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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 R》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끝내 월드컵에서는 완성되지 못한 황금 투톱
축구를 오래 좋아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대표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마라도나였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지단이나 호나우지뉴였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그런 선수였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브라질이 낳은 위대한 공격수였지만, 그들이 축구를 지배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호마리우가 수비수들의 시야에서 조용히 사라진 뒤 골문 앞에 다시 나타나는 선수였다면, 호나우두는 수비수들이 뻔히 보고 있어도 폭발적인 속도와 힘으로 정면을 돌파하는 선수였습니다. 호마리우의 축구가 골을 넣기 위해 불필요한 모든 동작을 지워가는 과정이었다면, 호나우두의 축구는 인간의 신체로 어디까지 가능할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까웠습니다.
한 명은 가장 좁은 공간에서 위대했고, 다른 한 명은 가장 넓은 공간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두 공격수였기에 오히려 서로에게 완벽한 파트너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지금 다시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들이 함께 이룬 성취보다도 끝내 함께 이루지 못한 장면입니다. 호마리우와 호나우두는 각각 브라질을 월드컵 정상으로 이끌었고, 모두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동시에 브라질의 주전 공격수로 월드컵 무대를 밟는 모습은 결국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994년에는 호마리우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있었고 호나우두는 아직 어린 후보 선수였습니다. 1998년에는 두 사람이 세계 최고의 투톱으로 완성된 듯했지만 호마리우가 부상으로 쓰러졌습니다. 2002년에는 호나우두가 기적처럼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호마리우가 스콜라리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 명이 돌아오면 다른 한 명이 사라졌고, 두 사람의 시간이 마침내 겹치는 듯하면 또 다른 변수가 그들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래서 호마리우와 호나우두의 이야기는 두 명의 위대한 공격수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끝내 완전히 겹치지 못한 두 시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 브라질이 위기에 빠질 때 나타난 호마리우
1993년 브라질은 월드컵 본선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브라질 축구의 역사와 자존심을 생각하면 월드컵 본선 진출은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지만, 실제 예선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브라질이 다시 찾은 선수가 호마리우였습니다.
호마리우는 이미 PSV 에인트호번에서 유럽 최정상 공격수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수많은 골을 넣으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1993년에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표팀에서의 위치는 클럽에서의 명성과 달랐습니다. 호마리우는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강한 자존심과 자유분방한 태도로 유명했습니다. 감독과의 충돌도 적지 않았고, 대표팀에서 멀어진 기간도 있었습니다. 다루기 쉬운 선수는 아니었지만, 골이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 그보다 믿을 만한 공격수도 없었습니다.
브라질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 걸린 1993년 우루과이전이 바로 그런 경기였습니다.
호마리우는 자신이 브라질을 월드컵으로 보내겠다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실제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습니다. 브라질은 우루과이를 2-0으로 꺾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했습니다.
말로 예고하고, 경기장에서 그대로 증명하는 선수.
그것이 호마리우였습니다.
그의 자신감은 때때로 오만하게 보였지만, 호마리우는 자신이 한 말을 골로 바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수였습니다. 브라질은 한동안 그를 외면했지만, 가장 절박한 순간이 되자 결국 다시 호마리우에게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호마리우는 자신을 다시 부른 브라질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 1994년의 영웅
1993-94시즌 호마리우는 FC 바르셀로나에서 자신의 유럽 커리어를 대표하는 절정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당시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팀’에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등과 함께 공격을 이끌었고, 리그 30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바르셀로나 역시 라리가 정상에 섰습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최전방은 호마리우와 베베토가 책임졌습니다. 두 사람의 성격은 달랐고, 경기장 밖의 관계가 언제나 친밀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라운드 위에서는 서로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베베토가 넓게 움직이며 수비진을 흔들면 호마리우는 중앙의 빈틈을 찾아 들어갔고, 호마리우에게 수비가 집중되면 베베토가 그 옆의 공간을 이용했습니다. 두 사람의 조합은 화려하다기보다 정확했습니다. 불필요한 움직임은 적었지만, 골이 필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둘 중 한 사람이 결정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호마리우는 조별리그 러시아전과 카메룬전에서 연속으로 골을 넣었고, 네덜란드와의 8강전에서도 득점했습니다. 스웨덴과의 준결승전에서는 후반 막판 결정적인 헤딩골을 터뜨려 브라질을 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대회에서 5골을 기록했고, 브라질은 24년 만에 월드컵 결승전에 올랐습니다.
결승전 상대는 이탈리아였습니다.
