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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3국을 가는 방법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겠지만 대부분 우즈베키스탄을 거쳐서 가거나 두바이를 거쳐서 가게 된다.
두바이는 2019년도 모로코를 가면서 두바이를 둘러 보았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항공을 이용하여 가기로 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까지는 4,800km로 7시간이 걸리고 한국보다 4시간이 늦게 간다. 우리가 서쪽으로 갈 때는 그 시간만큼
늘어나게 되고 동쪽으로 갈 때는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타슈겐트는 4시간이 늦고 거리는 4,800km 떨어져 있으며 7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집에서 여행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설 때가 가장 설레는 시간으로, 출발 시간이 10시 10분이기 때문에 7시까지 공항을 도착을 하
기 위해서 새벽에 집에서 나올 때가 그런 기분을 느끼는 때이다.
공항에서 우리 일행 여섯 명이 먼저 미팅을 하고 나서 가이드로부터 일정표와 수신기를 지급 받고, 각자 알아서 키오스크에서 티
케팅을 하고 출국수속을 밟는데 처음에는 키오스크에서 항공권 발매를 하는 것이 어려웠으나 지금은 참으로 편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본래는 10시 10분에 출발을 하여야 하였으나 30분 지연 출발하는 바람에 타슈겐트에도 늦게 그만큼 늦게 도착하였는데, 도착한
시간이 13시 30분으로 여행지에 도착하면서 시간을 벌게 되면 그만큼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타슈겐트 탑승구..
가능하면 창가로 좌석을 잡는다...인천공항 상공
첫번째 기내식....가짓수가 많다.
타슈겐트에 도착을 하고..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는 곳으로 왔는데...밴드가 와 있다.
선수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듯 연주를 한다.
한 번 촬영을 해보았다.
식사는 비행기에서 하였기 때문에 입국 수속이 끝나고 공항을 나오는 대로 곧바로 타슈겐트 관광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하루 잠을 자고 아제르바이젠의 바쿠로 출발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오후 시간에 관광을 하게 된다.
타슈겐트에서 우리가 들렀던 곳...파란 별표를 한 곳이다....타슈겐트는 1966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거의 파괴가 되다 시피하여 계
획도시로 새로 만들어지다 시피하여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었으나 그래도 가 볼 곳이 많으나 시간이 없기도 하고 이곳이 관광대상
이 아니기 때문에 동선이 가깝고 중요한 몇 곳만 들렀다.
처음에 간 곳이 지진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1966.4.26. 새벽 5.22분 7.5도의 강진이 일어나 사망자 8명, 부상자 1,000명, 이재민
75,000명, 건물 붕괴 36,000동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는 구소련 당국의 발표에 따른 것으로 실제 피해는 수만 명의
사상자를 포함하여 훨씬 클 것이라고 한다. 재해 이후 거국적인 복구 지원에 힘입어 2~3년 후 타슈켄트는 현대적 도시로 재건되었
고 건물은 9도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지진 기념비는 그때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다.
잠깐 사진을 찍고 하즈라티(하스트) 이맘광장으로 간다.
타슈겐트 거리
지진 기념공원 (Monument of Courage)
지진이 일어난 시각 1966.4.26일 05.23분을 가르키는 시계
지진이 일어난 년도와 날짜
공원의 이름이 Monument of Courage 인 것처럼 슬픔을 묵묵히 이겨내고 극복한 것을 기념하는 듯한 조각상이다.
여자는 아기를 업고 있고...
벽에 있는 사람들은 지진을 극복하는 과정을 표시한 듯...
관광객들에게 이곳은 인증샷을 남겨야 하는 곳 중의 하나일 뿐...
하스트 이맘 광장으로 간다.
이슬람교 사원의 외곽에 설치하는 첨탑. 옛날에는 한 사원에 하나가 있었지만, 지금은 1~6기를 세우고 있으며, 하나 또는 몇 개의
발코니가 딸려 있어 예배 시간을 알리고 축제일에는 불을 켜기도 한다
하자티 이맘 광장(Hazrati Imom majmuas)은 이슬람권의 유네스코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교육과학문화기구(ISESCO)가 매년 이
슬람 문화수도를 발표하는데, 2007년 타슈켄트가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재건된 유적지라고 한다.
이맘 광장에는 압둘라 무록소 자예브 17a 사원, Muyi Muborak Madrasah (Moyie Mubarek Library Museum), Barak Khan
Madrasah 등의 건물들이 있는데 날씨도 덥고 별로 관심들도 없어서 앞에 있는 이맘 모스크와 바라크 한 마드라세에 들어가 구경
하고 인증 샷을 남기고 브로드웨이 거리로 간다.
