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를 지나며
시/ 박대산
약속의 가나안 복지福地도 마흔 해 너머였기에
이 광야 거친 벌판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영혼은 늘 주님께 길을 물으며
대낮에도 빛 된 말씀의 등불을 켜듭니다.
길 잃은 소자小子는 오늘도
얼마나 내 등 뒤를 스치고
나는 또 몇 번이나 그들을 무심코 지나칠는지
나의 이웃은 정녕 그들이건만
나는 나에게 유익을 주는 자들만
이웃으로 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해 봅니다.
그리고 주리고 목마른 자의 머리에
조용히 숯불을 놓아봅니다.
(로마서 12장 20절)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아테네 거리를 헤매고
다닌 것은, 거짓과 위선이 넘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양심적인 사람,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찾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우리 인생길의 빛이요 등불인, 하나님의 말씀을 안내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 119:105).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등불로 내 속사람의 믿음을 다시
비춰보고, 헐벗은 자들의 심정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17절에 보면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처지는 매우 곤궁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들을 돕기는커녕 알아서 하고 평안히 가라 한다면 그게 무슨 그리스도인의
신앙이고 살아 있는 믿음이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
1서 3:18) 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말씀의 가르침을 좇아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줄 알지만, 필자가 아는 여종도
가난한 자의 외침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사랑의 종입니다. 필자는 그를 흉내
낼 수조차 없습니다. 그의 사역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요,
마태복음 18장 6절부터 10절까지 보면 '소자'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소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아주 부족하고 연약한 소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항상 겸손하고 영적으로 순수한 감정을 지닌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5장 31절~45절에 언급된 소자는,'지극히 작은 자'로서.
세상의 포로가 된 자를 가리킵니다. 즉 이들은 영적으로 포로가 된 자들이요,
또한 육체적으로 포로가 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헐벗고
굶주리고 버림받은 멸시 받는 가련한 상태의 사람들을 말하며, 영적으로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조에)이 없는 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5장의 주님의 종말론적인 비유의 참 뜻을 깨닫고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위해 실제로 물질로 도와야 하고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으로 그들을 먹여서 그들의 영을 살려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흔히 물질이 필요한 사람이 물질을 갖게 되거나,
병이 있는 사람이 병을 고침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떠나가는 자들이 많습니다(참고, 누가복음 17:12~19).
그럼에도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20절을 통하여 증거하기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수가 궁핍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원수에게 선행과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원수를 먹이고 마시게 하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행위이고, 궁극적인
마시움과 먹임은 생수의 근원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결정적인 매개체입니다(요한복음 6:35).
사실 육신적으로 배고픈 사람이, 당장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먹고 마실 것을 준다면, 원수 같은 상대방도
마음이 녹아져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뉘우침과 부끄러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일입니다.
멀리서 들리는 음성
유복한 친구들이 부를 수 있는 곳에
나는 호화스런 현대식 가정을 꾸미려 했다오,
그때 나는 한 고아가
“나는 집이라고는 없어요”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지요.
나는 정교하게 잘 꾸며진 침실이 붙은 방이
있는 집을 사려고 했다오.
그때 나는 한 어머니가
“주여, 내 아기를 따뜻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지요.
‘내가 정말 필요한 것은 새롭고 값비싼
건조대였네’나는 이 생각을 어떤 사람이
“나는 전쟁의 희생자입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당신은 멋있고 큰 빨랫줄이 있지만 나는
말릴 만한 아무런 옷도 없답니다”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 손에서 떨쳐버릴 수 있었지.
그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저장할 수 있는
냉장고를 원했었네.
내가 가진 것은 이제 유행이 지났고
더 이상 세워놓을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오.
바로 그때 대양을 건너
격렬하고 애처로운 울음이 들려왔네.
“나는 음식 부스러기가 조금도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나는 크리스마스에 차를 한 대 샀다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오.
그러나 그때 나는 한 고아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네.
“나는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어요”
친구를 위해 크리스마스 때마다
나는 돈을 많이 썼지만
전도할 때가 되었을 때는 10센트도 쓰지 않았다오.
크리스마스 축하가 모두 끝났을 때
나는 내가 쓴 것들을 계산해 보았네.
엄청난 금액이었다오.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네.
멀리 떨어진 어머니가
“우리 죄를 씻어버리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탄생이 얼마나 지났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그 아침에 들리는 것 같았네.
어머니의 말씀들은 내 마음에 늘 따라다니기
시작했네.
그만큼 엄하게 자라 왔기 때문이라네.
내 아이들도 복음의 빛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복음은 아직도 말로 다 할 수 없네.
죄와 이교도의 무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죽어가는 세상을 이기도록
내 힘을 다하여 일하리라고
나는 그 날 서약했다오.
-프레드 D. 자비스
구름 같은 생이라 해도
시 / 박대산
쓸려만 온 건 아니다 구름 같은 생이라 해도
성령의 뜨거운 바람 가슴 뭉클 불어오면
구만리 나라 밖에도 쏟고 싶은 단비여
생명을 씨 뿌리면 추수하는 날도 있어
한 알의 열매를 위해 넘나드는 이역異域의 땅
조국아, 북녘 하늘아 일어나서 함께 가자
순례자 삶이기에 머무를 곳 없다지만
세상이 회복 되면 안식할 새 땅이 있어
청산도 발 아래 두고 유유히 웃으며 간다.
인생의 부귀공명이 구름 같다는 사상은, 옛부터 많은 문인들이 읊은 노래이지만,
성경에서도 인생의 덧없음을 구름에 비유하였습니다.
욥기 30장 15절에 “놀람이 내게 임하는구나 그들이 내 영광을 바람 같이 모니
내 복록이 구름 같이 지나갔구나”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참고, 호세아 6:4)
그러나 기독교는 인생의 무상이나 허무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허무감을 극복하며 궁극적으로 새 하늘, 새 땅 곧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나아가는 생명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내일의 소망이 없고
꿈이 사라질 때 절망의 늪에 빠져버리고, 쉬이 조노(早老) 현상이 나타납니다.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티"는 내 생애에 가장 위대한 날은, 바로 나의 사명을
깨닫는 날이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사명은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인 잘못으로 인해 고향 집을 떠나 먼 외가를 향해 쓸쓸히
길을 떠나다가 날이 저물어 '루스' 땅 벌판 한 곳에서 돌을 베개 하여 잠을 자는데
여호와께서 꿈속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
28:13~15)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야곱이 꿈의 계시를 통해 장래의 이상을 보게 된 루스 땅은, 성읍 중심지가 아니라
외곽지대의 들판이었습니다. 즉 야곱이 누운 땅은 차디찬 불모지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차디찬 외로운 땅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곳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이 되었습니다(창세기 28:19). 그리고 나아가 그 땅은 야곱의 후손들이
누리고 살아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선진 야곱이 누운 땅은, 오늘날 우리의 나그네 삶의 현 주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디 찬 현실의 땅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장래의
이상(異像)을 받는 곳이 된다면, 이곳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새 언약'이 깃든 복된 축복의 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계속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