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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 (요4:16-24)
포천 일동 교회 정학진 목사
어느 날 CBS TV를 보다가 통탄한 일이 있었습니다. 방송에 자주 나오는 김 아무개 교수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늘 하던 버릇대로 저는 TV앞에 앉아 큰 기대를 하며 필기구를 준비하고 설교를 적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싶었습니다. 설교가 중반을 향해 갈수록 실망을 넘어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의 설교 요지는 이랬습니다.
“어느 여성에게 5명의 남편이 있었다. 한 명은 힘을 의미하는 권력이란 남편이었고, 또 하나는 지식을 의미하는 지력이었다. 다른 한 남편은 재물인 금력이었는데....”
그는 권력이나 금력, 지력 등 힘의 원천과 그 영향력, 그 가운데 소외받은 여인의 실상을 논하며 그 여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으로 결론짓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들으며 점점 지쳐갔고, 안타까웠습니다. 그 교수는 이런 식의 설교로 50분 가량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물론 텍스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전하기 위해 콘텍스트(context)를 언급하거나 예화를 사용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청중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유머를 사용하거나 쇼킹한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법을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본문의 내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를 설교랍시고 말하고, 예수님으로 결론을 내는, 현대 대다수 목사가 하는 설교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게 한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항의 전화를 하러 방송국에 전화기를 여러 번 들었다 놨다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언젠가 이 본문을 해석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설교하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과 5명의 남편은 핵심과는 전혀 무관한, 일종의 장치에 불과했는데 설교자는 이걸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본질(本質)과 현상(現像), 내용(內容)과 장치(裝置) 등을 구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1909.10.26 만주 하얼빈에서 청년 안중근이 조선 총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해서 3발로 사살했습니다. 총격 후 그는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 어로 “코레아 우라(korea ura)"를 외쳤습니다. 이는 대한독립만세라는 뜻이었지요.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었고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습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사살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원흉을 총살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사형설교를 받고 3.26일 뤼순(여순) 감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함께 거사에 참여한 감리교인 우덕순은 징역3년을 받았던 사건입니다.
지, 이제 만약 KBS에서
.1절 특집> 다큐를 찍는다고 합시다. 안중근의 이 사건을 쟁점화할 때 무엇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할까요?
이 사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당연히 안중근입니다. 그가 어떤 가정에서 자랐고, 그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과 스승은 누구인지....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인지.... 뭐 이런 것을 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안중근은 이날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을 사용했습니다. 7발 중 3발을 가슴에 명중시켜 그를 처형했고 나머지 3발은 옆에 섰던 수행비서관과 다른 일본인을 총격했습니다.
그를 죽인 것은 분명 브라우닝제 권총입니다. 그를 살해했던 실제 도구였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특집 다큐멘터리를 권총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권총의 역사가 어떻고, 어디제가 좋으며, 당시 독립군들이 사용하던 권총은 무엇이었고, 안중근이 그 권총을 어떻게 입수하게 되었는지 등.... 이런 내용이 아주 관련이 없을 수는 없지만 여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안중근 자신은 내용이고, 권총은 장치입니다. 여기서 안중근은 본질이고 권총은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면 본질에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1. 수가성 여인을 만나신 주님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때는 6시라고 표기한 걸 보니 우리 시간으로는 낮 12시쯤 되었을 때입니다.(요4:6)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고 주님 혼자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셨는데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그곳에 왔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시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물을 달라 하시니 여인이 놀라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4;9) 그러면서 요한은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라며 해설까지 친절하게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합니다. “......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 자, 이 대목에서 여인의 호칭이 달라집니다. 아까는 분명 “당신”이라던 여인이 말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4:11) 그러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야곱이 이 우물을 주셨고......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4:12)
당돌해 보이는듯한 이 질문이야말로 이 글을 쓴 요한의 관심사입니다. 요한은 여인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야곱보다 크신 분인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비교법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자기 동족 유대인에게 더 효과있게 전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6) 하셨고, 안식일과도 비교하시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마12:8) 하셨습니다. 성전보다 큰 분, 안식일보다 크신 분은 누구겠습니까?
