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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北史)로 보는 高駒驪, 百濟, 新羅, 倭 [제1편(4-4), 왜국(倭國) 篇]
[북사(北史)로 본 ‘高駒驪, 百濟, 新羅, 倭’ 땅(疆域)은, 반도(半島), 열도(列島)가 아니다]
2025년 08월 25일
○ 고전(古典) 원문(原文)【소위(所謂) 정사(正史)라고 불리는 많은 사서(史書) 원문(原文)】에 따르면 :
「왜국(倭國)은, “왜(倭)”, “왜노(倭奴)”, “왜노국(倭奴國) 또는 왜국(倭國)”으로 불렸다. 특정(特定) 사서(史書)에서 보면 : “소국(小國)이었던 일본(日本)이 왜(倭)를 급습(急襲), 병합(倂合)해버리고,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記錄)하였다.
➥ 우리가 중요(重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왜국(倭國) 또는 일본(日本)은 어디에 있었느냐?”정말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에 있었는가?」하는 것인데,
이런 “왜(倭)”는 「“조선(朝鮮)”을 떠나서는 존재(存在)할 수 없고, “왜(倭) 땅”은, “조선(朝鮮)의 땅을 떠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즉(卽),
➊ 「“반만년(半萬年) 세월(歲月), 조선(朝鮮)이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라면 : ‘왜국(倭國)=일본(日本)’ 역시(亦是) 열도(列島) 땅에 있었다」라는 것이 되어 버리고,
➋ 「“조선(朝鮮)이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면 : ‘왜국(倭國)=일본(日本)’ 역시(亦是) 열도(列島) 땅에 없었다」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런 복잡(複雜)한 구도(構圖)는, 멀쩡한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를 지들【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정치적(政治的)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고자,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만들어 놓은 까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들이 만들어 놓은, “한글 해설서(解說書)”에서만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 〈고전(古典) 원문(原文)【소위(所謂) 정사(正史)라고 불리는 많은 사서(史書) 원문(原文)】에 따르면 : 「“왜노국(倭奴國)=왜국(倭國)=일본(日本)”은,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이 아닌 남아세아(南亞世亞)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정사(正史) 「북사(北史)의 왜국(倭國)」편(篇)으로 들어가 보자. 「과연(果然) 당시(當時)의 왜국(倭國)은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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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북사(北史) 왜국(倭國) 편(篇)
전회(前回)는, “북사(北史) 신라(新羅)” 편(篇)의 기록(記錄)을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과 비교(比較) 분석(分析)을 통해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 땅에 있을 수 없다”라는 조건(條件)을 설명(說明)하였다.
예고(豫告)한 바대로 오늘의 주제(主題)는 “북사(北史) 왜국(倭國)【제1편, 4-4, 왜국(倭國)】”편(篇)이다.
➥ 도대체 “왜(倭)”는 누구였으며, 또 그들은 어디에 근거지(根據地)를 두고 있었을까?
정사(正史)의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마한(馬韓) 땅의 남(南)쪽에, 왜(倭)와 접(接)했다」라고 하였고, 또한 「‘변진(弁辰)=변한(弁韓)’의 남(南)쪽 땅에도, 역시(亦是) “왜(倭)”와 접(接)해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
➥「왜(倭)=왜노(倭奴)=왜국(倭國)=일본(日本)」은, 「한국(韓國)의 남(南)쪽 접경지역(接境地域)에 이어져 접(接)해 있었다」라는 것이다.
➥ 이러한 역사(歷史) 기록(記錄)은, 「한국(韓國)의 “마한(馬韓) 남(南)쪽 땅, ‘변진(弁辰)=변한(弁韓)’의 남(南)쪽 땅은, 모두 육지(陸地)로 이어져 있었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서 말하는 “왜(倭)”의 신라(新羅) 침략(侵略)은, 매우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기록(記錄)이다. 왜냐하면 동서남북(東西南北) 그 어디에도 왜(倭)와 접(接)했다는 기록(記錄)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反對)로, 「“마한(馬韓)과 변진(弁辰)”의 남(南)쪽 땅은 “왜(倭)”와 접(接)해 있다」라고 했기 때문에, 「“왜(倭)”의 침략(侵略)과 약탈(掠奪)은 “마한(馬韓)과 변진(弁辰)”에 집중적(集中的)으로 벌어졌을 것인데」……생뚱맞게도 “진한(辰韓)=진한(秦韓)”의 신라(新羅)를 시시때때로 침략(侵略), 약탈(掠奪)했다는 기록(記錄)은, 뭔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다.
➥ 그렇다면, “이 모두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로 보면 :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와 ‘열도(列島)의 땅’이 아닌, ➝ 큰 대륙(大陸)의 땅에서 벌어졌던 역사(歷史) 기록(記錄)이었음을 자연(自然)스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사(正史)에서 말하는 것이다.
