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한국교회가 1907년 처음으로 타문화권 선교사를 제주도로 파송한 이래로 한국의 타문화권 선교는 많은 발전을 해왔다. 여성들도 한국선교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되었다. 장로교여성들의 선교에로의 참여는 참으로 다양했다. 선교적 열심을 가진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푼돈으로 모은 많은 돈을 선교사역을 위해 바치기도 하였고 자신들의 패물을 팔기도 하며 매일 성미를 모아서 타문화권 선교사에게 경제적인 후원을 하기도 하였고, 이들을 위하여 많은 시간의 중보 기도를 통하여 그들의 영적 후원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 중에서는 직접 타문화권 선교에 참여하기도 한 경우도 있었다. 본 소고에서는 이러한 한국여성들이 그동안 어떻게 타문화권 선교활동을 해왔고 그 선교활동의 주된 일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한국여성선교사들이 선교활동하면서 경험하는 문제점들과 어려움 들을 진단하고 한국교회의 세계선교의 중요한 과제 앞에서 어떻게 한국기독교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선교사역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동참할 수 있게 될 지에 대하여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타문화권 선교에 다양한 교단의 여성들이 참여하였으나, 본인은 한국장로교 통합측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여성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하여 연구하고자한다.
2. 최초의 한국여성의 타문화권 선교사역 초기한국교회의 선교활동에 있어서 여성들의 활약은 참으로 크다. 한국여성으로서 최초로 타문화권 선교를 하게된 경우는 1907년 최초의 한국 목사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로 파견되었을 때, 그와 함께 제주도로 파송된 두 명의 여성으로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그의 아내 윤함애 씨이며 둘째는 이기풍 목사와 함께 전도부인으로 파송된 이선광 전도사이다. 최초의 한국인 타문화권 선교의 여성들은 독신여성과 사모선교사가 나란히 남성 선교사와 함께 떠났다는 점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선광 전도사는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로 파송되자, 이일을 돕기 위해서 파송되었다. 당시 평양의 널다리골 교회의 여전도회가 1908년 모금을 하여 이선광 여전도사를 파송하였던 것이다. 당시 제주도는 말과 문화가 많이 달라서 오랫동안 독립국행세를 하였고 풍속이 육지의 어느 곳보다도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이 많이 깔려있는 곳이었다. 또한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해서 외국처럼 멀리 느껴지는 곳이었다. 따라서 비록 제주도가 지리적으로는 한국내의 영토 안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한국의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사역을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사역으로 인정한다.{{) 전재옥, "한국의 타문화권 선교, 어디까지 왔나?" 미션월드, 1990년 10월, p. 24}} 그러므로 이선광 전도사는 이런 의미에서 제주도로 파송된 한국여성으로서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사로 볼 수 있다. {{) 최경순 ,"한국초기 여성선교사,"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 Th. M. 논문, 1994), p.113-118.}} 또한 이기풍 목사의 아내 윤함애씨의 경우, 비록 윤씨가 선교사로서의 파송은 아니었으나 선교사의 아내로서의 역할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풍목사의 아내 윤함애씨는 매우 신앙이 깊은 사람으로 초기 북미지역과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저하는 선교사의 아내로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윤씨는 남편의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더욱 격려하는 역할을 하였다. 윤함애씨의 딸 이사례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1907년 독노회에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기로 정하자 당사자는 처음에는 당황하여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부인이 "우리가 안가면 누가 그 영들 구하겠어요. 속히 떠납시다." 라고 하여 남편을 독려하였다. {{) Ibid., p.117}} 안따깝게도 이선광 전도사의 선교활동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어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선교 사역을 감당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개신교선교가 시작된 지 불과 20년밖에 안된 이시기에 한국장로교회가 타문화권 선교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바로 그 첫 발에 장로교회여성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함께 여전도사의 선교사로서의 참여, 또 아내로서 선교사의 길을 적극적으로 감당하였다는 점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3. 