프랑코 바레시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수비진은 호마리우를 효과적으로 막아냈고, 경기는 연장전까지 0-0으로 끝났습니다. 승부차기에서 호마리우는 브라질의 두 번째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시켰습니다. 마지막 순간 로베르토 바조의 슈팅이 골대 위로 넘어가면서 브라질은 네 번째 월드컵 우승을 확정했습니다.
1994년은 호마리우라는 선수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장면이 담긴 해였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리그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고, 브라질 대표팀에서는 월드컵 우승과 대회 최우수선수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해 호마리우는 브라질 선수 최초로 FIFA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선수에도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월드컵 우승팀의 한쪽에는 훗날 호마리우의 시대를 이어받을 어린 공격수가 앉아 있었습니다.
호나우두였습니다.
호나우두는 1994년 월드컵 당시 고작 17세였습니다. 브라질 대표팀 최연소 선수였던 그는 최종 명단에 포함됐지만, 본선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호마리우와 베베토라는 완성된 공격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4년의 호나우두는 브라질의 현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직 미래였습니다.
하지만 그 미래가 현실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3) 호마리우가 유럽을 떠나고, 호나우두가 그 자리에 서다
월드컵 우승 이후에도 호마리우는 한동안 바르셀로나에 남아 있었지만, 1995년 1월 플라멩구로 이적하며 브라질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그는 불과 28세였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세계 최고의 선수가 전성기의 한가운데에서 유럽을 떠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호마리우에게 유럽에서의 성공은 반드시 오래 유지해야 하는 지위라기보다, 이미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하나의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PSV에서 득점력을 증명했고, 바르셀로나에서 리그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여기에 월드컵 우승까지 더했습니다. 유럽에서 더 많은 명성과 돈을 얻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일이 호마리우에게는 더 중요했습니다.
호마리우가 유럽을 떠난 뒤에도 골은 계속됐습니다. 그는 플라멩구와 발렌시아, 다시 플라멩구와 바스쿠 다 가마를 오가며 득점을 이어갔습니다. 유럽 중심의 시선에서는 그의 전성기가 일찍 끝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호마리우는 브라질과 남미 무대에서 오랫동안 최정상 공격수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호마리우가 유럽을 떠난 자리에 새로운 브라질 공격수가 등장했습니다.
호나우두였습니다.
1994년 월드컵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던 소년은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한 뒤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호나우두는 단순히 빠른 공격수가 아니었습니다. 빠르면서도 강했고, 강하면서도 섬세했으며, 최고 속도로 달리는 중에도 공을 발에서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수비수가 거리를 두면 과감하게 전진했고, 가까이 달라붙으면 짧은 드리블로 벗겨냈습니다. 몸싸움이 시작돼도 균형을 잃지 않았고,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에서는 침착하게 마지막 선택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호마리우가 골문 앞에서 시간을 멈추는 선수였다면, 호나우두는 경기장의 시간을 갑자기 빠르게 만드는 선수였습니다.
1996년 호나우두는 공교롭게도 호마리우가 떠난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시간은 한 시즌뿐이었지만, 그 한 시즌은 축구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개인 시즌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호나우두는 1996-97시즌 라리가에서 34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수비수 여러 명을 달고 질주하는 장면과 골키퍼까지 제친 뒤 마무리하는 모습은 당시 축구팬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호마리우가 떠난 바르셀로나의 최전방을 또 다른 브라질 공격수가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호나우두는 호마리우의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었습니다.
호마리우가 이미 완성된 골잡이의 정답을 보여준 선수였다면, 호나우두는 기존의 공격수 분류 자체를 무너뜨리는 선수였습니다. 그는 윙어처럼 빠르고, 미드필더처럼 드리블했으며, 전통적인 중앙 공격수처럼 골을 넣었습니다.
1996년 호나우두는 FIFA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고, 이듬해에도 다시 같은 상을 받았습니다. 호나우두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은 최연소급 스타가 되었고, 축구계는 그를 ‘페노메노’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명은 브라질로 돌아가 여전히 골을 넣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유럽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습니다.
1994년에는 호마리우가 세계 최고의 선수였고 호나우두는 그의 뒤에서 배우는 소년이었습니다. 불과 2년 뒤에는 호나우두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두 세대가 교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마침내 두 사람의 전성기가 같은 시간 위에서 만났습니다.
4) 마침내 완성된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브라질 대표팀에서 함께 뛰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의 조합이 과연 잘 맞을지를 의심하는 시선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 선수 모두 골을 넣는 중앙 공격수였고, 모두 자신의 팀에서 가장 중요한 공격 자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 두 사람은 서로 경쟁하기보다 서로에게 부족한 공간을 채워주었습니다.
