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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하조대(荷趙臺) 애국송(愛國松).
..................조선시대(1392~1897)..................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통치 하였던.,조선왕조.
공식 명칭은 조선국, 일제 강점기에는., 이씨조선.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 후, 소멸된.,조선시대.
고려 말, 신진사대부 지원을 받은 이성계에 의해 건국.
유교 통치 이념으로 임금과 신하에 의한 정치를 중요시.
중앙 행정조직은 기본적으로 의정부와 6조(六曹)의 체계.
지방 행정조직은 전국을 경기도·충청도·경상도·
전라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두었던 조선시대.
...........................................................................
애국가의 시작과 함께 나오는 TV 화면 속.,소나무.
TV 화면에서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애국송(愛國松).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경승지.,하조대(荷趙臺)
하조대 정자 주변에는 여러 해수욕장이 줄지어 있다.
옛날부터 이곳을 한번 거친 이는 저절로 딴 사람이 되고
10년 지나도 그 얼굴에 산수의 기상이 서려 있게 된다는 곳.
하조대해수욕장은 수심이 깊지 않고 경사가 완만하며
울창한 송림을 배경으로 약 4㎞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담수가 곳곳에 흐르며 남쪽에는 기암괴석과 바위섬들 절경.
하씨 집안의 총각과 조씨 집안의 두 처녀 사이의 사랑.
그 '애틋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라고 하여.,하조대.
고려 말,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의 은둔지.,하조대(荷趙臺) .
............하륜(1348.1.22~1416.11.24)................
고려말~조선초 문신으로 이방원 즉위에 기여했고,
즉위 후에는 태종을 보좌하여 조선왕조 기틀을 마련.
이색, 정몽주 등과 조선 건국 반대했으나 곧 정치적 변신.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 밀려나고
병력마저 빼앗길 위기의 이방원과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
태종 즉위 직전에 정승 반열에 올랐고,
태종 즉위 후에는 공신으로 책록되고
조선 초 문물제도 정비와 명나라 외교.
...................................................
...........조준(1346 : 충목왕2 ~1405 : 태종 5)...............
조준(趙浚)은 고려말 개혁파 신진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
조선왕조 개창과 문물제도의 정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에게 중용되었다.
철저한 제도개혁과 체제정비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국정개혁 필요성을 상소하고 개혁을 주장.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
1390년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이성계를 추대.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경제육전>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으나 세자책봉과
요동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여
이방원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고,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했다.
...................................
고려 말, 하륜과 조준은 이곳에 은둔하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혁명을 논의했고
그것이 이뤄져 두 사람의 성을 따서.,하조대.
조준(趙浚)은 1390년(공양왕 2) 전제개혁.
고려 구세력 경제적인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한.,대표인물.
고려 말 개혁파 사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선왕조 문물제도 정비에 핵심역할을 했다.
'평양 조씨'조준은 문하시중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덕유(趙德裕), 아들 조대림(趙大臨)이
'태종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 태종과 사돈이 된다.
원래, 평양 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조인규 대에 이르러 몽골어를 잘하여 역관으로 출세,
충선왕의 국구(國舅)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는데,
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개탄했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1376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겸
'강릉도안렴사'로 정치를 잘해 이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388년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는 중망(重望) 있는 조준을 불러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발탁,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자문하였다.
이에 그는 크게 감격하여, 이성계에게 모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조선개국 후 정치적 실권이 점차 집중된 정도전과 대립.
세자책봉에 정도전은 방석을 지지, 조준은 방원을 지지.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이방원과 가까워 그와 친교가 두터웠고,
평소 방원에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주고 읽기를 권장하였다.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있으면서
민무구, 민무질 무고로 투옥 후, 이방원에 의해 석방.
그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하고 좌정승,영의정부사.
태종(이방원)과 사둔을 맺고 평양부원군으로 진봉.
'하륜과 조준'은 정치적 노선이 같았던.,태종의 측근.
조준은 사후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 문충(文忠)
.......................하조대 전설............................
하씨 집안의 총각을 마음에 둔 조씨 집안의 두 자매.
두 자매 모두 그 총각을 연모해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매 중 한 사람 만 선택해야 했던 하씨 집안의 총각.