심지어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12:39) 시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12:41)고 하셨고, 솔로몬을 언급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42) 셨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도 “그 분은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크신 분이냐?”라는 질문에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방점은 샘물이 아닙니다. 그 앞에 있는 “내가 주는 물”입니다. 즉 물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다시 말하면 ‘주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여인의 호칭이 완전히 바뀝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이 부분에서 여인의 남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이야기를 더 끌고 가기 위해서 남편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5) 결국 생수 이야기의 핵심은 물을 주시는 분(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대화를 이끌어 가셨던 것입니다.
2. 여인의 남편들은 모두 장치에 불과
남편이 없다는 여인의 말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4:17-18)
여기서 나오는 다섯 이란 숫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섯이 아니라 쉰이라도 여기에 관심이 머물면 안 됩니다. 장치니까요.
그런데 그 다섯에 방점을 두어 권력이니, 금력이니, 지력이니 하는 말로 본질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장치니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여기 다섯 남편이란 것을 풍유적(諷諭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곧, 사마리아 지방에는, 바벨론, 구다(Cuthah), 아와(Auva), 하맛(Hamath), 스발와임(Sepharvaim) 등 다섯 나라 사람들을 식민하였는데(왕하17:24), 그 다섯 나라에서 들어온 이방신(異邦神)이 역시 다섯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 사람들은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이방 신을 섬겼다고 하면서 ‘지금 있는’ 남편은 이교사상(異敎思想)과 혼합하여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혼합 종교를 가리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 역시 너무 상상적입니다. 차라리 여기에서 언급된 ‘남편’들은, 실제 그 여인의 생활에서 여러 번 개가(改嫁)된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으로 보아야합니다.
어쨌든 여인의 가족사를 훤히 꿰뚫고 계신 주님 앞에 여인이 드디어 고백합니다. 아니 허물어집니다. 어쩌면 이 고백을 듣기 위해 요한은 지금까지 이야기를 끌어왔을 것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 이 고백이 있어야 그 다음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이런 대화 없이 처음 만난 유대인 남자에게 이런 질물을 던지면 미친 여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선지자라고 인정을 해야 여인이 묻고 싶던 중요한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이 고백은 본질을 끌어오는 형식이고, 내용을 밝히는 장치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한 후 이제 여인은, 아니 여인의 입을 통해 요한은 자신의 관심사를 적습니다.
3. 장소의 종교와 시간의 종교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한 후 여인은 자신이 평소 알고 싶었던 중요한 질물을 쏟아놓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이건 문맥으로 보면 다음 질문이 생략된 것입니다. “그러니 뭐가 맞습니까?”가 나와야 완벽한 문장입니다. 여인은 지금 선지자에게 오래된 질문을 던집니다.
여인의 조상인 사마리아인들은 그곳에서 예배하였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제사)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 백년 이어져오는 질문입니다. 이걸 주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여인의 관심사, 아니 여인의 입을 통한 요한의 관심사고 모든 유대인을 비롯한 팔레스틴에 살고 있 던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어디가 맞습니까?”라며 예배의 장소를 묻는 여인에게 주님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4:21) 다시 말하자면 ‘장소’를 묻는 여인의 질문에 주님은 ‘시간’의 개념으로 답해주셨습니다. “예배할 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그 유명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
예배할 때를 말씀하신 주님께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이른다며 곧 “이때”라고 말씀합니다. ‘장소’를 ‘시간’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장소(Space)의 종교가 아닙니다. 시간(Time)의 종교입니다. 장소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만질 수 있고, 접촉 가능하며, 가시적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만질 수 없고, 접촉 불가능하며, 불가시적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는 장소의 종교입니다. 이슬람교는 성지인 메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메카는 모하메드가 마지막 설교한 곳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위치하고 있는데 성인 무슬림이라면 5대 의무 중 하나로 반드시 살아생전 그곳을 순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도 장소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부처와 관계있는 4곳의 장소를 4대 성지로 규정해놓고 있습니다. ①룸비니(Lumbini)는 석가가 탄생한 곳이고 ②부다가야(Bodhgaya)는 성불(成佛)을 이룬 곳이며 ③사르나트(Sarnath)는 부처가 처음으로 설법을 한 장소이고 ④쿠시나가르(Kushinagar)는 부처께서 열반입적한 곳입니다.
