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사의 창건 및 연혁에 대해서는 현재 범종각에 걸려 있는 범종의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범종은 1634년(인조 12)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명문은 절의 역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이에 의하면 보광사는 894년(진성여왕 8) 왕명에 따라 도선국사가 비보사찰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것을 1622년(광해군 14) 설미(雪眉), 덕인(德仁) 두 스님이 중건하고, 1634년 덕인스님이 발원하여 범종불사를 시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후 도원(道元)스님을 거쳐 신관(信寬)스님이 완성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범종 명문의 연혁 관련내용에는 창건 및 조선 중기의 내력만이 담겨 있다.
이외의 고려시대와 조선 후기의 보광사 역사는 1977년 편찬된 『봉선사본말사약지(奉先寺本末寺略誌)』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1215년(고종 2) 원진(元眞)국사가 중창하였고, 법민(法敏)대사가 불, 보살상 5위를 봉안했으며, 1388년(우왕 14)에 무학스님이 중창했다고 한다. 이후 불타버린 것을 1622년(광해군 4)에 설미, 덕인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634년 범종을 봉안하였다. 1667년(현종 8)에는 지간(智侃), 석련(石蓮) 두스님이 대웅전과 관음전 등을 중수하였으며, 1740년(영조 16)에 이르러서는 부근에 있던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묘소인 소녕원(昭寧園)의 기복사(祈福寺)가 되어 대웅보전, 관음전을 중수하고 만세루를 창건하였다.
1851년(철종 2) 이유원(李裕元)의 원찰로 되면서 화담선사가 다시 중수했고, 1863년 쌍세전과 나한전, 큰방, 수구암을 새로 짓고 지장보살상, 시왕상, 석가여래삼존불, 16나한상 등을 조성하였다. 1864년(고종 1)에는 관음전과 별당을 지었고, 1893년에 산신각을 신축하였다. 1901년 인파영현스님이 상궁 천씨의 시주를 얻어 다시 중수하였으며, 한국전쟁으로 별당 등 일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1957년에 수각을 짓고 1973년에 종각을 세웠다. 1981년에는 절 뒤 쪽에 거대한 호국대불을 세우고, 1994년 지장전과 원통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맞은편 만세루의 목어. 현재는 만세루로 칭하지만 1913년 서울의 상궁 등이 중수한 염불당 건물이라고 한다. 목어는 사슴의 뿔, 여의주 등으로 미루어 어변성룡의 형상으로 불교적 상징보다는 오히려 숙빈 최씨와 연결해보면 이해가 될 듯 하지만 근거가 없다.
보광사 경내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 대웅보전은 정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금의 전각은 1740년(영조 16) 무렵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마당보다 몇 단 높게 쌓은 석축기단 위에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만세루를 마주하고 있다. 기둥에는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고 그 밑의 주춧돌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기둥 밑부분 역시 주춧돌의 윗면의 상태에 맞추어 깍아 세운 것이 특징이다. 또 벽은 흙벽이 아닌 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그려진 벽화 또한 색다른 모습이다.
영조의 글씨라고 한다. 대웅전 가구
전각의 벽체는 흙이나 회를 바르는 것이 보통인데, 보광사 대웅보전의 벽체는 모두 판자를 끼워 구성한 판벽이다.보통의 벽이 회벽인데 비해 특이하며 양 옆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진은 측벽 벽화이다. 짤린 좌측 사진 위태천도는 불교의 호법선신인 위태천을 그린 것으로 단독으로 벽에 그려진 것은 이례적이다. 이 벽화에서는 새 깃털장식이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가슴 위치에서 금강저를 가로질러 잡고 있는 당당한 모습으로 표현됐다.
중앙 기사문수동자도는 왼손에 연꽃가지를 잡은 채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의 모습을 묘사했다. 사자는 큰 덩치에 비해 머리가 작다. 축 처진 귀, 뭉툭한 코, 동그란 눈에 일자로 그려진 눈썹이 인상적이다. 연화좌를 놓은 안장에는 문수동자가 앉아있다.
오른쪽 금강역사도는 상반신을 드러낸 금강역사가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얼굴은 꿈틀거리는 듯한 눈썹 아래로 두 눈을 크게 떠서 노려보고 있으며 콧수염과 턱수염이 모두 그려져 있는 것도 두드러진 표현이다.
