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과 영혼...!
과거.현재.....미래...!
물체.분자.핵. !
고체..액체..기체..!
영혼 !
영 !
성령 !
설과 추석은 우리의 큰 명절로 천만 명 정도가 이동한다고 하니 전쟁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명절이 돌아오면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 한바탕 북새통을 겪는 것이 상례(常例)처럼 되어 있다. 그렇게 고향을 찾는 것은 고향이 그리워서 간다기보다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기 위해 가는 경우가 더 많다.
지금은 상황이 좀 바뀌어서 자식들이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오히려 자식들의 집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조상님들의 묘가 대부분 고향에 있기 때문에 고향으로 가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명절에 고향을 다녀오면 좋은 일보다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일들을 안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원인은 대부분 부모 봉양 문제와 제사 문제로 인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흩어져 살던 형제들이 부모를 찾아보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이게 되는데 형제들이 부모 봉양과 조상의 장례나 제사 비용을 똑같이 분담하면 불평이 없을 터이지만 형편과 마음에 따라서 더 할 수도 있고 덜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좀 떳떳하지 못한 형제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해 어쩔 수 없이 참석한 형제도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떨어져 살기 때문에 못하다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쌓였던 감정들이 슬슬 고개를 들고 일어나 개중에는 대판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고, 이런저런 체면 때문에 끙끙 알면서 어물어물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안고 돌아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명절 뒤편에는 너나없이 말 못할 갑갑증과 파열음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부모, 친지와의 만남이 항상 환한 보름달과 같이 밝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만, 가족사는 언제나 기대와 원망들이 이리 저리 얽히고 설켜 있어 서로 감정 선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 것이 우리들의 현주소다.
말이 명절이지 수백 년 대물림된 행사를 치러야 하는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뭇한 시간이 아닐 수 있다. 기쁘고 즐거워야 할 명절이 이처럼 불편한 갈등을 겪어야 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그 원인이 있을까? 이런 뒤편에는 어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제사로 인한 갈등 뒤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을 필자는 진리를 역리로 바꾸어 쓰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말이 있다. 조상 제사가 진리라면 갈등이 많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지금은 미신으로 치부되고 말았지만, 50년대에만 해도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이 노여워서 그런다고 높은 산에 올라가 하늘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우제를 지내는 일은 없는 것 같다.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미신이라면 땅에 지내는 제사와 조상 제사는 미신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리 좋은 진리라도 망령된 자는 진리(眞理)를 역리(逆理)로 바꾸어 사망의 제도를 만들어낸다. 이런 일은 특히 종교 안에 아주 많이 있다. 이렇게 망령된 행위의 대표자들이 바로 사상가들과 종교가들이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지식인들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천도(天道)인지 지도(地道)인지 인도(人道)인지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고정관념이 되면 그들과 같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제사 문제는 수백 년 동안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불치병과도 같이 굳어져버렸다. 어떻든 우리나라의 조상 제사 문제와 장묘 문제는 오랫동안 더 홍역을 치러야 할 것 같다.
한말 개화기 선교사들은 아름다운 자연과 미몽의 백성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자의 나라’로 묘사했는데, 세계에서 유례없는 조상 숭배 열기만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유교 문명의 종주국인 중국은 물론 주변국인 일본이나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도 조상 제사를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교 문화권, 아니 세계에서 한국이 조상 제사를 지내는 유일한 나라가 된 까닭,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이 조상의 위패 앞에 은덕을 비는 나라가 된 까닭을 정작 알지 못하면서 막연히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불효자식이 되고 또 천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 주변에 있는 어느 집 큰며느리는 고향에 남겨둔 시어머니를 개가 풀 보듯 생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기어코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우기는 것을 보았다. 그 심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제사를 안 지내면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색은 하지 않아도 그런 잠재의식들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조상들에게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얼마나 고상하고 감격스러운 풍속인가라고 짐짓 위엄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남녀 간 불합리한 역할, 가족 간 불공평한 노력봉사와 제례 비용 조달에 가슴앓이를 해야 하고 시간을 쪼개 품앗이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소소한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게 우리 명절의 슬픈 자화상이다.
아마도 귀경길에서 언쟁깨나 했을 부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의례(儀禮)에 쏟아 붓고 허둥지둥 돌아설 때 그런 회의가 들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유별난 ‘조상 숭배의 나라’가 되었을까?