호마리우는 더 이상 경기장 전체를 누빌 필요가 없었습니다. 호나우두가 공을 몰고 전진하면서 수비수들을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나우두 역시 모든 공격을 혼자 완성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수비진을 흔든 뒤 호마리우에게 공을 전달하면, 호마리우는 가장 짧고 정확한 방법으로 공격을 마무리했습니다.
호나우두가 수비 블록을 부수는 선수였다면, 호마리우는 그렇게 부서진 수비진의 틈을 놓치지 않는 선수였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유형이 아니었기에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호마리우는 수비수의 어깨 뒤에서 움직였습니다. 경기에 오래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수비수가 잠시 공을 바라보는 순간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의 움직임은 크지 않았지만, 항상 상대가 가장 곤란해지는 위치로 향했습니다.
호나우두는 정반대였습니다. 그가 공을 잡으면 수비수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모였습니다. 한 명이 달라붙으면 돌파했고, 두 명이 다가오면 그 사이로 빠져나갔으며, 수비진이 뒤로 물러서면 더 빠르게 전진했습니다.
호나우두가 상대의 시선을 빼앗았고, 호마리우는 그 시선이 사라진 공간을 차지했습니다.
1997년 브라질은 코파 아메리카와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연이어 우승했습니다. 카푸는 훗날 두 사람의 조합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 조합 중 하나라고 회상했습니다. FIFA의 기록에 따르면 호마리우와 호나우두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19경기를 함께 뛰며 합계 34골을 넣었습니다.
1997년 한 해에 두 사람은 브라질 대표팀에서 무려 34골을 합작하며 코파 아메리카와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전은 두 사람의 파괴력을 상징하는 경기였습니다. 브라질은 호주를 6-0으로 꺾었고,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나란히 해트트릭을 기록했습니다.
한 경기에서 한 팀의 두 공격수가 각각 세 골씩 넣었습니다.
두 선수의 차이와 조화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브라질에는 두 공격수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카푸와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양쪽 측면을 오갔고, 둥가가 중원을 지휘했습니다. 레오나르두, 데니우송, 주니뉴 파울리스타 등 기술적인 선수들도 공격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팀의 마지막 장면은 대부분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완성했습니다.
1997년이 끝날 무렵, 브라질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습니다. 호나우두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고, 호마리우는 브라질과 발렌시아를 오가면서도 여전히 골문 앞에서 가장 위험한 공격수였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조합이 이미 완성돼 있었습니다.
1994년 월드컵에서 벤치에 앉아 호마리우의 우승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제 호마리우와 같은 위치에서 브라질의 공격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호마리우는 1998년 월드컵이 자신과 호나우두의 대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말을 과장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실제로 세계 최고의 투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월드컵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가장 완벽해 보였던 바로 그 순간부터 엇갈리기 시작했습니다.
5) 1998년, 첫 번째로 사라진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호마리우는 종아리 근육을 다쳤습니다.
그는 끝까지 출전을 원했습니다. 당장 조별리그에는 출전하지 못하더라도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회복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고, 호마리우 자신도 월드컵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최종 명단 제출 시한이 다가올 때까지 부상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리우 자갈루 감독과 브라질 대표팀 의료진은 호마리우를 최종 명단에서 제외했습니다. 호마리우는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투톱으로 월드컵에 나설 것이라 믿었던 선수에게 부상으로 인한 탈락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1998년 호마리우가 월드컵에 가지 못한 이유는 감독과의 갈등도, 기량 저하도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부상이었습니다. 관련 기록에서도 호마리우는 근육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최종 엔트리 제출 당일 제외된 것으로 정리돼 있습니다.
호나우두의 파트너는 베베토가 맡았습니다.
베베토는 여전히 노련하고 훌륭한 공격수였지만, 1997년의 호마리우와는 역할이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상대 수비진이 호나우두에게 집중될 때 그 부담을 똑같은 수준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선수는 당시 호마리우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호나우두는 브라질을 결승까지 이끌었습니다. 그는 대회에서 4골을 넣었고, 네덜란드와의 준결승전에서도 선제골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호나우두가 경기 당일 발작 증세를 보인 것입니다.
처음 발표된 선발 명단에는 호나우두의 이름이 빠져 있었고, 이후 다시 선발 명단에 포함됐습니다. 그는 결국 경기에 출전했지만 평소의 호나우두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브라질은 프랑스에 0-3으로 패했습니다.
호나우두는 대회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볼을 받았지만, 결승전의 충격은 그 모든 성취를 가렸습니다.
