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나의 길, 아니다.
재벌 되려고 했으면 영종도
평당 10원 할 때 섬 전체를 샀을 겁니다.
정치권 유혹도 많았지만 교육·의료 외엔 관심 없어…
내 꿈은 세계적 인재 키워 愛國하는 것, 그것입니다.
★ 그게 바퀴와 무슨?
"예전 여자들이 옷을 많이 입었잖아요.
그거 벗으려면 한참 걸려요.
전 침대를 세 개 놓고 저쪽 옷 벗을 동안
이쪽보고 옷 다 벗으면 의자를 바퀴로 쑥 밀고
다음 환자 보는 식으로 시간을 줄였습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체력은
어떻게 유지했습니까?
"제 산부인과의 미역국이
유명한데 다 제 언니 작품입니다.
퇴원한 환자 남편이 주전자 들고 많이 왔는데
정작 전 맛볼 시간이 없었어요.
언니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전지분유에
계란 노른자 하나 올려 링거 줄 꽂은 컵을 줬는데
그걸 마실 시간도 부족했어요."
◇붉은 저녁 노을의 기억
"전에는 아내가 입덧하면
남편도 입덧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아내와 같이
산통(産痛)하는 사람도 봤고요.
지금은 어떠냐?
후배들은 못 봤다는 거야?
의사가 환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지,
지금 사람들은 뭔가 다른지."
★ 예나 지금이나 출산은 큰일입니다.
"한번은 얼굴이 새까만 삼십대 남자가
새벽에 병원으로 뛰어들어왔어요.
가방 챙겨 따라 나섰는데 월미도 여객선 터미널에서
영종도행 배를 타는 겁니다.
섬에 내려서도 한참을 걸었어요.
점심때 도착해보니 젊은 여자가
핏기없는 얼굴로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
이불을 들치니 피범벅이 된 채로 그만….
임신중독증이었죠."
★ 허탈합니다.
"그이는 남편도, 의사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어요.
갈 땐 희망이 있었는데 올 때는
붉은 저녁 노을 본 기억밖에 없어요.
제가 적자를 감수하고 양평, 철원,
백령도병원을 인수한 건 그런 경험들 때문입니다.
평생 병원 한번, 의사 얼굴 한번 못 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게 제 평생 고민이었어요."
★ 불과 몇십 년 전인데
우리는 모두 잊고 있습니다.
"자궁외임신 환자가 왔는데
친정어머니가 짐을 주섬주섬 싸는 겁니다.
병원비가 없다면서요.
얼마나 서러웠겠어요.
그때부터 '우리 병원은 보증금이
필요 없다'는 문구를 써 붙였어요.
친구나 선배들은 '저러다
곧 망한다.'고 수군댔지만요."
★ 밀린 치료비 갚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신문지에 망둥이 몇 마리 말아오는 사람도 있고,
쌀, 옥수수, 감자, 짚신에 옷감 짜오는 사람도 있고
, 전 그걸로 환자 야식해주거나 파티했어요.
보증금 안 받는다고 진료비 떼인다고
망하는 병원은 없습니다.
오히려 환자가 더 찾아오니까요."
★ 그래도 개중엔 황당한 환자가 있지 않습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전 컴플레인(Complain·항의)
받은 적이 없어요.
의사들에게 전 항상 이렇게 말해요.
'왜 의사가 돼 불평을 사느냐? 전교 1등도
들어오기 힘든 의대에 와 그 고생해서
의사 됐는데 왜 불평을 사느냐?'고요.
환자를 가슴으로 대할 땐 항의가 있을 수 없어요."
★ 그렇게 밀려드는 환자를 놔두고 미국유학을 갔습니다.
"대학생 때도, 병원 할 때도
꿈은 미국 가는 거였어요.
대학에서 몇년 배운 의술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거든요.
즉시 못 떠난 건 돈 때문이었어요.
어머니께 또 손내밀 순 없잖아요."
★ 미국이 꿈꾸던 모습이던가요?
"하와이, 시애틀을 거쳐 꼬박 하루 만에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했을 때 정말 감탄했어요.
'이런 게 하늘과 땅의 차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메리이머큘레이트병원은 더 대단했어요.
60년대 우리는 주삿바늘을 만들지 못해
재활용하다 뭉툭해지면
숫돌에 갈아 쓸 정도였으니까요."
★ 그런 천국을 4년 만에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난한 우리나라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떠날 때 제 치맛자락 붙들고 울던
환자들과 어머니도 생각났고요.
미국에선 말렸죠.
'곧 영주권도 나올 텐데'라면서요.
미국인 스승은 귀국 후 항상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주셨어요.
'네 자리는 아직도 남겨두고 있다'는 문구와 함께요."
★ 그러다 1975년 다시 일본유학을 떠납니다.
"귀국 직후 전 거대한
환자의 숲에 갇혀 있었어요.
그런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띵'하며 '어?
난 뭐야.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이게 뭐야'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벤츠 타고 일직선을 질주하다
커다란 바위에 부닥친 것 같은,
일종의 우울증이었죠.
그래서 다시 떠났어요, 니혼대(日本大)로."
★ 거기선 병리학을 연구했지요.
"킴멜스틸 박사라고 당뇨병의 세계적 권위자가 있는데,,
제 스승인 다케우치 다다시 교수가 그분 제잡니다.
거기서 박사학위도 받았지만 더 큰 소득도 있었어요.
의료선진국인 일본을 보며 귀국하면
꼭 종합병원을 세워야겠다.
무의도(無醫島)나 무의촌(無醫村)
같은 곳에 병원을 만들어야겠다.
좋은 의사를 길러내기 위해 교육에
힘써야겠다는 세 가지를 그때 결심한 겁니다."
◇나는 바람개비다
"1977년 6월 전 재산을 출연해
의료법인을 설립하려 할 때,
어머니가 말하셨어요.
'여태 결혼도 안했는디…여자 혼자 살라믄 돈이라도 있어야지.
니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디
늘그막에 돈꺼정 없으면 뭣에 의지해 살라고 그러냐.'"
★ 진짜 의료법인은 왜 만든 겁니까?
"의료법인은 소유 개념이 없어요.
병원을 사회에 헌납한다고 생각해야 할 수 있는 거죠.
손익을 묻는 분들이 많았는데 답은 세월이 말해줬지요.
계속 발전했으니까요."
★ 한창 길병원이 커 갈 때
도산한 양평병원을 맡았습니다.
"서울의대 후배 중 이성우 복지부
의정국장이 있었는데 만나재요.
해외경제협력기금을 받아 세운 양평병원이
2년간 방치됐는데 선배가 맡아
달라더군요. 현장은 폐허였어요.
가득한 거미줄에 여기저기 철근이 튀어나와 있고.
안 되겠다 싶어 되돌아 나오는데 할머니
몇분이 치맛자락을 붙들고 우시는 거예요.
'우리 할아범이 중병에 걸렸는데
큰 병원에서 주사 한번 맞고 죽는 게
소원이랍니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