심지어는 유대교도 예루살렘을 성지화할 정도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닙니다. 갈릴리와 가버나움, 나사렛과 예루살렘 모두 소중한 곳이지만 그것은 주님과 연관되어 있기에 귀중한 것이지 그곳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거나 영험해서 숭배하는 장소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어머니 마리아와 가나의 혼례잔칫집에서 말씀하시며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2:4)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때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완벽한 타임’ 입니다.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낼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요7:30, 8:20)
헬라어에는 우리와 달리 ‘때’를 가리키는 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먼저 영원한 시간을 의미하는 ‘에온’입니다. 이는 ‘영원한 시간’ 혹은 ‘영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롬16:26. 엡1:4. 골1:26)
②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이는 인간의 시간으로 월력입니다.
③ 끝으로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이는 ‘충만한 시간’ 혹은 ‘신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전술(前述)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나이다.”(요2:40) 거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7:6) 등 입니다.
또한 마지막에 유월절 음식준비를 시키시면서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마26:18) 등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역사의 흐름 속으로 들어온 ‘신의 시간’을 가리킨다는 의미입니다.
4. 요한의 진짜 관심은 예배(禮拜)
예배(禮拜)란 무엇일까요? 예배란 단어를 파자(破字)해보면 ‘예배할 예(禮)’와 ‘경배할 배(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란 글자에는 왼쪽 ‘볼 시(示)’ 혹은 ‘보일 시’가 나오는데 이는 고대 중국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글자였습니다. 오른 쪽에 있는 풍성할 풍(豊) 자는 제사 상에 풍성한 것을 바치는 형상을 담은 글자입니다. ‘예배할 예’는 이 두 글자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示)께 풍성할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경배할 배(拜)’자는 왼쪽에 있는 손수(手) 자와 오른 쪽에 있는 두 글자의 합성어로 ‘십자가(十)’ 위에 있는 ‘왕(王)’을 의미합니다. 이는 ‘손을 들고 십자가 위에 계신 왕을 경배함’을 상징합니다. 경배(敬拜) 숭배(崇拜) 예배(禮拜) 등에 쓰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를 묻는 여인에게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란 어느 때인가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닙니다. ‘현재’입니다. ‘지금’을 말합니다. 지금 여인에게 “이때”란 주님을 만나고 있는 때입니다. 이때보다 중요한 때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때가 여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이제 여인에게 있었던 다섯 명의 남편 이야기는 모두 사라집니다. 장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생수’에 관한 말씀도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 ‘예배’에 관한 이야기만 남았다는 게 이를 반증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이때”가 “예배할 때”란 말씀입니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예배받으실 분이란 뜻입니다. 의미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있는 ‘그분’을 예배하는 게 아니라 이제 분명하게 예배할 시간이 왔는데 이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4: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예배하는 자’입니다. 기도와 헌신, 봉사와 사랑..... 모두가 중요한 기독교의 명제이고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예배’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사랑 많은 자들을 찾으신다.”거나 “헌신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말씀은 없는데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하는 자로 남아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야 심령이 살아납니다. 각자의 심령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살며, 나라가 삽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에 온 가치를 집중시키는 자, 예배에 성공하는 주님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등한시하거나 예배를 가벼이 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건 이율배반입니다. 감격과 감동, 감사가 넘치는 예배가 되도록 준비하고 헌신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사용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