그 패배 이후 브라질에서는 자연스럽게 호마리우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호마리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호나우두에게 쏠린 부담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프랑스 수비수들이 호나우두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을까.
물론 호마리우가 있었다고 해서 브라질의 우승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축구의 결과는 한 선수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98년이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함께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던 가장 완벽한 시기였다는 사실입니다.
호마리우는 32세였고, 골문 앞에서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호나우두는 21세였으며 신체적으로 가장 폭발적인 시기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대표팀에서 성공적인 호흡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월드컵이 시작되기도 전에 한 명이 사라졌습니다.
1994년에는 호마리우가 뛰고 호나우두가 벤치에 있었습니다.
1998년에는 호나우두가 뛰고 호마리우가 관중석 밖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만의 첫번째 월드컵은 그렇게 엇갈렸습니다.
6) 호나우두가 쓰러지자, 호마리우가 다시 돌아왔다
1998년 월드컵 이후 브라질 대표팀은 호나우두를 중심으로 새로운 공격진을 구성했습니다. 호마리우는 세대교체라는 명목하에 대표팀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졌고, 히바우두와 아모로주, 호나우지뉴 같은 선수들이 새로운 세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호나우두는 다시 한번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히바우두와 함께 대회 득점왕에 올랐고, 1998년 결승전의 충격을 털어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말, 호나우두의 축구 인생을 바꾸는 부상이 찾아왔습니다.
인터 밀란에서 뛰던 호나우두는 오른쪽 무릎 힘줄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긴 재활 끝에 2000년 4월 라치오와의 코파 이탈리아 경기에서 복귀했지만, 투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같은 무릎을 붙잡고 쓰러졌습니다.
이번에는 슬개건이 완전히 파열된 심각한 부상이었습니다.
그 장면은 당시 축구팬들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수비수와 부딪쳐도 쓰러지지 않던 선수가 공을 제대로 다투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였던 호나우두가 다시 뛸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운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호나우두가 재활에 들어간 바로 그 시기, 대표팀에서 멀어져 있던 호마리우가 다시 전성기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바스쿠 다 가마로 돌아온 호마리우는 브라질과 남미 무대를 지배했습니다. FIFA 클럽 월드컵에서 득점왕에 올랐고, 코파 메르코수르와 브라질 리그에서도 바스쿠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호마리우는 이미 34세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축구는 나이가 들수록 쇠퇴하기보다 더욱 단순하고 날카로워졌습니다. 젊은 시절처럼 넓은 공간을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수비수보다 반 발 먼저 출발했고, 공을 받은 뒤에는 한 번의 터치로 슈팅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체력과 속도는 줄어들었지만 골이 만들어지는 원리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더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브라질 대표팀이 2002년 월드컵 남미예선에서 흔들리자, 다시 호마리우를 찾았습니다.
1993년과 비슷한 장면이었습니다.
브라질은 위기에 빠졌고, 결국 가장 믿을 만한 골잡이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습니다.
호마리우는 2000년 9월 볼리비아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습니다. 이어 10월 베네수엘라전에서는 4골을 넣었습니다. 두 경기에서만 7골이었습니다. 당시 보도에서도 그는 2년여 만의 대표팀 복귀 후 볼리비아전 해트트릭에 이어 베네수엘라전에서 4골을 몰아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호마리우는 자신을 다시 부르기만 하면 골을 넣고 브라질은 승리할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습니다.
젊은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신감이었습니다.
1993년 월드컵 진출의 위기에서 브라질을 구했던 선수가 7년 뒤 다시 브라질의 예선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해 호마리우는 바스쿠 다 가마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남미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습니다. 34세의 공격수가 다시 남미 최고의 선수로 올라선 것입니다.
반면 호나우두는 경기장이 아닌 재활 시설에 있었습니다.
1997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상대 수비진을 무너뜨렸습니다.
2000년에는 호마리우가 그라운드에서 골을 넣는 동안 호나우두가 멀리서 그 장면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두 선수의 위치가 뒤바뀐 것입니다.
한때 어린 호나우두가 호마리우의 우승을 벤치에서 지켜봤다면, 이제는 부상당한 호나우두가 노장이 된 호마리우의 부활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두 사람의 시간이 엇갈리고 있었습니다.
7) 2002년, 돌아온 호나우두와 선택받지 못한 호마리우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 대표팀의 상황은 복잡했습니다.
브라질은 남미예선에서 여러 차례 감독을 교체하며 고전했고, 결국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가 대표팀을 맡았습니다. 호나우두는 장기간의 부상으로 정상적인 경기 감각을 증명하지 못한 상태였고, 호마리우는 여전히 브라질 무대에서 골을 넣고 있었습니다.
