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21:1-11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JjY2Hu62gzE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감람 산 벳바게에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맞은편 마을에 가서 보니 나귀 새끼가 문 앞에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물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제자들은 주님께서 이르신 말씀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라고 하니 그들이 허락했습니다. 제자들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 위에 타셨습니다. 그때 무리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종려나무가지를 길에 펴고 예수님의 앞뒤에서 소리 높여 찬송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고 무리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는 유월절 절기 즈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전국과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살든지 간에 일생에 한 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외국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은 “금년에는 여기에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사모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유월절 절기 때는 예루살렘에 제사하러 왔던 사람들이 몇 명이 되었을까요? 그때 유월절에 제물로 죽은 어린양의 숫자를 알면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규정에 의하면 어린양 한 마리에 최소한 10명을 단위로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기록에는 그 때 유월절 제물로 양 256,500마리가 드려졌습니다. 이 숫자대로 계산하면 유월절에 약 260만여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성문은 겟세마네 동산 건너편에 황금의 문(Golden Gate)입니다. 아치형으로 된 두 개의 문입니다. 지금은 이 문이 막혀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사용되던 문입니다. 종말론 학자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지상 재림하시면 이 문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설교는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나누겠습니다.
1.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님(3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벳바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인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귀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느냐?”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쓰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귀 주인은 선 듯 나귀를 보냈습니다. 나귀 주인은 예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예수님에게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두 가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➀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Savior)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 때문에 영생을 얻었습니다. ➁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Lord)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소유의 주인이십니다.
신앙생활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축복자동자판기가 되신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고 예수님이 자신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크게 오해 한 것입니다. 진짜 신앙생활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서 예수님이 주인이 되셨다가 자신이 주인이 되었다가 왔다갔다합니다. 이런 신앙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로드쉽(Lordship), 주재권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천연기념물인 진돗개는 그 탁월성이 세계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뛰어난 진돗개가 군견이나 경찰견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진돗개는 주인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돗개는 한 번 주인이면 끝까지 주인입니다. 그래서 경찰견이나 군견을 못합니다. 군대나 경찰에서는 한 사람이 평생 수색 및 경비용 개를 다루지 않습니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주인이 계속 바뀌는 셈입니다. 진돗개는 옛 주인을 잊지 못해 새 주인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군견이나 경찰견으로 부적격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돗개처럼 일생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초대교회시대는 수많은 사람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서머나교회의 감독 이었던 폴리캅도 순교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러온 병졸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준 뒤 화형대 앞에 섰습니다. 그때 호민관이 폴리갑에게 지금이라도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나는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고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나의 왕이시요,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겠는가?”라고 말하고는 화형의 장작더미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서 아주 평화롭게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한 번만 주인이시거나 가끔 주인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인이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도마는 요한복음 20:28에서 이런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두 가지 고백을 했습니다. ➀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➁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주는 헬라어로 kuvrio"(퀴리오스)입니다. 주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500년대까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자기 이름과 함께 D.V라는 대문자로 사인을 했습니다. 라틴어로 데이오 벨린티(Deo Valente)며 우리말로는 ‘주님이 원하시면’입니다. 그들은 모든 계획과 소망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런 사인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데이오 벨린티’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내려놓아야 하고 주님의 뜻이라며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2. 말씀을 이루시는 예수님(4,5절)
예수님께서 멋진 백마를 타고 입성하셨으면 위엄도 있고 폼이 났을 텐데 볼품없는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4-5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을 이루며 사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구약의 구절이 99번이나 인용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말씀을 사용하시거나 그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구약에 예언되었고 예언된 말씀대로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프리카의 리처즈 선교사님은 토인들에게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하루 10절씩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누가복음 6:30-31 말씀 때문에 곤란했습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리처즈 선교사님은 이 부분은 건너뛰려고 하는데 양심에 가책이 와서 기록된 대로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보이는 것마다 달라고 하더랍니다. 선교사님은 할 수 없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그들이 크게 감동을 받고 자기들이 요구해서 받아간 것들을 도로 갖다 주면서 “당신은 참 하나님의 종입니다.”라면서 그때부터 더욱 따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또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십니다.
서울 서대문 불광동에 황영일이라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육군 중령으로 제대하고 퇴직금으로 다른 사람과 동업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서대문 영천, 산 비탈길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가지고 지게꾼 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겨울이 닥쳐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짐 운반해 달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택시 정거장 옆에 한 아주머니가 커다란 짐을 하나 놓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암만 기다려도 택시가 오질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 제가 그 짐을 지고 갈테니 택시 한 구간 값만 주세요.”라고 말하니 아주머니가 짐을 맡겼습니다. 지게에 짐을 지고 아주머니를 따라 갔습니다. 한참을 가서 그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주머니가 택시 한 구간 값 60원을 주었습니다. “아주머니, 이렇게 멀리 까지 왔는데 좀 더 처 주세요.”, “택시 한 구간 값만 달라고 해 놓고 왜 여러 소리 하고 그래요.” 그리고 아주머니는 짐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더랍니다.