Hazrati Imam Mosque
하스트 이맘 광장에는 여러가지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하즈라티 이맘 모스크( Hazrati Imam Mosque)로 하즈라티 이맘 이라는
단어는 이슬람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즈라티(Hazrati)는 존경과 고귀함을 나타내는 단어이고 이맘
(Imam) 이슬람 사회에서 종교적 지도자 또는 교사를 의미하는 단어로 하즈라티 이맘은 매우 존경받는 또는 성스러운 이맘을 의미
하는 표현이다.
안으로 들어가고
내부...기도하는 사람도 보인다.
무슨 촬영을 하는 중인 듯...
이슬람 사원의 내부는 아주 단순하다..장식물이 없어서..어떤 형상도 우상숭배로 금지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무것도 없는 내부
돔의 화려한 문양
Barak Khan Madrasah의 상점들
안경집인지 필통인지...
Islamic Civilization Center 건축중인 건물
바라크 한 마르라세의 그늘에 모여 있다.
정문을 확대해서 본 것
하스트 이맘 광장...주변에 이슬람 사원들이 건축되어 있는데...최근에 신축된 건물들이다.
브로드웨이 거리는 아미르 티무르 광장 근처에 있는 거리로 고급 상가와 저녁에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서울의 명동 같은
곳이다. 한낮으로 너무 덥기도 하고 낮이어서 구경할 것도 없어서 이곳이 브로드웨이라는 곳이라는 것만 보고 그냥 지나간다.
우즈베키스탄은 2019년 8월에 다녀 가면서 타슈겐트의 대부분을 보고 갔었는데 브로드웨이는 밤에 와서 제대로 구경을 하고 갔
었다.
브로드웨이 거리
밤에는 사람들이 많지만 낮에는 이런 거리의 모습이다.
낮이라서 썰렁한 브로드웨이 거리
한국 음식을 파는 가게
탁구대도...
펩시콜라가 후원을 하는 거리인가???
아래 사진은 2019년도에 왔을 때 밤에 찍은 브로드웨이 거리의 사진으로 사람들이 넘쳐 난다.
식당을 가는 길에 아미르티무르 광장을 지나가면서 아미르티무르의 동상을 보고 지나간다.
아미르 티무르는 티무르제국을 건설한 사람으로 칭기즈칸에 비교가 될 정도로 정복 전쟁을 많이 하였으며 정복한 땅에서 사람들
을 많이 죽인 것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더 유명한 것은 죽을 때 ‘누구든지 감히 내 무덤을 건드리면 전쟁의 악마가 그 나라에 닥칠 것이다’.(whoever would dare
disturb the tomb would bring demons of war onto his land) 라는 유언을 했다고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6.22.일 구소련에서
아미르 티무르의 무덤에서 유골을 꺼내었는데 그 날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혼비백산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독소전쟁에서 한동안 소련이 불리한 형국에 있었는데 발굴조사가 끝나서 무슬림 전통 장례식을 거쳐 티무르를 재매장하였
는데,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붙이게 되었다고 하며 이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아미르 티무르의 무덤은 사마르칸트에 있는데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를 관광하는 여행이기 때문에 타슈겐트에서나 우즈베키스탄
에서의 관광은 이것으로 끝이다.
아미르 티무르 광장에 있는 그의 기마상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미르 티무르의 무덤의 내부천정
내벽..황금색 모자이크이다.
식당쪽으로 걸어가고...앞에 보이는 건물은 우즈베키스탄 호텔로 2019년도에 와서 3일을 묵었던 호텔이다.
식당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5시로 한국시간으로는 9시인 셈으로 배도 고플 때가 되었다.
타슈겐트의 현지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데 꽤 유명한 식당 같아 보인다. 음식도 여러 가지가 많이 나오는데 다 못 먹을 정도로 양도 많고 가짓수도 많다.
호텔에 도착한 시간이 현지 시간으로 6시지만 현지시간으로는 10시인 셈이다.
호텔도 생각보다 럭셔리하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에 있는 벽화 Corruption은 부정부패를 뜻하는 단어인데 아마도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그림인 듯
식당가...
식당 간판을 읽을 수가 없어서...
내부는 생각보다 무척 넓다.
볶음밥과 야체
샤슬릭까지...양이 많아서 절반도 못는다.
우리 일행은 우측에 일렬도 앉아 있다.
주방..외부에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음식들은 현지인들에게 파는 것인 듯...
숙소에 도착을 하고...
구글에 검색해보니 3성급 호텔로 1박에 10만원이 넘는다.
리셉션 벽에 걸린 시계에 서울은 없다...섭섭하게시리...
좀 길었던 하루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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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르 티무르의 무덤의 개봉과 관련한 전설같은 실화
1941년 봄,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
이제 준비는 끝났다.
최고 지도자 스탈린의 명을 받고 지난 10년 간 조사와 준비를 해 왔다.
