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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년 을사(1725) 4월 26일(계사) 비가 옴
01-04-26[28] 노수신(盧守愼) 등 일곱 현신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해 줄 것과 조태채(趙泰采)를 배향해 줄 것을 청하는 진도(珍島) 유학 박제현(朴齊賢) 등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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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珍島) 유학(幼學) 박제현(朴齊賢)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사는 군은 바닷가 구석에 치우쳐 있고 서울에서 1000여 리나 떨어져 있으며, 교룡과 악어와 함께 거주하고 소라와 방합(蚌蛤)과 같이 지냅니다. 임금의 교화와 멀리 동떨어져 있어 백성은 무지하며, 대인군자의 자취는 이곳에 이를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경사대부(卿士大夫) 가운데 불행히도 유배된 자들이 왕왕 이어졌는데, 지역이 멀고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또한 당세(當世)에 깨끗한 명성과 곧은 절개로 우뚝하게 뛰어나서 가장 참혹하게 화를 입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섬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남쪽 지역에서 신들의 고장만큼 궁벽한 곳이 없으나 현인의 자취 또한 신들의 고장만큼 많은 곳도 없으니, 경내의 백성과 선비들이 다행히도 그 유풍을 듣고 그 덕을 봄으로써 감동하고 분발하여 떨쳐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신들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백성이지만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를 깨달아 금수와 이적(夷狄)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실로 여기에 힘입었습니다. 그러니 그 흠앙하고 애모하여 영원토록 잊지 못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살펴보니, 고(故) 상신 문간공(文簡公) 노수신(盧守愼)은 심오한 학문과 맑은 절조로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권간(權奸)의 뜻을 거슬러 19년 동안 유배되었으나 기개와 절조를 더욱 가다듬었습니다. 고 상신 문정공(文貞公) 이경여(李敬輿)는 언론과 풍절(風節)이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는데, 흔들림 없이 정상적인 도리를 지키다가 여러 해 동안 천극(栫棘)되었으며, 조정에 돌아와서는 나라의 큰 보필지신(輔弼之臣)이 되었습니다. 고 상신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은 문장과 학식이 세상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사악한 자를 배척하고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나 끝내 참혹한 화를 당하였습니다. 고 참판 이민적(李敏迪)은 이경여의 아들로 아버지의 기풍을 많이 지니고 있었으며,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 와서 섬의 백성을 가르쳐 사람들이 많이 교화되었습니다.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에 항소(抗疏)하였던 고 부제학 정홍익(鄭弘翼), 대각에서 명성을 떨친 고 집의 신명규(申命圭), 명의(名義)를 힘껏 부식하였던 고 판서 남이성(南二星)은 모두 고충(孤忠)과 직도(直道)로 인하여 이 군에 유배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아, 저 일곱 현신과 신들의 고장과의 관계는 한유(韓愈)와 조주(潮州)의 관계나 소식(蘇軾)과 해남(海南)의 관계와 같으니, 미개한 풍속을 교화하여 예의의 고장으로 만든 것은 모두 그들의 공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백성과 선비들이 서로 더불어 사우(祠宇)를 창립하여 제사 지낸 지 또한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다만 먼 지방의 사정을 전하께 아뢸 방도가 없어 서원의 편액(扁額)을 아직 하사받지 못하여 우뚝하게 서 있는 몇 칸 건물이 매몰되어 빛을 잃었으니, 보고 듣는 이들을 고무하고 한 지방 사람들을 권면하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지금 충현(忠賢)한 이와 의열(義烈)한 이를 제사하는 사우가 팔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세상의 교화와 가장 관계되는 자들에게는 모두 편액을 하사하여 표창하였습니다. 일곱 현신과 같은 자들은 그들이 끼친 풍교(風敎)와 남긴 업적이 사전(祀典)에 두기에 적합한데, 현재는 쓸쓸하게 사사로이 향사하여 총사(叢祠)와 다를 것이 없으니 신들은 슬프게 생각합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고 상신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는 큰 기국(器局)과 원대한 도량으로 일찍이 성고(聖考)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며, 신축년(1721, 경종1)에 이르러서는 위기를 무릅쓰고 대책(大策)을 도와 정하였습니다. 비록 이 때문에 흉악한 무리에게 무함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으나, 오늘날 종묘사직이 안정되고 동방의 해와 달이 예전처럼 밝게 비출 수 있는 것은 실로 그의 공에 힘입었으니, 그 순결한 충정과 큰 절의는 전대 현인에 뒤따라 배향하여 백세토록 풍교를 수립할 만합니다. 그가 처음 유배된 곳은 실로 신들의 고장이었으며, 끝내 이곳에서 후명(後命)을 받았습니다. 신들은 그가 원통한 눈물을 흘리며 부른 선조(先朝)의 세 늙은 상신에 대한 비가(悲歌) 중에 ‘밤에 한 외로운 신하가’라는 구절을 읊조릴 때마다 피눈물을 닦으며 서로 바라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그의 충정(忠貞)을 살피고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제사를 지내 주고 시호를 추증하여 슬픔과 영광이 갖추 이르렀으니, 일국의 부로(父老)와 서민이라면 누군들 충신을 기리고 절의를 숭상하는 우리 전하의 성대한 뜻을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신들의 군에서도 응당 일곱 현신과 함께 동일한 사우에서 향사하여 한 지방 사람들의 존숭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기탁해야 합니다.