“북사(北史) 왜국(倭國)” 편(篇)을 보면서, 억지【어거지】가 아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과거(過去)로 돌아가 보듯이, 당시(當時)에 기록(記錄)된 역사서(歷史書) 속으로 들어가, “왜(倭) 땅”의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지형지세(地形地勢), 방위(方位), 기후(氣候), 산하(山河), 토산물(土産物), 특이지형(特異地形) 등등(等等)】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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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북사(北史) 왜국(倭國) 편(篇)
◈ 「倭 國」 : 《 (1) 倭 國 在 百 濟、 新 羅 東 南, 水 陸 三 千 里, 於 大 海 中 依 山 島 而 居。 : 왜국(倭國)은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동남(東南)에 있어, 물과 육지(水陸)로 3 천리(千里)를 가며, 큰 바다 가운데 섬(島)과 산(山)에 의지하여 산다. (2) 夷 人 不 知 里 數, 但 計 以 日。 : 이인(夷人 : 오랑캐)들은 리수(里數)를 알지 못해, 다만 해(太陽)로 계산(計算)할 뿐이다. (3) 其 國 境, 東 西 五 月 行 ,南 北 三 月 行, 各 至 於 海 。 其 地 勢, 東 高 西 下。 : 그 나라(倭國) 지경(地境)은 동서(東西)로 5월(月)을 가고, 남북(南北)으로 3월(月)을 가는데, 각처는 바다에 닿는다. 그 땅의 형세(形勢)는 동(東)쪽이 높고, 서(西)쪽은 낮다. 居 於 邪 摩 堆, 則 魏 志 所 謂 邪 馬 臺 者 也。 : 사마퇴(邪摩堆)에 거하는데, 위지(魏志)에 말하는 소위 사마대(邪馬臺)이다. (4) 又 云 : 去 樂 浪 郡 境 及 帶 方 郡 並 一 萬 二 千 里,在 會 稽 東, 與 儋 耳 相 近。 : 또 말하기를 : 낙랑군(樂浪郡) 지경(地境)과 대방군(帶方郡)에서 12,000리(里)인데, 회계(會稽)의 동(東)쪽에 있고, 담이(儋耳)와 서로 가깝다. (5) 俗 皆 文 身,自 云 太 伯 之 後 。 : 습속(習俗)은, 문신(文身)을 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태백(太伯)의 후예(後)라고 하였다. (6) 計 從 帶 方 至 倭 國 , 循 海 水 行, 歷 朝 鮮 國, 乍 南 乍 東, 七 千 餘 里, 始 度 一 海。 : 대방(帶方)에서 왜국(倭國)에 이르는 모든 길은, 물을 따라가면 조선국(朝鮮國)을 지나, 남(南)으로 잠깐, 동(東)으로 잠깐 가면, 7천여(千餘) 리(里)에, 처음으로 바다를 건넌다. 又 南 千 餘 里, 度 一 海, 闊 千 餘 里, 名 瀚 海, 至 一 支 國。: 또 남(南)쪽으로 천여(千餘) 리(里)에, 하나의 바다를 건너는데, 천여(千餘) 리(里)의 넓은 바다를, 한해(瀚海)라고 이름하는데, 일지국(一支國)에 닿는다. 又 度 一 海 千 餘 里 ,名 末 盧 國。 또 바다를 하나를 건너 천여(千餘) 리(里)에 말노국(末盧國)이 있다. 又 東 南 陸 行 五 百 里, 至 伊 都 國。: 또 동남(東南) 땅으로 5백리(百里)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닿는다. 又 東 南 百 里, 至 奴 國。 又 東 行 百 里, 至 不 彌 國。 또 동남(東南) 백리(百里)에 노국(奴國)에 닿는다. 동(東)쪽으로 백리(百里)를 가면, 불미국(不彌國)에 이른다. 又 南 水 行 二 十 日, 至 投 馬 國。: 또 남(南)쪽 물로 20일을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닿는다. 又 南 水 行 十 日, 陸 行 一 月, 至 邪 馬 臺 國, 即 倭 王 所 都 。: 또 남(南)쪽 물로 10일을 가고, 뭍으로 1월(月)을 가면 사마대국(邪馬臺國)에 닿는데, 곧 왜왕(倭王)의 소도(所都)이다. (7) 男 女 皆 黥 臂, 點 面, 文 身。沒 水 捕 魚。 無 文 字, 唯 刻 木 結 繩。 