하씨 총각은 자매의 언니에게 마음을 두었고
자매의 동생은 하씨 총각에게 마음을 두었고
자매의 언니는 동생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세 사람 모두 어느 한편 만을 선택할 수 없는.,사랑.
결국, 세 사람은 하조대에서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진다.
세 사람의 사랑은 바위에 부딪친 포말처럼 물거품이 된다.
.............................................................................
하륜이 제안한.,모악천도론
송도에서 신하들 간 탁상공론.
하여, '책상 案.,뫼 山'.,"안산(案山)".
태조가 천도를 결심하며 만든.,관청
신도이궁조성도감(新都離宮造成都監)
대신 일부는 창덕궁 이궁 건설에 반대했고
모악천도론(母岳遷都論) 등 한양천도를 반대.
태조는 궁궐수보도감(宮闕修補都監)으로 개칭.
태조는 한양천도 의지를 강력하게 천명.
......... 모악천도론(母岳遷都論)..........
고려 옛 도읍 송도(松都)의 진산.,송악산.
산 남쪽 기슭에 고려 왕궁터 만월대(滿月臺)
산 동쪽 자하동(紫霞洞), 서쪽 광명사정(廣明寺井).
1394년10월 한양천도로 조선의 도읍은 오늘날 서울.
고려 도읍 개경 수경궁을 품은.,송악산(松岳山 : 488m)
부소갑(扶蘇岬),곡령(鵠嶺),문숭산(文崧山)이라고도 한다.
산 전체가 화강암 큰 바위로 형성된 송악산.
송악산 북쪽에는 천마산과 박연폭포가 있고,
남쪽에는 진봉산, 용수산의 안산이 솟아 있다.
개경을 품은.,용수산의 안산
개경 안산을 빼닮은.,한양 안산.
하여, 하륜이 모악천도론을 제기.
............................................
모악(母岳)은 무악재 옆 안산(案山).
오늘날 한강 이북은 무궁화꽃 형태이고
오늘날 한강 이남은 무궁화꽃 받침대 형태.
풍수지리 상 무궁화 꽃술에 해당하는.,모악(母岳).
'모악천도론'에서 모악(母岳)에 해당하는.,안산(案山).
개성 수창궁에서 탁상(案)공론을 하던 산(山).,안산( 案山)
막상, 현장답사를 해보니 안산 정상이 '말 안장.' 같아 안산(鞍山)
이성계, 하륜, 정도전 무학대사 그리고 신하들.
개성 수창궁에서 출발, 나룻배 타고 임진강 건너
말타고 한양에 도착해 안산 정상까지는 걸어 올랐다.
모악(母岳)은 안산(鞍山)이며 그 남쪽 아래로
연세대, 홍익대, 명지대,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등.
그곳 한강 건너편에 봉은사 등 허허벌판이 보이는 곳.
'한강의 지류' 홍제천 물길을 통해
'서해 ~한강' 조운선 접근성이 용이.
하륜이 주장한 모악천도론 궐터.,안산.
그날밤, 이성계 일행은 안산을 내려와
서대문 인근 야산에서 군막을 치고 야영.
깊은 밤까지 한양 도읍지의 궁궐터를 논의.
"6개월간, 탁상공론 모악천도론은 오늘밤 결론을 내라."
평생 전쟁터를 떠돌았던 백전노장 출신.,이성계의 왕명.
이성계는 군막 야영이 익숙했지만 신하들에게는 죽을 맛.
어둠 속으로부터 언제 어디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올지도 모를.,야산.
밤새워 토론해서라도 결론을 내야했다.
그 다음날, 무악재 ~ 인왕산 ~ 경복궁 터.
모두 함께 걸으며 난상토론 끝에 내린 결론.
"조선의 한양 궁궐는 고려 남경 이궁터로 한다."
모악천도론 연희궁 궁궐론., 하륜 주장.
인왕산 아래 경운궁 궁궐론.,무학대사 주장.
백(북)악산 아래 경복궁 궁궐론.,정도전 주장.
이성계는 그당시 정도전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훗날, 이방원은 하륜과 손잡고 한양 신도시를 건설.
