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14,23.24)
여러분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 살아오면서 참으로 자신이 신뢰하고, 비록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가슴에 새기며 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엄마를 그렇게 사랑했고 그래서 어머니께서 임종 전에 하셨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그 말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를 부탁해!” 어쩌면 당신 떠나시고 난 뒤 홀로 남으실 아버지가 제 형제자매들과 힘들고 불편하실 것을 아셨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는 아버지를 저에게 잘 보살펴 주길 부탁하셨지요. 물론 엄마 곁에서 마지막 임종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특별히 저에게, “신부를 믿어!”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되돌아보면 아버지께 죄송하지만, 전 아버지를 잘 모시려고 노력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 보다는 어쩌면 엄마를 더 사랑했기에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었습니다. 엄마를 사랑했기에 엄마의 마지막 유언을 사랑으로 마음에 새기며 아버지 돌아가신 날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십니다. 분명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말을 지킬 것입니다. 이렇게 구분하신 것은 사랑에 있어서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편애나 차별이라기보다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자 다짐에 차이가 드러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저와 제 형제들의 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온도가 달랐다고 봅니다. 배우자와 자식이 없는 저에게는 어머니는 제 사랑의 전부였기에 ‘엄마의 말’을 지키려고 하는 내외적 강도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형제들이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에 견주어 봐도 인간관계(=부모와 자식, 형제들 간의 우애)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사랑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루7, 47) 저는 분명 예수님의 말씀처럼 다른 형제들보다, 저를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신 후 어머니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14,21) 라는 표현에서 ‘지키다.’는 말의 뜻은 규정, 법, 예의 따위를 어기지 않으려고 그대로 실행한다, 고 사전은 풀어 났더라고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키다.’는 의미는 단지 지켜야 할 계명 준수나 이행의 강제성보다 사랑에 대한 자연스런 내적 동의요 응답으로써 늘 마음에 새기며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랑하면 어찌 사랑하는 분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원의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그 말씀을 실천할 때 초래하는 많은 어렵고 힘듦이 수반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모든 것을 말하고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제 엄마가 남기신 유언을 명심하고 저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런 저를 제 엄마는 무척이나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이해하고 또 제가 이해한 대로 살려고 합니다. 사랑받은 만큼 깨닫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미워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리라, 는 점입니다. 마치 제 엄마가 당신의 당부를 제대로 온전히 실천하지 않은 제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을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이상으로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알고 계시기에 당신의 말씀을 지키며 살면서, 깨달아 실천해 주시기를 바라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요가 아닌 사랑의 당부요 바램으로써, 왜냐하면 어떤 형제들은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았음에도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지금도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나 어머님의 사랑이 부족하기보다 인간의 한계이요 욕심인가 봅니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결국은 짧은 인생살이에서 스스로 행복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혹은 제 경우처럼 엄마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이 더 자유로워졌고 행복했으니까요. 하느님을 위한다고 지나치게 떠들거나 나팔을 불지 마세요. 다 우리 잘되라고 하신 말씀이니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 결국 삶이 불행하고 자신을 어렵고 힘들게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시렵니까? 저는 제 경험으로 깨달은 바는 모든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저를 힘들게 한 게 아니라 저의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온도가 미약할 때 힘들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코니온에선 배척과 냉대를 겪습니다. 그런데 리스트라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에게서 “구원받을 믿음이 있음을 알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 (사14,8.10)하고 큰 소리로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이는 바오로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느님의 활동이며 아울러 그리스도께 대한 그 앉은뱅이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본 군중이 그들을 마치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내려오셨다.” (14,11)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교주처럼 받들어 모시며 칭송하려 합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선포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 영광을 독차지하고 자신에 대한 업적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두 사도는 자신들의 옷을 찢고,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14,15) 라고, 말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칭송과 영광을 거부합니다. 모름지기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보다 자신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신 것처럼 복음 선포자들 역시 자신들의 영광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들을 파견하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이 먼저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시1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