敬 佛 法, 於 百 濟 求 得 佛 經, 始 有 文 字 。 : 남녀(男女) 모두 팔이나 얼굴에 문신(文身)하며,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다. 문자(文子)는 없어, 결승(結繩)하고 나무에 새긴다. 불법(不法)을 공경(恭敬)하여 백제(百濟)에서 불경(佛經)을 구하니 얻으니 문자(文子)의 시작이었다. (8) 氣 候 溫 暖, 草 木 冬 青 。 土 地 膏 腴, 水 多 陸 少 。 : 기후는 온난(溫暖)하여 풀(草)과 나무(木)는 겨울(冬)에도 푸르다(靑). 토지(土地)는 비옥하며(膏腴), 물은 많고, 뭍(땅)은 적다.》라고 하였는데… …,
➨ 관심부분(關心部分)과 지형지세(地形地勢), 방향(方向), 거리(距離) 등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인(要因)들을 중점(重點)으로 발췌(拔萃)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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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倭 國 在 百 濟、 新 羅 東 南, 水 陸 三 千 里, 於 大 海 中 依 山 島 而 居。 : 왜국(倭國)은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동남(東南)에 있어, 물과 육지(水陸)로 3 천리(千里)를 가며, 큰 바다 가운데 섬(島)과 산(山)에 의지하여 산다.》라고 하였으니… …,
➨ “오늘날의 왜국(倭國)=일제(日帝)=일본(日本)”과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이 주장(主張)하는 왜국(倭國)”은, 바로 극동(極東)의 “열도(列島)” 땅이라고 하는데, 위의 구절(句節)에 의하면 :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에서 물(水)과 뭍(陸)으로 3 천리(千里)를 가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큰 바다 가운데에의 섬(島)에, 산(山)에 의지하며 산다」라고 한 것은 오늘날의 열도(列島)이야기가 될 수 없다. 열도(列島)의 왜(倭) 백성(百姓)들이 산(山)에서 사는가? 이것 헛소리다.
백제(百濟)에서, 신라(新羅)에서 수륙(水陸)으로 삼천리(三千里)를 갈 일이 없다. 곧 날 좋은 날을 택해 일엽편주(一葉片舟)를 띄워도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구주(九州)에 도착(到着)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식민매국사학자(植民賣國史學者)들이 자주 인용(引用)하며,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말하듯이 : “왜(倭)”는, 오늘날의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 일부(一部) 땅을 정복(征服)하고, 그곳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設置), 식민지배(植民支配)를 했다며, 반도(半島) 땅은 ‘지들의 것’이라고 침을 질질 흘리며 말하고 있지 않은가! 또,
“왜(倭)”는 시시때때로 신라(新羅) 동(東)쪽 해안지방(海岸地方)을 급습(急襲). 약탈(掠奪)했으며, 오죽하면 문무왕(文武王)이라는 신라왕(新羅王)은 자신(自身)의 주검을 왜(倭)가 침탈(侵奪)하지 못하도록 동해(東海)에 수장(水葬)하라는 어명(御命)까지 내렸겠는가!
더불어 백제(百濟)는, 수많은 백성(百姓)이 왜왕(倭王)의 교화(敎化)에 감읍(感泣)하여, 몇 개의 군민(郡民)들 수천(數千), 수만(數萬)이 왜선(倭船)에 몸을 던져, 왜국(倭國)으로 귀화(歸化)했다고 말했잖은가!
「“왜(倭)”는, 수륙(水陸) ‘3’ 천리(千里)를 “훨훨” 날아다니시나? ‘트로트’의 꽃 여왕(女王) “전유진”의 노래에서 보듯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류’인가?