오늘날 서울은 모악을 좌표로 설계된 흔적들이 많다.
'모악(母岳)에서 정동(正東) 방향으로 낙산을 바라보면,
그 사이에 일직선 상에 줄줄이 지어진 조선시대의 궁궐들.'
하륜(河崙 : 1348년 1월 22일(1347년 음력 12월 22일)~
1416년 11월 24일(음력 11월 6일)은 고려말~ 조선초 문신.
자 : 대림(大臨) 중림(仲臨), 호 : 호정(浩亭), 시호 : 문충(文忠).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부사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다.
고려 말 정몽주, 남은, 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처음에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1392년 이성계 조선 건국에 참여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1393년 정도전이 쓴 표전문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홍무제가 문책하자 직접 명나라에 가서 사태를 해결.
1398년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 측근.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당시에도 이방원을 도왔던 책사.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1416년 관직 은퇴 후 객사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낸
하윤린(河允潾)과 진주강씨(晉州姜氏)사이에서 출생.
하공진의 후손으로, 하식(河湜)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식목녹사(拭目錄事)를 지낸 하시원.
어머니 진주강씨는 증 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
뒤이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이때 하륜은 10년 연상인 정몽주를 어려워했으나
정도전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
또한 후에 '정몽주 문하생' 권근과도 가깝게 지냈다.
1360년(공민왕 9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여,
국자감 유생일때 '스승 이인복의 동생' 이인임과 친했다.
스승 이인복은 이인임, 이인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제자 하륜은 이인복의 문인이면서도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
한때 이인임의 대표적인 인척으로 지목될 만큼 그와 가까웠다.
<1365년(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
당시 시험관이기도 했던 스승 이인복은
제자인 하륜의 사람 됨됨이가 큰 것을 보고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하륜을 결혼시켰다.
또한 그당시 동지공거 중 한사람은 그의 스승이었던 이색.
1367년(공민왕 16년) 춘추관 검열(檢閱)ㆍ공봉(供奉)이 되고,
1368년(공민왕 17년)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시보(試補)되었다.
이듬해 감찰규정으로, 그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신돈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했고,
신돈을 공박하다가 지영주군사로 좌천되고 신돈에 의해 파직.
1371년(공민왕 20년) 신돈 사형 후
복직되어 다시 지영주군사가 되었으며,
이때 그는 영주목(榮州牧)을 잘 다스렸다.
안렴사 김주(金湊)는 그의 치적을
높이 평가해 보고한 이후 승승장구.
고공좌랑(考功佐郞)을 거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서 교주(交州)
강릉도찰방(江陵道察訪) 관직에 이르렀다.
스승 이인복이 동생인 이인임과 친하지 않은 것과 달리,
그는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면서 이인임의 심복이 되었다.
하륜은 이인임의 측근 중에서도 유난히 문신을 싫어하던
임견미에게 임기응변 술수를 간언해 비상한 지혜를 인정받았다.
1374년(공민왕 23년) 제릉서령(諸陵署令),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도 수학한 바 있어 이 연고로 공민왕 말년부터는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이후 전리정랑(典理正郎)·전교서부령
지제교(典校署副令知製敎)·전의감부령(典儀監副令)·전법서총랑(典法署摠郎)·
보문각직제학·판도서총랑(版圖署摠郎) 등을 거쳐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전리총랑(典理摠郎),
전교서령(典校署令)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승진
1380년(우왕 6년)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면서
이인임과 다소 멀어졌지만 훗날 1388년에
이인임 사후 전의부에서 그 시호를 황무(荒繆)라 하여
악시(惡諡)를 올리자 시호를 올리는 담당자에게 항의했다.
1380년 어머니 진주강씨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1383년 아머니의 3년 상을 마친 뒤 복직, 사간원우부대언,
우대언, 전리판서, 밀직제학을 역임했고 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퇴청 후에는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하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385년 명 사신 주탁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직책.
1388년 벼슬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러
1388년(우왕 14) 최영의 요동 정벌론을 비판, 적극 반대.
양주(襄州:지금의 양양군)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여름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복직, 관작을 회복했다.
