https://youtu.be/raIhtxoeCsY?si=2Yb7Aj5R5fDHSoAV
-홍범도 장군에 관한 연구 기본 자료들
-'홍범도 일지'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 필사본->이인섭 항일운동가 2번 필사->작가 김세일 1번 필사)
-1928 이력서
-1932~1933 홍범도 앙케트(문답지)
-외에 독립군 성명서 및 포고문, 일본제국의 첩보기록 등을 종합해서 홍범도 장군을 연구(단 독립군 자료와 일제의 첩보기록에는 시각 차이가 존재하므로 객관적 자료는 아니다. 그래서 연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
-나의 인생: 1868년 평양 출생, 평양 서문 안 문열사 앞에 태어나 모친은 7일만에 사망하고 아버지는 젖동냥을 하며 나를 키우셨다. 그마저도 9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남의 집 머슴살이를 15세까지 지속했고 평양에 있던 청나라가 만든 조선군대에 2살을 속여 우영 1대대 나팔수로 4년간 복무했다. 살인을 하고 도망쳐 황해도 수안 총령(고개이름) 종이 뜨는 일을 3년 하였고 그 때가 1868년 또는 1869년 이었다. (19~20세)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하여 경기 수원 덕수 리가 지담스님의 상좌로 중 생활을 하였고 강원도 회양 먹패장골에서 사격 연습을 하였다. 그 때가 1895년 을미년 8월 23일, 28세 되던 해.
-포수가 된 나는 1895년 9월 18일 강원도 단발령에서 김수협과 의병을 모의, 9월 19일 원산에서 서울로 가던 일본군 12명을 습격 후 총, 탄환습득, 포수들을 상대로 의병 모집했는데 44명이었다.
-안변 석왕사의 ‘유진석’의 의병 부대와 합류 하였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났는데 홍범도 도 그 일원.
-안변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패배(보급, 훈련, 무기에서 일본군이 압도했을 것으로 추측)
-동료인 김수협 전사, 유진석의 부대는 해산, 혈혈단신으로 피신
-2차 의병일으킨 홍범도 (1904년, 37세)
-북청에서 일진회 사무실 습격하여 일진회원 30명 척살!
-의병대 조직 (대장 홍범도, 참모장 김소림 등 400~500명), 압록강 아래 삼수, 갑산 지역에서 활동
-1908년 남만주 탕해(통화)로 망명 : 1908년 6-7월 일제의 군대가 조선 전지역 의병토벌작전 수행,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장기적으로 보급 즉 무기, 탄환부족으로 국경을 넘어.
-탕해에서 러시아 연해주의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얀치헤로 전전
-강과 국경을 넘어 일본군을 타격하고 돌아가는 작전을 모색했으나 대패, 홀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
-초기 홍범도 장군의 의병활동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첫댓글 먹먹해지는 유년시절의 이야기.. 공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으신 듯 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초기 의병활동엔 실패와 좌절이 있었고 그 큰 이유중 하나는 보급, '탄환부족' '무기부족'
보급이 안되는 전쟁은 지속할수가 없지요
군수지원이 너무 부실했죠ㅠㅠ
ㅠ ㅠ
진짜 "믿음의 조상"으로서, 고난을 겪으셨네요.
믿음의 조상: 구약성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가리키는 말. 유목민으로 이리저리 떠돌면서도 신의 말씀은 굳게 믿었고 그래서 후대에 귀감이 되었기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 불림.
@오리2 나라가 망했으니 정규군도 아니고 보급은 꿈도 꿀 수 없겠지요.
@노스아스터 나라가 망했습니다. ㅎ
@밸틴1 노년의 강제이주 루트 는 디아스포라죠.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실질적 리더였고 정신적 리더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 분의 유해를 가져가도록 허락하고 한반도의 정통성을 인정해주었는데(홍범도는 평양 출신) 저렇게 무도하게 육사에서 흉상 이전 운운하고 있으니 카자흐스탄의 동포들이 분노가 치밀만도 하지요.
어릴적에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