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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의 특색
중국철학은 근본적인 입장이 서양이나 인도철학과는 매우 다르다. 이러한 중국철학의 특색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서양이나 인도철학의 관점을 가지고 중국철학의 본질을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중국철학을 주제별로 분류하기 전에 철학적 특성을 먼저 탐구해야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중국철학의 특징에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 세 가지와, 부차적으로 중요한 것 세 가지, 모두 여섯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지’(知)와 ‘행’(行)의 통합. 중국철학은 본질적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적이다.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덩이를 이루고 있다. 중국철학에서는 우주와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연구함에 있어, 항상 일상적인 삶 속에서부터 출발한다. 우선 자신이 몸과 마음으로 실천 했는가에 대해 반성하는 것을 학문의 시작점으로 삼고, 마지막으로 다시 실천으로 돌아와, 현실적인 실천 속에서 얻은 이론을 실천 과정에 적용시켜 봄으로써 이론의 진리성을 검증한다. 이는 곧 경험을 통해 몸소 현실을 겪어본 다음,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깨달은 내용을 실천을 통해 검증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모든 이론은 일상적인 행위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들이 진리를 탐구하는 목적은 일상 속에서의 모든 행위를 선(善)하게 하고, 그러한 선한 행위를 일상 속에서 구현하는 데 있다.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論語, 雍也>)라고 했다. ‘즐긴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일종의 즐거움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맹자는 “군자가 깊이 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깨닫기 위함이다. 스스로 깨달으면 삶이 편안해 지고, 삶이 편안해 지면 바탕이 깊어지며, 바탕이 깊어지면 일상 속에서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也, 自得之則居之安, 居之安則資之深, 資之深則取之左右逢其原, 故君子欲其自得之也.<孟子, 離婁>)고 했다. 이는학문을 연구하는 목적은 도를 자득(自得, 스스로 깨달음)하는 데 있고, 도를 자득한 경지에 이르면 최고의 정신적 자유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荀子는 “군자의 배움은 귀로 들어와 마음으로 나타나고, 온몸에 두루 퍼지고, 활동하고 쉬는 사이에 드러난다. 단정하게 말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한결같이 법칙에 맞도록 해야 한다...... 군자의 배움은 그 몸을 아름답게 해 준다.”(君子之學也, 入乎耳, 著乎心,布乎四體, 形乎動靜, 端而言, 蝡而動, 一可以爲法則. .....君子之學也以美其身.<荀子, 勸學>)고 했다. 이처럼 순자에 있어서도 학문의 목적은 행위를 올바르게 바꾸고, 도덕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유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혜시(惠施)도 “만물에 흩어주되 싫증내지 않는다.”(散于萬物而不厭)고 하면서, “널리 만물을 사랑하고, 하늘과 땅을 한 몸으로 삼는다.”(汎愛萬物, 天地一體也.)고 했다. 그 뒤에 유학자인 주돈이(周敦頤, 濂溪先生으로 부름)도, “성인의 도는 귀로 들어와 마음에 보존되며, 덕행을 통해 쌓이게 되고, 일을 통해 행해지게 된다.”(聖人之道, 入乎耳, 存乎心, 蘊之爲德行, 行之爲事業.(通書)고 하여, 참된 앎을 추구하면 반드시 덕스러운 행위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고 했다. 요약한다면, 이론은 올바른 생활 방법에 대한 설명이고, 삶은 이러한 이론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도가 아무리 넓고 크고 높고 밝아도 일상적인 삶과 분리되지 않는”(廣大高明, 不離乎日用) 상태에 이르는 것이 ‘학문 함’(爲學)의 이상적인 경지가 되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드러나는 진리는 밥 먹고 옷 입는 일도 모두 “지극한 이치의 작용”(至理之流行)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학문 탐구의 방법에 있어서는 도덕적 수양을 더욱 중요시하여, 함양(涵養, 일상 속에서 덕성을 닦음)을 곧 치지(致知, 객관적 대상 세계의 원리를 인식함)의 방법으로 삼는다. 장자(莊子)는 “그리고 참된 사람(眞人)이 된 이후에 참된 앎(眞知)을 가질 수 있다.”(且有眞人而后有眞知. <莊子, 大宗師>)고 했다. 이른바 진인은 곧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이 없고, 선과 악, 나아가 삶과 죽음까지도 잊어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참된 앎, 즉 진지(眞知)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진인이 되는 수양을 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순자(荀子)는 “사람이 어떻게 도를 알 수 있는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어떻게 도를 알 수 있는가? 비우고, 통일시켜서 고요하게 하면 된다.”(人何以知道, 曰心. 心何以知, 曰虛壹而靜. <荀子, 海蔽>)고 했다. 