그해 가을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가짜라고 공격했다가, 역공격을 받고 오히려 광주, 울주 등지로 추방
그후, 윤이 이초의 변이 일어났을 때 복직했고,
등과 함께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가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더불어 조선의 건국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7월 초 고려가 멸망하자 낙향.
그러나 1392년(조선 태조 1년) 7월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관찰사(京畿左右道觀察使) 관직을 받게 된다.
이때 경기도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계기를 마련
1393년(태조 2) 경기도도관찰사 때 천도 논의가 나오자,
정도전과 함께 계룡산 건도역사(建都役事)의 부당함을 역설
마침내 중지케 했고 이어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
1393년(태조 2년) 모악천도론을 폈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1394년(태조 3) 중추원첨서사(中樞院簽書事)에 전보되었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퇴청 후 틈틈이 문인들을 길러냈는데
그의 문인 중 세종 때의 명재상 중 한 사람인 윤회 등이 배출
1395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햇으나 곧 기복(起復)되어 복직.
........................정도전과의 갈등...................
1396년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 복직했다가
표전물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
그는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내자고 주장하고,
스스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도전을 대신하여 해명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명나라에 가기를 거부했고,
결국 그는 표전문 작성에 연루된 권근, 정탁,
노인도(盧仁度) 등을 데리고, 명나라로 갔다.
홍무제가 정도전이 오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자
그는 '정도전이 건강상태로 올 수 없었다'며 해명.
그러나 권근, 노인도, 정탁은 억류되고 혼자 돌아왔다.
1396년(태조 5) 한성부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함으로써
홍무제 오해를 풀었고 그후에도 명에 자주 왕래해 외교에 공이 컸다.
그러나 표전문 문제가 제기될 때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내자고 했다가
그 때 항왜(降倭)를 도망치게 했다 하여
정도전파 사람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고,
...............................................................
이방원이 큰인물이 될 것을 알게된.,하륜.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으니 한번 그를 만나길 원합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하륜이 꼭 한번 보려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라며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하륜은 민제를 통해 이방원을 만나 그의 심복이 되었다.
여러 왕자 중 공을 세웠다고 자부했고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하륜은 그 야심을 간파했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이후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 최측근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했다.
제1차 왕자의 난때 정도전이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한 하륜은 불시에 습격해
정도전, 남은, 심효생 살해,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 제거.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충청도 병력을 직접 이끌고
한성부에 이르러 이방원을 도와 의안대군, 무안대군 제거
정도전 일파를 숙청하는 데 공을 세웠던 하륜.
태조가 양위하고 정종이 즉위하자
제1차 왕자의 난때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정사공신 1등에 오르고
진산군(晉山君)에 피봉되었으며 1399년에는 우정승(右政丞).
그해 5월 명나라 홍무제가 죽자
홍무제의 국상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명에 가서 조문하는 한편 정종의 왕위승습을 승인받고 귀국
문하부참찬사에 오르고 다시 문하찬성사
의흥삼군부 판사(義興三軍府判事)겸 판상서사사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으로 승진, 진산백(晉山伯)에 진봉.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이방원을 도왔고,
이방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그의 최측근이자 권력의 실세
제2차 왕자의 난 당시에 하륜은
박포 일당의 거병 계획을 미리 파악
선수를 쳐서 회안대군 이방간, 맹종 부자와
박포를 체포, 그 일파를 죽이고 회안대군 부자를 유배.
세자가 된 이방원은 이성계를 찾아가 인정받으려 했고,
무학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로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는 한성부로 돌아오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한성으로 환궁하던 날에
세자 이방원은 살꽂이다리로 마중나갔다.
하륜은 말렸으나 듣지않자 비책을 건의한다.
"태상왕(이성계)의 노기가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기둥을 굵은 나무이되
수령이 오래되고 조밀한 나무로 만들라."고 건의하였다.
하륜의 말대로 차일의 대들보를 아름드리 큰나무로 대체.
환궁한 태조 이성계가 아들 정안대군을 보자마자 노기충천
활을 잡고는 마중 나오는 정안대군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정안대군은 황급히 천막의 대들보 뒤로 몸을 피해 위기모면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기둥에 꽂혀., '살꽂이다리' 지명의 유래
태조의 환영 연회에 참석할 때에도
대신 내관에게 곤룡포를 입혀 보내라 진언
정종 내외가 술잔을 올린 뒤
정안대군 대신 세자 곤룡포를 입은 내관이
자신에게 술을 따를때 숨겨둔 철퇴를 내리친 이성계.
