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 일상의 길들여진 몸에서 떠나는 것이다
왜 여행을 떠나는가. 백인백색의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대답들에도 공통점은 있다. 많은 이들은 말한다. 여행은 떠남이며,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고. 동어반복 같지만, 이 말 속에는 분명한 하나의 진실이 담겨 있다. 모든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그것이 바로 여행이라는 진실.
돌아 보라, 언제 여행을 꿈꾸는가를. 반복되는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이 시들해지고 질릴 때, 기꺼이 여행은 현실이 되지 않았던가. 그 떠남은 곧 만남이기도 하다. 새롭고 낯선 미지의 세상과의 조우, 일상 아닌 것과의 만남. 만나기 위해선 떠나야 하고, 떠나야만 만남의 기갈을 채울 수 있다. 익숙한 것을 떠남은 두려운 경험이다. 낯선 세계와의 만남은 공포를 야기한다.
팍팍한 일상에서 등을 떠밀릴 때
그러나 그 두려움과 공포는 아슬아슬하기에 더욱 짜릿한 것이다. 고갈된 내면을 자극하고 채워줄 새로운 것들에 대한 욕망, 그 길떠남에 대한 갈구는 원초적 본능이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류시화, 길 위에서의 생각) 그 막막하고 끝없는 빈 들녘의 바람과 대면할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리고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김훈, 자전거여행)
이윽고 여행의 때가, 어김없이 다시 돌아왔다. 물샐 틈 없는 대규모 관료조직으로 엮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여행조차도 하나의 통제된 사이클을 부여한다. 생각해보라. 떠남과 만남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의 경험일 터. 하지만 촘촘한 조직의 그물망 속에서 그 떠남과 만남의 때조차 이미 극도로 사회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마음 내킬 때 훌쩍 떠나는 여행이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한낱 공상일 뿐인가. 대신, 여름휴가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는 한꺼번에 수많은 떠남과 만남을 풀어놓는다. 여름은 말하자면, 전 사회적으로 조직된 일탈의 한철이다.
그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지옥에서 벗어나려했던 뭇 사람의 시도가, 여행의 끝에선 결국 피로로 점철된 허탈스런 결말로 반복되는 까닭은. 너도나도 똑같은 스케줄과 여정으로 무장한 인파에, 깃발부대에, 차량 물결에 치여, 그토록 꿈꿨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남는 것은 바닥난 은행 잔고와 스트레스다. 쳇바퀴는 결코 일상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씁쓸한 각성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여전히 떠나고 싶어한다. 지금 떠나지 않는다면, 언제 또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일상의 빠듯한 그물은 기약 없는 걱정 속에 사람들을 가둔다. 속절없는 기다림은 더 큰 후회를 낳을 뿐이다. 돌아가 다시 맞아야 할 팍팍한 일상은, 기회가 될 때 어디든, 어떻게든 떠나라고 거센 압력으로 우리의 등을 떠민다. 그래서 괴테도 37번째 생일의 축하파티가 한창 무르익던 1786년 9월3일 새벽녘 몰래 이탈리아로 떠나갔던 것이다. ꡒ새벽 3시에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 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ꡓ라고 그는 <이탈리아기행>의 첫머리에 썼다.
떠남이 필수라면, 결국 문제는 얼마나 잘 떠나는가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피곤하고 짜증스런 결말을 피해, 풍요로운 여행을 일구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길떠남이 꼭 불가능한 임무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찾아보면 뜻밖에도 결코 적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라.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원칙과 방법으로 뜻깊은 여행의 목록을 하나둘 쌓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말 가고 싶은 곳을 찾아라
내가 좋아하는 김은주씨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극한의 오지를 꼽았다. 아프리카 나미브사막.
