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37
9월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연중 제2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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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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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iWt-Acbx9Y
(최영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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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동료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꿈꾸는 희망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의 정화입니다. 좀더 따뜻하고 낙관적인 시선, 활짝 열린 너그럽고 관대한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싶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희망사항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좁고 경직된 시선, 차갑고 비관적인 시선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딱딱하고 냉랭한 시선의 소유자들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꼬투리 잡기, 말꼬리 잡기, 비비 꼬인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기입니다. 그의 시선은 안타깝게도 상대의 작은 실수나 부족함을 잡아내고 지적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 좋은 것들, 정말 아름다운 대상들, 고귀한 가치들이 정말 많은데, 그 소중한 것들을 모두 놓치고 팍팍하게 살아가니, 이
그 얼마나 울적하고 불행한 삶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꼭 그랬습니다. 그들은 꾸리꾸리하고 때묻고 남루한 자신들의 전통과 율법을 완전 파기시키고 등장하신 신선함의 끝판왕이신 예수님의 존재가 무척이나 껄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 새 포도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실체를 도무지 인정할수도 수용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뒷꽁무니를 살금살금 따라 다니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꼬투리 잡기요, 흠집내기요, 말꼬리 잡기였습니다.
안식일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는 일을 한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밀이삭을 왕창 뜯어다가 절구에 넣고 찟은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며 심심풀이 삼아 고작 밀 이삭 몇가닥을 뜯어 손으로 비벼먹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은 기다렸다듯이 안식일 규정 위반이라고 외치며 설레발을 친 것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야말로 침소봉대요 확대해석의 끝판왕이 아닐수 없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윗 사건까지 호출하시며 그들의 완고한 시선을 꾸짖으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제사빵을 먹지 않았느냐?' 보십시오. 절박한 상황 앞에서는 우선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메뉴얼이나 규칙, 율법이라 할지라도 한 인간의 생명 앞에 결코 우선시 될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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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던 7대 주요 농작물로는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올리브, 석류, 대추야자를 꼽습니다.
그 중에서도 밀은 유다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빵의 기본 재료로 가장 으뜸가는 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동 지방에서는 몇 천년 전 부터 곡식을 경작해왔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유적지나 예리코 등지에서 불에 탄 밀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주부들은 매일 맷돌로 밀을 갈아 빵을 구웠습니다.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 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복음 6장 2절)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 두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쪼잔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루카 복음 6장 3~4절)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 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 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고 용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복음 6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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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비판의 피해자는 자신>
영국에 있는 대형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젊은 신사가 이 박물관에 들어와 그곳에 진열된 작품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그 작품들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노트를 꺼내 이것저것 열심히 적으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습니다.
처음부터 이 청년의 수상한 거동을 지켜보던 수위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그 젊은 신사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같은 작품들 앞에서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설명 태도는 너무나 진지했고 어린이들은 아주 잘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관람이 끝나고 돌아가려던 그 신사에게 수위가 궁금했던 것을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어째서 어제는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작품을 보셨습니까?”
그러자 그 선생은 “바로 이 아이들의 작은 키로 이들이 볼 수 있는 눈높이에서 작품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죠.”
우리는 우리 판단에 대해 너무 자신 있어 할 때가 많고, 혹은 그것 때문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한 자매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 해 준 것인데 재미있습니다.
자신이 길을 가는데 버버리 코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뒤쫓아 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 했는데 그 사람도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뒤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막 뛰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자신의 버버리로 이 자매를 가리면서 귀에 이렇게 속삭이더라는 것입니다. “치마가 엉덩이에 끼였어요!”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 대부분은 크나 작으나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병원 봉성체 때 안수를 해 주려고 하면 누워서 침을 뱉고 욕설을 하는 아주머니가 생각납니다. 이 분은 침대에 손이 묶여 있는데 손을 머리 쪽으로 가져가면 머리를 이리 저리로 흔들며 괴로워합니다.