이런 뭐 같은 이야기는, 지금(只今)도 식민매국사학자(植民賣國史學者)들이 자주 인용(引用)하는 줄거리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수륙(水陸) 3 천리(千里)”라고 하였다. 경상도(慶尙道) 또는 전라도(全羅道)에서 배를 타야 왜(倭) 땅으로 갈 수 있고, ‘제2차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없는 한, 예나 지금(只今)이나 길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수륙(水陸) 삼천리(三千里)”이고, 「지금은 바닷길【해로(海路)】로 천리(千里)【구주(九州) 福岡(후쿠오카)】밖에 되지 않나!”」이러한 “예(例)”는, 그저 하나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아래 구절(句節)을 보면 : 「반도(半島) 조선(朝鮮)과 열도(列島) 일본(日本)은, 불가능(不可能)한 구도(構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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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夷 人 不 知 里 數, 但 計 以 日。 : 이인(夷人 : 오랑캐)들은 리수(里數)를 알지 못해, 다만 해(太陽)로 계산(計算)할 뿐이다.》
(3) 《其 國 境, 東 西 五 月 行,南 北 三 月 行, 各 至 於 海 。 其 地 勢, 東 高 西 下。 : 그 나라(倭國) 지경(地境)은 동서(東西)로 5월(月)을 가고, 남북(南北)으로 3월(月)을 가는데, 각처는 바다에 닿는다. 그 땅의 형세(形勢)는 동(東)쪽이 높고, 서(西)쪽은 낮다. 居 於 邪 摩 堆, 則 魏 志 所 謂 邪 馬 臺 者 也。 : 사마퇴(邪摩堆)에 거하는데, 위지(魏志)에 말하는 소위 사마대(邪馬臺)이다.》라고 하였으니… …,
➊ 「其 國 境, 東 西 五 月 行,南 北 三 月 行, 各 至 於 海 。 其 地 勢, 東 高 西 下。 : 그 나라(倭國) 지경(地境)은, 동서(東西)로 5월(月)을 가고, 남북(南北)으로 3월(月)을 가는데, 각처는 바다에 닿는다.」라고 하였는데… …,
이를 옛 리수(里數)로 환산(換算)【예전 1일(日) 여정(一旅)을 약(約) 40리로 본 것인데, 이것은 한서(漢書)에서도 서역(西域) 나라와의 거리(距離) 기록(記錄)에도 일치(一致)한다】하면 : 「 ㈠ 5월(月), 곧 150일(日)을 가면 동서(東西) 약(約) 6,000리(里) 길이며, ㈡ 남북(南北)은 3월(月), 곧 90일(日)이니, 약(約) 3,600리(里) 되는 땅에 있었다」라는 것인데, “남아세아(南亞世亞)” 땅에서 이러한 구도(構圖)를 가진 곳은 바로 “보르네오(Borneo)”【婆羅洲[馬來語:Borneo]: 744,330㎢】섬(島)이다.
이러한 땅이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이라고 한다면 : 그러한 주장(主張)을 하는 자(者)는, 아마도 묘지(墓地)에서 자연(自然)으로 돌아가 영면(永眠)하고 있는 매국식민사학자(賣國植民史學者)일 것이다.
➋ 「其 地 勢, 東 高 西 下。 : 그 땅의 형세(形勢)는 동(東)쪽이 높고, 서(西)쪽은 낮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열도(列島)의 지세(地勢)와는 정반대(正反對)로 말하고 있다. 즉(卽),
“당시(當時)의 왜국(倭國) 땅의 지세(地勢)”는, 「동(東)쪽은 낮고, 서(西)쪽은 고지대(高地帶)」라고 전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열도(列島) 일본(日本) 땅은, 서(西)쪽은 높고, 동(東)쪽은 낮다.」이게 뭔 말인가?
남아세아(南亞世亞) 중에서 이와 같은 유사(類似)한 조건(條件)을 가진 곳은 : “보르네오(Borneo)”【婆羅洲[馬來語:Borneo]: 744,330㎢】섬(島)이다. 그 땅의 지세(地勢)는, 「서(西)쪽과 남(南)쪽은 낮고, 동(東)쪽과 동북(東北)쪽은 지대(地帶)가 높다.」
➥ “북사(北史)”에서 말하고 있는 “왜국(倭國)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정반대(正反對)로 기록(記錄)해 놓고 있어, 역시(亦是)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열도(列島)는, 옛 왜국(倭國)의 땅이 될 수 없다.」
즉(卽), 「열도(列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지세를 가지고 있어, 「곧 “열도(列島) 땅”은,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왜국(倭國) 땅이 아니다.”」 이건 팩트(Fac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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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又 云 : 去 樂 浪 郡 境 及 帶 方 郡 並 一 萬 二 千 里,在 會 稽 東, 與 儋 耳 相 近。 : 또 이르기를 : 낙랑군(樂浪郡) 지경(地境)과 대방군(帶方郡)에서 나란히 12,000리(里)인데, 회계(會稽)의 동(東)쪽에 있고, 담이(儋耳)와 서로 가깝다.》라고 하였는데… …,
➊ 「去 樂 浪 郡 境 及 帶 方 郡 並 一 萬 二 千 里,在 會 稽 東 : 낙랑군(樂浪郡) 지경(地境)과 대방군(帶方郡)에서 나란히 12,000리(里)이다」
이런 기록(記錄)으로 보면 : 오늘날의 「“열도(列島)의 구주(九州 : 큐 슈) 또는 교토(京都) 등지(等地)에서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까지 12,000리(里)였다”」라는 뜻과 같은 것이다.
‘12,000리(里)’는, 직선거리(直線距離) ‘4,800㎞’를 말하는 것인데… …반도(半島) 땅의 평양(平壤) 또는 황해도(黃海道) 등지(等地)에서 뺑뺑이 돌다가 대구(大邱), 부산(釜山)을 찍고, 또 찍고를 반복(反復)하고 구주(九州)로 경도(京都)로 달려가도 12,000리(里)는 턱없이 먼 길이다.