성공적인 여행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제일의 원칙. 정말 가고 싶은 곳을 찾아 미련 없이 떠나라는 것이다. 남들 다 가는 해외 한번 나가봐야겠다거나 여름에 그래도 해수욕장에 발은 한번 담가야 한다는 피상적인 고정관념은 말끔히 씻어내버리라는 충고다. 괴테가 찾아 떠난 이탈리아는 그가 유년 시절부터 동경해 마지않던 꿈의 공간이었다. 그 동경의 땅을 향해 괴테는 일상의 굴레를 벗고 거침없이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상상 속에서만 떠올릴 수 있었던 숱한 유적지와 건축물과 조각, 그림 등 위대한 이탈리아 문화의 진수를 직접 눈으로 보고 느꼈다. 일찍이 그림과 스케치로, 동판화와 목판화로, 석고상과 코르크 세공품으로 보아온 것들이 이제 내 눈앞에 즐비하게 펼쳐져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새로운 세계에서 친숙한 대상과 마주친다. 모든 것이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이고, 또한 모든 것이 새롭다고 그는 썼다. 꿈꾸던 것을 직접 만나는 기쁨. 여행의 모든 매력은 그로부터 출발한다.
괴테뿐일까. 김은주(31,여,카피라이터)씨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4군데를 가려뽑았다. 그는 그곳을 한곳 한곳 다녀올 때마다 더할 나위 없는 성취감과 희열에 사로잡혔다. 그 느낌들이 여행 중간의 삶을 밀어간다ꡓ고 그는 말한다. 타이와 아프리카, 북극, 사막이 그가 꿈꿔온 여행지들이다. 이미 타이, 아프리카는 한번씩 밟았다. 타이는 동물을 유달리 사랑하는 그가 코끼리학교에서 코끼리 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찾았던 곳이고, 나머지 3곳은 모두 극한의 오지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보름 동안 코끼리 똥을 치우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아프리카에선 사바나의 광대한 초원을 내려쬐는 열대의 뜨거운 뙤약볕과 씻을 물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에 시달렸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온 사람들의 삶을 느낄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유럽에서 본 예쁜 집들과 풍요로운 환경에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오지엔 있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인간이란 존재에 새삼 감동하게 됩니다.
회사를 다녀 모은 돈들은 대부분 여행 경비로 써버렸다. 극지탐험에만 최소 1500만원에서 2천만원이 든다. 지금 그는 그 돈을 모으기 위해 회사를 다니며, 동물원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한다. 그러나 그 모든 투자가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젊었을 때 그곳들을 가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하며 살 텐데요. 마음에 그리던 곳을 직접 밟고 체험할 때의 그 기쁨을 떠올리면, 돈이나 몸의 고생쯤은 사소한 대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지여행 뒤엔 무얼 하고 싶을까. 놀라지 마시라. 우주가 바로 그가 꿈꾸는 또다른 여행지다. 우주라는 절대적 공간에서 푸른 지구와 은하 가득한 별빛을 느끼고 싶어요. 오래지 않아 우주여행 경비도 많이 내리겠죠. 몇억이 들던 차근차근 준비해 언젠간 꼭 한번 해내고 말 겁니다.
영원히 기억에 남는 테마여행
주제를 정해 떠나는 것도 여행의 지평을 넓히는 좋은 방법이다. 유명하다는 잡다한 관광지를 돌며 증명사진 찍어오는 관광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찾아 떠나는 여행 말이다. 증명사진 관광도 물론 나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증명사진 찍은 만큼은 얻는 것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면 안 된다. 관광에서 여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주제를 갖고 떠날 필요가 있다.(이주헌,미술평론가)
이씨는 국내 처음으로 미술관 기행이란 장르를 열었다. 지난 94년 53일 동안 유럽 50여곳의 미술관을 찾아 여행한 기록을 책으로 냈다. 그뒤로도 그의 이 테마여행은 여러 차례 이어져오고 있다. 처음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이씨는 말한다. 내 눈으로 서양미술의 진수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 이전에도 몇번 관광길에 루브르미술관에 들른 적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 스쳐가는 것이었다. 집중적으로, 체계적으로 미술기행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국내에선 기본적인 정보도 구할 수 없었다. 아직 인터넷도 대중적이지 못하던 때라 어디에 어떤 미술관이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겨우 일본책들을 참고해 갈 곳을 정했다. 그리고 직접 여행 일정을 짜고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했다. 아내와 2살, 4살짜리 아이들도 함께 갔기 때문에 모든 게 쉽지 않았다.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으다보니, 나중엔 책짐이 너무 불어나 고생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갈수록 기억이 생생해지는 뜻깊은 여행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진짜 여행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갈수록 이 진짜 여행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휴가철이면, 그에겐 어떤 미술관이 좋은지를 묻는 문의전화가 쏟아진다고 한다. 