대개 선현의 족적이 이른 곳이라면 한때 지팡이를 짚고 유람했던 곳이라도 오히려 서원을 세워 향사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연잎으로 옷을 입고 난초로 띠를 두르고 계시던 이곳에 푸른 단풍 흩날리고 물색(物色)이 여전하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 또한 틀림없이 그 사이에서 왕래하리라 생각됩니다. 이 지방에서 영원토록 변함없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찌 사림의 공의(公議)가 아니겠으며, 국가의 성대한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들은 천 리 길을 발을 싸매고 달려와서 대궐 밖에서 한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들의 청을 굽어살펴 받아들여 고 상신 조태채를 일곱 현신의 원우에 배향하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시고, 이어 유사에게 명하여 은혜로운 편액을 하사하도록 하여 충절을 지닌 신하들로 하여금 한 가지가 모자란다고 탄식하지 않도록 하고 바닷가의 유생들로 하여금 실망하여 한탄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한 지방이 풍화(風化)를 격려하는 장소로 삼도록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충신을 존경하는 뜻이 매우 가상하다. 해당 조(曹)로 하여금 속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주-D001] 한유(韓愈)와 …… 관계 : 당(唐)나라의 한유는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지어 불교를 비판하였다가 조주(潮州)로 폄적(貶謫)되었으며,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은 철종(哲宗) 대에 신법당(新法黨)의 탄핵을 받고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는데, 각각 그곳의 백성을 교화하였다. 《舊唐書 卷160 韓愈列傳》 《宋史 卷338 蘇軾列傳》[주-D002] 연잎으로 …… 이곳 :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강리와 벽지를 몸에 두르고, 가을 난초 꿰어서 허리에 차네……마름과 연잎 재단하여 저고리 만들고, 연꽃을 모아서 아래옷을 만드네.〔扈江離與辟芷兮 紉秋蘭以爲佩……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노론 사대신 중 한 사람인 조태채(趙泰采)가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연루되어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있었던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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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0년 갑인(1734) 2월 19일(을축) 아침에는 비가 오고 해 질 녘에는 맑음
10-02-19[27] 엄한 교지를 받았으므로 직명을 삭탈해 줄 것을 청하는 황해 감사 유척기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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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감사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얼마 전에 이달 4일에 내리신 교지를 삼가 받들었는데 신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비국의 공문을 삼가 보니 성상의 교지를 공손히 따라서 신이 올라오도록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명을 듣고 두렵고 놀라 정신이 모두 나가서 날이 가도 오히려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지극히 용렬하여 자리를 채울 수 없는 상황인 것은 이미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마치 세상 사람이 사양을 숭상하는 것을 본받는 것처럼 감히 외람되이 다시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어리석고 미련한 고집은 혼미하여 바뀔 줄 모릅니다. 다만 처지가 위태롭고 병이 고질이 된 몸으로 신하의 분수가 엄하고 의리가 중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 갈수록 스스로 중한 주벌을 불렀습니다. 따라서 참으로 유사(有司)로 하여금 국법을 바로잡고 신의 죄를 논하게 한다면 악어가 우글거리는 바다에 던지거나 산속에 가두더라도 죄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 부모와 같은 성상께 곡진히 살피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특별히 입어 마침내 부절과 인끈을 관장하여 봉록을 누리게 하셨으니 비록 신이 자신을 위해 도모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어미와 서로 돌보며 성상의 은택을 구가하며 죄인을 총신으로 삼으신 것에 감사하면서 황공한 마음을 뼛속에 새겼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자리를 옮겨 제수하시는 은혜를 내려 다시 일을 맡겨 부리는 데 쓸 수 있는 자인양 하셨습니다. 아, 옛날부터 신하가 어찌 이런 은혜를 입을 수 있었겠습니까. 신하의 도리로 볼 때 은혜를 품고 죄를 두려워하며 달려가 명을 받들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이 사적으로 몹시 한스러운 것은 일찌감치 신으로 하여금 성의를 쌓는 데 힘쓰게 하여 신의 마음을 다 드러내 아뢴 다음 한번 밝은 명을 듣게 하셨다면 스스로 얼마간 고집을 부리지 않고도 아마도 안목 깊은 성상께서 살펴 주시는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달려가 명을 받드는 것을 공손함으로 여겨서 명을 내리시면 바로 받들어 거의 신의 분수를 조금이나마 수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머뭇거리며 가슴에 담아 두고 있다 일이 어그러졌으니 어느 것이든 신의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지난날 노여워서 내린 하교는 아니었으나 진실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 데다 최후의 엄한 교지로 말하자면 더욱이 신하가 감히 들을 것이 아니었으니 신하가 되어서 이런 이름을 듣고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이 한번 떠올려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몸이 새파랗게 질리고 떨려 홀연히 살고 싶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거의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아, 신이 벼슬에 나와 나랏일에 힘쓴 지 지금 이미 21년이 되었습니다. 