아프게 하려는 것이 아닌데 이전의 기억 때문에 그러는지 복을 주려는 사람도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 안에서 상대를 보면 자기 기준을 벗어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서양 속담에 ‘저녁에 의자를 사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저녁 때 일을 하고 피곤한 상태가 되면 모든 의자가 다 편해 보이게 돼서 아무 것이나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는 ‘배고플 때 식료품을 사러가지 말라’고 하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다 맛있어 보이니 과소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는 남자를 다시 고를 때 시간을 좀 두고 골라야지 그 안에 절망과 화가 남아있다면 올바로 남자를 고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마음엔 율법의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미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사리분별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의도하는 대로 보이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 눈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는 관점을 ‘주관’이라고 하고, 제3자가 보는 관점을 ‘객관’이라고 합니다. 주관이란 말 안에는 나의 생각이 개입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즉 이미 나의 판단은 할 때서부터 내 자신의 생각에 의해 오염되어 인식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인식의 순간부터 오류에 빠지는 것이니 그 인식을 통한 판단이야 어떻겠습니까?
사람이 완전히 순결하고 깨끗하고 악한 마음이 하나도 없기 전까지는 누구를 완전히 판단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그 믿음에 반하는 것들은 다 틀려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하여도 베드로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예수님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옳게 보고 판단하실 수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람을 판단하는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Gibson 박사와 Fink 박사는 다음과 같은 발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 도시에서 잘 알려진 큰 사업가이며 유명인사 한 사람이 이 병원을 찾아와서 핑크 박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주 안절부절 하고 긴장 중에 있습니다. 푹 쉬어서 마음에 안정을 찾으려고 애를 써도 잘 되지 않습니다. 나의 건강상태는 양호합니다. 또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편안히 쉴 수 있는지 좀 알려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핑크 박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근래에 그런 문제를 다룬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미 한 두 권의 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무 해답도 주지 못했고, 그 사람은 그렇게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간 후에 그의 말은 핑크 박사에게 큰 도전거리를 주었고 또 자기들이 어떤 중요한 포인트를 놓친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브손 박사와 함께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장장 두 시간의 회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과거 2년 동안의 모든 기록을 조사해서 그 사람처럼 긴장과 불안에 싸여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통적인 요소나 특징이 혹시 없는가를 찾아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작업에 착수했고, 오랜 작업 끝에 드디어 한 가지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 증상을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내려는 태도, 즉 남을 비판하는 정신이나 태도였습니다.
무슨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남에게서 찾아내어 책망하고 비판하려는 자세, 남의 잘못을 언제나 말하고 생각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그런 증상의 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한 직원들은 스스로 놀라서 한 두 시간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의 결점이나 잘못에 관심을 두고 생각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세는 심적인 불안, 고통과 심지어 정신병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판단 받지 않으려면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기준으로 너희도 판단 받게 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의학적으로 규명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면 자신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두려움도 커진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잘못하다가는 바리사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도 비판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긴다면 항상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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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통신호는 신호등과 수신호 중에 수신호가 우선권이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있거나, 공사 중인 경우에는 교통경찰이 수신호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통신호등은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대중교통을 검색했습니다. 차로 가면 주차료도 비싸고 워낙 교통이 막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검색했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환승하는 역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하철을 타니 환승하는 역이 한 정거장 차이가 났습니다. 인터넷을 믿고 내렸더니 환승하는 지하철이 없었습니다. 지금 지하철에서 안내하는 노선을 따라야 했습니다. 인터넷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잘못 내리는 혼동이 있었습니다. 삶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긴급한 상황에서는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하인처럼 늘 깨어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이했던 것처럼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깨어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22년 9월은 어떤 상황인가?’ 