➥ 「구주(九州 : 큐-슈)로 경도(京都 : 교토) 등지(等地)에서 서(西)쪽, 남(南)쪽으로 ‘12,000리(里)’를 가면 그곳은 과연(果然) 어디쯤에나 닿을까? 남아세아(南亞世亞) 수마트라, 보르네오, 쟈바, 술라웨시제도(諸島) 등지(等地)에 닿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問題)는,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 지경(地境)에서 12,000리(里)를 가야 한다」라는 것이다. 핵심적(核心的)인 줄거리는 : 「낙랑군(樂浪郡) 또는 대방군(帶方郡)은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12,000리(里)라는 거리(距離)가 이를 증거(證據)하고 있는 것이다.」
◈ 왜냐하면 「반도(半島) 땅에서 열도(列島)까지는 12,000리(里) 될만한 곳이 없다.」 이를 역산(逆算)하여, 「열도(列島) 구주(九州) 또는 경도(京都)에서 반도(半島)까지는 겨우 몇천리(千里)에 불과(不過)함으로, 12,000리(里)에 접근(接近)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즉(卽),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은, 반도(半島) 땅이 아닌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에 있었다는 것이고, 왜국(倭國) 또한 열도(列島) 땅이 아닌 12,000리(里) 떨어진 남아세아(南亞世亞) 땅에 있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➋ 「在 會 稽 東, 與 儋 耳 相 近。회계(會稽)의 동(東)쪽에 있는데, 담이(儋耳)와 서로 가깝다.」라고 하였는데… …,
여기에서의 모순(矛盾)은,
㈠ 「회계(會稽)의 동(東)쪽, 담이(儋耳)와 가깝다」라고 하였는데… …「회계(會稽)」는, 시대적(時代的)으로 그 위치(位置)가 조금 다르지만, “회계산(會稽山)”은,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 있어, “회계(會稽)”라는 지명(地名)은, 시대(時代)와 왕조(王朝)에 따라 다소(多少)의 차이(差異)는 있지만 : 이곳 회계산(會稽山) 주변(周邊)을 떠나 다른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會稽郡,中國古郡名。秦朝始置時郡治在吳縣(今江蘇蘇州城區),轄春秋時長江以南的吳國、越國故地。東漢中期,分會稽郡北諸縣置吳郡。會稽郡治所移至山陰縣(在今浙江紹興城區),領十五縣 / 會稽縣,中國浙江省紹興地區歷史上的一個舊縣名 / 會稽山,原名茅山、苗山,亦稱畝山、防山、鎮山、覆釜山、宛委山、嵞山,位於浙江省紹興市南】
㈡ 「담이(儋耳)」는, “주애군(珠崖郡)으로 해남도(海南島)에 있다”【珠崖郡,古代行政區,今中國海南省一部份,郡治位於今海南省海口市瓊山區龍塘鎮】리고 하였다.
【儋耳郡,中國古郡名。西漢元封元年(前110年)置,漢昭帝時併入珠崖郡。東漢初年復置,尋廢。隋時復置。唐初改為儋州。/ 郡名起源 : 儋耳為海南島的古部族名。儋,一作聸。《說文解字》耳部:「聸,垂耳也。從耳詹聲。南方有聸耳之國。」 楊孚《異物志》:「儋耳,南方夷。生則鏤其頰皮,連耳匡,分為數支,狀如雞腸,纍纍下垂至肩。」[1]《山海經》海內南經作「離耳」,郭璞註:「鎪離其耳,分令下垂以為飾,即儋耳也」】
㈢ 따라서 오늘날의 지명(地名)으로 보면 :
「담이(儋耳)」는, 「회계(會稽)의 동(東)쪽이 아닌 서(西)쪽 4∼5 천리(千里) 떨어진 곳에 “담이(儋耳)”가 있아야 한다.」 즉(卽)「담이(儋耳)」는 : 「회계(會稽)의 서남(西南) 4∼5 천리(千里) 떨어진 곳에 담이(儋耳)가 있다」라는 것이 돼야 올바른 것이 된다.
➨ “북사(北史)”의 ‘고전(古典) 원문(原文)’에 따르려면 : 「회계(會稽)」는, 「담이(儋耳)의 서(西)쪽 또는 서남(西南)쪽 4∼5 천리(千里) 떨어진 곳에 옛 회계(會稽)가 있었다」라는 것이 된다.
「왜국(倭國) 땅이 주애(朱崖)…담이(儋耳)【두 곳 다 해남도(海南島)】와 서로 아주 가깝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㈣ 위의 ‘고전(古典) 원문(原文)’ 기록(記錄)에 따르면 : 「주애(朱崖)…담이(儋耳) 서(西)쪽인 오늘날의 북베트남【옛 교지(交趾)】에 “회계(會稽)”라는 지명(地名)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곳 “회계(會稽)”의 동(東)쪽에 “주애(朱崖), 담이(儋耳)”가 있게 되는 것이다.