세 조정에서 은혜를 받은 것이 하늘처럼 끝이 없었으니 의리와 충성을 다 바치고자 하는 것이 한 조각 단심(丹心)입니다. 그런데 정성은 부족하고 재주는 거칠어서 위로는 소회가 있는 것을 다 아뢰고 의리에 맞게 진퇴할 수 없었으며 아래로는 힘을 내어 반열에 나아가 힘을 바칠 수 없어 결국 용납하기 어려운 죄에 빠져 마침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진실로 그 연유를 따지자면 재앙은 모두 스스로 만든 것이니, 신이 비록 죽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장차 어떻게 한두 가지라도 약간이나마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근처의 편안한 지역에 보임되는 것은 식견이 있는 자라면 또한 국가의 형정(刑政)이 잘못된 것을 의론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또 더구나 이보다 더하여 방면(方面)의 막중한 직임을 제수하고 승지의 책임을 맡기셨으니 참으로 사방의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상벌이 합당한 뒤에 사람들의 마음이 복종하는데 지금 비록 조정에서 미천한 신을 대우하는 것을 보더라도 공론을 지키는 자가 과연 바른 사람을 들어 쓰고 부정한 사람을 쫓아내는 일에 마땅함을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참으로 이런 것이 두렵습니다. 이모저모 생각해 보아도 아무래도 감히 외람되이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재주와 분수를 이미 시험하여 공효가 없었던 자리라는 것과 질병이 한층 무리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 같은 경우는 또한 낱낱이 아뢰어 성상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해와 달처럼 밝은 성상께서 굽어살펴 헤아리신다면 반드시 신의 말이 마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불쌍히 여겨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신이 장부 정리를 마치기 전에 병세가 더 악화되어 얼마 전에 비로소 돌아와 사차(私次)에 누워 감히 위태롭고 절박한 간절한 마음을 아뢰니, 말이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감히 조금도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은 성상께서는 신이 새로 제수받은 직명을 삭탈하도록 명하시고 이어서 신이 지은 죄를 감단(勘斷)하도록 명하여 정사하는 도리를 밝히고 신하들을 면려하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나간 일은 굳이 인혐할 것이 없는데 이와 같이 지나치게 사양하니 신하로서의 도리로 볼 때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가서 공경히 직임을 행하라.”
하였다.
[주-D001] 엄한 교지 : 1732년(영조8) 12월 13일에 왕이 특지를 내려 좌윤 유척기를 출척(黜斥)시켜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누차 소명을 어기고 사진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英祖實錄 8年 12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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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3년 정사(1737) 8월 7일(계해) 아침에는 맑고 저녁에는 비가 옴
13-08-07[26]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므로 삭직해 주기를 청하는 경상 감사 유척기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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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감사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상소를 올려 급히 사직을 청한지 이미 두세 번에 이르렀습니다. 어찌 신이 그만둘 수 있는데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명을 어긴 죄가 쌓여 악어가 들끓는 바닷가나 산골 유배지에 있어야 마땅한데, 성은이 하늘처럼 커서 외직에 보임되는 가벼운 벌을 받았으니, 신의 입장에서는 견책이 아니라 영예입니다. 신의 얕은 재주와 고질병으로 본디 어찌 번다한 사무를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친의 나이가 많고 집안이 가난하니, 큰 고을에서 편히 봉양하는 것은 옛사람이 부러워하며 말하던 것입니다. 신이 또 어찌 감히 고생스럽게 두세 번에 이르도록 누차 번거롭게 호소하며 그칠 줄 몰라 스스로 분의에 어둡고 의리를 멸시하는 죄를 저지르겠습니까. 참으로 염치의 중대한 한계가 한번이라도 무너지면 사람은 사람다울 수 없고 나라는 나라다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관말직이라도 한번 대간의 탄핵을 받으면 그 말이 마땅한지 여부와 그 일의 허실을 따지지 않고 감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공론을 엄격히 하고 염치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본디 형편없으나 직질이 상경(上卿)에 올랐으며 관찰사의 직임을 맡고 있는데, 파직을 청하는 엄한 탄핵을 받고서도 스스로 처신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대로 눌러앉는다면, 사람들이 신을 보고 장차 무어라 하겠습니까. 