내관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자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 - 이성계 -.
그후, 이성계는 이방원을 죽일 것을 단념.
1400년 정안대군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하륜은 진산부원군, 좌명공신 1등에 책록
태종에게 스스로 '창업과 수성'
그 방책으로 '변통'(變通)을 제시.
학문은 하나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그때 그때 달라져야 한다며 1401년(태종 1년) 관직을 사임
그러나, 그후 다시 복귀,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관제 개혁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로서 저화(楮貨)의 유통을 건의하였다.
태종 즉위 직후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편
6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하여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에게 직접 업무보고할 것을 주청 성사시켰으며, 재상 권한을 대폭 축소
시장에서의 화폐유통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저화를 발행하게 하고 재정 확충을 도모하였다.
좌주문생제 혁파, 호패법 실시,
신문고 설치 등을 성사시켰다.
한편, 하륜 자신이 지지한 정책의 방향과는 달리
태종이나 다른 주변 인물들과의 사적 관계에 의해
태종과 밀담으로 정책을 추진해 나간다는 비판을 샀다.
1401년(태종 1년) 자신의 문하생인 윤회과 과거에 급제했다.
하륜은 학문에 뛰어나면서도 호탕한 성품인 윤회를 적극 후원
판승추부사를 겸임, 바로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로서
명나라 영락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 갔다.
하륜은 조선 왕조를 정식승인을 표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과
태종 책봉 고명을 받고, 이첨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
그는 사서에도 관심을 갖고 삼국사략 등을 지었으며,
동국사략 등의 편찬에 적극 참여하고, 역사서도 편수
그의 저서 상당수는 임진왜란, 병자, 정묘호란 때 인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해
하륜은 계속 사신으로 남경을 다녀오는 등 명과의 외교에 주력
그의 사대는 명분보다 안보 실질적인 이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된 것을 현명한 처사였다며
명과의 국혼을 적극 주장했으나, 태종은 이를 적극 거부.
1402년 권근, 이첨과 함께 《삼국사략》(三國史略)을 편찬.
1405년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
1406년 중시독권관(重試讀券官)이 되었다.
1409년(태종 9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이 되었다.
영춘추관사로 《태조실록》의 편찬을 지휘.
<은퇴와 최후.>
그는 태종의 최측근 인사이자 책사의 한사람으로,
사사로운 인사 청탁을 많이 받고 통진 고양포(高陽浦)의
간척지 200여 섬 지기를 개인 농장으로 착복하여, 대간의 탄핵
공신이라 하여 용서되었다.
1414년(태종 14) 영의정부사에 재임명되었다.
1416년(태종 16년) 노환을 이유로 치사(致仕)하였다.
치사를 청하자 태종은 극구 만류하며 허락하지 않았으나,
병이 들었음을 이유로 거듭 치사를 청하여 허락받고 물러났다.
태종은 친히 교서를 써서 진주의 전세 100결을 하사했다.
"성상께서 주신 것을 어찌 감히 사사로이 쓸 수 있겠는가?"
따로 향사당(鄕射堂)을 지어 교서를 모셔두고
전세는 자신의 동리 노인들을 위해 쓰게 하였다.
태종은 향사당에 벽오당(碧梧堂) 친필 현판을 하사.
이어, 곧바로 진산부원군에 임명되어 왕명을 받아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침 순찰을 위해 함길도 행.
그해 11월 6일 한성으로 돌아오던 중 정평군 관아에서 운명.
저서에 호정집(浩亭集), 삼국사략 등,
가사로는 도인송도지곡, 수명명 등이 있다.
스승 '이색의 묘지명'을 지었고 시호는 문충(文忠)>
조모, 부모님의 묘역 옆 용맥에 자리한.,'하륜의 묘.'
