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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깨달음이 열리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천혜
1992년 7월
난 이곳에서 결혼까지 약속했던 두 번째 사랑의 실패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공개할 수 없다. 그저 첫사랑과는 달리 사람의 뜻에 의해 헤어지지 않고 하늘에 의해 갈라졌다는 초라한 변명으로 스스로의 비겁함을 가려보기나 하자. 보이지 않는 손은 아직 나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아무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나 하늘은 너무나 가혹한 방식으로 우리를 갈라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걱정만 하시던 어머니께서 방황이 너무 오래 계속되자 드디어 잔소리를 하신다.
“이놈아! 그러다 너까지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래? 벌써 한 달째 이 짓이야! 몸이 쇠 덩어리라도 못 견디겠다. 왜 이리 마음을 못 잡고 갈팡질팡이냐? 지난 일이야 어찌되었건 너는 다시 마음을 잡고 선이라도 보아서 장가갈 생각을 해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몇 달 뒤면 서른이야, 서른! 옛날 같으면 벌써 학부형이라고, 이놈아!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것이냐? 잊고 새 출발을 해야지!”
“엄마는 오로지 나를 다른 여자와 결혼시키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그럼 이놈아, 어느 부모가 자식이 노총각으로 늙어 가는 꼴을 보고만 있냐? 상처를 잊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니 어쩌니 하는 것도 더 젊었을 때의 일이지. 빨리 새 짝을 찾아라!”
“시끄럽소! 누가 뭐래도 나는 선희하고 결혼할거요.”
나에게 정말 그런 용기가 있는가?
“이놈이! 미쳤나?”
어머니의 손바닥이 등을 내리친다. 자신의 뜻을 거스를 때면 언제나 내 등에 벌건 자국을 남기던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이다. 막노동 판 남자의 그것보다 더욱 거칠 수밖에 없는 그 손이 다시 한 번 위력을 발휘한다.
“왜 때려! 이씨!”
“이놈이! 낳아준 에미보고 이씨가 뭐야!”
“누가 낳아달라고 했소? 자기가 좋아서 낳아놓고는 왜 날보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거요.”
“뭐가 어쩌고 어째! 이놈이 이제는 못하는 말이 없어!"
사정없이 때리는 손을 잡아 밀치고 나도 발악을 한다.
“안 낳았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고 좋았을 것 아니요? 나도 이 세상 살기가 지긋지긋 하다는 말이요.”
부서져라 방문을 닫고 길로 나선다. 남겨진 어머니의 비통함이 가슴에 전해지지만 그런 것까지 배려하기엔 지금의 내 인생이 너무나 서럽다. 이 세상은 자꾸만 나를 밀어내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결국 나의 몸이 성하지 않다는 사실을 핑계로 비겁하게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다. 나의 입장에선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남들의 눈엔 더럽게 비쳐질 용서받지 못할 변절이었다. 세상에는 궁합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는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 사주팔자 미리 알고 살아온 동양이 서양에 뒤졌듯, 설사 무당이나 능력자들을 동원해 알아내더라도 막을 방도는 더욱 없다. 선희와 나는 악연이었다. 서로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만났다. 그 만남으로 그녀는 그녀의 방식으로, 나는 나의 방식으로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일어섰을 때에도 나는 아직 쓰러져 있었다.
마음 만으로라도 한 번 맺어졌으면 아무리 처참한 하늘의 형벌도 꿋꿋하게 헤쳐 나가야 하지만 나에겐 용기가 없었다. 이렇게 아픈 몸으로 그녀와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운명으로부터의 도망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먼 훗날 용감하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할지라도 지금 나의 선택은 도피이다.
아버지를 잃고 극심했던 가난으로 방안에 얼음이 얼고 쥐들을 이불 삼아 잠자리에 들면서도 기가 죽진 않았었다. 도리어 고난을 자랑삼아 친구들을 불러들여 사람들이 다 보는 길거리에서 떡까지 만들게 할만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던 나였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왼쪽 무릎의 통증이 심상치가 않다. 증세는 그저께부터 시작되었다. 임국정 선생과 배드민턴을 치는데 무릎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오며 주저앉고 싶어졌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다시 나는 펄펄 뛸 수 있었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어쩌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사랑의 정신적인 충격을 입고 벌써 삼개월, 그 동안 계속된 육체의 학대, 너무 무리를 했나보다. 언제쯤 여자들을 옮겨 다니는 나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으려나.
“왜 이리 무릎이 아픈지 모르겠네.”
“야! 젊은 놈이 왜 그래. 해운대까지 원정을 왔으면 뿌리를 뽑아야지.”
기훈이는 모처럼 테니스를 같이 치기 위해 학교로 초대했는데 그거 치고 왜 그러냐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저께부터 그렇거든.”
“운동하는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그러나 세트를 거듭할수록 통증은 심해진다. 전처럼 금방 사라지지도 않는다. 아픔이 허벅지를 타고 오른다. 뛰는 속력이 점점 느려진다. 그러나 시합은 이겨야 한다. 난 지고 살 수 있는 성격이 되지 못한다. 급기야 운동을 마친 저녁 시간이 되어서는 너무 심각한 고통으로 자존심 상하는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내일 열리는 초이스 월례대회에서는 구경만 해야겠다.