이제 중앙아시아로 가서 아무르 티무르의 무덤을 열고 유해만 가져 오면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타지키스탄 출신의 중앙아시아 역사학자 아이니(S. Aini)
저명한 동양 고대-중세 사학자 세묘노프(A. A. Semyonov)
소비에트 고고학계의 거두인 게라시모프(M. M. Gerasimov)
촬영 담당 영화 감독 말릭 카유모프(Malik Kayumov)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향해 비행기를 출발시켰다.
1941년 6월 16일,
구르아미르(Go'r Amir)에 도착한 일행은 지하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전기장치와 기중기를 설치했다.
과연 500년이 지난 이 시점까지 유해는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일까?
먼저 아무르 티무르의 관 주변에 있는 아들 샤흐 루흐와 손자 미르조 울루그벡의 관을 열기로 했다.
있었다.
유해는 잘 보존돼 있었고 큰 아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된 울루그벡은 살해된 사람은 수의가 아닌 살해 당시의 의복
그대로 매장하는 관습에 따라 수의가 아닌 왕의 일상복을 입은 모습 그대로 였다.
<기중기로 관을 들어 올리는 연구팀-기록영상 화면 캡처>
이제 아무르 티무르의 관을 열 차례...
이런, 기중기가 말을 안 듣고 딱 멈춰 서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손으로라도 관을 열려고 낑낑대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까지 나가버렸다.
일순간 모두에게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찰나, 허름한 차림의 노인 3명이 지하 묘실로 들어 왔다.
"이 보시오, 이 관을 열면 전쟁의 혼을 풀어 놓는 것이오. 여태껏 보지 못한 잔인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오.
여기 책에 그리 적혀 있지 않소? 당장 그만 두시오." 노인들은 책을 펼쳐 보이며 강하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르 티무르의 목관-기록 영상 화면 캡처>
연구팀의 참모는 그들을 쫓아 내고 작업을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한 학자가 그 책이 필요하다 생각해 묘실을 나간 노인들을 급히 따라 갔지만 그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때가 1941년 6월 20일 오후 3시였다.
드디어 아무르 티무르의 관은 열렸고 석관 내부에는 다시 소나무로 만든 목관이 들어 있었다.
관을 뜯어내고 유골을 수습한 연구팀은 모스크바에 무전을 하고 아주 간만에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1941년 6월 21일 새벽,
갑자기 숙소에 나타난 사마르칸트 지역 공산당 간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라며 외쳤다.
학자들은 아연실색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도 정확하게 노인들의 예언대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르 티무르의 유골은 모스크바로 이송됐다.
전쟁은 비극 그 자체였다.
히틀러와의 불가침 조약을 신뢰했던 스탈린은 세계 대전의 참화 속에도 소련은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전쟁은 일어났고, 붉은 군대는 독일에게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하고 밀리고만 있었다.
6개월 간 계속된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에서만 200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밀리기만 하던 와중에,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 주코프(G. Jukov) 장군은 아무르 티무르의 유해 발굴 현장에 촬영 감독으로
참여했던 말릭 카유모프에게서 3명의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된다. 노인들이 했던 예언대로 아무르티무르의 무덤이
열리고 전쟁이 났다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은 주코프 장군...
장군은 수화기를 들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우연이든 아니든 불길한 내용임에 틀립없습니다. 사실 일어나지 않을 전쟁이 발생했고 소련군은 계속해서 밀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일단 그의 관을 닫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은 분명 아무르 티무르의 저주입니다."
스탈린은 많은 고민을 한 후 그의 말을 수용했다.
1942년 12월 20일,
공산체제하의 소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성대한 이슬람식 의식과 함께 아무르 티무르는 다시 자신의 관으로 들어갔다.
다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개전 이후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붉은 군대는 아무르 티무르의 관이 다시 닫히고 나서 이틀만에 첫 승리를 거두고
그 이후 계속 승승장구해서 독일군을 몰아내고 승전국이 된다.
1943년,
소련 공산당은 100만 루블을 사마르칸트로 내려보내 구르 아미르를 완벽하게 복원하라 명한다.
여전히 전시 상태이던
당시에 100만 루블은 탱크 16대를 구입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상의 사실은 당시의 촬영을 담당했던 감독의 기록으로 남아 있고, 주민들은 그런 영력있는 아무르 티무르를
지금도 추앙하고 있다. 다시는 아무르 티무르 대왕의 관이 열리는 저주가 없기를 기원하면서...
인너넷에서...
"누구든지 감히 내 무덤을 건드리면 전쟁의 악마가 그 나라에 닥칠 것이다."
"whoever would dare disturb the tomb would bring demons of war onto his land."
역시 그는 전신(戰神)임이 틀림없다.
위의 내용들은 위키 백과에서도 등재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시신의 확인을 통해서 전승으로만 전해지던 티무르가 오른쪽 절름발이 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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