1930년 전후의 여성의 타문화권 선교사역 한국의 여성들이 타문화권의 선교사역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된 것은 1930년을 전후로 이루어졌다. 한국의 장로교회여성들은 일제의 압박속에서도 놀라운 선교적 열정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참으로 보기 드문 대단한 선교적 열정이었다. 특히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선교사역은 주로 중국, 만주 시베리아를 대상으로 주로 이루어 졌다. 가장 먼저 여성선교사로서 북만주지역과 시베리아지역으로 진출한 여성선교사는 한가자 전도사이다. 1926년 총회의 파송으로 5명의 선교사가 진출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한 명은 여성이었고, 그가 바로 시베리아로 파송되었던 한가자 선교사이다. 주선애 박사는 장로교여성사에서 한가자 선교사의 희생적인 헌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처녀의 몸으로 주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북만주 등지로 말할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 헌신적으로 전도한 북만의 천사로 칭송을 받고있었다."{{) 주선애, 장로교여성사, (서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여전도회 전국 연합회, 1979) p.186. }} 1930년의 예수교 장로회 총회때에 전도부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갖은 핍박 속에 식량마져 끊어지는 곤경 속에서 피신을 하면서 전도를 하다가 소환되어 유원, 요하, 호리등의 지역으로 파송되면서 4백여리에 산재한 교우들을 심방하고 위문하면서 10여처에 교회를 세웠다. {{) Ibid., p. 187.}} 다음으로 이루어진 한국장로교 여성에 의한 선교활동은 1930년에 이르러서 최초로 중국 산동에 여선교사를 한사람을 파송하기 위한 결정을 함으로서 이루어졌다. 1928년 9월에 대구에서 개최된 제 17회 총회에서 중국에 여성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게되었고 이후 1931년에 이르러서야 장로교총회에서 김순호 선교사가 선택되어 정식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당시 여전도회연합회가 단독으로 이 막중한 일을 결정하고 감당하게되었다는 것 또한 대단한 성과였다. 김순호 선교사의 선교비와 어학비 600원과 여비 30원등이 여전도회 연합회의 단독으로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순호 선교사는 특별히 중국여성들을 계몽하는 일을 하였고 또한 많은 집회를 인도하여 복음으로 중국여성들을 해방시켰다. 해방전까지 중국에서 선교 활동하다가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여자부에서 교수겸 사감으로 봉직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로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게되자 남하하지않고 학교를 지키다가 1951년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51세였다. {{) Ibid., p. 189-190.}} 그 다음을 이은 여선교사는 윤정희 전도사이다. 1932년 여전도회총회에서는 남만주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남만주의 여선교사를 모집공고를 하였고 1933년 윤정희 전도사가 남만주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또한 장로교 여성들은 남만주에 이어서 북만주에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1936년에 결의하여 유안심 전도사가 1937년에 북만주지역으로 다시 파송하였다. 그는 북만주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부인사경회를 인도하고 선교활동을 감당하였다. {{) Ibid., p. 191-195. }} 1930년을 전후로 시작된 한국장로교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진 타문화권 선교사역은 그 시작점이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지 불과 40이 안된 시기이며 한국의 독립노회가 형성된 지 약 20년만이라고 볼 때 세계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단한 선교적 열정이었다. 이러한 한국의 장로교여성들의 타문화권 선교에 대한 열심은 당시 한국장로교회의 여성들의 적극적인 신앙의 열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37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문제로 크게 위축되기 전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여성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에 참여하게되었다.