황영일 성도는 돈 60원을 받아서 해가 어둑어둑 넘어 갈 무렵 집에 가려고 하는데 수요일 저녁 예배당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땡그랑, 땡그랑” 황성도는 그냥 집에까지 가면 예배를 못 드릴 것 같아서 근처 작은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끝난 다음에 크리스마스 임박해서 구제 헌금을 한다고 합니다. 그분이 뒤에 앉아 있다가 헌금바구니가 오기 전에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번 60원으로 라면 2개를 사야 가족이 끓여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가서 지게를 지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너 헌금하고 가라.”, “못합니다.”, “헌금 하고 가라.”, “못합니다.” 결국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다시 돌아가 60원 헌금했습니다.
황영일 성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갔습니다. “여보 나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요?”, “예배드리고 오느라고.”, “어서 씻으세요. 제가 밥상 차릴게요.” 밥상이 들어왔는데 반찬이 대여섯 가지에다 그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은 흰 쌀밥 먹기가 힘들었는데, 흰 쌀밥에 미역국이 올라온 것입니다. “여보, 이게 어찌된 밥상이요?”, “그냥 어서 드세요. 다 드시고 나서 제가 자초지종을 말씀해 드릴게요.” 그런데 밥을 반 쯤 먹고 보니까 애가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니, 쟤 머리가 왜 저래요?” 딸아이가 학교에서 도시락 안 싸온 사람에게 나누어준 카스테라 빵 하나와 우유 하나를 집에 있는 동생과 먹으려고 가방 속에 넣어 뒀는데, 오후에 출출해진 반 친구들이 그 빵을 먹겠다고 빼앗으려 해서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얼른 가방을 싸서 2층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이마가 깨어졌답니다. 선생님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돈 6천원을 걷어서 쌀을 좀 사고 반찬과 미역도 샀다는 것입니다. “지금 먹고 있는 밥이 그 밥이에요.” 그러니 밥 먹다 말고 넘어 가질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른들은 배고픈 것을 참을 수 있지만 저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황영일 성도가 눈물이 나서 울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까 어느 아주머니가 핸드백에서 돈 3만원을 꺼내며 “내가 가진 것이 이거 밖에 없어요. 이거 가지고 애 치료하세요.” 이러는 겁니다. “아니, 누구신데 우리에게 돈을 주십니까?”, “나는 아까 당신이 왔던 교회에서 안내하던 권사입니다. 내가 안내하다 보니까 당신이 예배를 드리고 들락날락 하며 수상하게 행동을 해서 혹시 간첩이 아닌가 뒤를 따라오다 문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딱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내일 혹시 지프차가 오면 타고 와 보세요”하고 가더랍니다. 다음날 정말 지프차가 한 대가 왔는데 타고 가보니까 그 권사님 남편이 대기업 사장이었습니다. 갑자기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벌이 어떻게 되오?”, “육사 6기생입니다.”, “군대 있을 때 뭐 했습니까?”, “행정을 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회사의 기획실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황영일성도가 돈 60원을 헌금하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갈등했지만 순종하고 났더니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면 너무 구속받는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성도로써 당연한 일이고 또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는 말씀의 능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분깃이 되어주십니다. 말씀대로 살면 원수보다 지혜롭게 됩니다. 말씀이 발에 등이 되고 인생길에 빛이 되어 인도해줍니다. 시편 119:165을 보겠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큰 평안이 있고 인생에 장애물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오래 전에 너무나 가난해서 대학을 못가고 선교사님 집에서 잔심부름 해주고 영어나 배우려고 선교사님 집에 들어간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님이 큰 트럭에다 장작을 한 가득 싣고 와서 그 청년에게 쌓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예쁘게 쌓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와서 보시더니 “여기는 미관상 보기 싫으니까 저쪽으로 다시 쌓아 놓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옮겨서 쌓았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보더니 “여기는 애들 노는데 위험하니까 저쪽 처마 끝으로 다시 쌓아 놓게” 하시는 겁니다. 청년이 순종하니 또 “아, 여기는 응달이니까 다시 저쪽 양지쪽에 쌓아 놓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일곱 번이나 옮겼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더러워서 선교사 집에 안 있는다.”라고 말하고 장작을 엎어버리고 나갔을 텐데 그 청년은 일곱 번을 아무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그 해 크리스마스가 되니까 선교사님이 청년을 또 불렀습니다. 청년은 “저 선교님에게 장작 귀신이 들렸나, 오늘은 장작을 어디다 쌓으라고 나를 부르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들어가자마자 “오늘은 장작 어디가 쌓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장작 쌓으라고 자네를 부른 것이 아니네. 자네가 워낙 순종을 잘하니 우리 집에서 썩는 것이 아까워서 내가 미국 신학교 입학원서와 재정 보증서를 받아 왔으니 빨리 가서 여권을 내고 비자를 준비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당신 나라에 큰일을 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순종을 잘하는 바람에 유학을 하게 되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신학대학 학장이 되었고 큰 교회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선교사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3. 겸손하신 예수님(5절)
5절에 보니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는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11:29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겸손한 마음은 은혜 받는 그릇이 된다.”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겸손한 사람보다 더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이 두 분은 진리를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겸손한 사람은 은혜 받을 그릇이 준비 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그릇에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을 이길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김장환 목사님께서 목회 초창기 때 성가대 가운을 하얀색으로 할 것인지 빨간색으로 할 것인지 파란색으로 할 것인지를 제직회에 안건으로 내셨답니다. 그런데 2시간이 걸려도 결론이 안 나더랍니다. 결국은 하얀 가운을 만들었는데 빨간 가운을 원하던 사람은 시험 들어서 다른 교회로 가더랍니다. 이런 사람은 교만해서 자기주장을 포기 못한 것입니다.
