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기계화문명과 생활혁명을 앞장서 이끌었던 철마는 이 땅에서 전혀 다른 폭군의 얼굴로 등장했다. 서구인들에게 공간과 시간의 격차를 획기적으로 좁혀주었던 철도가 20세기 초 조선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노역의 고통으로 삶을 거덜낸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특히 대표적 간선철도인 경부·경의선은 만주에서 러시아와 싸우는 일본군을 먹여살리기 위해 계획되어 목숨 건 강제부역과 수탈을 동반했다. 열차 타는 것은 고사하고, 기반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민중들은 고혈을 빨려야 했던 것이다.
1901년 착공된 경부철도는 국가주의 광기에 들떴던 당시 일본정가와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사였다. 일본관료자본가들이 만든 경부철도주식회사는 정부의 이자보증 등 파격적 지원아래 “경부선은 조선에서 일본의 유일한 맥관이자 사활의 기관”이라며 황족, 부호부터 시골농부까지 주식을 사 애국하라고 선동했다. 덕분에 경부철도는 각계각층 망라된 국민주 형식으로 자금이 조달됐으며 일본주주가 무려 99%를 차지했다.
조선인은 철저한 주변인에 불과했다. 철도부설을 위해 농번기에 강제로 인력을 끌어가 폐농이 속출했고, 식량·가축 징발로 농촌은 공동화되었다.
심지어 1906년 5월15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철도 지나는 지역은 온전한 땅이 없고 기력 남아있는 사람이 없으며 열집에 아홉집은 텅 비었고, 천리 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하였다”고까지 개탄했다. 실제로 일제는 2천만평 넘는 철도용지를 거저 빼앗고 연인원 1억명의 한국노동자들을 하루 12시간이상 마구 부렸다. 정재정 서울시립대교수의 <일제침략과 한국철도>에 따르면 경부·경의선은 마일당 평균 건설비가 각각 10만6000원, 6만2천여 원(당시 세계철도 평균치는 16만원)에 그쳤는데도. 2년만에 초고속으로 완성되었다. 철도사 유례없는 이 기적은 자본력 한계를 토지수탈과 강제동원으로 보충함으로써만 가능했다. 십수년전까지도 열차에 돌팔매질 했던 겨레 특유의 근대풍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 이면엔 철도로부터 지독한 해꼬지를 당했던 식민시대 고통과 궁핍의 핏빛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