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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1. 우리가 저 신성을 찾고 숭배하는 까닭은 죽을 일생의 물거품 같은 무상함 때문이 아니라, 행복한 삶 때문이다. p705
그러나 죽을 일생의 물거품 같은 무상함 때문이기도 하다. 이간의 근원적인 절망감은 바로 이것이 있지 않은가? ‘죽음’이라는 것에대해 처음 깨달았던 어렸을 때를 기억한다. 어린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깊은 절망감이었다. 모든 것으로 부터의 단절, 어두운 세상, 끝으로만 여겨졌던 죽음으로 인해 지금의 인생 또한 얼마나 덧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지고 마는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새롭게 안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도 소망을 얻게 되지만 죽음으로 인한 허무감과 절망감은 신성을 찾고 숭배하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
2. 내가보기에 선별된 신들 가운데서도 어떤 신들은 더 중요하고 출중한 임무에 선발된다.p707
수많은 신들 가운데에서도 차출 되는 신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신들이 가치없는 것이었냐 하면 또 그것은 아니었다. 스마트 폰을 쓸 때 가장 손이 많은 어플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될까? 우리가 핸드폰에 쓸떼없이 받아놓은 수많은 어플들 처럼- 언제 쓸지 모르기 때문에 - 로마인들에게 언제 사용할지모르는 너무나 많은 신들이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3. 그런데 그 자리에는 월경을 보살피는 메나 여신도 자리하는데, 이 여신은 유피테르의 딸이지만 비천한 신분이다. p709
성경을 읽으면서도 궁금한 부분이었는데, 왜 월경에 대해서 부정하다거나 비천하다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있었을까? 월경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노폐물의 배출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사실 월경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신묘막측한 인간의 신진대사가 아니던가?왜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야 할까? 여자가 임신하여 해산하는 것이 일종의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리고 월경은 그러한 것의 일부이기 때문에?
4. 이 신들로 말하면 지독히 비천하면서도, 고귀하고 선별된 신들보다 훨씬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생명과 감각이 없다면 여자의 자궁 속에 깃들어 있는 것도 보잘 것 없는 진흙이나 먼지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p709
인간에게 생명과 감각을 부여하는 일을 왜 비천하다고 여겼을까? 로마인들은 정작 중요한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못했다. 세속적인 마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세기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생기를 인간에게 불어넣은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생기를 불어넣은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러한 인간 창조의 과정에 중요한 부분을 비천한 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5. 오성과 이성을 가진 존재들은 오성과 이성이 없이 짐승처럼 살고 느끼는 자들보다 월등하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감각을 갖춘 존재들은 생명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는 것들보다 당연히 낫다. p711
로마인들이 신들의 서열을 정하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의 가치가 어디에 있었고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수 있다. 그러나 오성과 이성의 한계를 알지 못했고, 오성과 이성이 없는 짐승들이 인간들보다 더 나은 본능과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생명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는 것들- 예술품, 음악, 등등..-을 무조건 하등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
6. 이 여신은 선별된 신들 가운데 속하지 않는데, 이것을 보면 좋은 머리보다도 더 좋은 무엇인가가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잇다는 말처럼 들린다. p713
로마인들은 좋은 머리에도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에 많은 가치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좋은 머리를 주는 신을 선별하지 않았을까? 왜 이 신은 자리경쟁에서 탈락한 것일까? 인간의 내면적인 가치보다 외면적인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더 그러지 않았을까? 훌륭한 지성이 선망의 대상일 지라도 딱히 구할 필요성에 대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7. 마르스와 우르쿠스, 곧 죽음을 만들어내는 자와 죽음을 거두어들이는 자한테는 자리를 내주면서 p715
반면,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죽음에 대한 많은 두려움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세적 이익과 쾌락을 좇으면서도 이들 마음의 한 켠에 있었던 짐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기에 이렇듯 선뜻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이 이토록 많은 신들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이유가 이것에 있지 않은가? 그렇게 따진다면 마르스와 우르쿠스가 모든 신들의 부모가 될수도 있을 것이다.
8. 세상에서 관장하는 일이 고귀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이유에서 그 신들을 선별하고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p715
백성들에게 높은 인지도가 있다기 보다는 말은 그만큼 백성들의 마음을 샀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세상의 고귀한 일들이 무엇인지 인간들이 알았더라면 이러한 정령들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테지만 선별된 신들의 속성에 인간의 근본적 불안함과 두려움이 반영되어 있었을 것 같다. 그들은 인간의 두려움고 불안함의 실체였을지도 모른다.