먼저 지구의 환경을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위기의 상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황님은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지금처럼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면 지구는 곧 ‘임계점’에 다다를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는 계속 우리에게 더 이상의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만년설이 녹으면 엄청난 자연재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지금 북극의 얼음은 녹고 있습니다. 만년설도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유례가 없는 가뭄, 홍수, 무더위, 태풍을 겪고 있습니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지구의 기온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면 많은 대도시들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지구에 머물며 잠시 지내고 가는 손님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생각합니다. 신앙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박해와 시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로 개종을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내적인 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소자의 감소입니다. 제가 있는 미국은 교회를 통합하고, 줄여야 하는 곳이 생기고 있습니다. 빈 교회가 늘어나고 있으며, 매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둘째는 급격한 고령화입니다. 저 출산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팬데믹을 겪으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익숙해진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큰 교회는 유지가 되지만 작은 교회는 교회 운영에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는 1990년도에 2000년대 복음화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복음화가 무엇인지 설명하였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을 도입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교회는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매년 신축성당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예비자들도 늘고 있었습니다. 교구에서 주도하는 2000년대 복음화 운동과 소공동체 운동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인이 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1993년에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식으로 혁신을 강조한 ‘신경영 선언’, 2003년에는 ‘천재경영론’, 2010년에는 ‘위기론’, 취임 25주년인 2012년에는 ‘창조 경영’에 이르기까지 한국 경제사에 변곡점이 될 만한 혁신을 주도해 왔습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을 시작으로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의 분야에서 글로벌 1위에 올랐습니다. ‘타산지석’이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혁신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2022년 9월의 교회에도 혁신과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타이르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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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1-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절)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본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해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것보다,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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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가난한 이가 남의 밭에서 아직 추수하지 않은 곡식을 얼마간 잘라 먹는 것은 율법상 허용된 일입니다.(신명 23,26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 남의 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 자체는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바리사이들은 그것이 ‘안식일에 행한 노동’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와 관련한 명백한 규정이 오경의 율법에는 없으며, 바리사이 자신들이 지키던 구전 율법을 근거로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구전(口傳) 율법을 집대성한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서른아홉 가지 노동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안식일에 꽃이나 열매를 잘라서는 안 된다거나 알곡 한 톨도 까부를 수 없다는 세부 규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확과 탈곡에 관한 이런 규정들은 본래 노동을 금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소에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거룩한 빵을 합당한 절차를 통하여 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과거에 이 거룩한 빵을 속인인 다윗과 그의 일행이 허기져 먹은 일이 있었는데(1사무 21,1-7 참조), 바리사이들이 이를 두고는 아무 비난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다윗의 주님’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당신께 사람이 만든 안식일 규정들을 덧씌우고 속박하려 들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아집과 완고함을 짚어 깨우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경직된 사고와 잣대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옥죄고 단죄하는 마음으로는 주님의 길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는 길’(제1독서 참조)은, 비록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먹을지언정,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가까이에서 황금빛 밀밭을 자유로이 따라 걷는 그 삶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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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신앙의 고향>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루카4,22)
그곳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을 하면서도 바로 또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일어나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루카4,28-29)
목수 요셉의 아들이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든다며 사람들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지요.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는 어떠한 기적도 하실 수 없으셨지요.