미술관기행은 예술작품 감상과 시간여행을 동시에 하는 입체적 여행입니다. 예술작품은 그 사회가 지나온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그 드문 산 체험의 기회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낯선 세상과의 만남을 통한 정신의 성장과 고양이라는 여행 본연의 목적은 테마여행에서 한결 잘 살아날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엔 갈 곳이 마땅찮은 사람들, 주제를 찾아 먼 길을 나서는 것도 마뜩찮은 이들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아예 내 안의 마음길을 찾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온 몸의 오감을 자극하는 현란한 세상사를 떠나 맑은 마음의 근원으로 파고드는 수련여행 말이다.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지친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 인생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아무도 그대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도 그 무엇으로 그대를 위협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 어떤 걱정거리도 그대 마음을 흔들지 않을 시간을 가져야 한다.(여행의 책)
생각하지 않음의 미덕
무라카미의 소설 <댄스 댄스 댄스>의 주인공은 하와이로 떠난 여름여행 동안 일상의 모든 것을 잊고 2주일을 보낸다. 야자수 그늘 아래서의 책(<플레이보이>) 읽기와 라디오 음악(브루스 스프링스턴의 <헝그리 하트>와 제이 가일즈 밴드의 <댄스천국> 등) 듣기, 저녁 무렵 번화가를 어슬렁어슬렁 산책하기 정도가 그의 목록에 올라 있는 몇 안 되는 일과들이다. 그 주인공은 그가 눈치우기라 이름붙인 일상의 일들을 저 멀리 밀쳐버리고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는 하와이다. 무엇 때문에 생각에 잠겨야 한단 말인가.따지고 보면,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식의 휴가여행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벤처사업가 신창식(44)씨는 늘 대충의 윤곽만 잡고 여행을 떠난다. 틀에 얽매이거나 시간에 쫓기는 식은 절대 거부한다. 그냥 한가롭게 일상의 기억들을 비우고 다시 돌아온다. 세상엔 텅 빈 만남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건, 휩쓸리는 여행 아닌 뜻을 품은 여행을 떠나는 건 즐거운 경험이다. 그 여행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밥 딜런, <바람이 말하기를>) 물어보는 드문 기회를 맛보게 된다. 그 대답은 오직 바람만이 알고 있을지라도, 그런 길떠남은 분명 값지다.
여행은 준비, 여행은 공부
돈을 아끼지 말라
자녀는 데려가라
지역을 알고 가라
여행에도 방법이 있다!
누구나 다 색다른 여행, 공부하는 여행, 의미있는 여행을 꿈꾸지만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여름 휴가를 맞으면 늘 해오던 대로 사람 붐비는 곳만 골라 다니다가 바가지 상혼에 얼굴 찌푸리고, 물 반 사람 반 해수욕에 지친 뒤 피로를 풀기는커녕 피로가 쌓여 돌아오기 일쑤다. 왜 그럴까.
너무나 당연하지만 여행에 대해 평소 많은 생각을 해보지 않고 준비도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준비, 여행은 공부다. 공부하고 준비한 만큼 여행의 추억은 커진다. 문제는 실제 이런 것들을 유념하고 따지느냐의 문제다.
스스로를 트래블 디자이너로 소개하는 지일환(<유럽 100배 즐기기> 지은이)씨는 사람들이 해외여행이나 국내여행이나 모두 싼 것을 찾아 결정하는 경향을 지적한다. 천편일률 휴가가 되는 원리는 모두 같다. 내용보다는 가격을 따지기 때문이다. 신문에 여행 전면광고가 나오면 그 내용이 어떻고 어디를 가보는지를 따지기 이전에 다른 여행사 같은 지역 상품과 가격차가 얼마인지를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여행관을 가져야 할까. 지씨의 여행철학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물론 예산을 생각하되 어차피 여행은 돈들일 작정을 하고 벌이는 일인 만큼 돈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지치고 힘들 때, 또는 지적 욕망이 가슴속에 올라와 어딘가 가서 보고 느끼고 싶은 순간들을 만나게 마련. 이런 순간 무리가 되더라도 여행을 떠남으로 해서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면 두려워말고 돈들여 떠날 것을 권한다. 돈은 들어도 추억과 즐거움은 남고, 그것처럼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녀가 있는 사람은. 지씨의 답은 간결하다. 데리고 가라. 돈 많이 드는 해외여행, 특히 유럽여행을 갈 경우라면 더욱 데리고 가라는 것이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코흘리개일지라도 프랑스 오르셰미술관의 미감이 남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음감이 남는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냐는 것이 지씨의 지론. 특히 유럽은 기차패스의 경우 교통비도 16살 이하는 무료이고, 주요 박물관도 16살 이하는 무료이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필요가 없다고 충고한다.