양산에서 열린 10월의 테니스 클럽 월례대회는 최적의 날씨 속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대회에서 빠졌다. 그러나 초록의 테니스 공과 붉은 코트의 유혹은 강렬했다. 오후가 가까워지자 다시 나의 몸은 코트 위에서 뛰고 있다. 우리 클럽에 가입시키기 위해 오늘 처음 데리고 온 후배의 복식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내 몸을 돌보지 못하게 한 몫을 했다. 사자처럼, 표범처럼 포효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점점 육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저녁 회식에 이르러 아픔은 신음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무리해서 온 병이니 쉬면 낫겠지.
“엄, 엄마! 나, 나, 나 좀!”
바지를 갈아입으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누군가가 몽둥이로 허리를 내려치는 격렬한 통증과 함께 나는 장작나무처럼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이 든다. 방바닥에 고꾸라져 허리를 굽힐 수도 펼 수도 없다. 무릎에 이어 허리까지, 이제는 정말 끝이 나고 완벽한 병신이 되는구나.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누워만 있다가 끝내는 죽고 말았다는 고등학교 동창인 형래의 큰아버지 생각이 떠오르며 두려움에 소름이 돋는다. 제대를 한 첫날에 방을 쓸다가 쓰러진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아픔이다. 그때는 군대생활의 긴장이 풀려서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얘야! 왜 그러니?”
“엄마! 꼼짝할 수가 없어! 숨도 못 쉬겠고, 죽을 것 같아!”
“이리, 이리 좀, 돌아 누워봐!”
“아! 아퍼!”
편한 자세를 만들어 주려는 어머니의 손길은 오히려 더욱 큰 고통만을 가져올 뿐이다.
“학교로 전화해. 나 오늘 출근 못한다고!”
아침에 쓰러진 나는 점심때가 다 되도록 석고상처럼 누워 있었다. 오만가지의 불길한 생각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엄마는 한숨만 쉬며 그저 내 곁을 지켜줄 뿐이다. 5년 전 돌아서는 민아씨를 보며 길바닥에 쓰러졌던 기억이 눈앞에 떠오른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그때와 같은 증세는 아닌가 보다. 하긴 그때는 혓바닥이 굳어 말도 못했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나!
“그년들이 남의 생떼 같은 자식을 죽이네. 그랴! 왜 만나는 년들마다 우리자식을 이렇게 만들어! 민아란 년은 다른 데로 시집가서 남의 자식을 초죽음 시키더니, 이번에는 또 엉뚱한 년이 나서서 우리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드니, 도대체 그년들이 전생에 우리와 무슨 원한이 맺혀 이런다냐? 이놈아! 여자들이 그년들뿐이더냐? 너희들 없어도 나는 이렇게 잘산다하고 여봐란 듯이 살아야지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이 못난 놈아! 내가 너 술 처먹고 돌아다닐 때 알아봤다. 네 몸이 무슨 쇠 덩어리인줄 알았더냐? 천하의 못난 놈이 여자 때문에 술을 먹지.”
“제발 그만 좀 해. 엄마! 남은 죽겠는데 엄마까지 왜 그래?”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겨우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근방에서 가장 용하다는 김병림 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별로 병원같이 생기지도 않은 곳이지만 손님들로 언제나 북적거린다. 나는 이 병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마는 다르다. 젊은 사람은 병원의 외형에 끌리고, 늙은 사람은 병원의 소문에 끌린다.
“디스크 초기증세인데 별 것 아닙니다. 가끔 그런 수가 있죠."
무릎 문제로 다른 병원을 찾았을 때도 의사들은 모두 저런 식으로 말을 했었다. 처음으로 받은 진단은 조인트 마우스였다. 지나친 운동으로 무릎의 연골이 파열되어 생긴 병이니 일주일 정도 투약을 하고 물리치료를 병행하면 완치되리라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의 치료 후에도 증세는 전혀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왼쪽에서 오른쪽 무릎으로 통증이 전이되었다. 간호사 선에서 치료만 받다가 아픔이 더 악화되어 두 번째로 의사와의 상담을 요청했을 때 그는 짜증으로 응대했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되는데 환자가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 어떻게 해요? 우리를 못 믿겠으면 다른 병원으로 가보면 될 거 아니요.”
그래서 다른 병원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의사는 없었다. 그저 주사나 약장수가 있었을 뿐이다. 병원은 돈을 받고 각종 검사를 해주고 약과 주사를 팔뿐 치료의 정도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치료는 그만 두고 친절하게 상담이라도 해주는 의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왕이고 우리는 하인이다. 환자들에게 돈을 받아 부자행세를 하면서도 그들은 고마움조차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허리의 통증은 많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허리로 힘을 쓸 수는 없고, 굽히거나 펼 때는 벽을 짚어야 한다. 가장 심각한 부분은 무릎이다. 버스 정거장 하나를 걷는 것이 불가능하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 허리까지 부실하니 걷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다. 하는 수 없이 아침, 저녁으로 택시를 탄다. 며칠만 더 버티면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그때까지만 참자. 설마 40일 가까운 요양이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프기 전 사진>
첫댓글 언뜻 김남일 닯은신듯하고.. 인물은 훤 하십니다..
한 이십년 쫄쫄 고생하고 나니 지금은 많이 초췌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