오늘 복음을 들으며 다음 세 가지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 읽어주셨던 이사야 예언서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을 받은 이유, 그리고 세 번째는 신앙의 고향에 관한 부분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카4,18)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묶인 이들에게 자유를 알려주고, 눈이 먼 이들은 보게 하며,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차적인 선택이 가난하고 삶이 힘겨우며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단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일차적인 선택이라는 교황님의 교령, 즉 회칙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본당과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을 통해서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가장 버림받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너에게 해 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어떻게, 또 얼마만큼 배려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탄복하지만 곧 인간적인 반응을 드러냅니다. 신앙과 불신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또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신앙인이지만, 반면에 일상에서 나의 의지대로만 하고 싶어하고 인간적인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불신앙의 표본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다시 말해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결코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행복한 국민이 되려면 대통령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존경받는 대통령을 둘 때 그 국민은 행복해집니다. 마찬가지로 본당 신자들이 행복한 신앙 생활을 하려면 본당 사목자나 본당 수도자에 대한 존경이 절로 우러나와야 합니다. 이럴 때 행복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본당 신부나 수녀를 보고 당신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데 하는 시각으로 다가서면 신자나 사제, 수도자가 모두 불행해집니다. 모두가 함께 거룩함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하듯이 신자들 역시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행복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신앙의 고향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가 되면 고향을 찾습니다. 구정이나 추석이 되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고향에 가면 마음이 참으로 편하고 풍요로워집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고향에 가서 위로를 받고 새로운 활력을 찾아 재충전을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고달픈 삶의 현장으로 돌아오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고향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고향은 어떻게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를 통해서 내 신앙의 고향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신앙의 고향은 제가 서품을 받은 성당입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지치고 힘이 들면 가끔씩 저는 서품을 받았던 그 성당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순수했던 마음들이 다시 다 되살아나고 오래지 않아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신앙의 고향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은 성당이 신앙의 고향이 될 수가 있겠지요. 또 어린이들 같으면 첫영성체를 했던 성당이 될 수가 있겠고, 내가 결혼을 했던 성당, 또 열심히 활동했던 성당도 신앙의 고향이 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아꼈던 곳이 나만의 신앙의 고향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신앙의 고향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성당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때 우리들 신앙의 뿌리는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곳에 오래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사들을 많이 하게 되지요. 지금 자라고 있는 어린이와 청년들은 분명 대부분이 이 곳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학생 시절이나 청년 시절은 많은 경우 신앙의 불모지대와도 같은 시기입니다. 공부와 세상적인 일에 더 많이 마음을 쓰고 사느라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시기이지요.
그러다가 40대 중반이 넘어서면 다시 신앙을 찾는 시기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때 자신이 복사를 했던 성당, 또 결혼을 했던, 성당, 열심히 활동을 했던 성당, 성서 쓰기를 하고 기뻐했던 성당 등을 찾아보면서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회복시키기도 합니다. 신앙의 고향은 중요합니다.
신앙을 다시 회복시켜 주고 하느님과의 끈을 다시 이어 주는 곳이 바로 신앙의 고향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의 고향을 갖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행복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에게 신앙의 고향은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나자렛 사람들의 인간적인 냉담함, 그리고 우리 신앙의 고향에 관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방문하였을 때 사람들은 자기 고장 출신의 예수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고 극히 인간적인 시선으로, 즉 한낱 가난한 목수의 아들 신분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대하고, 하느님이 계신 곳이라는 열정으로 교회의 모든 일에 앞장선다면 그곳이 여러분의 행복한 신앙의 고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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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늘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자.>
무엇인가를 가지면 가질수록 좋다. 재물, 지식, 지위, 명예, 완력 등, 어떤 것이라도 가지면 가질수록 편리하며 좋다. 그것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일들을 하게하고, 남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한다.
하느님께서도 세상을 창조하신 후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리도록 맡기셨다. 사람에게 세상을 주신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다스림으로써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하신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사람을 그만큼 믿으셨음을 뜻한다. 때문에 우리가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것이며,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진 것을 잘 활용하며 서로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자칫 사람이 가진 것에 얽매이면 문제가 생긴다. 가진 것에 얽매이면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가진 것을 사용하려 하지 않고 자신만이 꼭 움켜쥐고 내놓지 않으려 한다.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 사람보다 나아가 하느님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심하면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해하기도 한다. 가진 것이 마치 자신인 것처럼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자만과 교만에 빠진다. 그래서 가진 것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러나 제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가진 것이 나는 아니다. 나는 다만 가진 것을 관리할 따름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람에게 맡기셨듯이, 하느님께서 내가 가진 것을 나에게 맡기셨을 따름이며, 나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내가 가진 것을 관리할 따름이다.