보궁에 계시는 불보살 아래로는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연화화생도(?) 반야용선 민화의 상징성으로 이해하면 좋을듯 코끼리를 탄 동자도
3명의 남자가 바위에 계시는 수월관음과 동승을 힘들게 옮기고 있어 상징성이 궁금하다. 대웅전 내부에도 벽화가 많이 있다. 우리나라에 벽화로 널리 알려진 양산 신흥사, 영덕 장육사, 제천 신륵사, 파주 보광사를 모두 답사한 듯하다 그외에도 많은 절집에서 화려하고 장엄한 때로는 민화풍 느낌의 벽화를 보았지만 기억 저편에 있다.
1869년(고종 6)의 중수를 기념한 '고령산보광사상축서(古靈山普光寺上祝序)'현판이 걸려 있다.
법회중이어서 사진을 촬영하지 못했지만 비로자나불이 주존이라는 문화재 안내문과 달리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으로 이루어진 삼계불과 그 옆으로 다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입상으로 봉안되어 있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이 불상들은 1215년 절을 중창할 때 조성되었다고 한다. 불화로는 5위의 불상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을 비롯해 신중탱, 감로탱, 칠성탱, 독성탱, 현왕탱 등 모두 6점이 봉안되어 있는데, 화기에 의하면 모두 1898년에 예운상규(禮芸尙奎),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규선(龍潭奎禪) 스님 등에 의해 그려졌다. 또한 불단 왼편에는 금고가 하나 있는데, 중앙에는 태극무늬를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꽃무늬가 그렸으며, 전면에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등의 명문이 보아 조선 말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내에 있으나 역시 수능 백일 기도로 법회중이어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7년명(崇幀七年銘)의 이 동종은 1631년(인조9)에 주조되었으며, 보광사의 내력을 명문으로 담고 있는데, 절의 창건 및 대체적인 연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범종의 양식을 보면, 맨 위의 용뉴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키면서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가 형성되어 있다. 신라 및 고려시대 범종에서 흔히 보이는 음관은 생략되어 있다.
몸체에는 위와 아래에 띠가 둘러졌고 그 가운데에 도톰하고 좁게 튀어나온 3줄의 띠장식대가 있어 몸체를 상하로 구분하고 있다. 윗띠 아래에는 사다리꼴의 유곽 4개와 보살입상 4체도 있다. 또 아래띠는 파도무늬와 용으로 구성되었고, 이 아래띠와 가운데 띠장식대 사이의 공간에 용 한 마리와 함께 범종의 조성 경위 및 제작자의 이름, 그리고 보광사의 연혁을 설명한 명문이 가득히 둘러져 있다
응진전. 산신각 응진전 산신각
지장전 앞 무영탑? 최근에 조성한 모양인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만 설마 그 곳의 탑은 아니겠지?
원통전 뒤쪽 축대 위에 자리한 어실각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전각이다. 1740년(영조 16) 보광사가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묘소인 소녕원(昭寧園)의 기복사(祈福寺)가 되면서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건물은 정면, 측면 모두 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어실각 안에는 숙빈 최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영조는 1740년(영조 16) 생모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원이 보광사와 가깝게 있어 이 절을 숙빈 최씨의 원찰로 삼아 대웅보전, 광응전을 중수하고 만세루를 건립하고, 어실각을 세워 숙빈의 영정과 신위를 모셨다고 하며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보광사로 가려면 이 벽제 삼거리에서 됫박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됫박고개를 넘어야 한다. 지금은 차로 쉽게 넘어갈 수 있으나 예전에는 무척이나 힘들게 넘었을 것 같다. 영조는 이 고개가 소령원에 누워 있는 자신의 생모와 더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했는지 더 파 낮추라고 해서 '더 파기 고개'라고 했다. "
어실각 앞 영조가 심었다고 전해오는 향나무. 왕의 모후가 되고서도 신분제약으로 인해 후궁을 면치 못한 숙빈 최씨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보광사를 지근에 있는 소령원의 원찰로 삼고서 어실각 전에 향나무를 심은 영조의 효심이 느껴지는 듯한 분위기의 절집이 바로 보광사가 아닐까? *** 전통사찰관광정보를 참조했습니다. 2010.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