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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평산신씨 판사공 미곡파종택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49 15.06.26 22: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판사공 미곡파종택(判事公 美谷派宗宅)
소 재 지 :  경북 영덕군 창수면 미곡리 344-4
건 축 주 :  신활(申活)
건축시기 :  17세기
이건시기 :  1900년대
소 유 자 :  신정용

건축 이야기
조선조의 학자인 죽로 신활(1576~1643)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의 선친은 창수면 인량리에 거주하였는데 1570년에 창수면 미곡리에 이주하려고 목재 등을 준비하였으나 임란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들 대인 1600년대에 완공하였다 전하여진다. 그 후 건축적인 기록은 없다가 사랑채를 1900년에 중수하였으며, 그 기록이 대청 상부에 남아 있다. 그 뒤 1948년에도 중수하였다.

건축 구성
판사공 미곡파 종택은 창수면 미곡리 마을을 통하는 도로 전면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채와 그 전면 우측에 사랑채가 우측으로 돌출딘 튼 ‘口’자형을 이루고, 그 우측에 평행하게 사당이 있으며, 사당 앞 공간(과거 방앗간채가 있었다고 함)을 사이에 두고 정자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대청마루 2통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 우측에는 귓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안방 전면의 좌익사는 정지와 상방이 연접되어 있으며, 귓방 전면의 우익사에는 도장과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귓방은 시집온 며느리가 사용하며, 외부에 아궁이 시설을 하여 난방을 하였다. 중문간의 상방은 조모가 거처하였고, 상부가구는 3량가로 대들보 위에 제형판대공으로 종도리와 장혀를 받치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좌측 2칸이 사랑방이고, 우측 2칸이 마루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상부가구는 5량가로 충량 위에 외기도리를 얹혀 팔작지붕을 구성하였다.
이 건물은 특징은 각기 다른 4동의 건물들이 연결되어 튼‘口’자형을 이루었다. 하지만 각 동의 건물들의 연결되는 지점의 기둥간격이 2~3자 정도로 일반적인 기둥간격에 비해 좁은 이유로 대청마루가 있는 안채와 정지, 도장, 사랑채가 각기 독립적으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

판사공 미곡파 종택은 창수면 미곡리 마을을 통하는 도로 전면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口자형 기본 구조에 전면 좌?우측에 마구와 사랑대청이 돌출된 양날개집의 모습이다. 정침 우측에 담장으로 일곽을 형성한 사당 영역이 있다. 사당 앞 공간에는 과거 방앗간채가 있었다고 한다.
안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 우측에는 귓방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안방 전면의 좌익사는 정지와 상방이 연접되어 있다. 또한 귓방 전면의 우익사에는 도장과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현재 안방과 상방은 벽체를 없애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하였다. 문틀과 문짝도 대부분이 현대식으로 교체하였으며, 부엌도 현대식으로 개조하였다.
안채의 상부가구는 3량가로 대들보 위에 제형판대공으로 종도리와 장혀를 받치고 있다. 안방의 상부는 더그매로 처리하였다.
종택의 전면은 좌로부터 마구, 정지, 문간방, 중문칸, 사랑방과 사랑대청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좌측의 마구는 덧달아 놓은 것이다.
사랑채는 전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좌측 2칸이 사랑방이고, 우측 2칸이 마루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상부가구는 5량가로 충량 위에 외기도리를 얹어 팔작지붕을 구성하였다.
이 건물의 특징은 각기 다른 4동의 건물들이 지붕으로 연결되어 ‘口’자형을 이루었다. 이것은 ‘口’자형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부재의 치목수법으로 보아 건축 연대도 각기 달라 보인다. 중문간의 상부는 자귀로 다듬은 것이나 사랑채는 그렇지 않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로수장으로 처리한 홑처마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상부는 3량으로 제형판대공을 사용하였다.

문중 이야기
- 문중이야기
신활(申活)은 조선시대 선조 9년~인조 21년(1576~1643)의 학자,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정립(挺立), 자는 경탁(景卓?景濯), 호는 죽로(竹老), 정립(挺立)으로도 불린다. 아버지는 준민(俊民)이다.
공은 박통경사(博通經史)하고, 예론(禮論)과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임란(壬亂)에 아버지를 따라 화왕진(火旺陣)에 참여하였으며, 선조 41 무신년(1608) 영해사림(寧海士林)이 의논하여 당시 부사 노경임(盧景任)과 영해인 이함, 백인경 등과 단산서원(丹山書院)을 창건하여 학문을 장려하였고, 학령(學令) 12조(條)를 정(定)하여 학생들의 교육에 힘썼다. 관(官)은 장악원정(掌樂院正)이고, 문집(文集)이 있으며, 1608년 선조의 장례에 차비관(差備官)으로 수행한 공으로 가자되었으며, 사림이 미산사(서원)(眉山祠)를 세워 향사를 지내고 『죽로집』문집이 간행되었다.