전력만 놓고 보면 호마리우의 월드컵 출전을 기대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2002년의 제외는 1998년과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1998년에는 몸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2002년에는 감독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스콜라리는 처음부터 호마리우를 무조건 배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대표팀 소집과 관련된 갈등이 누적되면서 두 사람의 신뢰는 무너졌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2001년 코파 아메리카 소집 문제입니다. 호마리우는 부상과 치료 등을 이유로 대표팀 참가가 어렵다는 뜻을 전했지만, 이후 바스쿠 다 가마의 해외 일정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스콜라리의 불신을 샀습니다.
스콜라리는 자신이 호마리우에게 여러 차례 기회를 줬지만 그가 응답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제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당시 보도에서도 스콜라리는 호마리우가 대표팀 요청에는 부상을 이유로 응하지 않은 뒤 소속팀 일정에는 참가한 사건을 중요한 이유로 들었습니다.
호마리우의 설명과 스콜라리의 설명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 번의 사건만으로 모든 과정을 단순화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2002년 제외는 기량 부족보다는 감독과의 신뢰 붕괴, 규율과 팀 운영에 관한 판단이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브라질에서는 호마리우의 발탁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셌습니다. 과거 대표팀 감독이었던 자갈루도 자신이라면 호마리우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팬들은 스콜라리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호마리우 역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스콜라리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브라질 대표팀의 공격진에는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나우지뉴, 에디우송, 루이장 등이 포함됐고, 호마리우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1998년에는 부상 때문에 출전할 수 없었던 호마리우가 2002년에는 뛸 수 있는 몸을 가지고도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팬의 입장에서 2002년의 제외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호마리우가 대표팀에서 완전히 밀려난 그 순간, 호나우두는 기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8) 달리는 황제에서 골을 기다리는 황제로
2002년 월드컵의 호나우두는 1996년과 1997년의 호나우두와 같은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그는 공을 잡은 위치와 상관없이 혼자서 공격을 시작하고 끝낼 수 있었습니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잡고도 수비수 여러 명을 돌파해 골을 넣을 수 있었고, 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그를 정면으로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의 심각한 무릎 부상은 그의 신체를 바꿔놓았습니다.
호나우두는 더 이상 매 순간 최고 속도로 질주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처럼 무리하게 수비수 여러 명을 상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움직임을 절약했고, 골이 만들어질 수 있는 위치를 먼저 찾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변화는 호나우두를 호마리우와 조금 더 닮은 공격수로 만들었습니다.
젊은 호나우두가 넓은 공간을 지배했다면, 2002년의 호나우두는 페널티박스 안의 짧은 순간을 지배했습니다. 공이 어디로 흐를지를 예상했고, 수비수보다 먼저 골문 앞으로 움직였습니다.
스피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스피드만으로 경기 전체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호나우두는 터키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부터 골을 넣었습니다. 중국전과 코스타리카전에서도 득점했고, 벨기에와의 16강전, 터키와의 준결승전에서도 골을 기록했습니다.
독일과의 결승전에서는 두 골을 넣었습니다.
첫 번째 골은 히바우두의 슈팅을 올리버 칸이 완전히 처리하지 못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밀어 넣은 골이었습니다. 과거의 호나우두라면 수비진을 질주로 무너뜨리는 골이 먼저 떠올랐겠지만, 이 골은 골키퍼의 실수를 예상하고 끝까지 공의 흐름을 따라간 공격수의 골이었습니다.
두 번째 골은 클레베르송의 패스를 히바우두가 흘려준 뒤 침착하게 오른발로 마무리했습니다.
브라질은 독일을 2-0으로 꺾고 통산 다섯 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호나우두는 8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1998년 결승전을 앞두고 쓰러졌던 선수가 4년 뒤에는 결승전의 두 골을 모두 넣었습니다.
그보다 더 완벽한 부활 이야기를 만들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호나우두가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호마리우를 좋아했던 팬들에게는 한 가지 생각이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자리에 호마리우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36세의 호마리우가 모든 경기에 선발로 뛰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1997년의 폭발적인 조합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교체로 들어가 골문 앞에서 한 번의 기회를 마무리하는 호마리우는 여전히 위협적인 선택지였습니다. 특히 히바우두와 호나우지뉴가 기회를 만들고 호나우두가 수비의 시선을 끄는 팀에서, 호마리우의 위치 선정은 또 다른 무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브라질은 호마리우 없이 우승했습니다.