내가 관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가진 것이 곧 나인 것처럼 착각하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죄에 빠지게 된다.
고린토 교회에는 교만에 빠진 교우들이 많았다. 이들의 교만으로 인하여 코린토 교회는 분열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구원의 길에서 이미 목표점에 이르렀다고 믿었으며 왕이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바오로는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부당한지 지적한다.
그는 사도로서 벌써 목표점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으며,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도상에 있음을 강조한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당하는 고난을 달게 받으며 살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자신이 그처럼 살아감을 본받아 겸손하게 살기를 권고한다.
오늘, 나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나는 이 세상에 선물로 태어났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내가 노력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상에 선물로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내가 이처럼 성장하고 성숙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도 사실 내 것이 아니었다. 미모, 재능, 완력뿐만 아니라 학식, 재물, 명예나 지위 등 그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졌다.
삶은 곧 선물이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안다면 나는 결코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주신 선물을 받고 산다는 감사의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 겸손한 삶을 살자.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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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루카 복음은 구원의 완성과 그 기쁨을 노래하는 복음입니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더 이상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신 주님을 맞이할 넉넉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애써 가꾸어야 할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 스며든 시간적 배경도 끝자락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것은 추수할 때의 행동이지요. 대개 성경 안에서, 추수는 이른바 종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과도기가 아니라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예전의 약속이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추수’라는 이미지가 밝히 드러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도,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도, 좀 더 나은 내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논박할 이유도 없습니다. 완성의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성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이 부족해 보이고,ㅇ아직 멀었다 싶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모두 부자고 성공하였으며, 그래서 값진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행여 누가 배고플까, 행여 누가 울고 있을까, 그래서 행여 누구라도 완성의 시간에 누릴 기쁨의 잔치에서 소외될까 고민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배고프지 않게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그리고 변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뒷배가 아주 든든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넉넉하여 나눌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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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지만 큰 차이>
루카 6,1-5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작지만 큰 차이>
누구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본다네
누구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사람을 본다네
사람이 한 일을
보는 사람이
일을 살리려고
사람을 죽인다네
일을 한 사람을
보는 사람이
일을 죽이더라도
사람을 살린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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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신자분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를 위한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 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 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옭아 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에 참례하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글자에 매인 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들은 예언적 말씀에 마음을 닫아걸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말과 규율로 이루어진 그들의 틀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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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동안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마스크 때문입니다. 얼굴의 거의 절반을 가리다 보니 누구인지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읍내에 있는 빵집에 갔다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식빵을 사기 위해 이 집을 가끔 들리는데 사장님께서 “신부님이시죠?”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사제임을 쉽게 알 수 있는 로만칼라를 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반바지에 흰색 면티를 입고 있어서 겉모습만 보면 그냥 동네 아저씨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신부인지를 아셨는지, 혹시 성당에 다니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지난번에 한번 로만칼라를 하고서 빵집에 왔던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스크도 쓰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신부님 눈이 많이 처져 있어서 기억났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눈 하나만으로 저를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적인 것을 잘 관찰하고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 사장님께서 그런 분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전부를 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ㅇ가장 큰 특징인 사랑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ㅇ그런데 많은 이가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주님을 알려고 합니다.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한 충돌이 일어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때를 가리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율법 자체가 절대적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이 있다면 관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손을 비벼 먹은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밀 두 이삭 이상을 따면 그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또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곡식을 타작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하긴 안식일에 떨어진 과일을 먹어서는 안 되었고, 과일이 떨어질 수 있으니 안식일에 나무에 올라가서도 안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난 계란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고발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법으로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율법으로 얽어매서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알려면, 주님의 사랑만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보고서 주님을 알려고 한다면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예수님을 반대했던 종교 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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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김의 여정>
-섬김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한평생 은총과 복이 이 몸을 따르오니,
오래오래 주님의 집에서 사오리다.”(시편23;1.6)
어제 오전 내내 수녀님들의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이 역할 또한 섬김의 직무중 하나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은 단 하나, ‘섬김’으로 요약됩니다. ‘봉사’란 한자보다 ‘섬김’이란 순수한 우리말이 훨씬 좋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원장 수녀님에게 고백성사를 드리며 감동했습니다. 그 섬김의 직무가 시작도 끝도 없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감했습니다. 고백성사후 사죄경과 더불어 격려성 조언이 생각납니다.
