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정구민
반만년 나라를 지켜온 산신
백두대간 어슬렁거리며
발톱 내보였다
헛기침하다가
뻣뻣하게 수염 세우며
낮잠 자다가
나라 협박받으면
입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위협하고
가난이 봄빛처럼 푸르르면
얼룩무늬 털을 뽑아
산빛 푸르게 물들이며
터줏대감으로 살았다
이제 땅에선 종을 이어가기 힘들어
하늘로 이주하려니
봄에는 큰곰
여름에는 돌고래
가을에는 조랑말
겨울에는 토끼
계절마다 동물들이 집을 다 차지해
빈집이 없다
눈이 부시도록 타오르는 눈빛
그냥 사라지기엔 억울하고
숲을 파랗게 키우려는
지구 전사 등에 태우고 으르렁으르렁 세계로 향해야지
생각을 탁본하는 밤
오늘날은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종교와 신화를 대청소하고 상호간의 불신과 증오를 키우며 대 사기꾼들의 불량하고도 부정적인 신화들만을 양산해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땅을 사고 투기하는 법,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배신과 중상모략을 일삼는 법, 온갖 탐욕과 소비를 미덕으로 삼으며 반자연적인 자본주의를 최고급의 사상과 이론으로 찬양을 한다. 자연은 삶의 터전이 아닌 금은보화의 보물창고이며, 따라서 자연은 아무런 고민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파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 옛날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온 동식물들이 다 소멸되거나 쫓겨나게 되었고, 백수의 왕인 호랑이마저도 멸종의 위기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호랑이가 소멸하면 호랑이와 함께 살던 친근한 이야기와 그 성스러운 신화도 죽게 되고, 그 친근한 이야기와 성스러운 신화가 사라지면, 우리 인간들은 오직 미다스왕의 후예가 되어 황금 속에 파묻혀 죽게 될 것이다. 돈, 즉, 금은보화는 그 자체로 아무런 재화도 아니고 음식도 아니며, 우리 인간들이 언어로 부여한 허상과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쓸모도 없고 더군다나 식량도 아닌 금은보화, 이 금은보화를 위해 만물의 터전인 자연을 다 파괴하고, 모든 동식물들을 다 죽여버린 바보, 이처럼 바보스러운 악마가 그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호랑이는 고양잇과의 포유동물이며, 다 자란 어른의 크기는 220kg에서 300kg 이상까지 자라난다고 한다. 호랑이는 가장 아름답고 균형 잡힌 몸매와 함께, 가장 지혜롭고 뛰어난 기품을 지녔다고 할 수가 있다. 백두산 호랑이, 호돌이, 비호, 범, 호순이 등의 이름 이외에도 산군山君, 산신령山神靈, 산중왕山中王으로도 불리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동물 중의 동물, 백수와 왕이자 우리 한국인들의 수호신인 호랑이조차도 이제 멸종의 위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정구민 시인의 [호랑이]는 “반만년 나라를 지켜온 산신”이지만, 그러나 이 호랑이는 상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정구민 시인이 그의 상상력으로 탁본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백두대간 어슬렁거리며/ 발톱 내보였다/ 헛기침하다가/ 뻣뻣하게 수염 세우며/ 낮잠”을 자던 호랑이, “나라 협박 받으면/ 입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위협하고/ 가난이 봄빛처럼 푸르르면/ 얼룩무늬 털을 뽑아/ 산빛 푸르게 물들이며/ 터줏대감으로 살았”던 호랑이, 그러나 “이제 땅에선 종을 이어가기 힘들어/ 하늘로 이주하려니/ 봄에는 큰곰/ 여름에는 돌고래/ 가을에는 조랑말/ 겨울에는 토끼/ 계절마다 동물들이 집을 다 차지해/ 빈집이 없다”고 한다.
오늘날의 위기는 언어의 위기이며, 언어의 위기는 생태환경의 위기이다. 생태환경의 위기는 지구촌의 위기이며, 지구촌의 위기는 더 이상 백수의 왕인 호랑이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대한민국과 함께, 우리 한국인들의 가장 훌륭하고 늠름한 기상을 지켜주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 주던 호랑이가 사라진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 한국어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타오르는 눈빛/ 그냥 사라지기엔 억울”하여 “숲을 파랗게 키우려는/ 지구 전사 등에 태우고 으르렁으르렁”거려 보겠지만,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호랑이가 사라지면 호랑이가 뛰어놀던 숲과 들과 강도 사라지고, 호랑이와 함께 살던 큰곰과 돌고래와 조랑말과 토끼들도 하나, 둘,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호랑이, 호랑이, 정구민 시인의 [호랑이]가 하루바삐 우리 한국인들의 탐욕과 마비된 의식을 물어뜯고, 이 시 속의 울타리를 뛰쳐나와 삼천리 금수강산의 수호신으로서 살아가 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