이 또한 당세에 부끄럽고 조정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과하는 정사로 말하자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지금 탄핵을 받고 떠나야 하는 몸으로 감히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붓을 적시며 출척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이야 본디 말할 겨를도 없고, 그 포폄을 받은 관할 지역의 수령들이 필시 눈웃음을 짓고 몹시 놀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반복하여 헤아려도 감히 명을 받들 생각을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지금 한재(旱災)가 극심하여 흉년이 들 것으로 이미 판가름 났으니, 반드시 속히 변통하여 다른 사람을 다시 임명한 뒤에야 바야흐로 진정(賑政)을 계획하여 곤경에 처한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상소를 도로 내려 주라는 하교가 또 꿈에도 생각지 않게 나왔기에 송구하고 답답하였는데, 수십 일이 지나도록 아직도 처분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묵묵히 엎드려 있으면서 그저 직무를 방기한 죄를 보태느니, 차라리 다시 사직을 청하고 엄한 벌을 받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만번 죽기를 무릅쓰고 지엄한 성상께 급히 글을 보내어 다급히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은 성상께서는 먼저 신의 직명을 삭직하라고 명하시고, 이어서 신이 번거롭게 해 드린 죄를 감률하신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버티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사직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17년 경진 > 5월 9일 > 최종정보
고종 17년 경진(1880) 5월 9일(병자) 맑음
17-05-09[32] 탄핵을 받고 처벌 받았으므로 근시의 직함을 체직해 주기를 청하는 행 우부승지 홍훈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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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우부승지 홍훈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전후로 지은 죄는 비록 악어가 출몰하는 바닷가나 궁벽한 곳으로 귀양가 있으면서 병들어 죽더라도 오히려 그 만분의 일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가 죄를 용서하라는 명령을 즉시 내리시니, 상설(霜雪) 같은 엄한 꾸지람과 우로(雨露) 같은 따뜻한 교훈도 모두 성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에서 나왔습니다. 신은 만번 죽을 종적을 가지고도 이렇게 다시 살려주시는 은혜를 입으니, 극도로 감격하여 눈물이 나오다가 피눈물이 계속 솟구칩니다. 옛사람은 이런 경우를 당하면 반드시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배를 갈라 자결하여 스스로 사죄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저는 나무와 돌 같이 지극히 미련한데도 요행히 성상을 다시 보게 되어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하기를 마치 의(義)의 단서가 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모르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으로 신에게 죄를 준다면 이미 용서받은 뒤라 더욱 클 것입니다. 신은 석방되어 향리(鄕里)로 돌아온 뒤로 자다가도 풍랑을 만난 듯 깜짝 놀라 꿈에서 깨고, 거처할 때에는 외뿔소와 돼지처럼 우리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부끄럽고 한스러워 오랫동안 허물과 후회를 안고 있습니다. 앞서의 허물을 돌이켜 세어 볼 때, 아직도 어찌 감히 예전에 하던 대로 하여 머뭇거리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계획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본래 어리석고 거칠며 재주가 없고 졸렬하여 백에 하나도 비슷한 것이 없다는 것을 성상께서 굽어 통촉하고 계시며 조정의 동료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우리 성상의 비호와 발탁을 입어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심지어 중비(中批)로 선발하셔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성상의 은혜에 감격하여 보답하고자 오직 한 번 죽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주는 모자라고 책임은 커서 밤낮으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딱딱한 것도 뱉지 않고 험한 것을 만나도 그치지 않았으나, 온갖 일을 모두 다 그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뭇사람들이 공격하고 험담하여 소매 속에 넣고 다니던 탄핵하는 상소가 비로소 나왔고, 암행 어사의 탄핵이 결국 나오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다는 재앙과 탐욕스럽게 재물을 삼켰다는 잔학성으로 점점 얽어매어 마침내 번복할 수 없는 죄안(罪案)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거짓인지 사실인지에 대해서 신은 장황하게 변명하고 따져서 거듭 체면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한(漢) 나라 법 삼장(三章) 중에 살인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하였고, 주(周) 나라 법전의 육계(六計) 가운데 장오죄(贓汚罪)는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도량이 너그럽게 포용하여 가볍게 귀양보냈다가 즉시 사면하셨으니, 매양 10대 동안 죄를 용서해 준다는 은혜로운 하유를 읽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목이 메이고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국가의 은혜를 저버리고 조상의 명예를 더럽힌 불충(不忠) 불효(不孝)한 자는 죽느니만 못합니다.
