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특집____
환 외 2편
- 창문을 내다
주경림
의사는 아버지 뱃속에 먼저 창문을 냈다
몸 속에서 무한증식 하려는 알들이 깃든
위를 잘라내야 했다
스무해 전에 3/4을 수술하고
애기 손바닥만큼 남은 위를 마저 꺼냈다
수술을 끝낸 의사가
녹색 수건에 싸인 아버지의 위를 보여주었다
오목했던 밥주머니는
선홍색 나비 한 마리로 펼쳐졌다
날개 안쪽, 주름 갈피갈피에 녹두만한 알들이 슬어져 있다
저 작은 알 속에 광포한 힘이 숨어있을 줄이야,
회복실에서 나온 후에도 아버지의 꿈은 계속 되었다
꽃을 찾아 들판으로 산으로 냇가로 헤매다
구름을 타기도 하고 허방에 빠지기도 했다
꿈 깨니 또 꿈.
환
- ICU에 갇히다
침상 위에 모니터가 아버지를 감시한다
일어나려고 하면 삐-삐경고음,
흰 모자와 마스크를 쓴 간호사가 황급히 달려와
잠금상태를 확인한다
소변줄이 제대로 꽂혔는지
산소줄이 코에 잘 붙어있는지
간호사의 눈은 링거병에서 소변 주머니까지
위 아래로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는 큰주머니, 작은주머니에서 줄줄이 늘어진
수액줄들을 가지런히 정돈한다
수액줄들이 흔들릴 때마다
밥주머니를 떼어낸 아버지의 몸 속 허공도 휘청거린다
흰 모자와 마스크 사이에 열린 까만 눈이
모니터에 그려지는 꺾은선 그래프로 아버지를 읽는다
“이봐요, 이봐요, 날 좀 살려줘—”
그 외침은 낙화하는 벚꽃잎처럼 흩어진다
흰 모자와 마스크는 재빠르게 옆의 환자로 이동한다
아버지는 짙은 안개 속에 갇혔다.
*Intensive Care Unit : 중환자실
환
- 진실과 거짓 게임
병상에서 구순을 맞은 아버지,
욕창방지 메트를 깔고 도넛방석을 받쳐주어도
콧줄과 산소줄을 댄 코를 찡그리며
아퍼, 아퍼—,
옆으로 뉘어도 한사코 정면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옆으로 계속 누워있도록
내가 침대의 여백을 채웠다
누군가의 여백이 된다는 것은 끔직한 일,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막상 아버지 옆에 누우니 아늑하고 포근했다
천장이, 하늘이 손에 닿을 듯 낮게 드리웠다
가슴 한켠이 뻐근해져
“아버지 대신 제가 아퍼드리면 좋을텐데.”
나도 내 말을 의심했다
“안~ 돼~”
아버지를 받치고 있는 탯줄들이 요동을 쳤다
병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돌아보았다
며칠 기력이 떨어져 말씀을 통 못하셨는데
오랫 만에 벼락치듯 내리는 꾸중이었다.
환, 환, 환
고래는 자신을 표현하는 고유한 울음 소리를 갖고 있는데 이런 신호를‘시그니처 콜’ 또는‘시그니처 휘슬’이라고 부른다. 고래처럼 나만의 울음 소리인‘시’가 내게는 바로 시그니처 콜인 셈이다. 그 울음 소리는 그리 아름답지도 영혼을 울리는 여운을 남길만큼 매력적이지는 못하지만 “나, 이렇게 살아있어요.” 하며 끊임없이 나의 존재감을 표현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위의 시 세 편은 아버지의 병상을 곁에서 지켜보며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무릇 생명이 있는 유정한 것들은 모두 시한부의 생을 살고 있다. 죽음 또한 삶의 한 과정인 줄 알지만 고통과 이별의 슬픔 또한 받아들여야했다. 그렇게 죽음 앞에서 겸허해질 때 내가 현재 가장 빛나는 순간을 살고 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의 자정작용을 경험 할 수 있었다.
「환」은 3년 전, 아버지의 위암 수술 직후에 쓰여진 시이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의사가 아버지의 잘라낸 위를 보겠냐고 물었다. 구십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던 밥주머니로 20년 전에 이미 3/4을 잘라내고 더욱 힘겨웠을 텐데 이제 노역으로부터 해방이었다. 의사가 녹색 수건을 펼쳐 보여준 선홍색 나비 한 마리는 아버지의 몸을 열고 허공으로 파르르 날아갔다. 분열을 거듭한 녹두만한 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애기 손바닥만한 위 주름 갈피에 슬어진 조그만 알들이 생명을 위협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고령인 아버지는 전신마취 휴유증으로 회복이 늦어지며 중환자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하루에 두 번의 면회만 허락되는 그곳에서 아버지는 견디기가 어려워 일시적인 환각 증상인 섬망에 빠지기도 했다. 중환자실의 풍경을 소재로 「환」은 태어났다. 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중환자실은 생명을 살려내는 곳이지만 아버지에게 침상의 모니터는 감시자이며 수액줄들에 묶인 감옥이었다. 아버지가 모니터의 꺾은선 그래프로 그려지고 수치로 읽어질 뿐, 어느 누구와도 눈길을 맞출 수 없었다. 밤낮 없이 환한 불빛과 백색 모자와 마스크, 백색 가운 속에서 아버지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가 환각증세였다.
아버지는 병실로 옮긴 후 섬망증은 나아졌지만 꼬박 2년을 병상에서 보낸 후 지난 해 이른 봄에 돌아가셨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관리를 잘해드려도 욕창이 생겼다. 체위를 바꿔 옆으로 눕혀드리면 한사코 정면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가 옆으로 계속 누워있도록 내가 침대 옆자리를 채웠다. 「환」은 아버지의 여백으로 침대에 나란히 누워본 경험담이다. 누군가의 여백이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 여겨왔는데 아버지 옆에 나란히 누우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걱정거리 하나 없고 무서울 것 없는 아늑한 둥지 같았다. 나는 감정이 고조되어 나도 모르게 아버지 대신 아퍼드리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기력이 떨어져 말 한 마디 못하고 지내던 아버지가 “안~ 돼~”라고 온몸을 쥐어짜서 큰소리를 냈다. 내 말은 몰라도 아버지의 말씀만큼은 진실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고생하다가 마침내 경기도 안성, 야트막한 산기슭의 봉긋한 새집으로 이사했다. 새집증후군 걱정없는 풀냄새 흙냄새가 향긋한 흙집이다. 다 좋은데 실내가 어두울 것 같았다. 평상시에 T.V와 전등을 켜놓고도 잘 주무실 만큼 밝고 환한 것을 좋아하던 아버지를 위해 둥근 지붕마루에 창문을 내 드리고 싶었다.
“뻐꾸기창 어떨까요? 아침 햇살 한 가닥이 뻐꾹 들르고 산목련 꽃그림자가 뻐꾹 어룽대고 밤이면 달빛 별빛이 뻐꾹 뻐꾹 소곤대는….”
“아가, 나 여기 있는데….”
그런 걱정 말라고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청옥빛 하늘에 새털 구름 몇점이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주경림 /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씨줄과 날줄』, 『눈잣나무』, 『풀꽃우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