1894년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오백 년 도읍지 한양에 종교 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종교 없는 제국은 없다는 문명사적 시선으로 보면, 사찰은커녕 공자 사당 하나 없는 유교 국가의 수도가 이상했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무속과 민간신앙에 푹 빠져 있는 조선인들을 목격했다. 콜레라가 습격한 마을엔 고양이 그림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가는 곳마다 무당이 있었고, 으슥한 곳마다 귀신이 살았다. 귀신 종류도 하도 다양해 그녀는 36가지 귀신 이름을 세다가 그만 두었다고 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사를 폐지하지 않는 한 다종교사회에서 제사 문제로 인한 갈등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한번쯤 고찰해보는 것도 해롭지 않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데 있어서 가장 난처한 것은 제물을 준비하는 문제와 축문을 쓰고 읽는 문제인 것 같다. 어떻게 해야만 다종교사회에서 모두가 동감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을까? 그런데 의미적으로 보면 제물이 제일 큰 문제인 것 같지만 제물 차리는 것은 개신교인들만 반대하는 입장인데 그들은 제상에 절만 안 하면 된다는 식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축문을 쓰고 읽는 문제는 만만치 않다. 축문은 신명(神名)이 거론되어야 하는데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불교인들은 기를 쓰고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기야 애국가에서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도니 그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갈등이 많은 제사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바보처럼 지나치면 되겠지만, 이 문제는 전 국민이 홍역을 치루고 있는 문제이므로 한번쯤 까발려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필을 든 것이다.
제사를 효(孝)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숭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까? 독자님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또 제물을 차려 놓으면 조상님이 잡수고 가실까? 조상님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제사의 기원과 그 의미를 알고자 하여 우리나라 고기(古記)에서 우리 조상들이 어떤 제사를 지냈는지 살펴보기로 하고 여러 책을 뒤져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기는 많은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분실 내지 소실되었고 또 이조 초기에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수거해서 소각하고 나머지는 일제에 의해 반출되고 없으므로 그동안 금서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 모습을 드러낸 환단고기(桓檀古記)와 규원사화(揆園史話)을 뒤져 보았다.
거기에서 얻은 지식은 고조선(古朝鮮) 시대에는 삼신일체(三神一體)이신 하느님에게 민족 전체가 드리는 천제(天祭)만 지냈을 뿐 지제(地祭)와 조상(祖上) 제사는 지내지 않았던 것을 알았다. 지제(地祭)와 조상 제사는 중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역수입된 것도 알았다.
용만 섬기는 지나(支那)족이 천제(天際)를 지낸 동이(東夷)족이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른 것을 보고 그것이 하늘의 강복(降福)으로 간주하고 자기들도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우리 민족이 섬기는 삼신일체(三神一體)를 잘못 이해하여 하나뿐인 신을 셋으로 갈라 놓은 흔적이 역역하다.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된 것은 유대교 다음에 기독교가 생기고 나서 오랜 후의 중세 때임을 감안할 때 중국이 삼신일체의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은 신의 가르침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삼신일체는 하나의 신이 셋으로 역사한다는 것인데 지나족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 가지의 신과 세 가지의 제사 제도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삼신일체를 쪼개서 천제(天祭)와 지제(地祭)와 조상 제사(祭祀)를 만들어낸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상 제사를 우리나라에는 이조(李朝) 시대에 도입하여 왕실에서부터 지내다가 서민에게까지 파급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조상 제사 제도를 만들어낸 중국과 그 주변국에서는 지내지 않는데 우리나라만 유별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사의 기원을 찾는 것은 아무래도 성경이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 성경에서 제사의 기원을 찾아보았다. 많은 사람이 인류의 조상으로 알고 있는 아담이 가인과 아벨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느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하느님께 드렸는데 하느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 그래서 화가 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창 4:1-8). 이것이 제사의 최초 기록이다.
세월은 흘러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홍수를 일으켜 인류를 멸망시키시겠다고 경고하셨는데 그 때에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일러주셨다. 그 말씀을 모든 사람이 비웃었으나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큰 배를 만들어 홍수가 나기 전에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짐승과 함께 배에 들어감으로 노아의 여덟 식구가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다.
홍수가 그치고 물이 잦아진 후에 노아가 배에서 나와 하느님께 감사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경건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제단에 태워서 드렸는데 하느님께서 그 향기를 받으셨다는 기록이 있다(창 8:20-21).