그 결과만 놓고 보면 스콜라리의 선택은 성공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마리우가 있었다면 더 나빴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2002년 월드컵은 스콜라리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옳았음을 증명한 대회였지만, 동시에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함께 월드컵에 나설 수 있었던 마지막 가능성이 사라진 대회이기도 했습니다.
1994년에는 호마리우가 우승의 주인공이었고 호나우두는 벤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2002년에는 호나우두가 우승의 주인공이었고 호마리우는 대표팀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브라질의 유니폼을 입고 세계 최고의 투톱이 됐지만, 월드컵 우승의 순간에는 언제나 한 사람만 그라운드에 있었습니다.
9) 끝까지 골을 넣은 두 사람
2002년 월드컵 이후 호나우두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습니다. 그는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호베르투 카를루스, 이후 데이비드 베컴과 함께 갈락티코 시대를 대표했습니다.
부상 이전의 폭발적인 움직임을 완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골 결정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2003-04시즌에는 라리가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체중과 부상 문제가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호나우두는 예전보다 무거워진 모습으로 대회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결국 3골을 넣으며 월드컵 통산 15골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월드컵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이었습니다.
브라질은 8강에서 프랑스에 패했습니다.
1998년 결승전에서 호나우두의 브라질을 무너뜨렸던 프랑스가 8년 뒤 다시 그의 월드컵을 끝낸 것입니다.
호나우두는 이후 AC 밀란을 거쳐 브라질 코린치안스로 돌아갔습니다. 유럽을 떠난 뒤에도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넣었지만, 반복되는 부상과 몸 상태 문제를 이겨내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2011년 호나우두는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호마리우는 그보다 더 오래 골을 넣었습니다.
2005년, 호마리우는 39세의 나이로 바스쿠 다 가마에서 22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39세 공격수의 리그 득점왕.
이 기록은 호마리우가 어떤 선수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전성기 때도 많은 활동량을 보여주는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뛰는 대신 누구보다 정확하게 움직였습니다. 따라서 신체 능력이 떨어진 뒤에도 자신의 가장 위대한 능력만큼은 오래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골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고, 수비수가 언제 공을 놓치는지 알고 있었으며, 골키퍼가 어느 순간 움직이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능력이 조금씩 사라져도 그 감각은 마지막까지 남았습니다.
호마리우는 2008년 공식 은퇴했고, 2009년 아버지의 소원이었던 아메리카-RJ 소속으로 잠시 한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호나우두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마음을 따라주지 않아 은퇴했습니다.
호마리우는 더 이상 증명할 것이 남지 않았을 때까지 골을 넣었습니다.
두 사람은 선수 생활의 마지막까지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10) 함께한 시간보다 엇갈린 시간이 길었던 두 전설
호마리우와 호나우두의 국가대표 경력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면 흥미로운 흐름이 드러납니다.
1994년 호마리우는 브라질의 에이스였고, 호나우두는 그의 뒤를 따르는 어린 선수였습니다.
1996년과 1997년 호나우두가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성장했을 때, 호마리우는 유럽의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1997년 두 사람은 마침내 함께 전성기를 맞았고, 세계 최고의 투톱이 됐습니다.
1998년 호마리우가 부상으로 쓰러지면서 호나우두가 홀로 월드컵의 부담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2000년에는 반대로 호나우두가 무릎 부상으로 쓰러졌고, 호마리우가 대표팀에 돌아와 브라질의 월드컵 예선을 구했습니다.
2002년 호나우두가 부상에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호마리우가 스콜라리 감독과의 신뢰 문제로 대표팀에서 제외됐습니다.
한 명이 가장 강할 때 다른 한 명은 그 옆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잠시 함께했던 1997년의 기록만으로도 우리는 그 조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경기에서 34골.
코파 아메리카 우승.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
한 경기에서 두 공격수가 동시에 기록한 해트트릭.
그들은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 투톱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의 위력을 증명한 투톱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실제로 함께 뛰었고, 실제로 우승했고, 실제로 세계 최고의 공격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월드컵에서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은 이루어지지 않은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이미 완성돼 있던 조합이 가장 큰 무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입니다.
11) 만약 1998년에 호마리우가 있었다면
두 사람이 함께 월드컵에 나섰다면 가장 강력했을 시점은 역시 1998년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호나우두는 폭발적인 신체 능력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공간이 조금만 열려도 수비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었고, 상대는 그를 막기 위해 여러 명의 수비수를 배치해야 했습니다.
호마리우는 32세였지만 결정력과 위치 선정은 여전히 세계 최정상이었습니다.