4. 해방이후 한국장로교의 여성선교사역의 현황 1945년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으나 한국사회는 뜻하지 않았던 남북의 분단과 1950부터 1953년까지의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혼란을 거듭하였다. 또한한국 장로교회도 교단의 분열을 경험하면서 사회와 함께 혼란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당연히 한국교회는 교회의 재건을 이루지 못하면서 한국교회의 여성 선교 사역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50년도에 들어오면서 한국 장로교가 점차 안정을 찾고 급성장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한국교회는 타문화권의 선교사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타문화권 선교사역에 대한 관심으로 1955년에 최초로 한국장로교회에서 첫선교사로 최찬영 목사를 태국에 파송함으로서 한국장로교회의 타문화권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그의 아내 김광명이 비록 선교사의 자격은 아니었으나 선교사의 아내로서 선교지로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야말로 장로교 여성이 해방이후 타문화권 선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 최찬영, 최찬영이야기, (서울: 조이선교회 출판부, 1995), p.85-97. 이책에는 최찬영선교사의 아내인 김광명 선교사의 생애에 대하여 몇장에 걸쳐서 간단히 소개하고있다.}} 해방이후 여성의 타문화권 선교는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바로 독신여성선교사의 경우이며 둘째는 기혼여성들의 선교사역이다. 기혼여성의 경우에 가장 많은 경우는 남편이 목사인 경우이다. 목사인 남편이 선교사로 파송 받을 경우에 아내가 사모선교사가 되어서 선교지로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는 것이다. 셋째로 남편이 목사가 아닌 경우도 가끔 있는데 그런 경우 여성선교사역은 남편이 목사인 경우와는 다소 차이가 많이 있다. {{) 기혼여성선교사중에서 남편이 목사가 아닌 경우가 있는데 예를들어 1964년 대만선교사로 파송된 정성원 선교사, 1984년 케냐로 파송받은 박양미선교사, 1984년 미국의 플로리다주의 국제결혼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하고있는 이정숙선교사, 1989년 미국 사우스케롤라이나주에 국제결혼한 한인교포들을 위해 선교사역하고있는 이수훈선교사등이있다. }} 해방이후의 한국장로교의 여성선교사들의 활동을 살펴볼 때, 극소수의 경우만이 남편이 목사가 아닌 경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선교사들은 크게 남편이 목사인 기혼여성과 독신여성의 선교사역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러므로 본 글은 해방이후의 독신여성선교사와 남편이 목사인 사모선교사의 경우만을 들어서 해방이후의 여성선교사의 상황을 다루고자한다.
a. 독신여성선교사의 활동 해방이전의 여성의 타문화권 선교사역이 주로 독신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해방이후의 장로교회 통합측의 독신여성선교사의 활동은 1970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독신여성으로 선교사로 파송된 경우는 1972년에 일본으로 파송을 받은 정영희 전도사이다. 그는 일본어에 능하며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손색이 없는 신앙인격자로 인정되어 그를 선교사로 적극 추천되었고 결국 1972년 파송되었고, 그는 오사카지역의 홍동근 목사와 함께 교포청년들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았고 또한 제일교포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주선애, op, cit., p. 318. }} 1973년에 박정자 선교사는 일본으로 파송받아 교포들을 대상으로 교회개척사역을 감당하고있는데 비록 여성목회자로서 목사가 되지 못하는 어려움속에서도 환자심방, 구역성경공부, 전도활동 등으로 교포2세와 3세를 대상으로 선교의 뿌리를 내렸다.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전도부, 전세계를 하나님의 영토로 (선교자료집I),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89), p. 268}}
장로교 통합측의 가장 대표적인 독신여성선교사로는 인도의 김영자 선교사를 들 수 있다. 김영자 선교사는 1980년에 인도로 파송되어 어린이사역, 학교와 고아원사역, 교회 개척등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사역의 중점은 남인도지역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을 하면서 그의 젊음을 다해 20년 이상 지금까지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는 인도의 뿌리깊은 케스트 제도로 인해 여러 가지 전도의 제한을 받고 특별히 성인사역의 어려움을 절감한 후 어린이사역에 특별히 중점을 두게되었다. 그는 힌두교사상에 깊이 물들지 않은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의 효과성을 깨닫고 이 어린이사역을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감당하였는데 1990년부터는 학교를 운영하여 기독교정신에 근거한 교육을 하고있고 학교는 꾸준히 성장하여 1998년부터는 기숙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학교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매년 학년이 끝나는 마지막주간에 학생들을 상대로 여름성경학교와 캠프를 개최하는 등의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고있다. 이외에도 문맹퇴치를 위한 야간학교를 23개이상 개설하였고 또한 교회개척사역을 하여 현재 2개의 교회는 독립하여 성장하고 있다. 