노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셈과 함과 야벳이다. 그들이 세상으로 흩어져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인류학적으로 보아도 그것이 정설인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이스라엘과 몽고와 미대륙에서 멸종되다시피 한 인디언이 이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한 셈족에 속한 민족이고, 흑인들과 바벨론에서 동쪽으로 온 지나족이 함족에 속한 민족이고, 백인들이 야벳족에 속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노아의 계보를 보면 이스라엘나라 조상과 우리니라 조상은 형제사이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유일하게 세계서 한국과 이스라엘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여타 나라들은 보편적으로 자기들이 만든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우리나라와 이스라엘나라 조상들이 지낸 제사 방법이 노아가 지낸 제사 방법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오늘날처럼 돼지 같은 동물은 하느님에게 드릴 수 없는 부정한 동물이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소나 양처럼 새김질을 하고 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만 드려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의미는 새김질 하는 짐승은 먹은 것을 위에서 다시 꺼내 입에서 우물거리면서 새김질을 한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도 새김질하는 짐승처럼 하느님의 법을 마음에 담아 놓았다가 그것을 다시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여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발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의 의미는 천신(天神)과 악신(惡神)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으신다는 뜻이다. 사람이 영을 분별하지 못하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악신을 참신으로 알고 하느님께 바쳐야 할 제물을 사람과 금수(禽獸)와 버러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게 바치고 경배하는 망령된 자들이 된다. 그래서 고대에 하느님의 뜻을 잘 아는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은 새김질하지 않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은 절대로 제물로 쓰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백두산(白頭山)의 이름은 이런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이 홍수 사건 후에 빛(하느님)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해 뜨는 곳을 향하여 서쪽에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해 뜨는 동쪽 끝 높은 백두산에 올라 제단을 만들어 놓고 흰 소의 머리로 하느님께 제사를 지냈는데 그곳을 백두산(白頭山)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소머리로 제물을 삼아 드렸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자. 소는 사람을 대신해서 드려진 희생(犧牲) 제물(祭物)의 성격을 띤다. 하느님에게 소머리고기를 잡수시라고 드린 것이 아니라. 소가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이 우리 민족도 하느님께 순종하겠다는 다짐으로 우리 대신 소를 희생 제물로 드린 것같다.
소는 고삐 줄에 매여 사는 동물로 주인에게 순종하고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으며 죽어서도 자기 몸을 다 주인에게 바친다. 소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손에 매인 존재이니 소처럼 순종하면서 살겠다는 고백으로 우리 대신 소를 제물로 드린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제사마저 타락하여 오늘날은 제상에 소머리 대신에 돼지 머리를 올리고 돼지 입에다 돈을 물려 놓고 넙죽넙죽 절을 해대는 것이다. 독자님들은 돼지 머리 하면 무슨 생각을 떠올리시는가? 우리는 돼지처럼 내 배만 채우면 그만이니 돈이나 많이 벌게 해달라는 기원이 아닐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소머리는 비싸니까 값이 싼 돼지 머리로 대신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옹색한 변명을 하지만 제물의 의미가 그런 것이겠는가?
지금도 단군 시대에 소머리로 제사를 지냈던 곳이 보존되어 있다. 강화도 마리산은 원래 ‘머리산’이었는데 지금은 마리산이라고 부른다. 참성단은 단군께서 해마다 제물을 마련해 오셔서 소머리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머리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고대에 하느님에게만 제사를 드렸었다. 이러한 경천사상(敬天思想)은 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스라엘이 모세 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우리나라는 그들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던 민족이다. 하느님에게 제사지내고 하느님의 법으로 살 때에는 전 세계의 정신문명을 주도했다고 고기(古記)는 전하고 있다.
“하늘의 법은 오직 하나뿐이며 그 문은 둘이 아니다. 너희는 오직 순수한 정성으로 마음을 하나로 하면 하늘에 이를 수 있으리라. 하늘의 법은 항상 하나이며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다. 내 마음을 남의 마음에 이르게 하면 인심이 교화되어 하늘의 법에 합하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세계만방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 행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먼저 벗어나 화를 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하늘의 법을 지키며 만물을 사랑하여라.”(단군세기)
고대에 이렇게 정신문명이 발달하여 임금과 백성이 예를 갖추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고 이웃 나라 지나족(支那族)들이 우리나라를 부러워하여 이러한 교훈을 받아갔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 기록되어 있다. 동양문명의 주도자인 공자(孔子)도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른 우리 조상들을 부러워하여 동이(東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공자가 우리나라 하늘의 도(道)를 연구하여 충효사상을 만든 것이 주변국에 퍼졌는데 그것이 동양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하늘의 도가 실종되면서 한(漢)나라에게 대륙을 내 주어야 했다. 그 후 중국의 강성한 국력에 현혹되어 우리의 삼신일체(三神一體) 도(道)를 내던지고, 중국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지도(地道)를 가져다 금이야 옥이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단군 시대 이후 무속(巫俗) 화(化)되어버린 삼신신앙과 중국에서 변질되어 들어온 불교와 유교가 뒤섞여져서 온갖 귀신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실정이다.