상대 수비진이 호나우두의 돌파를 막기 위해 간격을 좁히면, 호마리우는 페널티박스 안의 빈 공간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수비가 호마리우의 움직임을 의식하면, 호나우두가 전진할 공간이 더 넓어졌습니다.
베베토도 훌륭한 대회를 치렀지만, 1997년부터 이어진 호마리우와 호나우두의 호흡은 이미 다른 차원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와의 결승전처럼 호나우두가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던 경기에서는 호마리우의 존재가 더 중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호나우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도 골을 기대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절대적인 공격수가 있었다면, 프랑스의 수비 방식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상상입니다.
프랑스는 강했고, 지단은 결정적인 순간에 두 골을 넣었습니다. 호마리우가 있었다고 해서 브라질이 반드시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브라질이 호나우두 한 명의 상태에 모든 공격의 운명을 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998년의 브라질에는 호마리우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호마리우에게도 1998년의 월드컵이 필요했습니다.
호마리우가 1994년뿐 아니라 1998년에도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면 그의 역사적 평가는 지금보다 더 높아졌을 것입니다. 호나우두 역시 1998년의 상처를 홀로 감당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릅니다.
두 사람의 경력에서 가장 큰 갈림길이 될 수 있었던 월드컵이었습니다.
그러나 호마리우의 몸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2) 만약 2002년에 호마리우가 있었다면
2002년의 가능성은 1998년과는 조금 다릅니다.
2002년의 호마리우는 이미 36세였습니다. 모든 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넓은 범위를 소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시 브라질에는 히바우두와 호나우지뉴가 있었고, 두 사람은 호나우두와 함께 대회 최고의 공격진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호마리우가 합류했다면 1997년처럼 호나우두와 고정 투톱을 이루기보다는, 경기에 따라 선발과 교체를 오가는 역할이 더 현실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골이 필요한 경기 막판에 호마리우가 벤치에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호마리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공격수가 아니었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면 충분했습니다.
상대 수비가 지친 후반,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에게 시선이 쏠린 상황에서 호마리우가 페널티박스 안으로 들어왔다면 여전히 매우 위험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2002년의 호나우두는 부상에서 막 돌아온 상태였습니다. 대회 전까지 그가 전 경기를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호마리우는 전술적인 선택지뿐 아니라 보험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콜라리는 개인의 능력보다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팀의 규율과 신뢰를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월드컵 우승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2002년 호마리우의 제외를 단순한 실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스콜라리는 성공했습니다.
다만 결과의 성공이 호마리우의 능력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호마리우는 충분히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는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가 탈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축구 실력보다 감독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1998년에는 몸이 준비되지 않았고,
2002년에는 관계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호마리우는 두 번의 월드컵을 놓쳤습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호나우두는 브라질의 가장 중요한 공격수로 그 대회에 나섰습니다.
13) 제가 기억하는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시간이 흐른 뒤 선수들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면 우리는 더 정확하게 그들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호마리우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70경기 55골을 기록했고, 호나우두는 98경기 62골을 기록했습니다.
호마리우는 1994년 월드컵의 영웅이었고, 호나우두는 2002년 월드컵의 영웅이었습니다.
호마리우는 바르셀로나에서 라리가 득점왕에 올랐고, 호나우두 역시 바르셀로나에서 라리가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호마리우가 떠난 PSV와 바르셀로나를 호나우두가 차례로 거쳤다는 사실도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저에게 두 사람은 기록만으로 기억되는 선수들이 아닙니다.
호마리우가 골문 앞에서 수비수의 시야를 벗어나는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경기 내내 보이지 않는 것 같다가도 공이 페널티박스 안으로 들어가면 어느새 가장 좋은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호나우두가 하프라인 근처에서 공을 잡으면 마음이 먼저 뛰었습니다. 수비수 한 명을 제치고, 또 한 명을 지나쳐 골키퍼와 마주하는 장면이 당연한 일처럼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출전하는 날에는 더 특별했습니다.
호나우두가 수비수들을 끌고 달려가면 그 뒤에서 호마리우가 나타났고, 호마리우에게 수비가 집중되면 호나우두가 열린 공간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때는 그 장면을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98년에도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어쩌면 2002년에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선수들의 전성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짧았고, 두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은 더욱 짧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경기는 단순히 브라질 대표팀의 한 경기가 아니었습니다.
두 명의 역사적인 공격수가 같은 시대와 같은 유니폼 안에서 함께 뛰는, 다시는 반복되기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14) 끝내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욱 오래 남은 투톱
호마리우와 호나우두는 모두 자신의 월드컵을 가졌습니다.