둘째는 알고 가라ꡓ는 것.
우리나라 어느 지역, 외국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가이드북을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지만, 목적지 도착 전에 그곳의 역사와 유명한 문화적 명소는 다 알고 찾아갈 수 있을 정도는 돼야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가서 아 여기가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온 도시야하는 것은 곤란한 일. 지씨는 여행 가기 이전에 여행 기간의 세배 정도 기간을 공부하라고 주문한다. 책과 인터넷으로 접한 정보들이 간접경험에서 직접경험으로 바뀌는 쾌감은 공부하는 여행자만 느낄 수 있는 묘미라는 것이다.
현재 고등학교 교사이면서 여행칼럼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강문근씨는 여행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떠날 것을 주문한다. 뭘까.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을 가라는 것,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남들 가는 곳에 나도 간다는 식, 중년층이면 으레 동남아시아로 가고 대학생이면 유럽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식은 피하라는 말이다. 어디 가는 게 좋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정말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책을 읽다가 우연히 가보고 싶다는 느낌이 든 곳이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가보고픈 충동을 느낀 곳을 가는 것이 좋아요.
여행, 삶과 역사를 빚는 과정
그리스의 영웅들부터 조선의 문인들까지… 길 위에서 정체성을 찾는 사람들
세계화가 가속화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공간의 이동은 더없이 빈번해지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1950년에는 전세계적으로 2500만명에 불과했던 국외여행자가 1995년에는 6억여명에 달했고 2010년에는 10억여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하니, 여행은 이제 그 목적이 휴식을 위해서든, 업무를 위해서든 현대인에게는 필수적인 행위가 되었다.
<서유기>는 구도의 기록
그러나 여행이란 현대에 와서 새삼스럽게 중요해진 일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행위이다. 세계의 모든 신화와 전설에서 영웅적 존재는 언제나 여행 곧 길떠남을 경험한다. 헤라클레스는 사자의 가죽을 벗기고, 괴물 히드라를 퇴치하고, 용이 지키는 황금사과를 따오는, 12가지의 노역을 위해 여행을 해야만 했고 테세우스는 크레타섬의 미노타우로스라는 식인 괴물을 제거하기 위해 미노스 대왕의 미궁으로 떠나야만 했다.
우리 건국신화에서의 주몽 역시 적대자들의 핍박을 피해 엄체수(淹遞水)를 건너 광활한 만주벌판으로의 여정을 떠난다. 중국신화에서는 목천자의 여행이 유명하다. 목천자는 임금으로서 8필의 준마를 타고 서쪽세계로 정복의 길을 떠난다. 마침내 그는 서쪽 끝 불사의 땅인 곤륜산에 도달하여 여신 서왕모를 만나 환대를 받고 돌아온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세계의 모든 영웅신화는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였다. 그것은 출발-과정-귀환의 구조인데 영웅이 길을 떠나 적대자와 투쟁을 하거나 괴물을 퇴치하는 등의 모험을 하고 결국에는 미녀나 보물을 얻어 돌아와 결혼하거나 왕이 된다는 이야기 패턴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의 모험적 여행은 중층적 의미를 지닌다. 즉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먼 길을 떠나고 그 여정에서 영웅적인 업적을 달성하는 일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한 개인이 정신상의 단련을 거쳐 완성된 인격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 환상문학의 걸작 <서유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서방 천축국으로 불경을 얻기 위해 험난한 여행을 떠나는 손오공 일행은 불완전한 인격, 정립되지 않은 자아를 상징한다.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등이 표상하는 것은 나약함, 변덕스러움, 탐욕 등의 정화되지 않은 인간 본능이다. 이들이 여행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요마, 괴물은 모두 우리 내면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들이다. 요마와 괴물을 이겨낸 끝에 천축국에 도착하여 불경을 얻어오는 지상의 여정은 결국 거친 본능과 욕망을 다스려 온전한 성품을 이룩하는 정신수련의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서유기>를 환상적인 여행담이 아닌 구도의 기록으로 읽을 수 있다.
