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부부 사랑 법] 퇴계 이황
지적 장애 아내를 평생 사랑으로 보살핀 퇴계 이황 (1)
우린 누구나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 인생을 살아간다.
물론 날이 갈수록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일정한 나이가 되면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 살아간다.
인생이란 거친 세상을 혼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부부란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지를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다들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결혼하여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부부 생활을 해나간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부부 이야기,
특히 부부 사랑에 대해 듣게 된다면 지혜롭게 부부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퇴계 이황의 부부 사랑 법에 대해 들어보자.
"군자와 지적 장애 아내"
다들 퇴계를 조선의 성리학을 정립시킨 분으로, 엄숙한 유학자처럼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개방적이요 인간적인 분이었다.
특히 재혼할 때 상대방이 정신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받아들였고, 결혼한 후에도 그런 부인을 끔찍하게
챙긴 ‘애처가'였다. 그는 바로 높은 학문에다 덕(德), 즉 어진 인품까지 갖춘 이른바 ‘군자(君子)' 였던 것이다.
퇴계는 두 번 장가를 갔다.
첫 번째 부인인 김해 허 씨는 아들 둘을 낳고 산 후 조리를 잘못하여 일찍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31살에 둘째 부인인 안동 권 씨와 재혼했는데, 권 씨는 정신이 혼미한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다.
전해오는 말로는 당시 안동으로 귀양을 온 권질이 찾아와 과년한 딸이 정신이 혼미하여 아직도 출가하지
못했다면서 맡아줄 것을 부탁하자, 퇴계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승낙했다고 한다.
그만큼 퇴계는 국량이 넓은 분이었고, 장애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결혼 후 권 씨는 여러 가지 실수를 범했지만, 퇴계는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인내심으로 포용하여 부부의
도리를 다했다.
한번은 온 식구가 분주하게 제사 상을 차리는 도중 상 위에서 배가 하나 떨어졌다.
권 씨는 얼른 그것을 집어 치마 속에 감추었다. 퇴계의 큰 형수가 그것을 보고 나무랐다.
"동서, 제사 상을 차리다가 제물이 떨어지는 것은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해서라네.
근데 그걸 집어 치마 속에 감추면 쓰겠는가?"
방안에 있던 퇴계가 그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형수 님. 앞으로는 더욱 잘 가르치겠습니다.
조상 님께서도 손자 며느리의 잘못이니 귀엽게 보시고 화를 내시진 않을 듯합니다."
그러자 큰 형수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동서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세. 서방님 같은 좋은 분을 만났으니 말이야."
얼마 후 퇴계가 아내 권 씨를 따로 불러 치마 속에 배를 감춘 이유를 물었다.
권 씨가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자, 퇴계는 그 배를 손수 깎아주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권 씨가 흰 두루마기를 다림질 하다가 조금 태우고는, 하필 붉은 천을 대고 기웠다.
그럼에도 퇴계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입고 외출을 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경망스럽다고 탓하자, 퇴계가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 모르는 소리 말게. 붉은 색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것이라네.
우리 부인이 좋은 일이 생기라고 해준 것인데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
이렇듯 퇴계는 권 씨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사랑과 배려로 감싸주며 살아갔다.
그 후 권 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전처 소생의 두 아들에게 친어머니와 같이 시묘 살이를 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권 씨의 묘소 건너편 바위 곁에 양진 암을 짓고 1년 넘게 머무르면서 아내의 넋을 위로해주었다.
부모도 아닌 아내의 죽음에 시묘 살이를 한 경우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며 살아라"
퇴계의 부부 관은 이제 막 혼례를 올린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요 만복의 근원이란다. 지극히 친근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또한 지극히 바르고
조심해야 하지. 그래서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거란다. 허나 세상 사람들은 부부간에
서로 예를 갖추어 공경해야 하는 것을 싹 잊어버리고, 너무 가깝게만 지내다가 마침내는 서로 깔보고
업신여기는 지경에 이르고 말지.
이 모두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거란다.
그 집안을 바르게 하려면 마땅히 시작부터 조심해야 하는 것이니, 거듭 경계하기 바란다."
이처럼 퇴계는 모름지기 부부란 서로 예(禮)를 갖추어 대할 뿐 아니라 마치 손님처럼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예란 겉으로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진심(盡心)으로
대하는 것을 말하였다.
원래 부부란 백년 해로 할 사람이요, 먼 길을 가는 자는 기본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부 둘만이 있을 때조차도 예를 지키란 것은 아니었다.
내외 간, 특히 부부간 잠자리에선 서로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다정다감하게 지내라고 했다.
그래서 인지 민간에서는 퇴계를 주인공으로 한 성적인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남아있다.