평산신씨 미곡파 종택은 죽로(竹老) 신활(申活)이 세웠다고 한다. 평산신씨 미곡파의 계보는 수손(遂孫)→숙행(淑行)→명화(命和)→준민(俊民)→활(活)로 이어지며, 수손→숙행→명화→준민 대까지는 창수 인량에서 살았다.
죽로 신활(1576~1643)은 선조 30년(1597) 유일재 김언기(1520~1588)의 문인인 부 준민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의 화왕산성 전역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바 있으며, 33년(1600)에는 여헌 장현광(1554~1637)을 찾아뵙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며, 41년(1608)에는 영해부사 노경임(1569~1620)에게 청하여 단산서원을 세워 가정 이곡과 역동 우탁을 봉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인조 9년(1631)에는 목은 이색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3년(1611) 인량에서 오촌(梧村) 석림별서(石林別墅)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6년(1614)에는 역동서원 원규에 12개 학령을 첨가하여 단산서원에 게시하였고, 인조 10년(1632) 오촌에서 현재의 미곡으로 거주지를 옮겼다고 한다. 『단양부지』에는 평산신씨 미곡파 숙행→명화→준민→활 4대 모두 효행으로 이름났음을 전하고 있고, 신활의 저서로『죽로집(竹老集)』이 있다.


관련유물
- 단산서원(丹山書院)
선조 41 무신년(1608) 영해사림(寧海士林)이 의논(議論)하여 당시 부사(府使) 노경임(盧景任)과 영해인(寧海人) 죽로(竹老) 신활(申活) 등이 창건(創建)하였다.
- 미산정사(眉山精祠)
순조 3년(1803)에 창수면 미곡리에서 사림의 합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죽로 신활을 배향하였다. 묘를 상현(尙賢)이라 하고, 사를 미산이라 하였으며, 규모로는 묘우가 3칸, 묘문이 3칸, 강당이 8칸, 대문이 8칸, 주사가 10칸이다. 봉안문과 상향축문은 참판 김희주가 지었다. 현재는 폐지되고 없다.
관련인물
- 신활(申活)
죽로 신활(1576~1643)은 선조 30년(1597) 유일재 김언기(1520~1588)의 문인인 부 준민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의 화왕산성 전역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바 있으며, 33년(1600)에는 여헌 장현광(1554~1637)을 찾아뵙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며, 41년(1608)에는 영해부사 노경임(1569~1620)에게 청하여 단산서원을 세워 가정 이곡과 역동 우탁을 봉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인조 9년(1631)에는 목은 이색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3년(1611) 인량에서 오촌(梧村) 석림별서(石林別墅)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6년(1614)에는 역동서원 원규에 12개 학령을 첨가하여 단산서원에 게시하였고, 인조 10년(1632) 오촌에서 현재의 미곡으로 거주지를 옮겼다고 한다. 『단양부지』에는 평산신씨 미곡파 숙행→명화→준민→활 4대 모두 효행으로 이름났음을 전하고 있고, 신활의 저서로『죽로집(竹老集)』이 있다.
- 신수손(申遂孫)
1400년대의 인물로 효행이 있었으며, 참봉을 지냈다. 증손이 죽로 신활이다.
- 신준민(申俊民)
호는 설월당(雪月堂)이고 부친은 참의 신명화이다. 유일재 김언기의 문하이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법도를 넘어섰으며, 임진왜란 때는 아들 신활과 곽재우 장군의 진영에 참가하였다.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승사랑을 받았다.
영덕 > 창수병곡권 > 창수면 미곡리
- 미곡리
본래 미곡리는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의하면 영해부의 서면 지역에 포함된 것으로 나오며, 1890년대 말에 발간된『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는 오서면 소속으로 나온다. 『호구총수』가 발간될 당시에는 영해부의 서쪽 행정단위로는 서면과 서면 2도로 나오는데, 이것이 언제 어느 때에 오서면으로 개칭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설에 미곡은 등운산 밑이 되므로 미실, 또는 미곡이라 하였다 하며, 광천(너부내), 대봉, 음지마을, 숲안못, 석전, 즉 돌밭, 양지마을을 통틀어 미곡이라 하였다 한다.
이러한 것이 일제 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미하동, 미상동 일부와 서면의 우상동 일부를 병합하여 미곡동이라 하여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 이후에 대봉, 너부내, 양지마을, 숲안못 등을 미곡1동, 음지마을을 미곡2동으로 분동하였다.