이처럼 반드시 비우고 통일시켜서 고요하게 하는 수양을 한 뒤에 비로소 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張載)는 “신묘한 작용과 온갖 변화를 궁구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수양을 많이 한 결과이지, 억지로 생각하고 힘써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덕을 높이는 외에는 군자가 치지(致知)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窮神知化, 乃養盛所致, 非思勉之能强. 故崇德而外, 君子未或致知也.<正蒙, 神化>)고 하여, 덕을 높이는 것이 곧 치지(致知)하는 길임을 말하고 있다. 정이천(程伊川, 이름은 頤)은 “사람의 도리는 경(敬) 만한 것이 없다. 치지(致知)하는 일은 경(敬)에 있지 않는 것이 없다.”(人道莫如敬, 未有致知而不在敬者. <語錄>)고 했다. 그리고 敬은 “마음을 통일하여 어지럽게 흩어지게 하지 않도록 함”(主一無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경(敬)이 치지(致知)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양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모두 참된 앎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수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세계와 삶의 본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덕스러운 행위를 실천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것이다. <대학>(大學)에는 “마음이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 수 없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고 했다.
이처럼 중국철학에 있어서의 다양한 개념과 이론들은 모두 실천이 전제되어야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실천과 분리되면 곧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행위를 할 때면, 늘 왜 그러한 행위를 해야 하는가 또는 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행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결과를 다시 실천적 행위에 적용함으로써 이론과 실천의 간격이 소멸되는 그러한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중국철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한다면 중국철학은 일상 속에서의 실천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며, 나아가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행위가 바로 앎의 시작이 되고, 아울러 앎의 궁극적 목적이 된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를 하기 위해서이고, 이러한 행위는 또 그대로 지식을 얻는 방법이 된다. 중국철학에서 말하는 학문은 본디부터 오직 지식 자체에 대한 탐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로는 지식을 얻는 행위가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학문은 앎과 행위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실천’은 변증법적 역사관에서 말하는 ‘이론’과 ‘실천’에서의 ‘실천’과는 달리 일상적인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밝혀 둔다.
둘째, 자연과 인간의 통일적 연속. 중국철학 전반에는 근본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자연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로 통합되어 있으며, 삶에 있어서의 최고의 이상은 직관적으로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세계와 나는 본디 한 몸이며, 안과 밖은 원래 구별이 없다. 다만 인간이 사사로운 욕망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을 멋대로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리석음과 폐단을 제거하면 자연과 인간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중국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천(天)을 인(人)의 근본으로 생각하며, 또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으로 여겼다. 자연의 필연법칙은 곧 인간의 당위 법칙이 된다. 그리고 중국철학에 있어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연과 인간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을 성(性)이라고 보았다. 사람은 천으로부터 본성을 받았으며, 따라서 인간의 이상은 곧 이 본성을 극진히 드러내는 것이다. 성은 곧 본근(本根, 존재의 근거)이 되며 또한 도덕 원칙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든 도덕원칙은 이러한 본근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경향은 송명(宋明)대의 리학(理學)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소옹(邵雍)은 “학문에서 천과 인의 상관관계를 다루지 않으면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學不際天人, 不足以謂之學. <觀物外篇>)이라고 했고, 정명도(程明道)는 “천과 인이 본디 둘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합해서 말할 필요는 없다.”(天人本無二, 不必言合. <語錄>)고 했고, 정이천(程伊川)은 “도(道)에 처음부터 천과 인의 구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천의 입장에서는 천도라고 하고, 인의 입장에서는 인도라고 할 따름이다.”(道未始有天人之別, 但在天則爲天道, 在人則爲人道.<語錄> 라고 했다. 천과 인은 본디 한 몸이다. 천도와 인도 하나의 도일 뿐이다.