그런데 경사(慶事)를 널리 함께 하고자 하여 거두어 서용하시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해 주셔서 주려(周廬)와 후원(喉院)에 제수하는 교지가 연이어 내리니, 저의 죄는 태만하고 불경한 데에서 더욱 깊어지고, 성상의 은혜는 곡진하게 용서하시는 데에서 더욱 중해집니다. 신이 비록 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낯 두껍게 반열에 공손히 빨리 걸어 나가더라도, 사람들은 필시 손가락질하며 ‘저 사람이 남의 목숨을 해치고 장오죄를 범한 자다.’고 하면서, 너나없이 얼굴을 돌리고 비웃으며 코를 막으면서 지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벼슬하여 한번 그르치자 모든 일이 다 망쳐졌다는 것이니, 감히 우군(右軍)이 묘소에 맹세한 것을 본받지 못하고, 중랑(中郞)이 거적에 싸여 온 것에 비해 볼 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소패(召牌)가 거듭 내리고 칙유(飭諭)가 거듭 엄중하지만, 신은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곤란한 형편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신에게 천지 부모 같으시니 신을 가엾고 애처롭게 여기셔서 속히 신의 근시(近侍)의 직함을 체직하시고, 이어 신이 명령을 소홀히 한 죄를 다스리소서. 그리고 즉시 선부(選部)로 하여금 영구히 사적(仕籍)에서 깍아버려 더럽고 혼탁한 저로 하여금 맑은 조정의 반열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소서. 눈물을 흘리며 축원하고 정성을 다하여 간절히 비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난 일을 끌어다 말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여러 차례 칙교가 내렸는데도 이와 같이 자기 주장을 고집하며 명을 어기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분의며 도리인가. 즉시 들어와서 숙명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D001] 삼장(三章) : 삼장은 세 가지 법 조문이다. 한 나라 고조가 함양(咸陽)에 들어 갔을 때 그곳 부로(父老)들과 법 세 조문을 약속하였는데,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처벌한다는 내용이다.[주-D002] 육계(六計) : 육계는 관리를 고찰하는 여섯 항목이다. 그 내용은 염선(廉善), 염능(廉能), 염경(廉敬), 염정(廉正), 염법(廉法), 염변(廉辨)이다. 모두 청렴을 근본으로 하고 그 공과(功過)의 다소를 따졌기 때문에 육계라고 한 것이다. 《周禮 天官 小宰》[주-D003] 우군(右軍)이 …… 맹세한 것 :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우군은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이다. 왕희지는 왕술(王述)과 피차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뒤에 왕술이 검찰(檢察)이 되어 왕희지가 군수로 있던 회계군(會稽郡)에 와서 고의로 트집을 잡자 왕희지가 치욕으로 여기고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직하였다. 부모의 묘(墓) 앞에 가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로 감히 이런 마음을 변치 않겠습니다. 다시 벼슬자리를 탐한다면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자식으로서 자식 노릇을 못한다면 천지가 덮어주고 실어주지 않으며 명교(名敎)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성심으로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합니다.” 하였다. 《晉書 王羲之傳》[주-D004] 중랑(中郞) : 방통(龐統)을 가리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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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집 제13권 / 홍양록 홍양은 홍주의 별칭이다. 무신년(1608, 선조41) 1월부터 기유년(1609, 광해군1) 4월까지이다. 〔洪陽錄 洪陽洪州別名起戊申正月止己酉四月〕
최장군의 사당 병서 〔崔將軍祠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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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이름이 영(瑩)이니, 묘소가 홍주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장군이 죽은 뒤 신령으로 나타나 향리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지금까지 기도하고 제사 지낸다고 한다. 내가 이 시를 지은 지 이틀이 되는 날에 풍채가 매우 장대한 어떤 장부 꿈을 꾸었는데, 그 장부가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시를 보니 매우 기쁘고 매우 기쁘도다. 지난날 적이 물러간 것은 모두 나의 공이다.”라고 하고는 홀연히 떠나갔다. 깨어난 뒤 매우 놀랍고 신기하게 여겼는데, 이는 장군의 신령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아서가 아니겠는가. 다만 적이 물러갔다는 말은 분명하지가 않으니, 본주(本州)에 접때 왜구(倭寇)가 경내를 침범하였다가 곧바로 물러났고, 역적(逆賊)이 홍주성으로 쳐들어왔다가 스스로 패망하였는데, 어쩌면 이를 말하는 것인가. 괴이한 일이다.