“아, 순교자 성월 9월은 수녀님의 달입니다. 수녀님은 살아 있는 순교자의 삶입니다. 공동체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분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여정, 섬김의 직무를 통해 날로 주님과 가까워질 것이며 날로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중심 자리에 섬김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여정, 섬김의 책임등 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하나 파스카의 영성,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요, 우리 모두 섬김의 직무를 맡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지의 말씀을 드렸는데 후에 만나 뵐 때, 환하고 밝은 모습에, ‘아, 수녀님은 원장이란 섬김의 직무를 기쁘게 수행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십대 초반, 삼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수도원 초창기, 분원장 소임에 주방장 소임, 손님 담당에 전화 소임등 1인 몇역으로 전천후 다목적용으로 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때는 자동응답기도 없어, 한밤중 자다 깨어나 피정신청 전화를 받았을 때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가 격렬한 항의를 받고 즉시 사과한 후 깨달은 바로 다음의 진리입니다.
“아, 나는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교회는 수도원은 서비스업종이구나! 훌륭한 서비스업에 종사하려면 세 요소를 갖춰야 되겠다, 첫째 사람이 좋아 친절해야 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눙해야 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 쾌적快適해야 하겠구나. 서비스업인 음식점이나 병원, 학교를 보면 금방 들어나는 구나. 수도원의 우리 수사님들은 모두 섬김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셈이구나.”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섬김의 직무입니다. 성덕의 잣대는 섬김의 겸손, 섬김의 사랑, 섬김의 환대일 것입니다. 섬김의 직무에 온힘을 다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온통 섬김의 삶으로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투명하게 비워졌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를 닮았습니다.
어제 가톨릭 신문 1면에는 추기경에 서임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추기경 서임식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서임식에서 유추기경에게 바레타를 씌워 주며 “우리 함께 나아가자”고 말했고, 유추기경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다”고 화답했습니다. 유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지난 5월29일 추기경에 임명됐을 때 순교자의 삶을 본받겠다고 다짐했다”며 “잘 죽는 삶을 살겠다”고 각오를 피력했습니다.
주님의 착한 목자로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듯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분골쇄신粉骨碎身,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군림하거나 지배하려는 생각을 말끔히 치워버리고 당신을 닮아 섬김의 직무에 충실하라는 우리 모두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의 소임등 모든 일은 “섬김의 일” 하나로 요약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섬김의 중심에서 만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확언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여정에, 섬김의 직무에 항구하고 충실할수록 날로 주님과 가까워지며 주님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 섬김의 사도가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질그릇같은 우리 안에 선사된 하느님 영광의 빛이 섬김의 활동에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됨을 깨닫습니다. 평주간 오늘 제1독서중 섬김의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도 감동입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집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1코린4,11-13)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으로 정의합니다. 다음 유명한 성구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성규, 머라45-46)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예외없이 평생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주님을 섬기는 학원에 재학중이 평생학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사랑의 여정에서처럼 우리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예전 김수환 추기경님이 산행중 산사山寺에 들렸을 때 젊은 스님이, “추기경님은 고등학생같다”는 말에 “아니다. 나는 재수생이다”라 대답한 유머가 생각납니다. 주님을 섬기는 “섬김의 학교”에서 졸업이 없는 영원한 재수생인 우리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섬김의 베테랑을 소개합니다. 바로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암브로시오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대(大)”자가 붙는 교황은 대 레오 교황과 둘뿐입니다. 생전에 동시대의 베네딕도 성인은 비록 못만났지만, 성인을 참으로 흠모하여 그 유명한 베네딕도 전기를 쓰신 분으로 누구보다 베네딕도 성인의 영성에 정통했던 교황님입니다.