천과 인이 이미 둘이 아니라면 나와 나 아닌 것도 나눌 필요가 없다. 나와 나 아닌 것도 원래는 한 몸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를 나 아닌 것과 나누지 말아야 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서 안과 밖,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소멸되며, 사람과 자연이 융화되어 한 덩어리가 된다. 서양에서는 우주에 대해서 탐구할 때 우주를 외재적인 존재로 분리시킨 다음, 그것에 대해서 연구하지만, 중국인은 우주를 외재적인 존재라고 보지 않고, 우주의 본근과 심성은 서로 연속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주를 연구하는 것은 곧 자신을 연구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중국 철학자들에 있어 우주론은 본질적으로 안과 밖, 객관과 주관(物我), 자연과 인간(天人)을 나누어 보지 않는다.
천과 인이 상통한다는 관념은 중국철학, 특히 송명대의 도학(道學)의 근본적인 관념이 된다. 이러한 관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많은 사상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중국사상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셋째, 진(眞)과 선(善)을 동일한 것으로 봄. 중국철학자들은 진리(眞)가 곧 지선(至善)이며, 진(眞)을 구하는 것이 곧 선(善)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과 선은 둘이 아니다. 아울러 지극히 참된 도리는 곧 지극한 선의 준칙이 된다. 진이 곧 선이고, 선이 곧 진인 것이다. 선을 찾는 것과 별개로 진을 찾을 수는 없다. 만약 선을 찾는 것과는 별개로 오직 진만을 찾고자 한다면, 오류를 범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진조차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중국철학자들도 지(知, 사실에 대한 앎)를 구하고자 했으나, 즉 진리에 대해 알려고 했으나, 이러한 지(知)를 구하는 방법(인식 방법)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국의 사상가들은 치지(致知)의 과정과 수양(修養)의 과정은 나눌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여겼다. 우주의 참된 모습에 대한 탐구와 삶에 있어서 지선(至善)에 이르는 것은 같은 일의 양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궁리(窮理)가 곧 진성(盡性)이고, 숭덕(崇德)이 또한 곧 치지(致知)가 되는 것이다.
서양에 있어 철학의 본래의 뜻은 ‘지혜를 사랑함’이며, 앎 자체를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약 중국에 있어서의 철학의 의미도 ‘지혜를 사랑함’이라고 한다면, 비록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완전히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의 철학자들은 오직 앎 그 자체만을 찾기 위해 애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철학적 탐구의 궁극적 목적이 ‘문도’(聞道, 도를 이해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었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論語, 里仁>)고 했다. ‘문도’(聞道)는 ‘지도’(知道), 즉 ‘도를 이해함’이라는 뜻이다. 도는 진과 선을 겸하고 있고,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삶에 있어 지극한 선의 준칙이기도 하다. 도를 구하는 것이 곧 진을 구하는 것이며, 동시에 선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과 선도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넷째,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만 중요하게 여길 뿐이지, 옳음 그 자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인식 방법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어떠한 사상이나 이론도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을 통해 옳은 행위를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삶의 현실적인 모습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아울러 어떠한 삶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해서 연구했다. 또한 ‘나’를 ‘나 아닌 것’과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나 아닌 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는 근본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객관적 사물의 실재성에 대해서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진(秦)나라 이전에도 객관적 대상 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의심하는 철학자가 없었으며, 북송대에 와서도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객관적 대상 세계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불교를 배척했다. 객관적 대상 세계가 마음에 의존한다고 생각한 것은 남송의 양자호(楊慈湖) 및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에 의해서였다. 그럼으로 중국 철학자들에게 있어 감각주의적 인식론 체계는 근본적으로 필요하지 않았다. 서양은 ‘나’와 ‘나 아닌 것’에 대한 구별을 통해 ‘자아에 대한 자각’을 찾았지만, 중국에서는 ‘나’와 ‘나 아닌 것’이 통합된 것을 ‘자아에 대한 자각’으로 생각했다.