최 장군은 진짜 장사이니 / 崔將軍眞壯士
하늘이 동방을 위해 이 땅에 탄생시켰다오 / 天爲吾東生我地
검 한 자루 움켜잡고 뭇 흉적을 도륙했으니 / 手提一劍血群兇
좌로는 홍건적이요 우로는 흑치였다오 / 左馘紅巾右黑齒
압록강의 군대를 되돌릴 길 없었으니 / 旌旗鴨綠無回路
참수를 당할 때도 눈이 외려 노하였다오 / 東市衣冠眼猶怒
적동에 혼령이 돌아오자 사당을 세우니 / 魂歸赤洞鄕祠開
용맹한 기상 생시인양 고향에서 흠향하네 / 猛氣如存食故土
사후에도 인간들에게 화복을 끼치니 / 死後還能禍福人
지금까지도 달려가는 홍양의 백성이로다 / 至今奔走洪陽民
홍양의 백성들 장군에게 제사 지내니 / 洪陽之民祀將軍
금지와 취독이 천년만년 강림하누나 / 金支翠纛千千春
숙연히 신령을 맞이하며 타고를 치니 / 迎神肸蠁伐鼉鼓
거른 술과 통 희생에 촌 무당의 춤이로다 / 釃酒炮牲野巫舞
숲 바람이 불어와 지전 재를 흩날리니 / 林風吹散紙錢灰
대낮에도 왕왕 신령이 비를 뿌리누나 / 白日往往神靈雨
단청은 벗겨져 귀신이 낮에도 울부짖고 / 丹靑剝落鬼晝嘯
철갑은 다 삭아 이끼만 선명하게 피었구나 / 鐵衣蝕盡苔花曉
한때의 공이요 만고의 원통함이니 / 一時之功萬古冤
송악은 창창하고 월산은 의구하도다 / 松岳蒼蒼月山老
[주-D001] 최장군(崔將軍) : 최영(崔瑩, 1316~1388)으로, 본관은 창원(昌原),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강직 용맹하고 청렴하였으며, 일평생 왜구를 토벌하는 데 수많은 공을 세웠다. 1388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요동(遼東)을 정벌하려 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는 바람에 요동 정벌이 좌절되었으며, 이성계에게 잡혀 유배되었다가 끝내 공요죄(攻遼罪)로 몰려 참수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삼봉산(三峯山)에 최영의 사당인 기봉사(奇峰祠)가 있다.[주-D002] 역적(逆賊)이 …… 패망하였는데 : 1596년(선조29)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가리킨다. 1596년(선조29) 왕족(王族)의 서얼 출신인 이몽학이 임진왜란 중에 반란을 일으켜 수천 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홍주성(洪州城)으로 진격하였다가, 홍주 목사 홍가신(洪可臣) 등에 의해 평정되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칼과 창이 빽빽하게 늘어섰다’는 것은 수천 명이나 되는 반란군의 흉험한 기세가 두려워할 만하였다는 말이다. 《북사(北史)》 권33 〈이의심전(李義深傳)〉에 “이의심은 당세에 쓰일만한 재주가 있었으나 심흉이 음험하고 각박하여 당시 사람들이 ‘검극이 빽빽한 이의심〔劍戟森森李義深〕’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검극삼삼(劍戟森森)’은 심흉이 몹시 음험하여 두려워할 만한 것을 비유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주-D003] 홍건적(紅巾賊) : 중국 원(元)나라 말기에 일어난 도적의 무리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썼으므로 홍건적이라 불렸다. 1359년(공민왕8)에 홍건적 4만 명이 고려를 침범하여 서경(西京)을 함락시키자 최영 장군은 여러 장수와 함께 곳곳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1361년 홍건적 1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범하여 개성을 함락시키자 최영 장군은 이듬해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였다.[주-D004] 흑치(黑齒) : 이빨을 검게 물들인 족속으로, 왜구(倭寇)를 가리킨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 “탕곡은 그 위에 부상이 있고 열 개의 해가 그곳에서 목욕을 하는데 흑치국(黑齒國)의 북쪽에 있다.〔湯谷上有扶桑, 十日所浴, 在黑齒北.〕”라고 하였다. 왜구가 고려를 침략한 것은 수없이 많다. 1376년(우왕2)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에게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하자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최영 장군은 노구를 이끌고 출정하기를 자원하여 홍산(鴻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는 등, 일평생 왜구를 토벌하는 데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주-D005] 압록강의 …… 노하였다오 : 이른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뒤 최영 장군이 공요죄(攻遼罪)로 참수를 당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 명(明)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고 