- 대봉(大鳳)
미곡 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의 형국이 봉새와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 대봉사(大鳳祠)터
대봉, 곧 미곡리 747번지에 있는 대봉사의 터로 조선 단종 때에 화를 입은 권자신(權自愼)과 권책(權策), 권상길(權尙吉)을 배향하였다.

- 미산사(眉山祠)터
양지마 서북쪽의 곧, 미곡리 446번지에 있는 미산사의 터로 조선 순조 3년(1803)에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활(申活)을 배향하였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다.

- 임파정
평산신씨 천한(天翰) 공의 정자이다.

- 작은봉정
미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오촌리에 있는 봉정 동남쪽의 작은 마을이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평산신씨 판사공, 죽로공의 묘가 있다.

죽노 신활선생

성명 : 신활(申活) , 1576년 ~ 1643년
본관 : 평산(平山)
: 경탁(景卓)
: 죽노(竹老)
출생지 : 영해(寧海) 인량리(仁良里)
출신지 : 영해(寧海)
분묘지 : 영해(寧海) 봉정산(鳳停山)
영특한 아이
신활은 어릴 때부터 여느 아이들보다 영리함을 보였다. 그는 6살 때 유가의 경전 가운데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경전이라는 오경(五經), 즉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중요 구절들을 암송하였으며, 9살 때는 능히 글을 지을 수 있었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이 알려지자 운악(雲岳) 이함(李涵)이 그를 보기 위해 집으로 초청했다. 그의 집에는 이미 문장으로써 유명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월이 ‘학(鶴)’이라는 글자에 맞춰 시를 지으니, 신활은 그에 대해 “鶴?雲?添客愁(학려운소첨객수: 학 울음소리 하늘 높이 번져가니 나그네의 근심이 더해지네)라는 대구(對句)로 답했다. 그러자 해월은 그의 재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활은 단지 재능만을 갖춘 아이가 아니었다. 8살 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도 극진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13살 때는 이미 그 고을 사람들이 그를 “박통경사율신이례(博通經史律身以禮)”, 즉 널리 학문을 꿰뚫고 예로써 몸을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단산서원(丹山書院) 건립
신활의 나이 19세가 되던 1594년에 왜구의 침범으로 강토는 피폐해지고 나라의 형편은 어려워졌다. 그로 인해 영해의 학교도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자 신활은 유림의 학자들을 떨쳐 일어나게 하는 한편, 관찰사에게 편지를 보내 단산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는 서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먼저 고려의 유명한 학자인 역동(易東) 우탁(禹倬)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서원의 배향자(配享者)로 모시고, 퇴계선생이 제정한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원규에 12조항을 더하여 단산서원 학령(學令)을 마련했다. 그리고 주자의 가례를 참고하여 장례에서 입을 상복의 규정을 그림으로 그리고, 고을에 거처할 때의 여러 가지 예절을 제정하여 마을의 청년들을 격려했다. 이로써 왜구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영해지방의 학풍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학자로 보낸 일생

신활이 어릴 때부터 보여 온 재능으로 생각한다면 누구보다 먼저 과거시험에 합격해야 마땅했다. 그래서 그도 15세 이후로 줄곧 과거에 응시했다. 하지만 향시에서는 여러 차례 합격하였으나, 정작 대과에서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의 불합격을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 중에 당시 시험을 관장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신활에게 자신의 지조를 조금 꺾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충고를 했다. 이 말은 자신의 뜻을 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채점을 하는 시험관의 뜻에 맞게 답안을 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이 말에 들은 신활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찮은 선비도 명예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올바른 도리로써 자신을 바로 세우지 않고, 어떻게 올바른 도리로써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 신활은 더 이상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를 ‘죽로(竹老)’라고 짓고 이후 학자로서의 일생을 살았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새로운 임금이 등극하자 올바른 정치를 위한 계책을 지어 올리기도 하는 등 나라와 백성에 대한 염려는 한결같았다.