1994년은 호마리우의 월드컵이었습니다.
2002년은 호나우두의 월드컵이었습니다.
호마리우는 브라질의 24년 우승 갈증을 끝냈고, 호나우두는 두 번의 무릎 부상과 1998년의 악몽을 이겨내고 브라질의 다섯 번째 우승을 완성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완벽한 서사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동 서사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1994년 호나우두는 뛰지 못했습니다.
1998년 호마리우는 부상으로 떠났습니다.
2002년 호마리우는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 최고의 투톱은 월드컵에서 단 한 경기조차 함께 뛰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월드컵까지 함께 지배했다면 이 이야기는 더 완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의 상상 속에 남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완성된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지만,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는 질문으로 남습니다.
호마리우가 1998년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2002년에 다시 함께 뛰었다면 어땠을까.
그 질문에는 영원히 정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상상합니다.
호나우두가 공을 잡고 수비진을 향해 달려갑니다.
두 명의 수비수가 그를 막기 위해 움직입니다.
그 순간 호마리우가 수비수들의 시야 뒤로 조용히 사라집니다.
호나우두가 공을 내줍니다.
호마리우가 한 번의 터치로 골키퍼를 넘깁니다.
혹은 반대의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호마리우가 수비수 사이에서 공을 받아 짧게 연결하고, 호나우두가 열린 공간으로 폭발적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골을 넣습니다.
짧았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장면들입니다.
한 명은 골문 앞에서 가장 영리한 선수였고,
한 명은 공을 잡고 달릴 때 가장 두려운 선수였습니다.
한 명은 축구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간단하게 했고,
한 명은 축구에서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호마리우.
그리고 호나우두.
함께한 시간보다 엇갈린 시간이 더 길었고, 끝내 월드컵에서는 완성되지 못했던 투톱.
그러나 짧게 함께한 시간만으로도 세계 축구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두 사람.
그들이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은 이제 팬들의 상상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호마리우와 호나우두의 이야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짧았기에 더욱 강렬했고, 끝내 완성되지 못했기에 더욱 오래 기억되는 황금 투톱.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이것이 제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15) 그리고 다시 만난 두 사람
그렇게 두 선수의 현역 시절은 끝났습니다.
한 사람은 정치인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축구 행정과 사업의 영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호마리우는 브라질 정계에 들어가 상원의원으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방송과 인터뷰를 통해 다시 축구계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호나우두 역시 구단 경영과 축구 관련 사업에 참여하며 그라운드 밖에서 브라질 축구의 한 축을 맡아왔습니다.
현역 시절이 끝난 뒤 두 사람의 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다시 같은 자리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호마리우는 자신의 방송에 호나우두를 초대했고, 두 사람은 오래전 대표팀 합숙소에서 있었던 이야기와 함께 뛰었던 순간들을 웃으며 되돌아봤습니다. 선수 시절에는 서로의 자존심이 워낙 강했고, 때로는 비교와 경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는 경쟁자보다는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낸 동료의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호나우두는 어린 시절 자신이 호마리우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이야기했고, 호마리우 역시 호나우두가 얼마나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수였는지를 인정했습니다.
두 사람은 누가 더 위대한 공격수였는지를 두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서로 쉽게 양보할 리는 없었습니다. 호마리우는 여전히 호마리우답게 자신이 최고라고 말했고, 호나우두 역시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대화 속에는 불편한 경쟁심보다는 서로의 위대함을 가장 잘 아는 두 사람만의 존중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두 사람이 레전드 경기와 쇼볼 행사에서도 다시 같은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그들은 1997년처럼 빠르게 달릴 수도 없고, 세계 최고의 수비수들을 상대로 골을 몰아넣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같은 공간에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그 시절을 기억하는 팬들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갑니다.
호나우두가 공을 잡으면 호마리우가 공간을 찾았고, 호마리우가 골문 앞으로 움직이면 호나우두가 수비수들을 끌고 달렸던 시절.
그들이 함께 월드컵에 나서는 모습은 끝내 볼 수 없었지만, 세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이 웃으며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또 다른 의미의 마지막 장면이 되었습니다.
짧았기에 더욱 강렬했고,
끝내 완성되지 못했기에 더욱 오래 기억되었으며,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만났기에 더욱 따뜻해진 이야기.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그들의 마지막 장은 아직도 천천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첫댓글 잘보고갑니다 ~
타임라인이 안맞았을 뿐이죠.. 뭐..
메시와 야말처럼..
그들이 월드컵에서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은 이루어지지 않은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이미 완성돼 있던 조합이 가장 큰 무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