북변(北邊)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최영 장군이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였으나, 이성계 등이 명을 어기고 압록강에 위치한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함으로써 요동 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어 이성계의 군대가 개경(開京)에 쳐들어오자 최영 장군은 소수의 군사로 이를 맞아 싸웠으나 막지 못하고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다시 공요죄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수를 당하였다. 원문의 ‘동시의관(東市衣冠)’은 ‘동시조의(東市朝衣)’, ‘조의동시(朝衣東市)’와 같은 말로, 조복(朝服)을 입고 동시에서 참수를 당하였다는 뜻인데, 대신(大臣)이 형장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강직한 신하 조조(鼂錯)가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천자의 권위를 강화시켜 사직(社稷)을 편안케 하고자 법령(法令) 30장(章)을 개정했다가 제후들의 반발과 간신배의 참소로 조복을 입고 동시에서 처형되었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동시’는 한나라 때 사형을 집행하던 곳으로, 형장을 가리킨다. 《史記 卷101 鼂錯列傳》[주-D006] 적동(赤洞) : 충청북도 홍성군 홍북면에 있는 지명으로, 최영 장군의 출생지이다.[주-D007] 금지(金支)와 취독(翠纛) : ‘금지’는 악기(樂器) 위의 황금으로 된 장식이고, ‘취독’은 물총새의 깃으로 장식한 깃발로 신선의 행차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신령으로 강림하는 최영 장군의 행차를 가리켜서 한 말이다. 참고로 당나라 두보(杜甫)의 〈미피행(渼陂行)〉에 “상비와 한녀가 나와 노래하고 춤추니, 금지와 취기의 빛이 있는 듯 없는 듯해라.〔湘妃漢女出歌舞, 金支翠旗光有無.〕”라고 하였다. ‘상비(湘妃)’는 상수(湘水)에서 죽어 상수의 신이 되었다는 순(舜) 임금의 비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고, ‘한녀(漢女)’는 한수(漢水)의 여신이다. 《全唐詩 卷216 渼陂行》[주-D008] 타고(鼉鼓) : 악어가죽으로 만든 북이다.[주-D009] 지전(紙錢) : 종이를 돈 모양으로 오려 만든 것으로, 옛 풍속에 죽은 이를 제사할 때 이것을 태워서 귀신의 노자로 삼아주기도 하고, 무당이 소원을 빌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주-D010] 한때의 …… 의구하도다 :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開京)의 송악산(松岳山)과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는 홍주의 월산(月山)은 옛날과 다름없이 푸르건만, 우뚝한 공을 세운 최영 장군은 간데없고 원통함만 만고에 길이길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월산’은 홍주의 진산(鎭山)으로, 백월산(白月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락(顔樂) 김흔(金訢)은 통신사(通信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적암(適庵) 조신(曹伸)은 압물관(押物官)으로 함께 일본(日本)에 가는데, 대마도(對馬島)를 지나다가 안락이 시를 지어 기록하기를,
바다에 걸터 있으니 별다른 천지요 / 跨海別有天
섬에 둘러서 저절로 부락을 이루었다 / 環島自成聚
백성들은 고기잡이하는 사람이 많고 / 民物多漁人
촌에는 반이 소금 굽는 집이로다 / 村居半鹽戶
아이들도 칼을 차고 / 兒童亦佩刀
부녀도 노를 저을 줄 안다 / 婦女解搖櫓
띠로 덮어서 기와를 대신하고 / 蔭芧代陶瓦
대를 쪼개어 활을 만들었다 / 剖竹作弓弩
대 울타리에는 방게와 게가 시끄럽고 / 竹籬閙螃蟹
돌 밭에는 메벼와 차조가 적도다 / 石田少稉秣
국은 칡뿌리를 삶고 / 羹矐煮葛根
화살통에는 닭의 깃을 꽂았도다 / 矢房揷鷄羽
조갯살로 마른 양식을 보충하고 / 蚌蛤充餱粮
후초와 차는 상품으로 판다 / 椒荈資商賈
쑥뜸을 떠서 병을 고치고 / 炷艾醫疾病
뼈를 태워서 비바람을 점친다 / 灼骨占風雨
시주하여 부처를 받들고 / 檀施奉浮屠
도망한 사람은 사당 집에 모인다 / 浦逃萃祠宇
신을 벗는 것은 어른 공경하는 것을 알고 / 脫履知敬長
자리를 함께 하여 아비를 피하지 않는다 / 同席不避父
상투는 방망이 같으며 이는 칠을 많이 하고 / 椎髻齒多染
손바닥을 합하며 등을 약간 구부린다 / 合掌背微傴
눈을 흘기며 성질이 날쌔고 사나워 / 睚䀝性忿狼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다 / 慄悍輕殺掠
말을 시작하려면 모노노 소리를 내고 / 發語母呶呶
서로 힘을 겨루려면 약약을 좋아한다 / 相力喜躍躍 왜훈(倭訓)에 모노노(母呶呶)는 발어사(發語辭)이고, 약약(躍躍)은 힘을 쓰는 소리이다.