또한 대학생을 위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 김영자, "생명 다하는 날까지" 땅끝까지, 끝날까지 빚쟁이 선교사,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역, 서울:선교타임즈, 2000) p.158-167. }} 또 다른 독신선교사로서 매우 효과적으로 사역하고있는 경우는 케냐의 김옥실 선교사를 들 수 있다. 그는 1991년 수산교회의 후원으로 한국의 외항선교회를 파송되었고 그곳의 아프리카 내지 선교회와 협력하여 케냐로 파송을 받았다. 케냐에서 김선교사는 피난민들을 위한 사역으로 시작하여 상담 가정방문 및 그룹 성경공부사역을 감당하다가 피난민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됨에 따라 피난민자녀교육을 위한 선교사역 프로잭트를 시작하게되었다. 이 피난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사역인 "에벤에셀 사역"을 통해서 학교교육과 기독교교육을 겸비한 선교사역을 1993년 이후부터 주로 초등학교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감당하였다. 이후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약 300km 떨어진 지역에서 2000년부터는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예배를 드린후에 2001년 "에벤에셀 학원"을 시작하였는데 이곳은 크리스찬의 정신을 가지고 중등과정 이상의 학생 약 120명의 학생들이 기숙하면서 공부하고 있고 정진지체아들을 위한 특수학교도 운영하여 약 10여명의학생들이 교육에 임하고 있다. {{) 김옥실선교사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발췌, 2002년 9월 27일 }}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활동하고있는 송광옥 선교사는 여성목사로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1990년에 장신대 신대원 출신의 독신 여성 중에서 최초로 선교사로 파송된 경우가 되었는데, 그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있는 SETIA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고있으며 이 교수사역과 함께 자카르타 근교에서 1997년 이후부터는 한인 열방 교회를 개척하여 현재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 송광옥목사와의 인터뷰에서 발췌, 2002년 9월 26일. }} 전반적으로 볼 때, 독신여성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여성들의 타 문화권선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외에도 84년 하와이로 파송받아 켐퍼스 사역을 하고있는 최승희선교사, 1985년 의료선교사로 네팔로 파송된 이춘심 선교사, 1992년 케냐로 파송받아 도시슬럼가의 유치원사역을 감당하고있는 서숙자선교사, 러시아로 파송받아 교회개척을 감당하면서 담임목사로 사역하고있는 김정희 선교사, 일본에서 최초로 일본교단에서 담임목사로 안수받고 사역하고있는 박미애선교사, 프랑스에서 유학생 사역을 감당하고있는 고금자선교사 등등이 있다. 이외에도 여성독신선교사들이 많이 있는데 본 글에서 언급된 선교사들은 인터뷰를 위해서 특별히 선정된 사람들만 언급되었다.}}
이들의 사역은 주로 교육사업에 치중한 경향이 있는데 그 종류도 유치원사역에서부터 초등과정 교육사업, 중등과정과 고등과정의 교육사역에 많은 활동을 하고 있고, 이중에서도 일부는 대학교수로서 일하기도 한다. 이뿐 아니라 독신여성선교사들은 교회개척사역에도 많이 진출하고있다 이것은 1996년 한국장로교통합교단에서 여자목사안수가 허락된 이후 여자목사 선교사가 배출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 독신 선교사로서 목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여성선교사들로는 인도네시아의 송광옥, 프랑스의 고금자, 일본의 정인화, 일본의 박미애, 카작흐스탄의 김미영, 러시아의 김정희, 몽고의 오효강 등이 있다. }} 독신여성선교사들을 여성선교의 백미(白眉)로 표현하는 이광순 교수는 독신여성선교사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독신선교사들의 활동이 기혼여성선교사보다 그 사역에 있어서 더욱 열매가 있는 것은 그들이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자녀양육과 교육문제로 인해 문명화된 도시지역이나 도시 가까운 지역에 선교지를 정할 필요가 없다는 유리한 조건이 있다. 가정의 제약을 받지 않고 본국의 여성사역자들에게 대한 여러 가지 제약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선교현지에서 자유롭게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익이 있었다. 따라서 독신여성 선교사의 경우 많은 선교사역의 열매를 볼 수 있었다. {{) 이광순, 여성선교를 위한 프로그램, http:/kslee.cwmpcts.org/main/study/articles/kslee012.htm.2000, p. 3.}} 이에 반해 독신여성선교사는 독신이라는 상황으로 인해 여러 가지 사역의 어려움을 또한 경험한다. 이광순 교수는 독신선교사들이 당하는 어려움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신 여성선교사들은 가족이 없기 때문에 가장 깊숙한 오지 선교지나 또는 통신시설이 전혀 안되어 있거나 의료시설이 매우 빈약한 선교지에서 희생과 열정을 가지고 사역하기 일쑤인데 이 때문에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구조작업과 지원이 늦어지는 수가 흔히 발생하며 비위생적인 지역에서 사역하기 때문에 육체적인 건강을 헤치거나 고립된 생활로 인해 정신적인 외로움에 시달리는 문제가 있다. 또한 이들은 오지의 선교지나 고아와 빈민과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과 같은 고된 사역에 주로 투입이 되고 외부의 도움과 지원을 받기가 어렵다. {{) Ibid. p. 4 }} 이정순은 한국의 독신여성선교사들의 현황을 그의 책, 하나님을 향해 홀로선 여인들에서 결론적으로 독신여성선교사들의 어려움들을 외로움, 안전성의 문제, 대화할 상대가 없음, 정체성이 흔들림, 남편과 자녀가 없는 것에 대한 현지인의 몰이해, 혼자서 모든 일을 해야함, 사역대상이 제한적인, 타인의 보호가 필요함, 남자들과의 리더십의 문제, 이성의 유혹, 육체적 피로등을 들고 있다.{{) 이정순, 하나님을 향해 홀로 선 여인들, (서울: 조이 선교회 출판부, 2000) p. 92.}} 이외에도 독신선교사들은 후원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다소 불리한 점이 많은 어려움이 있다. 독신여성이라는 이유로 인해 큰 프로잭트나 교회개척사역을 맡는데는 어려움이 있고 또한 미래의 장기계획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다.{{) 이원재 선교사와의 이메일 인터뷰중에서, 2002년 9월 20일 }} 또한 일부 독신여성선교사들의 강한 지도력은 선교현지나 본국에서의 여성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기도 한다. {{) Ibid., p. 32}}
