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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한양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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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나라의 도읍' 천도는 쉽지 않은 일.
'하늘길' 내기 만큼 어려워.,천도(天道)
도읍을 옮기는 일 또한 어려워.,천도(遷度)
신 도읍지를 천거하기도 어려워.,천도(薦度)
새 도읍을 결정하기도 어려워.,천도론(遷都論).
조선건국 초 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 개경 기운이 다 되었다는 이유로.,한양 천도.
1398년(정종 원년)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옮겼다.
이때 개경으로 옮겨 간 이유는 한양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골육상잔 참변 탓.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간 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 이양.
태종은 왕위에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의견이 분분
1404년(태종5년) 9월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천도를 단행.
이후,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시대 문화, 정치.,중심.
1392년 7월 17일 태조가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갖자
고려 500년 도읍 개경에서는 민심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 즉위를 반기는 백성들에 비해 냉담했던 기득권층.
"새 왕조에 참여하면
응분의 직책과 신분보장."
태조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과거시험을 외면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간 고려 선비들.
'무언의 항거이고 반기.'
"나오면, 살려 주겠다."
혁명세력은 최후 통첩 후
광덕산 계곡에 불을 질렀다.
이때 화염 속에서 희생된 72명.
조의생, 신우, 임선미 등이 두문불출.
그후, "杜門不出" 사자성어가 확산되었다.
두문동 사건에 충격 받은.,태조 이성계.
혁명에 성공한 개국 공신들은.,공과다툼
눈앞 이익에 혈안이 되어 세력확장에 열중
한양천도 실행은 안중에도 없는.,개국공신들.
왕위에 오른 자신을 따가운 시선으로 보는 개경인들.
이성계는 하루 속히 개성을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권중하, 남은을 대동하고 계룡산을 답사.
계룡산을 신도읍으로 지목하고 공사 명령.
개경에서 동행한 김주를 눌러앉혀., 지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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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계룡산 신도읍을 반대하고 나선.,'경기도 관찰사' 하륜.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남쪽에 치우친.,계룡산."
신도읍 안(案)은 원점으로 돌아가.,무학도사, 권중화까지 재검토.
'풍수지리학' 대가 하륜이 제시한
자료들은 흠 잡을 것조차 없이.,타당.
"별도의 지시가 있을때까지 공사를 중단하라."
이성계 명령이 떨어지자 중앙 지방 백성들이 환영.
하륜의 논리에 탄복한 이성계는 그를 중용하게 된다.
지방 관서에서 즉각 수도 개성으로 불러들여
하륜을 '첨서중추원사'로 임명해 곁에 두었다.
정통 유학을 공부했지만
풍수지리와 도참설에 능해
변방으로 떠돌기만 했던.,하륜.
하지만, 정도전은 하륜을 이방인 취급.
정통 유학자로서 불교와 도참설을 배척.
"주군 곁 2인자는 한사람으로 족하다." 했다.
정도전은 직책은 낮았어도
당시 개국공신 서열로 2인자.
그 자리를 넘보는 하륜을.,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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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이 도읍으로 지목한.,'모악(母岳)천도론'.
그가 안산을 제시한 이유는 조운선(漕運船) 항로.
권중화, 조준는 "모악이 도읍지로 협소하다." 며 반대.
이때 태조 이성계가 고심 끝에.,던진 말.
"도읍 궁궐터는 모악(母岳)으로 결정한다."
모악을 주산(主山)으로 한.,마포 도화동 뒷산
모악(母岳)에 궁궐이 들어서면 그 아래 신촌(新村).
태조 명이 떨어졌는데도 신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개경에 눌러앉고 싶은 신하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을 이전하게 되면
그들은 개경 전답을 헐값에 팔아야 하고
개경의 기득권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서운관원.,유양달, 이양하
총대를 메고 나서서 간했다.
"신이 배운 바로 보아서는.,
도읍으로 정할 곳이 아닙니다."
계룡산 토목공사가 중지된지., 6개월
태조는 신하들의 탁상공론이 답답했다.
이성계는 모악을 함께 답사하자고 나섰다.
하륜이 제안한.,모악천도론
송도에서 신하들 간 탁상공론.
하여, '책상 案.,뫼 山'.,"안산(案山)".
태조가 천도를 결심하며 만든.,관청
신도이궁조성도감(新都離宮造成都監)
대신 일부는 창덕궁 이궁 건설에 반대했고
모악천도론(母岳遷都論) 등 한양천도를 반대.
태조는 궁궐수보도감(宮闕修補都監)으로 개칭.
태조는 한양천도 의지를 강력하게 천명.
하륜이 지목한 모악에 미련이 많았던.,태조.
임진강 건너 8월 더위 속에서 모악(母岳)에 도착.
태조 일행은 모악에서 허허벌판을 내려보며 함께 막영.
오늘날, 서대문구 독립문.,독립관 인근.
'모화관 옛터' 인근에서 막영했던 것일까?
아니면, 사방이 탁트인 모악에서 막영한걸까?