9. 우리가 알기로 신들이 선별된 것은 탁월한 덕성 때문도 아니고 사리에 맞는 행복 때문도 아니며...오로지 포르투나의 무턱대고 휘두르는 권세 덕분이기 때문이다. p715
어거스틴의 재치있는 서술에 또한 번 웃음이 난다. 행운을 아무렇게나 뿌리고 다니는 포르투나 여신 덕분에 신들이 눈먼 행운을 받아서 중요한 자리를 꿰찬 것은 아닐까. 정말 행복이 눈이 멀 수 있다면, 그래서 눈먼 행복이 있다면 이런 엉뚱한 신들에게나 갔을 것이 뻔하다. 포르투나의 무턱대고 휘두르는 권세가 많은 신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10. 그 신들이 영예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명예를 받기 위해 선별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비천한 하급 신들은 비천함 그 자체로 인해 치욕으로 창피당하는 일이 없게 보호받은 셈이다. p717
오히려 비천한 취급을 당하는 신들은 그 치욕이 덜했다. 중요한 자리에 선별되었던 신들은 오히려 그것이 불명예였기 때문이다. 선별된 신들은 인간의 패망에 선봉에 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현상을 역으로 보면서, 진리에 대해 상고하게 하는 어거스틴의 통찰력이 놀랍다. 뒤집힌 세상을 다시 뒤집어 보면 진짜 고귀한 가치가 무엇이고 비천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같다.
11. 세계 역시 정신과 물체로 구성되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신에 의거해서 신이라고 일컬어 진다고 했다. p7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물리적인 것, 물체들에게도 신성을 부여한 것은 모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계의 정신적인 부분에만 신격을 부여한 것이라면 남녀의 비밀스러운 일에 관여하는 신은 무엇이고, 돌쩌귀나 구리나 은, 금에 깃들어 있는 정령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게 보여지는 것은 물리적인 부분 뿐인데, 정신적인 부분은 어디에 있다는 이야기란 말인가? 돌쩌귀의 정신은 무엇이고, 은, 금의 정신은 무엇일까?
12. 개시한 일은 온갖 염려로 가득한 법이며, 무엇을 시작한 사람은 끝을 간절히 희구하고 지향하고 기대하고 염원하게 마련이므로, 끝을 향해 끌어가는 동안은, 곧 시작한 일이 끝마쳐지기 전에는 그 일을 두고 기뻐하지 못한다. p727
지금 나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학기에 개시한 일들로 인해 나는 온갖 염려로 가득차 있으며, 신국론 과제를 시작한 지금 나는 끝을 간절히 희구하고 지향하고 기대하고 염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끝을 향해가는 지금, 나는 빙고!!를 외칠때까지 이 과제를 두고 기뻐하지 못한다....
13. 세상이 입속에 있다는 식의 이런 얘기가 영혼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영원한 생명에 무슨 보탬이 되는가?p729
로마인들은 세상이 곧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을 어떤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러나 세상, 또 그것의 형상의 개연성이 성립된다고 해서 세상 자체가 곧 신이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과는 관련되어 있지 않고 더욱이 영원한 생명에 보탬이 되는 일도 아니다. 그럴듯한 비유와 설명은 사람을 현혹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야 할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14. 물고기에게는 입구멍과 목구멍 말고도 오른쪽이 아가미와 왼쪽 아가미가 열려져 있으니까 네 문이 열려 있는 셈이다. p731
재치쟁이 어거스틴. 예수님도 탁월한 비유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가르치셨다. 물론 어거스틴이 서술하는 이러한 글이 그분의 비유와 같은 경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또 예수님은 나름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비유라는 방법을 사용하신 거겠지만 예수님도 이러한 재치가 있는 분이셨을 것 같다. 적절한 비유를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센스가 있는 분이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5. 하지만 “나는 문이다”라고 선언하는 진리의 말씀을 경청하는 영혼이 아니라면, 그 많은 문으로 들어오는 허황한 얘기들을 피할 길 없을 것이다. p731
어거스틴은 글의 말미에 흐름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서술한다. 신국론이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로마사회에 대해 그가 선지적인 목적을 가지고 서술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로마시민들이 지향해야할 궁극적인 지향점을 알려주는 것 또한 목적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알려준 뒤,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서술의 순서가 바람직하다고 느껴졌다.