그러므로 한국장로교회의 선교사역을 보다 활발하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독신여성들이 선교사역을 감당할 때 보다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쓰임 받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독신여성선교사들의 인력을 극대화하고 이들의 사역을 적극 지원하여 선교현지에서 놀라운 열매를 맺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독신여성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뜨거운 기도와 헌신, 전도의 열정과 잘 훈련된 신앙, 체계적인 성경지식,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 고학력의 지적 수준 등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정순, op. cit., p. 121.}} 이러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인력을 적극 활용하고 이들이 온전히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단차원에서의 경제적, 교육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또한 독신여성선교사들이 보다 활발하게 한국교회선교사역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남성중심의 사역과 선교적 지원은 반드시 극복하여야한다. 일반적으로 독신여성선교사들의 사역이 남성선교사들의 사역보다 비교적 과소 평가되고 있는 데에는 한국교회가 여성들의 사역을 남성들의 사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과소 평가하는 경향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사역으로 인해 본국에서의 지원도 인색한 점이다. 따라서 이들 독신선교사들은 자력으로 재정확보와 시설운영을 해야하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남성사역을 중시하고 여성들의 사역은 덜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타 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교회개척사역의 강조점에서부터 다양한 선교사역의 영역의 확보와 전문화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야한다. 이렇게 할 때 독신여성선교사들의 사역은 더욱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사역으로 인정되게되고 그에 맞게 한국교회의 후원과 다양한 지원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a. Wife Missionary 의 선교활동 해방이후 한국장로교회가 타문화권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면서 여성들도 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목사가 선교사가 된 경우에 그의 아내가 함께 선교지로 가게 된 경우들이다. 1955년 최찬영 선교사로부터 시작하여 한국장로교회의 타문화권의 선교사역에는 남자선교사들이 파송되었으나 그들과 함께 아내들이 타문화권으로 함께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에게 선교사라고 하는 직책은 1988년까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Joyce M. Bowers 는 그의 글 "Roles of Married Women Missionaries: A Case Study"에서 일반적으로 결혼한 여성선교사들이 타문화권 선교사역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서구 선교사들의 예를 들어서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결혼한 여성선교사들이 남편과의 관계에서 크게 4가지의 형태로 사역을 감당하였다고 말한다. 첫째는 선교지에서 주로 가정 주부(Homemaker)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로서 이러한 여성선교사들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전적인 아내이며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여성선교사들은 주로 아직 어린 자녀들이 있거나 비슷한 나이의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 정도를 할 수도 있다. 또한 남편의 일은 완전히 남편 혼자의 독립된 일로서 담당한다. 둘째로 후원적 지원자 (Background Supporter)로서 활동적으로 남편과 남편의 일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하는 여성 선교사들이 있다. 이들은 가정 안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후원적인 일, 즉, 접대, 상담, 모니터역할, 성경공부와 언어 학습등과 같은 일에 적극적으로 돕는다. 이들은 적절히 가정 밖의 일도 가지고있는데 이러한 일들은 남편의 일과 관련이 많이 있다. 셋째로 팀 사역자(Team Worker) 인데 남편과 함께 팀 사역을 하는 경우 남편의 일에 직접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고 인건비를 받고 일을 하기도 한다. 