예컨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퇴계 선생과 그의 부인>이란 이야기를 들어보자.
"퇴계 선생은 낮엔 의관을 차리고 제자를 가르쳤지만, 밤에는 부인에게 꼭 토끼와 같이 굴었다.
그래서 ‘낮 퇴계, 밤 토끼'란 말이 생겨났다."
이처럼 퇴계는 성에 대해 개방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고, 아내와의 사랑에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현대 사람들은 쉽게 사랑을 하고, 그만큼 쉽게 사랑을 포기하기도 한다.
사랑을 포기하는 이유는 성격이 맞지 않거나 사회적인 제약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지나치게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거나 상대방이 나에게 맞춰주기 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처럼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포용할 뿐만 아니라 서로 예를 지키고 애정으로 대한다면
소중한 인연을 쉽게 포기할 일이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물론 퇴계의 그러한 모습은 남녀가 비교적 평등했던 조선 중기의 시대 상황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끝>
퇴계 이황의 며느리 개가 시킨 이야기(2)
퇴계(退溪)선생의 둘째 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창 젊은 나이의 둘째 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과부가 되었다. 퇴계 선생은 홀로 된 며느리가 걱정이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집이나 사돈 집 모두에게 누(累)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집안을 순찰하곤 했다.
어느 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 선생은 며느리의 방으로부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순간 퇴계 선생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젊은 며느리가 술 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선비 모양의 인형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인형은 바로 남편의 모습이었다.
인형 앞에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말했다.
"여보, 한 잔 잡수세요."
그리고는 인형을 향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남편 인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는 며느리,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흐느끼는 며느리.
퇴계 선생은 생각했다.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이냐? 저 아이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수절 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이 짓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이튿날 퇴계 선생은 사돈을 불러 결론만 말했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 없네. 무조건 데려가게."
친구이면서 사돈 관계였던 두 사람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딸을 데리고 가면 두 사람의 친구 사이마저 절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퇴계 선생의 사돈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안되네.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일인가?"
"나는 할 말이 없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는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이렇게 퇴계 선생은 사돈과 절연하고 며느리를 보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 이후 과부의 재가 및 재가한 과부의 자녀들에 대한 불이익과 규제가
적용되던 사회 분위기에서 이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몇 년 후 퇴계 선생은 한양(漢陽)으로 올라가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므로 한 집을 택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가 퇴계 선생이 좋아하는 것 뿐이었다.
더욱이 간까지 선생의 입맛에 딱 맞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 집 주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다. 반찬의 종류는 어제 저녁과 달랐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만
올라온 것이었다. 나의 식성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토록 음식들이 입에 맞을까?
혹시 며느리가 이 집에 사는 것은 아닐까?
퇴계 선생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 가려는데 집주인이 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양 가시는
길에 신으시라며 주었다. 신어보니 퇴계 선생의 발에 꼭 맞았다.
아! 며느리가 이 집에 와서 사는구나!
퇴계 선생은 확신을 하며 집안을 보나 주인의 마음씨를 보나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짐작만 하며 대문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구석에 숨어 퇴계 선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먼 빛으로 보아도 자기 둘째 며느리가 틀림없었다.
퇴계 선생의 두 눈에는 애틋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옛날 그토록 측은히 여기며 사랑해 주던 며느리가 아닌가.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뜨거운 정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손이라도 마음껏 크게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혹시 남의 눈에라도 띌까 봐 참고 또 참았다.
퇴계 선생은 그날 즐거운 마음으로 한양 가는 길을 걸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내가 청상 과부였던 저 며느리를 천정으로 보내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구나.
홀로 된 과부가 마음에서 우러나 자기 스스로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가문의 체면과 인습에 얽매여 마음에도 없는 절개를 억지로 지킨다는 것은 진정한 열녀가 아니다.
더구나, 그것을 주위 사람들이 강요하거나, 또 여자에게만 수절 하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히 남녀 불평등이요,
여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큰 죄악이다.
퇴계 선생은 며느리를 개가(改嫁)시켰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지극히 봉건적인 그 시대에 퇴계 선생이 아니고서는 감히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극히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이 일을 놓고 유가(儒家)의 한 편에서는 오늘날까지 퇴계 선생을 선비의 법도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고 윤리를 무시한 사람이라는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정반대로 퇴계 선생을 칭송하고 있다.
퇴계 선생이야말로 윤리를 깨뜨리면서까지 윤리를 지키셨다며 윤리와 도덕을 올바로 지킬 줄 아는
분이시라고 칭송하고 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평가할까?
[출처] 퇴계 이황의 며느리 이야기|작성자 천석
<받은 메일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