16. 그런데도 이런 이름을 유피테르에게 부여한 것은 틀림없이 탐욕이었다. p741
지금도 그렇듯 맘모니즘은 어디서나 경배 받고 최고의 가치로 일컬어진다. 로마시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인간에게 소유에 대한 개념이 생겨난 뒤부터 물질 만능주의는 세월이 지나도 쇠락하지 않는 강력한 가치이다. 신들이 어떤 이름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면 로마시민들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아는 단서가 될 것이다. 로마인들은 내적인, 또 외적인 부유함보다 ‘돈’이라는 수단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여 유피테르에게 위임시켰다. 로마시민들의 마음은 우유뷰단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겉치레일지라도 내적인 부요함에 대해 언급할 수도 있지만, 이때에 이 외적,내적 부요함은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17. 그리고 우리는 참 하느님도 부유하다는 말을 하는데 하느님은 돈 때문이 아니라, 전능함 때문에 부유한 것이다. p741
하나님의 전능함이 그를 부유하게 만들었다면, 그에게 모든 것이 속해있다 라는 말과 같은 것일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의 전능함은 모든 것을 만들고, 만들어 지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의 부요함도 만들었고, 물질의 부요함도 만들었다. 하나님이 오직 돈 때문에 부유하다면 키다리아저씨와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18. 그리고 메르쿠리우스가 곧 언어 능력 자체라면, 저 사람들이 자인하는 말에 비추어 보더라도, 신은 분명 아니다. p745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는 일이 복잡하기도하고 신비로운 작용이기 때문에 언어능력을 신격화 한것일까? 그렇다면 그 신은 선한가 악한가?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신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시키기 까지 하는데 어거스틴은 이것은 정령도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사람이 하는 말에는 어느정도 책임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러한 책임에 대한 회피의 구실로 이러한 신을 만들어낸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 그렇다면 제발 전쟁이 없어야 하듯이 저따위 신도 없었으면 좋겠다. 있어 보았자 거짓으로 신 행세를 하는 셈이다. p745
전쟁은 곧 형제살해라고 일컫는 어거스틴은 군신 마르스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사람들간의 싸움이나 더 나아가 국가간의 전쟁에는 분명 사악한 정령들의 술수가 작용하겠지만, 모든 전쟁이 없어야 하는 것일까? 수업시간에 토론했던 ‘정의로운 전쟁’이 생각났다. 더 나아가 ‘정복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 성경속에서 하나님은 정복을 허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20. 그러다 보니 그들을 선별된 신들 모두가 바로 이 세계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신들한테는 세상 전체가, 어떤 신들한테는 세상의 일부가 들어 있다고 여겼다. p751
차라리 신을 하나로 통일시켰다면 모르겠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그의 성품이 그의 피조물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래서 세상의 일부를 보아도 하나님이 보이고, 느껴지고 세상 전체를 보았을 때에도 그의 섭리가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에 충만한 것은 유피테르가 아니라 그분의 섭리인 것 같다.
21. 그냥 내가 바라보는 관점을 피력하겠다. 인간의 몫은 그저 이러저런 의견을 품는 것이고 내용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p753
바로의 확실한 견해인 것 같다. 최종적 판단을 자신의 선에서 보류하고 신에게 맡김으로써 판단을 회피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게 답이 아닐까. 진리를 알 수 없다면 이런 저런 의견을 다양하게 품지만 결국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 않을까. 내용을 확실하게 알고있는 그 신은 내용을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런저런 의견을 품는 것도 인간의 몫이지만 선택하는 것 또한 인간의 몫이다.
22. 그 이유는 모든 종자 가운데 최상은 인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잔인하고 허황한 얘기를 두고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p757
어떻게 사람의 신체나, 더 나아가서 목숨이 제물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흡족하게 받는 신은 인간의 안녕에 관심조차 있는 신일까? 요즘 사람들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벌하는 신이 어떻게 신이냐’라는 말도 곧잘 하던데, 왜 이때의 로마사람들은 그러지 못했을까? 아이들부터 성인까지 많은 인간들이 제단에 받쳐져 희생되어 왔을 것이다. 자식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입힌 것이니 어거스틴 처럼 나도 양쪽 모두 희생자라고 하겠다.
23. 종자의 방출이 잘 이루어지도록 이런 식으로 리베르 신을 무마해야 했다. p761
인간의 번성 또한 신들의 기분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신을 달래는 방법이 너무나도 저속하여 어처구니가 없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하늘의 신이 인간이 자신을 위해 땅에서 음란한 행위들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종자(?)를 방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비는 농사의 중요한 조건이었다. 먹고사는 문제나, 자손을 번성시키는 극히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었던 이러한 신들은 정말 얼마나 사악한가.