야전에서 단련된 태조에게
막영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신하들은 막영을 감당하기 벅찼다.
모악(母岳)은 안산(鞍山)이며 그 남쪽 아래로
연세대, 홍익대, 명지대,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등.
그곳 한강 건너편에 봉은사 등 허허벌판이 보이는 곳.
'한강의 지류' 홍제천 물길을 통해
'서해 ~한강' 조운선 접근성이 용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도읍지 궁궐 터.
화강암 정상부가
말안장 산세라 하여
유래된 지명.,안산(鞍山)
'6개월간 모악천도론'
'개경에서의 탁상공론.'
뜻이 함축된.,안산(案山)
동쪽으로는 한양을 비롯해
낙산까지 바라다 보이는.,위치.
"도읍을 품었다," 하여.,모악(母岳)
안산(295.9m)은 높지 않지만
인왕산을 품고있는 모산이기에
모악(母岳)의 패기를 지닌.,산세.
"지리로 보면 궐터가 될 수 없는 곳입니다."
"좋지 못하다면, 문서로 근거 자료를 제시하라."
그날밤, 태조는 허허벌판에 군막을 치고 야영했다.
개경에 각 부처에 2명씩만 남기고
그외 모든 신하들을 대동한.,야영장.
신하들은 밤새도록 갑론을박 의견이 분분할때
듣고만 있던 왕사 무학이 새 궁궐 후보지를 제시.
'태조 왕사' 무학대사는 "인왕산 천도"를 거론했다.
풍수지리 대가 이자
미래를 예견한 식견가.
일찌기 이성계를
왕의 재목으로 지목했던
무학이 내놓은.,비장의 카드.
어질 仁, 임금 王.,인왕산(仁王山).
서쪽 인왕산이 병풍처럼 애워싼.,궐터.
남쪽 목면산(남산)을 좌청룡으로 하고
북쪽 백악(북악산)을 우백호로 정하고
동쪽 낙산을 바라보는 곳에 동향, 궁궐論.
'인왕산(仁王山) 천도론(天道論).'
"봉화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봉화군은 정도전을 높여 부르는 말.
'승유억불' 성리학 겸 유학자 개국공신 입장에서 볼때
무학의 '계룡산 천도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정도전.
그렇다고, 하륜과 무학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하륜은 자타가 인정하는 '도참설'의 대가.
무학은 임금의 왕사이자 "풍수지리설' 대가.
하륜과 무학을 한사람씩 각개격파 하기로 작정.
"모악은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
조운선이 왕래 하기에는 좋으나
아쉬운 것은 궐터로는 협소한 점.
안으로 궁궐과 밖으로 종묘를
건축할 자리가 마땅하지 않으므로
왕의 거처로 적합하지 않을듯 합니다."
하륜의 '모악천도론'
도참설에 이의를 제기.
"신은 '음양술수' 학설은 배우지 못했는데
여러 사람 의견이 음양술수에 머물러 있어
신은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맹자 말씀에 어려서 배운 학문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사온데, 외람된 말씀이오나
신이 배운대로., 직언을 드립니다."
정도전은 점잖게 도참설을
음양술수로 몰아붙이며 반박.
공격의 칼끝을 하륜에게 향했다.
이어서, 무학대사의 풍수지리설에
역사관으로 이의를 제기한.,정도전.
"옛부터 수많은 나라가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었지만 모두 남향 궁궐.,명당 터.
동향인 궁궐은 그 전례가 한번도 없었읍니다."
"주나라는 겹욕에 도읍을 정하고
449년이 흐른 11대 평왕이 낙양천도
30대 800년만에 망한 점을 미루어 볼때
주나라 흥망은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꿰뚫어 고대국가 흥망성쇄는
지리적인 여건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군막 안은 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
정도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한 고조가 항우와 함께 진나라를 칠때
항우는 술사 말을 믿고 팽성으로 돌아가고
한고조는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망하고, 한나라는 번성했습니다.
이후로 주나라와 수나라가 관중에 도읍하고
당나라도 역시 도읍하여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역으로 말하자면,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 성쇄에 있지 않은듯.,"(중략).
"중국에서 천자가 된 군주는 많았지만
도읍한 곳으로는 신이 이미 말씀드렸듯
몇 곳에 지나지 않았으니 한나라가 일어날때
어찌 술법과 설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사옵니까?
신이 이미 말씀드린 궁궐터는
이미 옛사람들이 경험한 증거를
폐하께 고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데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자칫 장래에 불길함이 없게 하소서."
역사관을 꿰뚫은 밑바탕으로
깊은 학문을 통달하지 않았다면
감히 거론할 수 없는 논증이었다.
술수(術數)나 설(說)보다는
역사(歷史)가 앞선다는.,논리.
무학의 풍수지리학에 대한.,반론.
왕사 무학대사가 수염만 쓰다듬을뿐.,유구무언.
하륜이 탄복하듯 내뱉는 호흡에 등불이 흔들렸다.