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게 되면 인식론이 발달하게 되지만, 나와 나 아닌 것을 통합해 버리면 객관적 대상 세계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같아지기 때문에 인식의 문제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중국의 철학자들은 인식이나 인식 방법의 문제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오직 그것만을 따로 떼어 연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섯째,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겼지, 논증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형식 논리적인 정밀한 논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또한 형식 논리를 다루는 학문적 영역도 없었다. 중국의 사상가들은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을 실천과 결합해 봄으로써 참된 증명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일상 속에서의 경험 내용을 해석할 수 있고, 실천 과정에서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 반드시 언어를 통해 정밀하게 논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철학은 삶 속에서 실제로 옳은 것으로 증명 될 수 있는 것을 중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간혹 내면적인 직관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논리적인 논증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체험을 오래 하게 되면 문득 깨닫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이전의 많은 의문과 난점들이 해소됨으로써 일상적인 경험 내용의 옭고 그름이 완전히 이해될 것이다. 이것이 곧 깨달음이다. 중국철학의 속성은 이러한 깨달음을 곧바로 글로 써 놓을 뿐이지, 자세히 증명하지는 않는다. 중국 철학자들의 문장이 짧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철학자들이 주제에 따라 기술된 길 글보다 짧은 글을 모아놓는 일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중국의 사상가들은 깨달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이에 대해 세밀하게 논증하는 것은 결코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바꿔 말하면 세밀한 논증은 깨달음과는 관계가 없는 군더더기에 불과하다고 보았을 뿐이다.
여섯 째, 과학에 의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종교에 의지한 것도 아니다. 중국 고대에는 종교가 발달하지 못했다. 물론 고대의 중국 인민들은 천제(天帝)나 귀신의 존재를 믿기는 했지만, 애초에 강력한 신을 중심으로 일정한 형식을 갖춘 강력한 종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교(道敎)는 한참 뒤에 와서 만들어졌고, 불교는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다. 물론 중국의 사상가도 비록 도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 두 종교를 부정했고,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도교와 불교를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진나라 이전에 공자는 이미 귀신의 존재는 부정했다. 그러나 천의 존재와 역할은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天道)와 같은 말을 입에 담는 것은 꺼렸다. 다만 묵자(墨子)는 천과 귀신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신봉함으로써 종교적인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노자가 숭배 대상으로서의 천의 위치를 타파한 이후, 천제(天帝)를 주재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송나라 유학자들도 천에 대해서 말을 하지만, 결코 의지를 가지는 주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에는 철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다. 서양에 있어 중세 철학은 종교의 노예였고, 근대 철학 속에서도 또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에서는 서양에서처럼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삼은 경우가 전혀 없었다. 진나라 이전의 철학자 가운데 순자는 이미 미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타파하였으며, 후한의 왕충은 더욱 적극적으로 미신을 타파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송나라 유학자 장재(張載)와 주돈이(周敦頤)도 적극적으로 귀신을 배척하면서 귀와 신이라는 두 용어를 자연의 현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결론적으로 중국 철학자 가운데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중국에서도 고대부터 과학이 싹트고 있었지만, 성숙된 과학적 탐구는 없었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에 근거를 둔 철학적 체계의 성립 정황은 볼 수가 없다.
이상의 여섯 가지가 중궁철학의 일반적 특색, 즉 중국철학의 일반적인 근본 경향으로서 서양이나 인도의 철학과는 다른 점이다. 중국철학의 각 부문에 있어서의 특징은 아래의 글에서 따로 기술할 것이다. 중국철학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중국철학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철학 속에 내재되어 있는 많은 독특한 맛의 묘미를 느끼지 못하고, 거저 피상적인 이해에만 머물게 됨으로써 그 본질적인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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