 

가족이야기

: 신명화(申命和)
생부 : 신준민(申俊民)
: 재령이씨(載寧李氏) 이은좌(李殷佐)의 딸
아버지 신준민(申俊民)
신활의 아버지는 설월당(雪月堂) 신준민이다. 그는 퇴계의 문인인 김언기(金彦璣)의 문하에서 공부한학자였다. 비록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강학으로 후인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어린 아들이 재능을 보이자 여간 대견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명 학자나 문인의 초청에 응하여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안목을 넓혀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보호하는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들을 데리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진영인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처럼 신활의 아버지는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사로운 정이나 이익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신활 역시 올바른 도리로써 처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 소신을 굽히고 과거 시험관의 뜻에 맞는 답안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충고할 때, 오히려 “올바른 도리로써 자신을 바로 세우지 않고, 어떻게 올바른 도리로써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에서 아버지의 그러한 영향을 볼 수 있다.
부인과 자식들
신활은 1616년(광해 8)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1618년(광해 10)에 재혼을 했다.
첫째 부인은 영천이씨(永川李氏) 이민현(李民顯)의 따님으로 두 아들과 딸 넷을 낳았다. 장남은 신길휘(申吉暉)로 진사를 지냈으며, 차남인 신길원(申吉元)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장녀는 백동현(白東賢)에게, 차녀는 조욱(趙頊)에게, 삼녀는 오섭(吳涉)에게, 사녀는 유장(柳樟)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둘째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 박응달(朴應達)의 따님으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신길우(申吉佑)이다.

학문이야기
스승 : 장현광(張顯光)
향사 : 단산서원(丹山書院)
학파 : 기타 학파
교유인물
서성(徐?), 황유일(黃有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전통적 유학
신활은 6살 때 이미 오경의 중요 구절들을 암기하고, 9살 때 능히 글을 지을 수 있었으며, 10살 때는 어른과 시로써 문답을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13살 때는 그 고을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박통경사(博通經史)”, 즉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통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박학다식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학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는 어느 누구 못지않은 많은 저작을 남겼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집에 불이 나서 많은 저작이 없어졌다. 지금 그의 문집인 『죽로집(竹老集)』에 남아 있는 글들은 예학(禮學)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문집의 잡저(雜著) 속에 있는 「부재위모기철궤연의(父在爲母朞撤??議)」,「상중주혼의(喪中主婚議)」, 「오복도서(五服圖敍)」 등이 그것이다.
「부재위모기철궤연의」는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생전에 쓰시던 물건을 3년간 철거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논의한 것이며, 「상중주혼의」는 상중에 있는 사람이 혼인에 관한 일을 주관할 수 있는지를 논의한 것이며, 「오복도서」는 주자의 가례를 참조하여 장례에서 입을 다섯 가지 의복의 제도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밖에도 「상여헌장선생문목(上旅軒張先生問目)」, 「상선생재도문목(上先生再度問目)」 등의 편지글에서도 그의 예학을 엿볼 수 있다. 이 편지글들은 그의 스승인 장현광에게 예제(禮制)에 관해 의문스러운 것들을 물은 것이다. 그리고 초학자들을 위해 고을에 거처할 때의 여러 가지 예절을 제정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신활의 남아 있는 글들과 행적을 보면, 그는 분명 예학에 대해 남다른 조예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인조반정 후에 바른 정치를 위해 제언한 「계해의상봉사(癸亥擬上封事)」를 보면 시사(時事)에 대한 나름의 관심과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과 함께 불타버린 글들을 고려할 때 신활의 학문은 공자가 말한 박문약례, 즉 글을 널리 배우고, 그 배운 것들을 예로써 간추려 실천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한다는 전통적인 유학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이야기

문집명 : 『죽로집(竹老集)』
『죽로집』은 신활의 4세손인 신방달(申邦達) 등이 그의 글을 수집, 정리하여 1823년(순조 23) 이후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4권 2책의 『죽로집』에서 제1권은 77수의 시(詩)와 7편의 만사(輓詞)로 되어 있다. 이 시들에 대해 이주원(李周遠)은 "맑고 뛰어나며 높고 전아하다"라고 평하였다. 그리고 이 시들 가운데 「문서보(聞西報)」, 「문심양변입산서회(聞瀋陽變入山書懷)」, 「탄시사술회(歎時事述懷)」 등은 당시 신활이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느낀 비애감을 술회한 것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제2권은 소(疏), 서(書), 서(序), 그리고 단산서원의 원규(院規)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록 임금에게 올리지는 못했지만 「계해의상봉사」라는 상소문이다. 여기에서 신활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각종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 백성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해 시급히 힘써야 할 6조목을 말하고 있다. 이 장편의 상소문은 그의 시국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3권은 기(記)와 잡저(雜著)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관어대유행기(觀魚臺遊行記)」는 그가 존경해서 꿈속에서나마 보기를 원하고, 그래서 단산서원의 배향자로 모신 목은 이색의 종적을 따라 관어대를 돌아보고 그 풍경을 적은 것이다. 그 밖에 그의 예학에 대한 조예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이 잡저 속에 포함되어 있다.
제4권은 부록으로 연보(年譜),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발문(跋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활은 외적들에 의해 국토가 침탈당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을 몸소 겪은 학자였다. 『죽로집』은 그러한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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