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학계는 5세기 유송의 송서에 나오는 왜왕 무를 일본서기의 웅략천황에 비정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아마도 백 년은 더 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동일인이 되려면 적어도 즉위와 퇴위 시기는 같아야 합니다. 하나만 같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둘이 다 같아야 합니다.
송서를 보면 왜 왕세자 흥이 사신을 보내 462년에 왜왕 책봉을 합니다. 다음 기록입니다.
濟死,世子興遣使貢獻。世祖大明六年(462) :「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籓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즉 흥에서 무로의 권력교체는, 왜국 사신이 당시 왜국 수도였던 오사카 부근에서 유송 수도였던 남경까지 가는데 해로와 육로로 몇 달 걸린다고 보았을 때, 461년에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일본학계의 통설은 왜 왕세자 흥은 20대 안강천황이고, 왜왕 무는 21대 웅략천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보면 안강천황이 죽고 웅략천황이 왕이 되는 것은 456년입니다.
*안강 2년(455), 봄 정월, 계사삭 기유(17일)에 중체희명을 세워 황후로 삼았다. 먼저 중체희명은 대초향황자와의 사이에서 미륜왕 (眉輪王)을 낳았다. 그는 어머니로 인하여 죄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궁중에서 살았다.
*안강 3년(456), 가을 8월, 갑신삭 임진(9일)에 천황은 미륜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3년 뒤에 관원복견릉(菅原伏見陵)에 장사지냈다. 겨울 10월, 계미삭에 천황은 혈수천황이 일찍이 시변압반황자(市邊押磐皇子)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후사를 부탁한 것을 원망스럽게 생각하여 .... 사냥터에서 시변압반황자를 활로 쏘아 죽였다. 겨울 11월, 임자삭 갑자(13일)에 천황이 ... 즉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궁을 정하였다.
두 왕의 즉위년이 456년과 461년으로 5년이나 차이가 나는데, 1~2년 차이가 나면 어떻게 밀어볼 수 있으나, 5년이나 차이가 나는 것은 두 왕이 동일인이 아니라는 근거라고 반론을 제기해 왔습니다.
단 두 왕의 퇴위 시기는 같습니다. 478년에 왜왕 무가 국사를 보내는데 내용이 비통하여 무의 신변에 대단히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당시 웅략이 병이 중하여 국사를 못 보고 태자가 이를 대신했다고 하는데 이는 왕이 이미 죽은 것입니다. 사신이 국서를 가지고 가는 시간이 몇 달 걸린다고 보았을 때, 두 왕의 퇴위시기는 461년으로 같습니다. 따라서 송서를 요약하면 왜왕 무의 재위시기는 461~477로 17년간입니다. 상당히 오래 재위한 셈입니다.
이렇게 두 왕의 즉위 시점이 5년이나 차이가 나므로 두 왕은 동일인이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해왔는데, 일본서기를 한중사서처럼 "합리적으로" 읽으면 이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일본서기 읽는 법을 알면 전혀 달라집니다. 나중에 어떻게 읽는지를 보일 것입니다.
안강이 죽자 3년 후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5세기 왜국은 왕이 죽으면 일단 가매장을 하고, 3년 후에 다시 장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장사지낸 달에 제사를 지냅니다. 여기서 3년상이란 죽은 후 정확히 36개월이 아니라 2~3년 후에 장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장사를 지낼 때 후계자가 옥새를 받기 때문에 전 왕이 죽은 지 2년 정도 되는 시점에 내전이 벌어집니다.따라서 왕이 교체되는데 평화적 왕권교체가 거의 없으며 평균 3년의 공위기간이 존재합니다. 단 5세기에만 해당되는데, 태자가 저절로 왕이 되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15응신-16인덕-17이중-18반정-19윤공-20안강-21웅략 중에 부자상속은 인덕-이중뿐입니다.
참고로 무령왕릉 지석을 보면 무령왕도 왜국처럼 죽은 후 일단 가매장을 했다가 2년 3개월 후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성왕이 백제의 국정을 주도하였고 자연스럽게 왕이 되었습니다.
5세기 일본서기의 천황은 왕력상의 아버지와 생물학적 아버지의 둘을 갖는데, 천황이 되면 선왕의 왕자로 입적되는데 왕자의 순서는 입적된 순서입니다. 따라서 첫째로 갈수록 친자인 경우가 많고 뒤로 갈수록 양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16대 인덕은 15대 응신의 4번째 아들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응신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21대 웅략은 19대 윤공의 5번째 아들로 되어있는데 당연히 양자입니다. [계속]
첫댓글 왜왕 무가 송에 국서를 보내온 시점이 478년으로 왜왕 무의 국서 내용에 고구려가 침략하니까 자신의 부친 제가 고구려의 침략에 저항하는 군사 행동을 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사망하였고 제의 뒤를 이을 무의 형 흥이 동시에 사망하여 무가 그 떄문에 상을 치르는 상황 떄문에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국서를 보내온 478년 전후로 즉위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부친과 형이 동시에 죽어서 상을 치룬 왜왕은 일본서기에도 나타나 있지 않고요 일본서기에서는 왜왕 무로 비정되는 유라쿠 천황의 부친 인교 천황(왜왕 제로 추정) 는 453년에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장남 안코 천황(왜왕 흥으로 추정)이 재위 3년만에 시해당했다고 기록되어 부친과 형이 동시에 사망했다는 왜왕 무의 국서 내용과 다르게 나왔지요 그럼으로 국서를 보내온 왜왕 무가 유라쿠 천황으로 보기 힘든 이유가 이런 송서 일본서기 두 사료간의 재위기간에 관한 불일치한 기록내용일수밖에 없는 법이고
아무리 송과 일본이 교통상 거리가 멀어도 새왕이 461년에 즉위했다는 가정대로 해도 즉위 18년만에 송에 자신이 즉위했다는 국서를 뒤늦게 보낸다는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은 일이지요
게다가 고구려의 침략 떄문에 부친과 형이 동시에 사망해서 그 때문에 고구려에 대한 복수전 준비에 송의 도움을 요청해야 되는 왜왕 무의 절박했던 형편을 추가적으로 고려하면 부형이 사망한지 18년이 되도록 송에 고구려 복수전의 도움 요청을 뒤늦게서야 한다는게 말이나 될수 있는지요 그래서 왜왕 무가 유랴쿠 천황으로 보기 어려운게 일본서기에 나온 일본의 현실과 다른 송서의 왜왕 무의 국서 내용 떄문입니다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자국 국토가 위태롭다는 왜왕 무가 고구려의 침략을 당한지 18년이나 오랜 세월이 걸리도록 즉위 국서를 보낸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공실불 지극히 합리적인 의문이십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왜 5왕의 남조 외교는 왜국 내에서의 왕권 투쟁의 결과입니다. 책봉을 요구하는 이유와 요구하지 않는 이유도 일본서기에 다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나올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 왜 5왕의 조공책봉에 송서의 기록에서는 왜의 권력투쟁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왕권 투쟁의 결과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법입니다 책봉은 중국 왕조의 주관적인 외교적 입장으로 좌우되어 나타나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