➥➥➥ ㈤ 또 하나는 : 「낙랑군(樂浪郡), 대방군(帶方郡)을 기준(基準) 12,000리(里)」라고 하였으니, 「그곳은 남아세아(南亞世亞) 땅【말레이시아, 수마투라, 자바, 보르네오, 술라웨시 제도(諸島) 등지(等地)】을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결과(結果)를 얻게 된다.
이것은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왜(倭)”는, 기독교(基督敎)를 앞세워 침투(浸透)시키고, 뒤에 군대(軍隊)를 동원(動員)한 서세(西勢)에게 패배(敗北), 동(東)쪽으로, 동(東)쪽으로 계속(繼續) 이동(移動)하는 과정(過程)이 상세(詳細)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이러한 이동(移動) 과정(過程)은, 이미 우리 카페(Cafe)에 여러 차례에 걸쳐 게재(揭載)되어 있다. 이를 참고(參考)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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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俗 皆 文 身,自 云 太 伯 之 後 。 : 습속(習俗)은, 문신(文身)을 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태백(太伯)의 후예(後)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
➨「태백(太伯)」은, 「태백(太伯)은 주(周) 태왕(太王)의 장자(長子)임에도 동생(同生)에게 왕위(王位)를 물려주기 위해 형만(荊蠻)으로 도주(逃走)하여 단발문신(斷髮文身)하고, 오(吳)나라의 시조(始祖)가 된 ‘오 태백(吳太伯)’을 가리키는데, 왜(倭)는 태백(太伯)의 후예(後裔)라고 스스로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회계(會稽)는 옛날 오(吳)나라의 지역이다.
【여기서 문제(問題)가 되는 것은, 「“담이(儋耳)”는 회계(會稽)의 동(東)쪽이 아닌 서(西)쪽 4∼5천리(千里) 먼 곳에 있다」라는 것이다. ‘회계(會稽)가 오월(吳越)’ 지방(地方)이라고 했다면 : “오월(吳越)의 땅”의 ➊ 옛 교지(交阯 : 북베트남) 땅에 있어야 하며, ➋ 또는 메콩강[Mekong, 江] 하류[下流 : 호치민(HoChiMinh)과 프놈펜(Phnom Penh) 사이의 땅] 땅에 있어야 사서(史書)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대륙(大陸)의 학자(學者)들은 : 「왜(倭)의 문신(文身), 복장(服裝), 풍속(風俗) 등은 오월(吳越)과 같다」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勿論) 여기서 ‘오월(吳越) 땅’은 21세기(世紀) 역사해설(歷史解說)과는 전혀 다른 땅에 있었다.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倭人習性與特徵如下:黥面紋身,穿貫頭衣,服裝風俗似吳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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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計 從 帶 方 至 倭 國 , 循 海 水 行, 歷 朝 鮮 國, 乍 南 乍 東, 七 千 餘 里, 始 度 一 海。 : 대방(帶方)에서 왜국(倭國)에 이르는 모든 길은, 물을 따라가면 조선국(朝鮮國)을 지나, 남(南)으로 잠깐, 동(東)으로 잠깐 가면, 7천여(千餘) 리(里)에, 처음으로 바다를 건넌다. 又 南 千 餘 里, 度 一 海, 闊 千 餘 里, 名 瀚 海, 至 一 支 國。: 또 남(南)쪽으로 천여(千餘) 리(里)에, 하나의 바다를 건너는데, 천여(千餘) 리(里)의 넓은 바다를, 한해(瀚海)라고 이름하는데, 일지국(一支國)에 닿는다. 又 度 一 海 千 餘 里 ,名 末 盧 國。 또 바다를 하나를 건너 천여(千餘) 리(里)에 말노국(末盧國)이 있다. 又 東 南 陸 行 五 百 里, 至 伊 都 國。: 또 동남(東南) 땅으로 5백리(百里)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닿는다. 又 東 南 百 里, 至 奴 國。 又 東 行 百 里, 至 不 彌 國。 또 동남(東南) 백리(百里)에 노국(奴國)에 닿는다. 동(東)쪽으로 백리(百里)를 가면, 불미국(不彌國)에 이른다. 又 南 水 行 二 十 日, 至 投 馬 國。: 또 남(南)쪽 물로 20일을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닿는다. 又 南 水 行 十 日, 陸 行 一 月, 至 邪 馬 臺 國, 即 倭 王 所 都 。: 또 남(南)쪽 물로 10일을 가고, 뭍으로 1월(月)을 가면 사마대국(邪馬臺國)에 닿는데, 곧 왜왕(倭王)의 소도(所都)이다.》라고 하였는데… …,
위의 글 “(6)”의 글을 보면 : 「반도(半島) 조선(朝鮮)과 열도(列島) 일본(日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➊ 「반도(半島) 땅의 한국(韓國) 또는 백제(百濟)나 신라(新羅)에서 왜국(倭國)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의 해로(海路)밖에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바로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구주(九州) 산구현【山口縣 : 야마구치】을 거처 육로(陸路)로 가면 : 그것으로 끝이다.