24. 당신네 현명한 조상들이 이것을 마련해 주었을 텐데 그 이유는 되도록 많은 신들이 당신들을 다스리게 하려는 뜻보다는 이따위 미신과 허위를 즐기는 악령들이 되도록 수가 많아져서 당신들을 손아귀에 쥐게 하려는 뜻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p763
조상들이 자손들을 악령들에게 넘겨주었다는 말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진리를 몰랐던 조상들의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현명함이 바로 이것이지 않았을까? 더 많은 신들의노예가 됨으로 일시적인 평안함을 누리는 것. 서투른 어른들이 그 다음 세대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이나 꼼수를 가르치고 전수하는 것 처럼 말이다.
25. 세계에는 돌과 흙이 있는데 보다시피 감관이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은 신의 뼈요 신의 손발톱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p765
너무나 억지스러운 연결이 아닐 수 없다. 둘의 공통점은 감관이 없다는 것 하나. 그렇다면한낱 신의 손발톱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잉태된단 말인가? 신의 뼈나 손발톱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이루는 요소들의 근본이라는 말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들이 흙이나 돌을, 그러니까 자연의 일부를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데 일조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이러한 거짓말이라도 필요할 지경이다.
26. 곧 대지라는 하나의 전체가 두 부분으로 또는 두 신으로 분할되고 말았으며 따라서 정작 텔루스 여신이라는 제 삼자는 과연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디 존재하는지 알길이 없다. p769
로마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신들이 있었던 까닭에 그들의 입지에 대한 배려는 너무 부족했다. 이처럼 비 체계적인 신들의 서열과 체계는 신들의 존재여부마저 희미하게 만든다. 진화를 거듭하면서 예전 것은 없어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포켓몬스터보다 신들은 못한 존재인것 같다. 영역들이 분화되면서 더 늘어만 가는 신들의 숫자는 오히려 그들이 존재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27. 그래서 여신 하나 안에 여러 사물들이 존재하니까 따라서 다수의 여신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마음 내키는 대로 쪼개고, 붙이고, 더하고, 곱하고 다시 합치도록 내버려 두라! p773
신들에 대한 설명은 코에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 식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었다.
세상에 불가능한 신의 존재방식은 없었다. 이성적으로 접근해 보았을 때 너무나 터무니 없어서 지적인 동의조차 구해질 수 없는 신들의 세계가 있다고 믿고, 목숨을 바치고 신체의 일부를 바치고, 또 수치스러운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로마인들에게 어거스틴은 분노하고 있는 것 같다.
28. 땅이 여신이 아니었다 해도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라도 비옥해졌을 테고, 또 사람이 자기 손으로 불임이 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p775
땅에서 열매 맺는 것은 땅이 땅인 것 그 자체로 충분했다. 창조주가 인간들에게 원했던 것은 불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땀과 수고였다. 인간이 인간 그 자체인 것으로 충분했다. 창조주가 원한 것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이나 제사가 아닌, 그들과 맺는 ‘관계’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창조주는 땅을 통해, 그러한 것을 가르치고자 했을 것이고, 인간을 통해 그러한 것을 누리고자 했을 것이다.
29. 그래서 바로는 지극히 박식한 사람으로서 이 일화를 몰랐을리 없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했을 것이고, 그런 행사에 분개하고서 아예 언급조차 하기 싫어했던가 보다. p777
당대에 지극히 박식했던 사람은 어처구니 없는 거세사건에 대하여 외면하고 함구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모양이다. 몇몇 현자들은 그 일에 대해 찬사를 보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니 그럴만도 한 것 같다. 당대의 현자라면 이 잔인하고 안타까운 일에 대하여 꽃이지는 것에 노력하는 정성으로 조금더 이 시대, 이 사회에서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올바른 가치가 무엇인지 상고해보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30. 그러니까 지금도 경건한 삶을 영위하려는 의사가 없는 자라면 그런 제사나 드리면서 영원한 삶을 찾도록 내버려 두라!...악령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물리치는 참다운 종교를 알도록 하라! p807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함이 누구에게나 있지만, 진리에 대한 갈망함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사실은 영원한 삶의 갈망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어거스틴의 마지막 외침에 방점이 찍힌다. ‘알도록 하라!’ 덮어놓고 믿으라! 하는 것이 아닌, 지금 당신네들이 믿는 그 알수도, 이해할수도 없는 종교보다, 알기쉬운 이 도(道)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진리는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