수작하는 것은 다른 나라 말을 웃고 / 酬酢嗤異語
배반은 괴이하게 만든 것에 놀랬다 / 杯盤驚詭作
산에서 따 온 안주는 귤과 유자를 쌓아 놓고 / 山肴堆橘柚
바다에서 잡아온 안주는 상어와 악어를 갈랐도다 / 海錯斫鮫鰐
말과 혀는 새가 지저귀는 것 같고 / 辭舌鳥喃喃
노래하고 부는 것은 개구리가 개굴개굴하는 것 같다 / 歌吹蛙閣閣
몸을 얽혀 흰 칼춤을 추고 / 縈身舞白刃
가면을 쓰고 채색 장막에서 나온다 / 假面出彩幕
주인은 유달리 친절하고 / 主人殊繾綣
나그네는 매우 기뻐하며 농담한다 / 旅容頗懽謔
멀리 교류하는 것이 감자를 씹는 것 같아서 / 遠遊如啖蔗
풍미가 달고 쓴 것이 섞였도다 / 風味雜甛苦
가자 일찍 돌아가자 / 行矣早歸來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내 나라가 아니다 / 信美非吾土
하였다. 적암(適庵)도 ‘일본에 가서 본 것을 쓴다.’는 시에 쓰기를,
다시 객지에서 눈을 부비니 / 更刮客中眼
뜰에 베푼 것이 잡된 희롱이 많다 / 陳庭雜戱多
상에 걸터 앉아서 손 북을 치고 / 踞床拍手鼓
이마를 찌푸리고 목구멍 노래를 짓는다 / 蹙額作喉歌
보검을 몸에 차고서 춤추고 / 寶劍縈身舞
희롱하는 말로 얼굴을 돌려가며 꾸짖는다 / 詼談轉面訶
마음으로 이것이 즐거운 일이고 / 心知是樂事
말 소리가 틀리는 것이 괴이할 것 없다는 것을 안다 / 無怪語音訛
하였고 또 짓기를,
늙은이는 와서 곡조를 부르고 / 老翁來押曲
채색 장막에서는 푸른 옷 입은 아이가 나온다 / 綵幕出靑童
칼을 휘두르기를 적을 치는 것같이 하고 / 奮劍如攻敵
창을 휘두르기를 몸을 호위하는 것같이 한다 / 揮戈似護躬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 傍觀喧雜沓
가면으로 청과 홍을 다툰다 / 假面競靑紅
저녁이 다가도록 남아서 즐겨 웃고 / 竟夕留歡笑
돌아오매 말이 기러기 같다 / 歸來馬若鴻
하였으니, 두 공의 시를 보면 대마도의 풍토를 거의 총괄하여 다하였다.
해외사료총서 12권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Ⅰ(1854~1894) 문서번역본 > 103. РГАВМФ, ф.574, оп.1, д.2, лл.170~170об.
11월 9일 아침 7시. 일요일
5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함대 전체가 아드미랄 치하체프(Адмирал Чихачев) 항을 출발하여 조선해안을 따라 거제도에 있는 아드미랄 알렉세예프(Адмирал Алексеев) 항으로 갔습니다.
오후 4시 25분 아드미랄 알렉세예프 항에 닻을 내렸습니다. 도중에 ‘시부츠’ 호가 우리를 따라와 함대로 합류했습니다. ‘시부츠’ 호는 부산에서 출발했고 함대가 쓸 경비를 가지고 왔습니다. 치하체프부터 알렉세예프 항 까지 이동하는데 9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70마일(122.5베르스타)을 항해했습니다. 알렉세예프 항을 둘러싼 지역은 매우 아름다웠고 만 전체를 들판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통영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조선인 마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모두 조선인이고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경작지에는 쌀과 보리, 그리고 옷을 만드는 목화만을 파종했고 무도 기르고 있습니다. 쌀은 연 1회 파종하고 보리는 연 2회 파종합니다. 가장 추운 달은 12월, 1월, 2월이며 65세 된 조선 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통역을 통해) 눈은 전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인은 태어나서 한 번도 눈을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얼음은 얼지만 매우 얇고 해안선 주변만 얼곤 합니다. 거제도에는 조선도시인 거제가 있고 군수(감사또/Kамсато)가 살며 책임조수(참부/цамбу)가 있어 마을들을 통솔하고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기타 질서를 관할합니다. 가축과 가금류는 비싸지 않은 가격에 살 수 있습니다. 황소는 16,000케시, 닭은 100케시, 달걀 100개에 400케시입니다. 동전을 케시라고 부르는데 500케시가 1달러(또는 1루블)입니다.
저녁 10시에 조선 군수(감사또)가 우리 순양함에 왔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행군을 준비했습니다.
11월 10일 아침 7시, 월요일
해상포함인 ‘시부츠’ 호는 닻을 올리고 지역을 조사하기위해 통역을 동반하여 조선의 해만으로 갔습니다.
오후 2시에 5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우리 함대는 아드미랄 알렉세예프 항을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항해했습니다. 오후 3시에 함대장인 두바소프 장군의 지시에 따라 ‘오트바즈니(Отважный)’ 호가 예정대로 알렉세예프 항으로부터 일본의 나가사키로 출발했습니다.`
저녁 6시 시부츠 호는 예정에 따라 들렀던 해만을 떠나 전체 함대와 합류했습니다.
11월 11일 아침 10시, 화요일
함대는 조선의 롱리치(Long Reach) 해협으로 들어가 중간에서 닻을 내렸습니다. 정박장에는 중국군 코르벳함 ‘트왕하이(Twang-hai)’ 호가 서있었고 우리의 아드미랄 호를 향해 폭죽을 13번 쏘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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