무슨 얼어 죽을 7,000리를 가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넌다고 하였을까?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것은, 대방(帶方)에서 출발한 것이다.
곧 「① 計 從 帶 方 至 倭 國 , 循 海 水 行, 歷 朝 鮮 國, 乍 南 乍 東, 七 千 餘 里, 始 度 一 海。 : 대방(帶方)에서 왜국(倭國)에 이르는 모든 길은, 물을 따라가면 조선국(朝鮮國)을 지나, 남(南)으로 잠깐, 동(東)으로 잠깐 가면, 7천여(千餘) 리(里)에, 처음으로 바다를 건넌다. ② 又 南 千 餘 里, 度 一 海, 闊 千 餘 里, 名 瀚 海, 至 一 支 國。: 또 남(南)쪽으로 천여(千餘) 리(里)에, 하나의 바다를 건너는데, 천여(千餘) 리(里)의 넓은 바다를, 한해(瀚海)라고 이름하는데, 일지국(一支國)에 닿는다. ③ 又 度 一 海 千 餘 里 ,名 末 盧 國。 또 바다를 하나를 건너 천여(千餘) 리(里)에 말노국(末盧國)이 있다. ④ 又 東 南 陸 行 五 百 里, 至 伊 都 國。: 또 동남(東南) 땅으로 5백리(百里)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닿는다. ⑤ 又 東 南 百 里, 至 奴 國。 又 東 行 百 里, 至 不 彌 國。 또 동남(東南) 백리(百里)에 노국(奴國)에 닿는다. 동(東)쪽으로 백리(百里)를 가면, 불미국(不彌國)에 이른다. ⑥ 又 南 水 行 二 十 日, 至 投 馬 國。: 또 남(南)쪽 물로 20일을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닿는다. ⑦ 又 南 水 行 十 日, 陸 行 一 月, 至 邪 馬 臺 國, 即 倭 王 所 都 。: 또 남(南)쪽 물로 10일을 가고, 뭍으로 1월(月)을 가면 사마대국(邪馬臺國)에 닿는데, 곧 왜왕(倭王)의 소도(所都)이다.」라고 하였으니… …,
총(總) 거리(距離)는 : 「7,000 여리(餘里)+1,000 여리(餘里)+1,000 여리(餘里)+500 여리(餘里)+100리(里)+100리(里)+800리(里)【20일(日)을 간다 : 일(日) 40리(里) 기준】+ 400리(里)【10일】+1,200리(里)【30일】=“12,100 여리(餘里)”」에 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距離)로 볼 때 : 「이것이 “반도(半島)와 열도(列島) 사이를 말한다”라고 하는 자(者)는, “제정신을 갖지 않은 사람임에 분명(分明)한 것이다”.」 그곳이 ‘구주(九州)든, 경도(京都)든 말이다.
「반도(半島) 땅에 옛 조선(朝鮮)은 없었고, 또한 열도(列島) 땅에 왜국(倭國)은 없었다」라는 것이다. 무슨 얼어 죽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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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男 女 皆 黥 臂, 點 面, 文 身。沒 水 捕 魚。 無 文 字, 唯 刻 木 結 繩。 敬 佛 法, 於 百 濟 求 得 佛 經, 始 有 文 字 。 : 남녀(男女) 모두 팔이나 얼굴에 문신(文身)하며,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다. 문자(文子)는 없어, 결승(結繩)하고 나무에 새긴다. 불법(不法)을 공경(恭敬)하여 백제(百濟)에서 불경(佛經)을 구하니 얻으니 문자(文子)의 시작이었다.》라고 하였으니,
「‘오월(吳越)과 대부분(大部分) 풍속(風俗)이 같았다’라는 것이고, 풍속(風俗)이 대략(大略) 같았다는 말은, 그 족속(族屬)이 그 족속(族屬)이었다」라는 것이다. 또 「문자(文字)도 없고 기초적(基礎的)인 수리(數理)도 몰라 끈이나 새끼 등을 매듭을 묶어 헤아리고, 또는 나무에 새겨서 헤아렸다는 것이고, 또 “문자(文字)의 시작(始作)”은 백제(百濟)로부터 불경(佛經)을 얻으니 그때부터 문자(文字)가 시작(始作)됐다」라는 것이다.