어제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에 관한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무위키를 출력하니 장장 13쪽이었습니다. 1.생애초기, 2.수도생활, 3.교황사절, 4.교황시절, 5.선교, 6.전례개혁과 방대한 저술, 7.자선등 항목을 통해 파란만장한 삶에 그 위대한 업적이 정말 불가사의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그대로 중세기초 로마는 물론 유럽을 구한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처럼 다방면에 천재일 수 있는지, 64년 한 생애에 보통 사람의 몇백배는 사신 분이요, 천재라는 말도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 불가사의한 인물입니다.
교황님의 전 삶을 요약한다면 섬김에 전력투구했던 삶입니다. 성인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교황에 대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정의도 그레고리오 교황으로부터 유래합니다. 얼마나 신도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대중의 강력한 지지로 사후 즉시 성인으로 시성됩니다. 교황님의 어머니 역시 성녀로 “실비아”입니다. 교황은 604년 선종전 약5년간은 크나큰 병고를 겪습니다. 교황님의 일기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599년에는 “열한 달 동안 나는 거의 침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통풍과 고통스러운 근심들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매일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다.”고 적었으며, 600년에는 “근 2년 동안 나는 침상 위에 매여 있었다. 통증이 너무 괴로워서 축일에조차 세시간 동안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 버겁다. 나는 매일 죽음의 문턱에 서고, 매일 그 앞에서 내쳐진다.
그리고 601년에는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 교황님이 선종한 해는 604년이니 임종전 말년의 병고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대로 섬김의 직무에 전력투구했던 순교적 삶의 결과요, 참으로 휴식 이 없는 죽어야 휴식에 늘 고통이 따랐던 성인들의 생애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의 와중에도 마음 깊이에는 찬미와 감사, 평화와 기쁨, 희망과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봅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섬김의 직무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름다운 입당송이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관상가이자 신비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 줍니다. 섬김의 원천은 바로 주님과의 관상적 일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복된 그레고리오는 베드로 좌에 올라,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기리며 살았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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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6,2)
<율법 위에 있는 사랑!>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안식일에는 39가지 노동을 금지했는데, 그 가운데에 하나가 추수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은 행위는 추수행위에 해당되니, 이는 율법 규정을 어긴 것이고, 그러니 율법 안에서만 보면 바리사이 몇 사람의 지적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적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 곧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준 일을 그들에게 언급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마르 2,27)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율법 위에 사랑이 있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것이 곧 '진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하느님의 행위를 할 때에는 항상 이 진리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이 진리에 맞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입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고 선언한 최초의 교황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리면서, '규정이나 법 위에 있는 본질'을 늘 먼저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하느님의 종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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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dhI3L8Px_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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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9.03.토.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 5)
안식일의 본질은
사람의
참된 길이다.
사람의 길은
마음의 길이다.
우리 마음이
올바르면
안식일도
올바르다.
마음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우리모두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사랑의 길은
안식일 율법에
사로잡혀
있지않다.
먼저
자기자신을
보는 깨어있는
사람으로 우리가
돌아서는 것이다.
깨어있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랑과
깨어있는 지혜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악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도 사랑을
실천하신다.
안식일의 탈을 쓰고
세속의 방식을 따르는
모순된 우리들
신앙이다.
참된 신앙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다.
사랑의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다.
다시 안식일의
주인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안식일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의 일이다.
사랑을 위한
안식일이다.
아름다운
사랑의
안식일이다.
여기 안식일의
사람이 있다.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 받아야 할
사람이며
사랑을 실천해야 할
사랑의 사람들이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은
활짝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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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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