정도전의 말을 듣는 동안에 태조의 결심이 바뀌었다.
개경 수창궁에서 6개월간 탁상공론했던
"모악천도론"을 일거에 가라앉힌.,정도전.
밤은 깊어만 가고 군막은 조용해졌다.
정도전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도전의 논리는 하륜과 무학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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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서운관이 한마디.
정도전을 지원하고 나섰다.
"모악은 장래에 나라를
도둑질 할 사람이 살 땅."
'나라를 도둑질 할 괴수라면,
지리산이나 구월산에 살아야지.'
'나라를 밝게 다스려야 할 군주라면
풍수지리나 도참설에 현혹되기보다는
한양 양지바른 곳을 찾아야 한다.'는.,뜻말.
무력으로 고려 왕권을 찬탈한.,이성계.
서운관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앞으로 그 누구인가 찬탈할지 모를.,조선의 왕권.
사실 상,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때
"모악천도론"이 흠잡을 곳이 없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수성하기 힘든 위치.
(왜적들이 배를 타고 침입할 경우)
(한강 물길을 통해 쉽게 다가설 위치.)
(훗날, 임진왜란 침입 경로.,홍제천 물길)
당대의 유학자 정도전은
풍수지리설이나 도참설보다는
역사관을 앞세워 자신의 논리를 전개.
한성 '도읍과 궁궐' 후보지는
인왕산과 백악으로., 압축되었다.
다음날 태조는
신하들과 함께
인왕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바라본.,백악
간밤에 정도전이 제안했던
한성 도성의 깃점은.,백악(白岳).
그 남쪽 자락에 경복궁 건축을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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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때 도읍지로는 여러 곳이 검토되었고
한양천도 결정 후, 궐터 선정에 의견이 분분했다.
광희궁, 연희궁(延禧宮),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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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궁은 1623년 광해군에 의해 복원되고
경덕궁이라 하였다가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서궁(西宮)으로 10대 왕들이 정사를 보던 궁궐.
태조 이성계가 상왕으로 물러나 거주한.,궐.
경복궁, 창덕궁과 더불어 조선 3대 궁궐이었다.
무학대사가 지목한 인왕산 남쪽 자락., 동향 궁궐터.
지금 광희궁 터보다
훨씬 크고 넓었던.,옛터.
한성 후보지로는 신촌(新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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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궁은 경복궁의 서쪽 이궁(離
하륜이 지목한.,오늘날, 무악제 곁 안산(案山) 궁궐터.
안산(案山) 동쪽.,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수경궁터.
낙산(落山)까지 한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궁궐들.
조선개국 초, "모악(母岳)천도론"이 실감나는.,안산(案山).
조선시대 궁궐을 모두 다
품어안고 있는.,모악(母岳).
서울대학교 병원 암센터 5층에서 바라보면
창경궁 홍화문 사이로 멀리 보이는.,모악(母岳).
조선시대 모악은 화강암 산세가 험준한.,고개마루.
모악제는 말 한필 겨우 통과한 협소한 길목이었다.
도적떼가 '의주 ~ 한양' 상인들을 약탈하던.,모악제.
열 명 이상이 모여야 군인들이 호송해 넘었던.,모아재.
안현, 길마재, 무학재, 모래재,·추모현,사현
등으로 불리우던 안산(296m)과 인왕산(338m)
사이에 위치했던 고개마루 지명이 오늘날.,무악재.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과 현저동 사이.,무악재.
오늘날, 무악재보다 높고 험준했던., 고개마루.
옛 고개마루를 피해 넓은 길을 닦은.,무악(無岳)제.
무악(無岳)이 되어 기뻐 춤췄다 하여.,무악(舞樂, 巫樂).
'무학'과 관련된.,무학현(無學峴),
영조와 관련된 지명.,추모현(追慕峴)
오늘날, 행정지명 무악동.,무악(毋岳)재.
지금도 말안장 형태의 화강암.
옛 길목이 남아있는.,안산(鞍山).
안산 등산객이 즐겨찾는.,휴식장소.
조선시대 '의주, 황해도, 평안도~한양' 교통 요충지
특히, 조선시대 명 청 사절들이 들어오는 길목의 관문
조선시대 가장 큰 내란 '이괄의 난'이 종결되었던 장소.
1769년(영조 45년) 영조는 부왕 숙종의 명릉 역사를 시작'
몸소 이 고개에 올라 명릉 쪽을 바라보며 ‘추모현’이라 명명
무악재는 매우 험한 고개였으므로 온갖 짐승들이 서식했었다.
나라에서는 북쪽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개마루
무악재 낮추는 공사를 여러차례 한끝에 수척이 깎이게 되었다.
영천까지 전차가 가설되며 무악재를 또 다시 확장, 낮추는 공사.
무악재를 지나가다가 보면
도로 좌우에.,급경사 암반층.
패여나간 만큼 낮아진.,무악재.
1960년대 공사로
지금과 유사한 위치로
무악재는 낮아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