진짜 신앙인은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사수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교만이 숨어 있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자유하십시오. 성가대 가운이 파란색이면 어떻고 빨간색이면 어떻습니까? 유도리가 있어야지요.
기독신문에 실린 늘사랑교회 권성대목사님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글입니다. “고려 말 이방원과 정몽주의 대화이다. 이방원은 정절을 강조하며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정몽주에게 시 한 수를 읊는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何如歌)’라고 한다. 이에 정몽주는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강조하며 ‘단심가’로 화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결국 이방원은 심복을 통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했다.
난 목회 초기에 ‘단심가’를 좋아했었다. 진리에 관한 한 철저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회를 바로 하고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목회 말년에 나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에서 목회의 여유를 느끼게 되었고, 교회의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생명을 걸만한 진리의 문제로 부딪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은 편견으로 인해, 또는 자기주장이 밀리는 것을 견디지 못해 목숨 걸고 나서는 경우였다. 결국 교회는 부딪힘 속에 분열하고 우리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고 마는 것이다.
조금만 힘을 뺄 수 없을까?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두고 서로 화목한 관계로 설 수 있다면 나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진리문제가 아닌 것에도 유도리가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리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지만 그 외의 문제에 대해는 다른 사람의 뜻을 따릅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다른 사람 밑에 들어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온유와 겸손한 한 팀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강퍅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것 같지만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겸손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하면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눌릴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크게 활약한 밀른(Milne)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던 로버트 모리슨 박사와 동역 하는 선교사가 되고자 선교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선교본부에서는 “자네는 선교사로서는 적합하지 않네. 정 원한다면 모리슨 박사의 심부름꾼으로 보낼 수는 있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밀른은 겸손한 마음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좋습니다. 선교사로서 자격이 못된다면 심부름꾼으로 가겠습니다. 나무도 패겠습니다. 물도 길러 오겠습니다. 그 외에도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래서 선교본부에서는 그를 심부름하는 사환으로 중국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후에 그는 중국 선교사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겸손한 그를 사용하시고 높여주신 것입니다.
4. 구원자이신 예수님(9절)
주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양의 내용은 9절에 나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여기 보면 사람들은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wJsannav(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당시 군중들은 주님에게 호산나를 외치며 구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던 구원은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재난 중의 하나가 B.C. 175년경 헬라의 왕 안티오코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일입니다. 안티오코스는 헬라의 사상과 문화에 심취된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주의를 박멸하고 이스라엘에 헬라의 생활과 문화, 헬라의 사상과 종교를 이식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고의적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기 위해 성전 제단에 돼지고기를 헌물로 드리고 성전에 있는 각 방들은 공인된 매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사본을 가지고 있거나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면 사형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마카비 형제들이 일어나서 B.C. 167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안티오코스를 추방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마카비 형제들처럼 로마군인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정치적인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지도자였다면 나귀를 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한 나귀 새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정치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인 구원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마태복음 1:21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다른 구원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사도행전 4:12을 보겠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신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고린도전서 1:18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십자가가 미련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고난을 기념하며 경건하게 한 주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나누었습니다.
1.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3절).
2.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신 분이십니다(4,5절).
3.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십니다(5절).
4.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9절).
성경을 들고 믿음의 고백을 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임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처럼 말씀을 이루며 살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셨음을 믿습니다.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