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 산소 방문 길
손 진 담
지난 주말 경주에서 일박하는 모임을 일찍 끝내고 여가를 이용하여 고향 산천에 계시는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뵙기로 했다. 열차 여행 중이라 택시를 이용하여 서쪽으로 향했다. 경주시 현곡면을 거쳐 인접한 영천시 고경면으로 가는 도로(904번 용담로)는 비교적 한산하였으며, 주변의 산천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고 높은 하늘과 어울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경주 현곡면 소현리에는 신라 효자 문효공 손순의 유허비가 있다. 문효공은 신라 육부 중 대수촌장 구례마의 후예로서 흥덕왕 때 석종(石鐘)으로 유명하며,효행의 기본적인 전설로 많이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손순은 아버지를 여의고 품팔이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어린 자식이 매번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고 있는 것을 본 손순은 아내와 의논하여 자식은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으니 자식을 산에다 묻어버리자고 하니 아내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인근 산에 올라가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보니 석종이 나오므로 이상하게 여겨 아이를 도로 데리고 내려와 석종을 집에 달아놓고 매일 치다 보니, 아름다운 소리가 궁중까지 알려져 연유를 알게 된 흥덕왕은 손순의 효성에 감동하여 집 한 채와 쌀 50섬을 하사하였다. 손순은 그가 살던 집을 시주하여 홍효사(弘孝寺)라 짓고 석종을 걸어 놓았으나 진성여왕 대에 후백제의 도적 때가 쳐 들어와서 빼앗아 갔다고 한다. 문효공은 우리 손문의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관계상 그냥 지나쳐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면 소재지를 지나 가정리에 접어드니 도로 오른편에는 ‘수운 최재우 생가’라는 안내판이 나타나고, 왼쪽으로는 천도교의 성지 용담정으로 가는 안내가 보인다. 조선 말기 순조 24년(1824년)에 태어난 수운은 성인이 되면서부터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이곳 용담골에서 골똘히 기도하다가 1860년에 종교체험 후 인내천 사상을 포교한 한국의 자생종교 동학의 교조이다.
수운의 아명은 복술이며, 그의 양녀에게는 여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우리 어머니 경주 이씨 (1908-1993)의 소꿉 동무였다고 들은 바 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이곳 현곡에서 오래 사시다가 나의 어머니 어린 시절에 가족들을 데리고 넓은 들판이 있는 건천읍 천포리로 이사를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큰 이모는 현실댁이라 하고 우리어머니는 천포댁이라 하였다. 마침 동행하는 택시기사가 경주 최 씨라 조상인 수운 동학 교조와 해월 최시형 2대 교주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으며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자연스레 신라 육부촌 이야기도 나왔고, 가는 동안 나이도 비슷하여 여러 가지 정담을 나누었다.
택시는 어느덧 시 경계인 남사봉-어림산 중간재를 감돌아서 고경면 황수탕 어귀에 도달하였다. 황수탕은 본래 철분이 많은 약수로 유명하며 누런 물색에 떫은맛이 있으나 위장병에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왕년에는 유명 약수탕이라 원근 지역에서 몰려온 행락객들로 붐비고 약수로 끓인 닭백숙은 청송의 달기 약수와 쌍벽을 이루었는데, 요즈음은 옛날 같지 않아 한산하기가 그지없었다. 가게가 따로 없어 근근이 식당에서 묘제용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인근의 칠전리로 향하였다. 논밭에 인적은 없고 비닐로 쌓인 볏짚만 뒹굴고 있었다.
영천시 고경면에는 충성대와 국립호국원이 있으며 특히 칠전리는 풍수지리상 명당자리가 많아서인지 야산에는 묘지들이 유독 많다. 그래서인지 조부님의 산소 자리를 고향 마을에서 20여 리나 떨어진 이곳에 자리 잡은 걸 보니 부모님 형제들의 조상 산소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조부님은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49년 대한민국 건국 후 6.25동란 전에 77세로 생을 마감하시고 이곳에 안치되셨다.
택시를 마을 입구에 대기시켜놓고 산으로 올라갔다. 낙엽으로 덮인 좁은 산길은 나무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소먹이고 풀 베는 목동도, 겨울 나무꾼도 사라지고, 가을에 겨우 예초기 들고 벌초하는 행렬만 잠시 지나갔으리라. 잡목이 우거진 이곳, 70년 전엔 어떻게 상여를 운반했을까? 전해온 이야기로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벌목하고 길을 내었다내요. 많은 상두꾼과 운구행렬이 이 작은 마을에서 일박해가면서 이 길을 올라 장례를 치렀다니 굴착기도 없던 시절 상상이 잘 가질 않는다.