<사후. >
하륜은 사후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태종은 그를 "자신의 장자방"이라고 했으며,
후대 한나라 장자방, 송나라 치규(稚圭)에 비유
자신의 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변통도 가능
때에 따라 변절 권모술수로 보일 수 있는 수단까지도 불사
그러나 제자 윤회는 그의 부정적인 행적들은 대부분 생략했다.
하륜의 묘는 진양군(현 진주시) 미천면의 오방동
(현,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산 166)에 위치
진주성 내 영남포정사 왼편으로 1970년대 세운 출생지비.
그의 묘소 주변에는 할아버지 하시원, 할머니 진주정씨,
아버지 하윤린, 어머니 진주강씨의 묘가 함께 소재해 있고
이들 묘역은 1977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 제41로 지정.
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469., 하륜의 선대 묘역.
함양 경충재, 함양 부조묘 등에 제향되었다.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 있는 사당 경충재는
후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의 은전을 받았으며,
경상남도 함양군에는 그의 부조묘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441번지에 위치.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현재로서는 어렵더라도
장차 나라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면 개혁해야 한다."
"저화가 동전(銅錢)보다 훨씬 사용하기 편리한 화폐."
"충청도 지역에 운하를 파고
3남지방에서 서울로 운송하는
물화를 내지의 운하를 통해 수송."
그의 개혁안은 민중들이 종이 지폐를 외면했고
운하 건설에 큰 비용이 들어 실행하지 못했다.
하륜은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군주의 의중을 헤아려 실천하여 영화롭게 살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하륜의 죽음에 태종은 심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간 조회(朝會)를 멈추고
고기와 생선이 든 반찬을 7일 동안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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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은 불교, 도가 사상, 무속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었지만,
"불교와 무속 등이 민심을 현혹하고 사람들을 속인다." 질타했다.
'현실세계도 모르면서 사후세계 개념으로 사람들을 기망한다는 것'.
"내가 불교를 좋아하는 것은 불교에 미혹되는 것과는 다르다.
불교에서 중생에게 화복을 미리 알려주는게 잘못인가?" - 태종 -
"미래의 볼 수 없는 일을 놓고 사람을 현혹시키고,
의연하게 일에 대처하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불교.
이는 성인이 이치에는 맞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듯.."
"화복으로 말하면, 과거 불타가 살아있을 때
일족을 도살하려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불타는
왜 미리 알려주어 화를 면하게 하지 않았는지요?
화복에 관한 불타의 그름을 여기서 알 수 있듯." - 하륜 -
하륜은 미래를 미리 알 수 없음을 들어 불교를 비판
또한 불교나 무속 등이 앞으로 닥칠 일의 이해득실을
미리 계산하여 처신하려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비판했다.
인간 본연의 입장에 따라 매사에 일이 닥치면
의연하게 선을 지향해 나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그의 불교 비판은 불교의 사회적 폐단이나
반사회성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이론으로 진보.
정사의 안정을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태종 즉위 직후부터 왕권강화를 위해 정치제도 개편
6조 대신들이 왕에게 직접 결재를 받아 왕이 직접 결정하게 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왕이 백성의 고충을 들을 언로를 마련
이로써 6부 대신이나 지방관의 전횡이나 권한을 견제했다.
신문고를 설치해 왕이 백성의 의견을 수렴할 것을 건의했다.
태종은 이를 적극 수용하였다.
또한 시장에서의 물물교환보다는
일정한 화폐를 사용케 할 것을 주장,
태종에게 '저화' 발행을 건의하여.,시행.
조선 건국을 설계한 이가 정도전이라면
조선 건국을 완성한 이는 하륜이 아닐까?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꿈꿨던 정도전과 다르게
하륜은 권력의 현실적인 향배에 관심이 많았다.
고려 말에 이색에게 가르침을 받은 신진사대부이면서
동시에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권문세족 일원이었던 하륜
이상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그는 온건개혁의 노선을 걸었다.
19세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일찍이 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당대 최고 권력자' 이인임의 비호.
소신은 굽히지 않으면서도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하륜.
하륜은 고려 조정에서 세 번이나 쫓겨났다.
처음에는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서 파직되었고,
다음에는 최영의 요동정벌을 만류하다 추방당했고,
위화도회군 직후에는 이색 계열로 몰려 눈 밖에 났다.
