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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현대의 일본 역사학계가 판독하고 있는 글자들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서기 503년 8월10일, 대왕(백제 무령왕)시대, 남동생인 왕(게이타이천황, 오호도)이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의 이름)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시는 것이노라.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며,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
이 명문은 무령왕이 친동생 게이타이천황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잘 살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가 물씬 느껴진다.
그런데 일본학자들 중에는 이 명문에 대해 엉뚱한 주장들을 펼치면서 본말을 전도하는 이도 있다.
대표적인 게 명문에 나타난 계미(癸未)년이 서기 몇 년을 가리키느냐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서기 503년의 계미년을 서기 433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水野裕說), 서기 263년 설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서기 263년 설을 주장한 사람은 다카하시 겐지(高橋健自, 1871~1929년) 박사였다.
그는 청동제 거울을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橋本市)에 있는 스다하치만신사(隅田八幡神社)라는 사당에서 찾아낸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거울을 찾아낸 후 1914년에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사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서기 263년 설은 오늘날 일본학계에서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묵살당하고 있다.
또 후쿠야마 토시오(福山敏男) 교수는 필자처럼 서기 503년 설을 지지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가 명문의 ‘남제왕(男弟王)’은 게이타이천황이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형인 ‘대왕(大王)’은 백제의 무령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왜나라의 닌켄(仁賢)천황이라고 엉뚱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무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이 친형제 관계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의 이름(諱)이 ‘사마(斯麻)’라는 것은 일본의 어느 역사학자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을 입증해주는 소중한 기록인 금석문이 있다. 1971년 7월8일에 발굴된 무령왕릉(충남 공주 소재)의 묘지석(墓誌石)이 바로 그것이다.
묘지석에는 무령왕의 휘가 ‘사마’라고 새겨져 있어 확고하게 입증됐던 것이다.
여기서‘일본서기’의 잘못된 기록도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 461년 조에는 “백제 무령왕은 개로왕의 동생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곤지왕자가 새부인과 함께 백제로부터 왜나라로 가던 중 쓰쿠시(筑紫)의 카카라노시마(各羅島)라는 섬에서 태어난 아기가 백제 무령왕이다”라고 씌어 있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무령왕은 곤지왕자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다.(‘三國史記’)
백제왕가와 왜왕가의 계보 <17>
아무튼 곤지왕자의 후손인 무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의 혈연관계를 밝힌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을 근거로 백제왕족과 왜왕들의 계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 본국에서는 곤지왕자의 아들이자 문주왕의 조카인 동성왕(제24대)→동성왕의 차남인 무령왕(제25대)→무령왕의 왕자인 성왕(제26대)→성왕의 장남인 위덕왕(제27대)과 차남인 혜왕(제28대)→혜왕의 장남인 법왕(제29대)→법왕의 왕자인 무왕(제30대)→무왕의 장남인 의자왕(제31대)으로 법통이 이어진다.
백제왕부인 왜나라 쪽에서는 동성왕의 삼남인 게이타이천황→게이타이천황의 장남인 안칸천황, 차남인 센카천황, 또 다른 아들인 킨메이천황→킨메이천황의 형제 자매들인 비다쓰천황, 요우메이천황, 스천황, 스이코천황→(한 대를 건너뛰고) 비다쓰천황의 손자인 죠메이천황→죠메이천황의 태자인 텐치천황으로 혈맥이 이어진다.
한일 양국의 왕 계보에 따르면 동성왕의 7대손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되고, 동성왕의 6대손이 왜나라의 죠메이천황이 된다.
죠메이천황은 ‘신동아’ 99년 10월호에서 밝혔다시피 나라의 백제강가에다 백제궁을 지었던 사람인데, 그가 바로 의자왕의 아저씨뻘이 되는 것이다.
또 죠메이천황의 아들인 텐치천황은 당연히 의자왕과 같은 항렬의 형제간이 된다.
그렇기에 의자왕의 백제가 망하게 되자, 텐치천황은 그 당시 왜 왕실에서 살고 있던 의자왕의 왕자인 부여풍(扶餘豊)을 본국 백제로 보내 왕위를 계승하도록 지원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서기 661년 5월 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5월에 대장군 히라부(比邏夫) 등이 선사(船師,선장) 170척을 이끌고, 풍장(豊璋,부여풍 왕자) 등을 백제국에 보내고, 조칙으로서 풍장 등으로 하여금 그 위(位)를 계승시켰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본서기’가 기록한 시점보다 약 반 년이 이른 시기인 ‘서기 660년 말에 풍장 등이 백제에 당도했다’고 아오키 가즈오(靑木和未) 교수는 ‘일본서기’(岩波書店, 1979)의 본문 주석에서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사인 ‘삼국사기’도 백제본기 660년 조에 “왜국에 있다가 온 옛왕자 부여풍을 맞이해서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할 당시 백제와 왜왕실의 깊은 유대 관계를 묘사하는 글귀도 적지 않다.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사자(使者)를 보내 원병을 청했다.”(백제본기)
“왜병의 배 400척이 백강(白江)에서 불탔고, 왕인 부여풍은 탈출해서 피신했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으며, 고구려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있다.”(백제본기)
“의자왕의 다른 왕자인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들의 부하와 더불어 왜군과 함께 항복했다.”(백제본기)
이런 기록들은 백제가 공격을 당할 당시 왜왕실에서 모국의 패망을 막기 위해 왜병과 군선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백제.왜 양국의 실권자, 곤지왕자 <18>
한편 동성왕의 아들들인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을 각각 권력의 일인자로 등극시킨 할아버지 곤지왕자야말로 그 당시 한일 양국에 걸쳐 막강한 왕가 세력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곤지왕자는 그 후에도 계속 왜 왕실에서만 살다가 가와치(河內) 땅에서 서거하게 된다.
지금 오사카부(大阪府)의 하비키노시(羽曳野市)가 그 옛날의 가와치 터전인데, 이곳에는 유명한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가 있다.
이 신사는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라고도 불리는데, 곤지왕자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지내고 있는 사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