20여 분을 올라가니 드디어 조부님 산소가 나타났다. 가져간 술과 안주를 상석 위에 올려놓고 절 두 번을 했다. 산소는 벌초가 잘 되어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시야가 잘 트이고 멀리 활모양의 산들이 환상(環狀)으로 둘러싸여 그야말로 환상적(幻想的)이다. 묫자리가 바람을 잘 막아주고 지하수가 없으며 좌청룡 우백호이면 명당이 아니겠는가? 일체유심조라고 했던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조상에게 감사하면 후손들도 복이 닥치겠지요.
상석, 비석, 망주석이 제대로 서 있는지 점검을 하였다. 비석은 보령 오석으로 한문 글자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비석 전면에 弘陵參奉月城孫公之墓(홍릉 참봉 월성손공 지묘)가 큰 글씨로 아로새겨지고 옆면과 뒷면에는 조상들의 휘와 후손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할아버지는 홍릉참봉, 괴암공으로 휘가 영달(1873-1949)이시다. 수운선생과 동시대인 송파공 휘 상각(1828-1900)의 둘째로 태어나시고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셨답니다. 기골이 장대하시고 지도력이 탁월하셔서 추곡의 ‘손 참봉’이라면 영천 일대에서 널리 알려지신 분이랍니다. 나아가 큰집 사랑채에는 식객들이 끊일 날이 없어서 아녀자들이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답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할머님이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괴암공의 수발을 들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다른 건 몰라도 할아버지 신었던 나막신을 보니 나의 큰 발이 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나는 조부님의 차남, 재전공의 넷째이니 피를 속일 수야 있겠는가. 재전공(휘 수은; 1912-1994) 문집에 실린 한시 하나가 떠올랐다.
拜先考墓所感懷 (배선고묘소감회)
선고(先考)의 묘소를 참배하고 감회가 있어 짓다
歲歲登臨春又秋 (세세등림춘우추) 매년 묘소에 올라 봄이 또 가을이 되니
焚香哭拜感新流 (분향곡배감신류) 분향(焚香)하고 곡배(哭拜)함에 감회가 새롭네
依舊松杉環衛道 (의구송삼환위도) 예전처럼 소나무와 삼나무는 위도(衛道)를 두르고
變形雲霧鎖山頭 (변형운무쇄산두) 변형하는 구름과 안개는 산 머리를 감싸네
洋洋如在惶惕地 (양양여재황척지) 양양(洋洋)히 있는 듯 황송하고 두려운 곳에
寂寂無憑景慕多 (적적무빙경모다) 적적(寂寂)하여 의지할 곳 없이 경모하는 마음 가득하네
斜風落日回程立 (사풍낙일회정립) 빗기는 바람과 지는 해에 돌아가려 서 있으니
涕淚滂滂敢不收 (체루방방감불수) 세차게 흐르는 눈물 감히 거둘 수 없네
종반들이 모두 모여서 같이 왔으면 좋으련만 다음을 기약하고 하산을 하였다. 대기 중인 경주택시 기사가 한 시간을 기다리다 반가이 맞아 주었다. “산소는 이상이 없었어요, 할아버지가 참 좋아 하시죠” 하면서 왔던 길로 차를 돌려 나갔다. 현곡에서 경주 시내로 들어가지 말고 내친김에 건천읍 화천리에 있는 신경주 고속열차 역으로 가자고 했다. 주행거리가 30km 이상인데다 주차대기를 한 시간이나 했으니 요금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조부님 산소 방문을 마칠 수 있어, 나름대로 뿌듯해 미터 요금대로 현금을 지급 했더니 웬걸 할인까지 해주겠다면서 배추 잎 한 장을 돌려주었다. 자기 택시를 이용해 주고 좋은 여행을 같이하게 되어 배운 것이 많다고 하는 운전사 경주최 씨는 분명히 고운 최치원, 수운 최제우에다 경주 최 부자의 맑은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역전 택시 승강장에서 하차하니, 어느새 그 은발 기사가 내 곁에 다가와서 직각으로 절을 하며 잘 다녀가시라고 한다. 이를 본 다른 택시기사들이 모두 의아해 하고 있었다. 내 검은 염색 머리가 약간 민망했지만 저녁노을을 받으며 신라 무산 대수촌(모량부)을 떠나왔다.
2017.11.13.
첫댓글 손순매아의 내력 잘 읽었습니다. 효자이십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효문화뿌리운동의 리더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