그는 급진적인 개혁이나 정책, 사건에 대해서는
어김 없이 반기를 들었고 시련을 묵묵히 감수했다.
정치관은 온건했지만 소신은 흐릿하지 않고 집요했다.
하륜의 온건개혁 정치관에서 가장 핵심은.,왕권 수호.
그가 부딪친 이들은 하나같이 신하로서 왕권을 넘어선 자.
신돈, 최영, 이성계 등은 왕보다 백성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하륜이 볼 때 고려왕조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
이는 그의 후견인이었던 이인임의 영향이었을 수도 있다.
이인임도 권력을 휘두르긴 했지만 왕권은 신성불가침이었다.
권력은 도덕과 달리 비정한 속성을 갖고있다. - 마키나벨리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관점이다.
하륜은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의 비전을 제시하며 이방원을 설득.
이방원은 자신이 살길과 군주의 길을 찾아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 피를 자양분으로 삼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열었다.
하륜도 육조직계제, 호패법, 군제개혁 등 왕권강화책을 입안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상호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나라로 발전
정도전이 설계한 신권 우위의 질서와
이방원이 추구한 왕권 중심의 질서가
묘하게 어우러지며 500년간 이어진 것.
하륜이 조선왕조에 끼친 공로는 가볍지 않았다.
그는 왕권수호에 대한 집념으로 마지막에 웃었다
나라가 바뀌어도 개혁은 추진하되 왕권을 바탕으로
한편, 재상정치를 주장하는 정도전의 눈에는
하륜이 위험하기 그지없어 제거해야 할.,정적.
아울러, 함께 제거해야 할 요주의 인물.,이방원
사실 조선 개국 초, 이방원은 벼랑 끝에 매달린 형국이었다.
원래 장성한 왕자가 후계자 자리를 놓치면 목숨이 위태로운 법.
집권세력은 후환을 남겨두려 하지 않아 이방원은 1순위 제거대상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내세우며 시시각각 이방원을 압박
이방원 측에서는 정도전이 목에 칼을 겨누고 조여 오는 기분.
궁지에 몰린 하륜은 동변상련 이방원과 힘을 합쳐 정도전을 제거.
< 후세의 평가. >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에게 있어
조선왕조 설계자는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왕권 강화 디딤돌을 놓은.,하륜 (河崙 1347~1416)
'모악천도론'으로 한양천도를 최초 주창한.,하륜.
'조선의 신도읍' 한양 1차 설계 및 시공자'.,정도전
'500년 조선의 도읍지' 한양의 시공 및 완공자.,하륜.
안산(案山)을 모악(母岳)으로 설계 시공된.,한양(漢陽)
조선왕조의 궁궐들은 안산을 모악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한양 내사산(內四山) : 東 낙산, 西 안산, 南 남산, 北 백악산.
'낙산~ 안산' 일직선 상에 놓인 조선왕조의 궁궐들.
원래, 청계천은 조선 초 건천인 개천을 파서 만든 물길.
태종 재위 때, 하륜(물 河, 산이름 崙)의 작품인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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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진주가 본향인 하륜은
공민왕 9년 국자감시 문과 합격.
이때 좌주(座主)가 이인복이었다.
이때의 과거 시험관은 좌주였고.
좌주는 급제자를 문생이라 불렀다.
이들의 관계는 평생 부자와 같은 관계.
그당시 정몽주, 이색 같은 당대의 거유를
좌주로 모시지 못한 하륜은 변방을 떠돌며
중앙정계에서 학벌의 설움을 톡톡히 당했다.
조정에 출사한 하륜은 감찰규정(監察糾正) 감투를 쓴 혈기로
권세가 신돈의 문객 양전부사(量田副使) 비행을 탄핵하다 파직.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시절 최영의 요양 출병을 반대하다 추방.
두 사건을 거치며 '학맥도 신통치 않은 자가 튀면 다친다'
라는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전면에 나서는 것을 피했다.
이러한 방어적인 자기 관리가 관운을 길게 했는지도 모른다.
정도전이 끌고 가는 스타일이면
하륜은 밀고 가는 스타일이었다.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한 사람이라면 하륜은 도편수였다.
