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 냉수리비(迎日 冷水里碑)
국보 제264호
소재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신광면사무소 마당
① 발견시점 : 1989년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
② 발견자 : 밭을 갈던 마을 주민
③ 비석 건립연대 : 신라 지증왕 4년(503)
④ 비석 주요 내용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의 절거리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를 내렸는데 계미년 9월 25일에 지증왕 등 각부의 대표 7명이 함께 논의하여 두 왕의 조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별교를 통해 절거리가 죽은 후에는 아우 아사노(또는 아우의 아들 사노)에게 재산이 상속되고 미추, 사신지는 재물 분배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이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중죄에 처할 것임을 결정하였고 이 명령은 중앙기관의 전사인 7명과 지방관서의 촌주 2명이 일을 마치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
⑤ 비석 발견의 의의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없는 신라시대의 사회 풍속
특히 재산분쟁에 관한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닙니다.
신라사 왜곡과 영일 냉수리비
문헌기록이 엉성한 한국 고대사학계에 금석문과 같은 새로운 사료가 출현한다 해서 늘 그 연구가 '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 새로운 사료를 기존 학설에 꿰맞춰 터무니없이 해석하는 바람에
엉뚱한 결과가 빚어지기도 한다.
경북 영일 냉수리비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은 사료 비판이 아니라 올바른 해독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라는 글자를 '어'라고 억지 해독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1989년 발견된 냉수리비문을 학계는 해독조차 엉터리로 하고 이를 발판으로 엉터리 신라사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어떤 점이 그런가? 봉평비가 출현하고 난 다음 이른바 이 분야 전문가 10명중
8-9명이라는 절대 다수가 봉평비가 세워진 지증왕 시대에 신라에는 왕(王)이라 일컫던 존재가 무려 7명이나 동시에 존재했다고 보는 점이 그렇다.
봉평비는 절거리(節居利)라는 한 개인의 재물취득 관련 소송에 관한 신라 왕실의 결정 내용(일종의 판결문)을 돌에 새겨 놓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이런 결정은 사탁부(沙喙部) 소속 지도로 갈문왕과 같은 부 ◎덕지(◎德智) 아간지(阿干支), 자숙지(子宿支) 거벌간지(居伐干支), 탁부(喙部) 소속 이부지(爾夫智) 일간지(一干支), 지심지(只心智) 거벌간지(居伐干支), 본피부(本彼部) 소속 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 사피부(斯彼部) 소속 모◎지(暮◎智) 간지(干支) 등 7명이 공론(共論), 즉 함께 논의해 내렸다.
사탁부와 탁부, 본피부, 사피부는 신라 왕경(王京)을 구성한 6부의 일부분이고, 지도로와 ◎덕지, 자숙지, 이부지, 지심지, 두복지, 모◎지는 공론을 한 7명의 이름이며 갈문왕, 아간지, 거벌간지, 일간지, 간지는 당시 신라 관직 등급 이름이다. 비문에서는 지도로 갈문왕 이하 절거리의 재물취득 논의에 참여한 7명을 '차칠왕등'(此七王等)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 '차칠왕등'을 역사학자 대부분은 '이들 일곱 왕'이라 해석했고 이런 견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만약 '차칠왕등'이 '왕 7명'이라고 한다면 지도로 갈문왕으로 표현된 지증왕
시대에 신라에는 무려 7명이나 되는 왕이 한꺼번에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따라서 역사기록에 나오는 당시 신라 왕의 위상은 이처럼 여러 왕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별볼일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실제 봉평비에 나오는 '차칠왕등'을 '이 7명의 왕'이라고 해석한 모든 학자가 이렇게 보았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한다.
어떤 이는 봉평비의 이 구절을 중요한 토대로 삼아 중고기 신라 왕권이 신통찮았다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차칠왕등'에 대한 이런 해석은 한국 역사학계가 저지른 가장 터무니없는 사료 오독(誤讀)이요 역사왜곡이다.
왜냐하면 '차칠왕등'은 '이들 7왕'이 아니라 '(갈문)왕과 그 외 나머지 6명'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차칠왕등'을 '왕 7명'으로 해석한 까닭은 끊어읽기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를 잘못 끊으면 '아기다리 고기다리'가 되듯이
'차칠/왕등'(이들 7명, 즉 왕과 기타 등등)이라고 읽어야 할 것을 그만 '칠왕'(일곱 왕)을 붙여 버린 다음 '등'(等)이라는 한자를 복수(複數)를 나타내는
'들'이라고 해석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차칠왕등'이 '7왕'이 아니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첫째, 이런 해석은 '등'이라는 한자를 한문 그대로 해석하든, '들'에 대한 이두 표기로 해석하든 어떤 경우에도 문법적이지 않다.
정통 한문에서 7과 같은 구체적인 숫자 뒤에 오는 같은 부류의 명사에는 따로 '등'과 같은 복수를 나타내는 말이 올 수 없다. '이들 7명의 왕'을 정통 한문으로 표기하면 '차칠왕'(此七王)이지 결코 '차칠왕등'(此七王等)이 아니다.
이는 고대 국어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영어의 영향으로 우리 문법이 파괴되기는 했으나 '이들 7왕'이 맞는 표현이지 '이들 7왕들'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또 다른 근거는 '차칠왕등'이라고 표현된 7명중 왕은 지도로 갈문왕 단 1명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차칠왕등'의 왕이 지도로 한 명이라는 증거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봉평비 안에, 그것도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 '차칠왕등'이 결코 '왕 7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비문에는 ◎부지왕(◎夫智王), 내지왕(乃智王)을 가리켜 '전세이왕'(前世二王=앞선 두 왕)이라 하고 있고, 갈문왕을 비롯한 7명이 결정한 내용을 공표한
7명을 '차칠인'(此七人=이들 7사람)이라 하며, 지금의 면장이나 동장쯤 되는
촌주(村主) 2명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차이인'(此二人=이들 2명)이라 하고 있다.
만일 '차칠왕등'(此七王等)이 '이들 7왕'이 맞다면 같은 비문 다른 곳에 등장하는 '전세이왕'은 '전세이왕등'(前世二王等), '차칠인'은 '차칠인등'(此七人等), '차이인'은 '차이인등'(此二人等)이 돼야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2 혹은 7과 같은 구체적인 숫자를 앞세우는 명사에는 복수를 표시하는 '등'(等)이란 글자를 따로 붙이지 않았다.
이는 '차칠왕등'이 결코 당시 신라에 왕이 7명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지도로 갈문)왕과 그 신하 6명을 합친 7명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엉터리 해독을 발판으로 지증왕 즈음 신라에는 왕이 7명이나 있었으므로 당시 신라 왕은 다른 왕들의 견제를 받는 허약한 존재였다는
학설은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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