원래 우리 민족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다만 집단 축제 형식인 천제만 고려 때까지 지냈던 민족인데 지금 조상 제사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조상 제사는 중국에서 충효 차원에서 만들어낸 제례(祭禮)를 이씨조선이 받아들여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잘 이행되지 않다가 향교를 장악한 양반들이 자기 가문의 위세를 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남이 장에 가니까 나도 따라가는 것처럼, 일반 서민들이 쌍놈소리를 면해보려고 따라 했던 것이 치유할 수 없는 불치의 병이 되고 말았다.
불교(佛敎)에서 유교(儒敎)로 전환한 이씨조선은 민간 신앙을 일소할 방법을 주자학(朱子學)에서 찾았다. 천제(天祭)와 지제(地祭)와 종묘(宗廟)가 그것이다. 경복궁 우측에 사직단(社稷壇)을 지어 하늘 신(神)과 토지 신(神)에게 제례를 올리고, 좌측에 종묘(宗廟)를 지어 제사의 기원을 마련했다. 15세기 말 성종(成宗)은 아예 [경국대전]을 편찬해 국법으로 반포했다. 예제(禮制)에 이런 조항이 있다.
“6품 이상 문관이나 무관은 3대까지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제사 지내고, 일반 서민은 부모에게만 제사 지낸다.”
잡신을 섬기는 자는 처벌되었다. 빈곤한 서민은 위패를 모시고 명절 때는 두어 가지 음식으로 족했다. 굶는 판에 더 차릴 것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양반이 향촌(鄕村)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봉제사(奉祭祀)는 충군효친(忠君孝親)의 규율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격식과 요란한 상차림이 강제된 것이다. 조상숭배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이자 봉제사는 곧 가문의 위세 경쟁으로 변했다.
유교는 내세관(來世觀)이 없는 게 특징이다. ‘조상 숭배의 나라’에서 불교와 주술 신앙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미국 선교사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기]에서 ‘코레아인들은 사회생활에서는 유교에, 사고방식은 불교에 속하며, 곤경에 빠지면 귀신에게 빈다’고 썼다.
21세기 대명천지에 귀신을 믿는 사람은 이제 없어졌고, 외래 종교가 유입되자 한국은 다종교사회로 변했다. 그런 와중에 유교는 제천(祭天) 기능은 없애버리고 주로 생활의례, 특히 제례(祭禮)만 남겨 놓았다. 명절이라는 축제의 시간을 제사로 종종걸음을 쳐야 하는 ‘조상 숭배의 나라’가 된 역사적 배경이다.
이런 내력을 알았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과연 사람이 죽으면 제물을 받을 수 있는 신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느님이 인정한 참 신은 과연 어떤 신인가? 그리고 조상숭배가 왜 자기 가문(家門)에만 국한되어야 하며 조상을 기리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데 왜 반드시 상차림 형식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의미는 무엇이며, 과연 신은 어떤 제물을 받기를 원하시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도 성경 외에는 어느 곳에서 시비를 가려줄 만한 기록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성경을 보니 하느님께서 선지자(先知者)의 입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 있어 그 기록을 여기에 옮겨본다.
“너희는 우상들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여라.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은 신들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저 하늘 아래에서도 없어지리라.”(렘 10:11)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아니한 신은 우상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라고 했다. 그리고 제물을 바치는 인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인생들아,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양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와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사 1:11-16)
오늘날 종교인들의 행위에 대해서 이보다 더 강한 질타가 또 있을까? 다음의 말씀도 들어보자. 건물을 지어놓고 그것이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가르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고 예물을 많이 바치면 복을 많이 받고 적게 바치면 복을 적게 받는다고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이보다 강한 질타가 있을까?