즉, 주어진 도면에 따라 못질 하고 흙을 발랐던 사람이다.
정도전이 동북아에 조선을 등장시킨 사람이라면
하륜은 조선 테두리 내에서 태평성대를 고민한 사람.
정도전이 기획과 추진력을 겸비한 혁명가 학자라면
하륜은 구상과 실천력을 겸비한 행정가적 학자였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서로 상통하지만 상생하지 못한다.
혁명가와 행정가는 상이하지만 상생한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만나면 부딪치는 상극.
하여, 이방원과 정도전은 상극.
이방원과 하륜은 상생(相生)했다.
이방원과 하륜은 궁합이 맞았던 것.
하륜이 객지에서 사망하자
태종은 애석해 눈물을 흘렸다
"동북면은 왕업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고자 했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어려웠다.
경의 몸은 쇠하였으나 먼 길 수고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행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이 중하기에 경에게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 전송한 것이 평생 영결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 태종 -
하륜은 세상을 떠났고 숙번은 한양을 떠났다.
아직도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누구와 상의하여
처결해 나가야 한단 말인가? 당장에 세자가 문제.
그당시 세자 양녕대군의 스승이었던.,하륜.
태종은 예조좌랑 정인지를 함흥에 보내 영전에 사제(賜祭).
슬픔에 잠긴 태종은 3일 동안 신하들의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고기가 들어있는 음식을 들지 않았다.
임금으로서 신하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하륜의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하라." - 태종 -.
하륜은 살아 넘었던 철령을 죽어서 넘어왔다.
생전에 눈 덮인 개골산을 보고 싶어 했던 하륜
하륜은 구의(柩衣)에 덮여 금강산 자락을 넘었다.
하륜의 시신이 한양에 도착했다.
한 달 전, 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한양을 떠난 하륜이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남산에 횃불을 밝히고
무인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하륜이 돌아왔건만 횃불은 꺼져 있었다.
"혁명전야,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먼저 선수를 써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
망설이던 이방원을 설득하던 하륜이었건만.
이무(李茂)가 득죄하여 온 조정의 대신들이
그의 목을 베기를 청하였을 때. 하륜 홀로 반대.
왕의 의지에 반하는 발언은 목이 떨어질 수 있었다.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반대하였던.,하륜.
'하륜이 죽일 수 없다 하니 내 속마음도 같다.'
이렇게 속마음까지 털어놓고 지내던 임금과 신하 사이.
한양에 빈소가 마련되자 문상객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천성적인 자질이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많은 사람이 따랐다.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어 실수가 적었다.
태종과 16년 동안 많은 인재를 길렀고 요직에 심었다.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로 있던 하륜의 사위 이승간.
태종은 하륜의 상중에 한양에 올라오도록 허락하였다.
군인이 근무지 이탈을 엄금하는 것은 그당시 군법이다.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하게 하고
군인 사위를 불러올리는 것도 파격.
세자 양녕대군이 하륜의 빈소에 제사하고 왕이 친히 사제(賜祭)
원로 대신에 대한 최고의 예우, 빈소를 찾은 태종이 말을 꺼냈다.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오."
"국장으로 번거롭게 하지 말고
가인(家人)을 시켜서 장사하라. 고
하륜이 유언했다 합니다." -지신사 조말생 -
"대신(大臣)의 예장(禮葬)은 나라의 상전(常典)인데
하륜의 공덕이 국장으로 손색이 없지를 않소?" - 태종 -
태종은 하륜의 유언과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국장은 생략.
그 대신 국장도감(國葬都監)에 명하여
구의(柩衣), 단자(段子), 견자(絹子) 각각 1필,
상복(喪服)에 쓰는 정포(正布)17필, 혜피(鞋皮) 2장을
하륜의 집으로 보냈으나 그 부인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륜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뤘고
선영이 있는 진주 미천면에 묻혔다.
하륜이 주창한 저화(楮貨) 사용과 운하.
6백 년 전, 지폐에 해당하는 저화 사용했고
삼남지방과 연결하는 운하를 파자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조선의 정체성과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중시.
하륜은 실질적인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실용주의자였다.
두 사람이 깔아놓은 초석이 있어 조선왕조 5백년이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