역사 시기에 이르러서도 신화의 이러한 중층적 의미는 지속적으로 추구된다. 공자는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 태산에 오른 이후에 천하가 작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登太山而小天下), 모국에서 이룰 수 없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각국을 주유하게 된다.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젊었을 적에 중국 천하를 유람하면서 각지의 신화와 역사, 풍물과 민속을 체험하고 풍부한 감성, 웅장한 기상을 아울러 함양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그는 거세의 형벌을 당했음에도 불굴의 정신으로 만고의 문장인 <사기>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란 영원의 나그네
시선으로 일컫는 이백은 평생을 여행 속에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일찍이 고향인 사천을 떠나 천하를 유랑하면서 각지의 협객들을 사귀기도 하였는데 그때의 벗이었던 곽자의가 후일 대장군이 되어 반역죄로 처형 위기에 있던 이백을 구해주기도 한다. 이백 문학의 호탕하고 자유분방한 개성은 아마 그의 여행으로부터 길러진 기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백은 그의 산문 〈봄밤의 연회에 부쳐>(春夜宴桃李園序)에서 다음과 같은 명구를 남겼다. 천지란 만물의 여관이오, 시간이란 영원의 나그네이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 이러한 언급이야말로 이백이 여행 그 자체를 삶의 본질이자 우주의 본질로까지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여행인이었던 이백은 죽음마저도 여행길에서 맞았다. 이백이 술에 취해 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설화는 낭만적인 이백의 이미지에 맞게 각색된 것이다. 실제로 이백은 만년을 고독하게 방랑하다가 어느 시골 마을 친척집에서 병사했다.
공자사마천이백 이외에도 중국의 문인들은 여행을 즐겼다. 산문가인 한유유종원, 시인인 소동파, 철학자인 주희 등은 귀양길과 같은 본의 아닌 여행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평소 산수를 사랑하여 자주 유람에 나섰고 그 감흥을 글로 남겼다. 그들이 남긴 여행기는 유기(遊記)라는 문학형식으로 성립된다.
이같이 산수자연에 대한 답사를 통해 성정을 도야하고자 했던 고대 문인들의 정신은 조선조 사대부들한테도 계승되어 15~17세기 사이에 산수유기(山水遊記) 문학으로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들에게 산수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응결된 장소였고 인간의 심성과 감정을 정화시켜주는 수양의 터전이었다. 이들이 조국의 산수를 순례할 때 그것은 민족의 숨결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스스로의 인품을 연마하는 행위가 되었다.
조선의 문인들은 금강산,지리산,소백산,묘향산,삼각산 등 명산을 유람하면서 무려 560여편에 달하는 유산기(遊山記)를 남겼다. 특히 고려말 길재로부터 조선의 김종직, 이퇴계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 및 성리학자들에게 지리산,청량산 등을 중심으로 한 산행의 기록이 많다. 이들은 공자의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즐기고 어진 자는 산을 즐긴다(知者樂水, 仁者樂山)는 자연애호의 정신을 이어받아 산행을 독서와 마찬가지의 수행방식으로 인식했다. 대개 불우한 지식인에 속했던 이들 영남의 선비들은 산행을 통해 궁핍한 마음을 열고 호연지기를 배양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이퇴계의 제자인 조호익은 환난의 도에 처했기 때문에 산수의 진정한 즐거움을 알게 되며 바로 그것이 공자의 산수관의 요체라고 고백한다.
모든 역사는 여행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본다면 여행이란 실로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계발하고 성장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행위이다. 청년기의 방황을 그린 이문열의 <그해 겨울>에서 주인공은 도회를 떠나 경상도의 산촌을 거쳐 동해 바닷가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성숙한 자아로 거듭난다. 헤르만 헤세의 인도여행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왔던가? 헤세는 34살 때 그토록 동경해왔던 인도로의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나쁜 기후와 건강 때문에 인도여행에서 실망감만을 맛보고 오히려 부수적으로 행해진 동남아 여행에서 중국인을 접하게 된다. 이때 느끼게 된 내면적 해방감은 이후 그로 하여금 중국문화에 탐닉하게 하여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