“이것이 하느님의 성전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성전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라.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하고 바알(풍요와 다산의 신)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하느냐? 이는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 7:4-10)
예수께서 자기 몸이 하느님이 사시는 성전이라고 가르쳤고 또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면서 제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는데도 손으로 지은 집을 성전이라고 속이고 하느님께 예물을 바쳐야 한다고 거짓말 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타하시는 것이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 받침대다. 그러니 너희가 어떻게 내가 살 집을 짓겠으며 어느 곳에다가 나를 쉬게 하겠느냐?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며,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겸손한 사람, 회개하는 사람, 나를 경외하고 복종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을 내가 좋아한다. 소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자는 사람을 쳐 죽이는 자와 같고, 양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자는 개의 목을 부러뜨리는 자와 같고,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치는 자는 돼지의 피를 바치는 자와 같고, 분향을 드리는 자는 우상을 찬미하는 자와 같으니라. 이러한 제사장들은 나의 뜻을 묻지 않고 제 뜻대로 한 자들이다.”(사 66:1-3)
또 불상을 모시는 집을 짓고 부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하느님을 잘 섬겼던 우리 환웅(桓雄) 천왕의 상(像)을 모셨던 대웅전(大雄殿)이라는 이름을 도용한 현판을 붙여 놓고도 부족해서 애국가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불상에게 절하고 공덕을 쌓으면 잘될 것처럼 냄새를 풍기는 불교지도자들이 음미해 보아야 할 말씀이 있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말하게 하겠는가? 우리 하느님은 하늘에 계셔서 하시고자 하시면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다. 이방 나라의 우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으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소리를 내지 못한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나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은 모두 우상과 같이 되고 만다.”(시 115:2-8)
사실 신(神)은 천상천하에 오직 한 분밖에 없다. 그분이 곧 하느님이다. 속한 입장에 따라서 신명(神名)을 다르게 부를 뿐이다. 하느님이나, 하나님이나, 천주님이나, 상제님이나, 여호와나, 야훼나, 엘이나, 알라나, 알이나, 갓이나 아니면 자연이라고해도 괜찮다. 처한 입장과 언어에 따라 이름만 다를 뿐 참 신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다른 신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가들이 만들어낸 신이고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자기 마음속에서 만들어내는 귀신일 뿐이다.
“하늘의 법은 오직 하나뿐이며 그 문은 둘이 아니다.
너희는 오직 순수한 정성으로 마음을 하나로 하면 하늘에 이를 수 있으리라. 하늘의 법은 항상 하나이며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다. 내 마음을 남의 마음에 이르게 하면 인심이 교화되어 하늘의 법에 합하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세계만방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 행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먼저 벗어나 화를 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하늘의 법을 지키며 만물을 사랑하여라.”
종교가들이 하는 말, 즉 예물을 드리고 기도하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모두 사기다. 예수도 석가도 노자도 공자도 그런 복을 가르친 적이 없고 그런 약속을 한 적은 더더구나 없다. 삶은 바르지 못하면서 당산나무 아래나 바위 밑에나 불당이나 예배당에 가서 아무리 울고불고 기도를 많이 해도 소용없다. 오로지 바른 정신으로 바른 삶을 사는 것이 기도이고 예배이어야 한다.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하면 복 받을 그릇을 준비하면 된다. 하느님은 복과 화를 우리 앞에 놓아 두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이 들어오고, 재앙 받을 짓을 하면 재앙이 불어 닥치는 것이다.
잘못된 유전이나 전통은 과감히 개혁할 필요가 있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스럽게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잘못된 제도와 전통을 깨부술 수 있어야 한다. 똒같은...인간이 만든....종교가들이 만든 교리에 매여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산속에서....목탁만두들기고 ...목에...살만 찌우고.....살아가야 하는가 ? 혼자서...깊은곳에 숨어서...기도만하며...소리없이 ....머리통만 키우며 살아야 하는가 ?
가자...가자.....모두 손잡고... ! 손을 놓지 말거라 !
하늘의 뜻을 무시하고 인간의 생각으로 사람을 거쳐 넘어지게 하는 제도를 만든 종교가들의 아비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귀인 것이다. 마귀는 꿰맞추기를 좋아하여 무엇이든지 하느님의 말씀과 비슷하게 꿰맞춰서 자기를 섬기에 만든다. 땅에 없드려 가장 낮은척하며...키스하고...방탄쪼끼에...방탄차에....금지팡이에....금모자에....금십자가에....................... ! 양의탈을쓴 늑대가 아닌가 ?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아비 마귀의 일을 행하면서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는 자들이다.
죄인나그네가 살펴본 바는 여기까지입니다.
이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일뿐이며
정설은 아니니독자님들께서는 견해를 달리하시더라도
크게 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는자는...볼것이며.....
들리는자는...들을찌어다...
항상....깨어있으라 !
행복한선녀와나무꾼
여러분을초대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항시 함께 하시기를...... |
첫댓글 아주 긴 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