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마르코 12,38-44
성직자들의 선생은 언제나 평신도들이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렙톤 두 닢을 바치는 과부의 믿음과 길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비교하시며 예수님은 사도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평신도를 통해 당신 미래의 사제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운명은 사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며 성직자들부터 죽이라고 하셨겠습니까?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에제 9,4-6)
여기서 성전부터 시작하라고 한 것은 사제들부터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쓰인 ‘성전’은 거룩한 성소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성소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제들은 사제들에 의해 거룩해지기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제가 잘 살면 질투가 나지
본받기 어렵습니다.
여러 이유로 그런 사제처럼 되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평신도가 자신보다 잘하면 ‘평신도도 이만큼 하는데, 나는 뭐지?’라며 뉘우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돈과 명예로 타락해가는 교회를 뉘우치게 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하느님 음성을 듣기는 하였지만, 그저 시골의 작은 경당을 재건하라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무너지는 라떼란 대성당을 어깨로 받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부제품까지 받았습니다. 부제를 받아야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평신도로 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사제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성직자라는 명예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성직자가 되어서도 살 수 없는 가난과 겸손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생각해 봅시다.
박해받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신자들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평신도 최인길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대신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목숨을 다해 보호한 강완숙 골롬바도 있습니다.
그가 체포령이 발효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수많은 가족이 다 위험할 수 있어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목숨을 걸고 은총을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압록강까지 도망하여 자신의 고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뉘우치고 돌아와 순교합니다.
이탈리아 로피아노라는 동네에 사제들의 수련소(Scuola di formazione)가 있습니다.
사제로 일정 기간 살다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 이들이 와서 스스로 권위와 명예와 재물을 다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수련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만든 이는 키아라 루빅(Chiara Lubich)(1920–2008)이라는 평신도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1939년 로레토의 마리아 성지를 방문하는 동안 그녀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특별한 사명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을 느끼며 심오한 영적 소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 그룹을 만들어 사랑과 일치에 초점을 맞춰 복음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포콜라레 운동의 시작입니다.
저도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꾸르실료 운동’의 수원교구 지도신부를 6년간 하며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제와 수도자들도 이 교육을 많이 받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사제가 본받을 평신도가 줄어들면 교회는 더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사제는 그 위치상 쉽게 타락하게 됩니다.
그만큼 많은 대우를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평신도들이 눈에 보이게 큰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처럼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면 됩니다.
성체의 기적을 온라인에 기록하여 시복을 받은 이탈리아 청년은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가
있습니다.
그는 16세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전에 3년의 공을 들여 세계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들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이는 인터넷은 잘 모른다며 말로만 강론하며 성체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제들에게 커다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아이도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과부처럼 조용히 섬깁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그 모범으로 성직자들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0일 [연중 제32주일]
복음: 마르 12,38-44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계 제도 안에 성직자·수도자들은 평신도들보다 훨씬 더 하느님 가까이 있고, 평신도들보다 훨씬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교회나 수도회, 수녀회는 거룩한 곳이고,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정이나 세상은 속된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혁신한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황님이나 주교님들은 1중대, 사제나 수도자들은 2중대, 평신도들은 3중대가 아님을 공의회는 명확하게 강조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체이자 교회의 주인공입니다.
교회의 위계 제도, 다시 말해서 주교직, 사제직이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평신도들 역시 성화의 길로 불림받았음을 명백히 강조하셨습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거룩함을 지향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성화(聖化)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훌륭한 평신도들을 만나면서 저는 늘 확신합니다.
신분이 절대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흙탕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한 송이 청초한 연꽃처럼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끝도 없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언제나 거룩함을 갈망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평신도들은 이미 성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평신도들께서도 간절히 열망한다면, 거룩한 갈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신다면, 세상 안에서 충분히 봉헌생활을 해나가실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수행하고 계시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 못지 않은 성직을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께서 매일 행하고 계시는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을 향한 봉사의 현장에서, 짜증내면서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봉사하실 때, 여러분들은 이미 성화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이웃들 한 명 한 명이 다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다.’ 생각하고, 그들을 대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어떤 위대한 주교님이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보다도 훨씬 고귀한 성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쏭달쏭하면서도 참 진리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오면 절간이 술집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평신도들께서도 술집에 들어가시면 그 술집을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발길 닿은 곳마다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켜나가시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일 강론>(2024. 11. 10.)(마르 12,38-44)
<중요한 것은 ‘사랑’과 ‘정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38-44)”
1) 율법학자들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가난한 과부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은’ 그 율법학자들이 곧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만 바친’ 부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남의 것을 빼앗아서 그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바친 자들이 되는 셈인데,
남의 것을 빼앗는 것도 죄이고,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선한 것’을 바쳐야만 봉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것’을 바치는 것은 봉헌이 아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2)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씀에서,
야고보서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야고 5,1-5).”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채고,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었다면, 부유함 자체가 죄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부자로 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어떤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서 부자가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3)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는 특정 개인만은 아닐 것이고, 율법학자들이 등쳐먹은 ‘과부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진 것을 다 바친 그 ‘비율’ 때문이 아니라, ‘온 마음’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비율’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누구든지 가진 것을 다 바치라는 단순한 가르침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만일에, 나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자들이, 회개하지는 않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이야기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가난한 과부가 바친 동전 두 닢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과 사랑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가진 것 가운데 일부만 바치든지 전부 다 바치든지 간에,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랑’과 ‘정성’입니다.
사실,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가지고 있는 생활비를 모두 바치는 것은 누구에게나 현실적으로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각자 형편대로 바치라는 뜻입니다.
또 가지고 있는 생활비를 모두 바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5) 사도행전 5장의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재산을 다 바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일부만 바쳤고, 그러면서 전부 다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사도 5,1-2).
그때 베드로 사도는 그들이 전부 다 바치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이려고 한 것을 꾸짖었습니다(사도 5,3-4).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