이게 “왜(倭)”의 진정(眞正)한 정체(正體)라고 할 수 있다.
(8) 《氣 候 溫 暖, 草 木 冬 青 。 土 地 膏 腴, 水 多 陸 少 。 : 기후는 온난(溫暖)하여 풀(草)과 나무(木)는 겨울(冬)에도 푸르다(靑). 토지(土地)는 비옥하며(膏腴), 물은 많고, 뭍(땅)은 적다.》라고 하였는데… …,
「열도(列島) 땅은 377,973㎢」로, 「반도(半島) 땅 220,000㎢」보다 약 1.7배(倍)나 되는 큰 땅이다. 무슨 땅(뭍)이 적다는 것인가?
➥ 「19세기(世紀) 이전(以前)의 “왜국(倭國)=일본(日本)” 땅은,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이 될 수 없다. 더불어 “조선(朝鮮)” 또한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을, 정사(正史)를 칭(稱)하는 ‘고전(古典) 원문(原文)’은 말해주고 있다」라는 사실(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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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설명(說明)한 것들은 “북사(北史)의 왜국(倭國)”편(篇)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북사(北史)의 주인공(主人公)은 선비족(鮮卑族) 북위(北魏)를 말하는 것으로, 고구려(高駒驪)와는 왕실(王室) 간(間)의 혼인(婚姻)으로 이어져 있었던 왕조(王朝)였다고 하는데… …
「자주적(自主的)인 조선사(朝鮮史) 입장(立場)…에서 바라보면 : 「고구려(高駒驪)의 여러 제후국(諸侯國) 중의 한 나라였을 뿐이다.」라고 주장(主張)한다.
또한 북사(北史)의 주인공(主人公)들은, 수차(數次)에 “수십만(數十萬) 기병군단(騎兵軍團)”을 출병(出兵)시켜 백제(百濟)를 습격(襲擊)하였으나, 사전(事前)에 이를 안 백제(百濟)는 은밀(隱密)하게 매복(埋伏), 이들을 불시에 쳐 궤멸(潰滅)시켰다고 전(傳)해진다.
“북사(北史)”는, 당(唐) 이연수(李延壽)가 찬(撰)한 것으로, “AD 386 ∼ 618”년(年)의 “북위(北魏), 서위(西魏), 동위(東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및 수(隋)”의 233年 간(間)의 역사(歷史)를 기록(記錄)한 것이다. 【北史 : 唐朝李延壽撰。紀傳體,共100卷,含本紀十二卷,列傳八十八卷,上起北魏登國元年(386), 下迄隋義寧二年(618), 記北朝北魏、西魏、東魏、北齊、北周及隋六代二百三十三年史事.】
「북사(北史)」는, 조선사(朝鮮史)를 재구성(再構成)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貴重)한 사료(史料)임을 누구도 부정(否定)할 수 없다. 특히 서역(西域) 편(篇)에 “유일(唯一)”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는 「발해(渤海)」에 대한 것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기록(記錄)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 「해동(海東) : 발해(渤海)의 동(東)쪽을 지칭(指稱)하는 말로, 예전에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說明)한다.
「북사(北史)」에 의한 “해동(海東) 땅”은, 「㈠ 지중해(地中海) 동(東)쪽 ㈡ 흑해(黑海) 동(東)쪽 」 땅을 지칭(指稱)하고 있다.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의 강역(疆域)은, “동구라파(東歐羅巴)로부터 중원대륙(中原大陸), 반도(半島), 열도(列島)까지를 포함(包含)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 “북사(北史)”편(篇)은 “왜국(倭國)”을 끝으로, 다음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를 보면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한국(韓國)”에 관한 원전(原典) 중심(中心)으로, 오염(汚染)되지 않은 조선사(朝鮮史)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북사(北史)로 보는 高駒驪, 百濟, 新羅, 倭 [제1편(4-4), 왜국(倭國) 篇 / 1∼4편, 끝】
다음 게재(揭載)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 위지(魏志)]로 보는 “한국(韓國)과 왜(倭)”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합니다.
2025년 08월 25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북사(北史) 편을 1-4편으로 끝내고,
다음엔 삼국지 위서(위지)속의 한국(韓國)과 왜(倭)에 대해서 알아보기보기로 합니다.
* 왜, 무엇 때문에 : 옛 조선왕조는, 반도(半島) 땅에 처박혀 있어야 하며,
왜, 무엇 때문에 : 왜(倭)는, 반도 동쪽의 열도(列島) 땅에 처박혀, 열도(列島) 땅을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는 걸까?
이 모두는 "조선왕조"의 쇠락과 "서세"의 번성과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여 벌어진 제국주의(帝國主義)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 이를 인지(認知)하지 못하는 "한글세대"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 추가되어, 고착화되어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