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0년 전에 정치학 교수인 S교수님이 왜왕 무가 백제 무령왕이라는 주장을 폈고 그것이 TV 방송에 나온 적도 있습니다.
주장의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461년에 곤지가 임신한 무령왕의 어머니를 데리고 왜국으로 가다 아들을 낳자, 어머니는 백제로 돌려보내고 아들만 왜국으로 데리고 갔다. 따라서 무령왕은 왜국에서 성장하였다.
2) 478년의 무왕의 국서를 보면 아버지와 형이 고구려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데,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에 의하여 아버지인 개로왕이 죽고, 사료에는 없지만 당시 왕자들도 다 죽은 것으로 보여 개로왕의 막내 아들 뻘인 무령왕에게 딱 맞다.
3) 502년에 남제가 무를 왜왕으로 책봉하는데, 왜국에서 남제까지 사신을 보내 책봉 받는데 대략 1년이 걸리므로, 이는 왜국을 통치하던 무령왕이 501년에 남제에 왜왕 책봉을 요구한 후, 백제로 돌아와 501년에 무령왕으로 즉위한 것임에 틀림 없다.
따라서 무령왕은 태어난 461년부터 백제로 돌아가는 501년까지 40년 동안 왜국에 있으면서 왜국을 통치했다.
하지만 반론도 있습니다.
1) 일본서기 원문을 보면 곤지가 임신한 왕비를 데리고 가다 왕비가 아들을 낳자 아들은 백제로 돌려보내고 어머니만 데리고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사료에 모순이다. *일본서기를 최초로 번역한 1989년에 나온 전용신의 일본서기가 이 부분을 오역했는데, 혹시 S교수가 일본서기 원문을 안 보고 이 오역만 본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2) 고구려에게 아버지와 형이 동시에 죽은 사람에는 곤지도 있다. 아버지인 비유왕도 고구려가 사주한 내란으로 죽었고, 그들이 고구려로 도망간 후에 475년에 장수왕이 고구려군을 이끌고 한성을 칠 때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내려와 형인 개로왕을 죽였다. 국서를 보면 무는 고구려에 반격하려고 했지만 당시 14살이던 무령왕은 그런 적이 없다.
3) 502년에 남제를 건국한 무제가 자기 생일을 맞이하여 사료를 보고 주변국 왕들을 일제히 승진시켜 책봉하는 축하연을 한 것이지 왜국이 사신을 보내 책봉된 것이 아니다.
40년 동안 왜국을 통치했으면 사료 어딘가에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사료에도 무령왕이 왜국에 갔다는 흔적은 없다
기성 학계는 S교수를 역사의 기본도 안 갖춘 사람으로 보고 왜왕 무가 백제 무령왕이라는 주장에 아예 상대를 안했습니다. 특히 1)과 3)은 사료 오역으로 치명적이었습니다. 2)도 만족하려면 무령왕이 언제, 어디에서, 몇 만 명의 군대를 결성하여, 지휘관은 누구로 하여, 어디로 어떻게 보내, 고구려군과 전투를 하게 했다는 근거를 6하원칙에 맞추어 제시해야 합니다.[계속]
첫댓글 왜왕 무가 설령 무령왕이 아니어도 유라쿠 천황일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요 왜왕 무가 보내온 국서에 고구려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심을 표출하는 등 고구려와 전쟁할 일이 없었던 왜의 현실과 동떨어지게 나타나 있거든요 설사 국서를 보내온 왜왕 무가 유라쿠 천황이 맞다 해도 당시 일본이 고구려의 침략에 위기 상황에 놓였다는 얘기로 귀결될수가 있는 법이지요
웅략이 고구려와 전쟁할 이유가 있습니다. 1~5세기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몇 만 명의 군대를 결성하여, 지휘관은 누구로 하여, 어디로 어떻게 보내, 고구려군과 전투를 하게 했다는 근거를 6하원칙과 고고학적 근거를 들어 다시 설명드릴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 지리적으로 고구려와 멀리 떨어진 일본이 고구려와 전쟁하여 그 많은 피해를 받아 적대적인 증오감을 표출한다는건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는 얘기일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고구려와 일본이 서로 지리적으로 인접하면 모를까 송서의 왜왕 무의 국서대로라면 고구려가 일본열도에 진출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요 5세기 일본 유물에 북방 기마민족 색채의 유물들이 많이 나온 정황을 고려하면 고구려의 일본열도 진출 가능성을 배제할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