넷째로 동역 사역자(Parallel Worker) 인데 자신의 선교역할이 남편의 역할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 여성선교사들의 경우를 말한다. 남편과 같은 단체조직에서 일할 수도 있고 남편의 일과는 관계없는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로 전담할 수도 있고 이것은 교회의 사역일 수도 있고 교회 밖의 일 일수도 있다.{{) Joyce M. Bowers, "Roles of Married Women Missionaries: A Case Study,"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January 1984, (8:1), p. 6}} 이러한 관점에 근거해서 볼 때 해방이후의 사모선교사들은 과연 어떤 역할을 주로 하고 있을까? 1988년 이전의 한국 여성선교사들의 많은 경우는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선교사역지로 향하면서도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가사노동에 시간을 보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주로 가정주부나 후원적 지원자의 역할을 하였다. Ruth Tucker는 이러한 부인 선교사들의 비효율적인 선교사역의 열매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교인력의 30%이상을 차지하였던 기혼 여성들은 종종 가사노동에 소모되었으며 전도사역을 위해서는 남성들 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 Ruth Tucker, Guardians of the Great Commission, (Grand Rapids: Zondervan, 1988), p. 10. }} 이러한 선교사의 아내로서의 자기정체성은 선교사로서 부름을 받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남편이며 본인은 남편의 후원자로서 가정을 지키는 자로서의 인식 때문이다. 또한 여성선교사의 역할은 한국의 전통적인 한국 가정안에서 여성의 종속적인 위치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반영하는 가정주부와 보조자로서의 여성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이광순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선교사 남편과 함께 선교사현지에 투입된 여성선교사들은 전문선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신학적인 교육이나 소명의식에 있어서 미흡한 점이 있었다. 우선 선교사로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남편이기에 선교사로서의 전문 훈련이나 교육을 여성선교사로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예컨데 현지 언어의 구사능력과 문화적응력이 부족한 부인선교사들이 선교지에 파송됨으로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 중에는 전문 선교 영역 없이 남편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보조하거나 아니면 자녀양육과 가사와 같은 영역에 전념하도록 함으로서 남편선교사의 사역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을 안겨주는 수도 있다. {{) 이광순, op. cit., p. 4}} 1988년부터 이러한 기혼한 사모선교사들이 정식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되면서부터 한국여성선교사들의 역할은 점차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모선교사가 정식으로 여성선교사로서의 직책을 받게된 사실은 한국교회 선교사역에 있어서 여성들에게 매우 깊은 의미를 주는 고무적인 일이다. 이러한 사건은 그 배후의 이유가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선교사의 아내들의 보조적인 역할이 보다 적극적인 선교사역에로의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시작점이 되었고 많은 사모선교사들이 이제는 팀 사역이나 동역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계기를 열게되었다. 이것은 교회안에서의 여성의 평등문제가 선교정책이나 선교현장에서도 실현된 획기적인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1988년을 지나면서 여성선교사들의 역할이 보다 적극적인 선교사역으로서 참여로 나타나면서 여성들의 역할이 후원자적인 역할에서 팀사역으로서의 전환을 서서히 하고 있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즉, 선교사의 부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이 이 시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점차로 여성 선교사들로서의 자기정체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현상은 매우 서서히 선교현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95년 베트남의 한인교회와 현지인 사역을 위해 파송된 김선희 선교사는 처음 선교사로 파송되었을 때, 사모로서의 역할과 전통적인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어야 했는데 특별히 한인교회의 사역을 감당할 때는 한국교회의 사모의 역할을 교인들에게 요구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남편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김선희선교사와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2002년 9월 18일.}} 인도네시아에 1988년 선교사로 파송 받은 노희주 선교사는 남편이 신학교 교수 사역, 어린이 사역, 교회지도자훈련사역 등등의 많은 역할을 감당하는 동안 처음에는 가정에서의 자녀양육을 가장 중요한 일로 감당하다가 점차로 현지에서의 적극적인 사역을 찾게되어 유치원사역과 여자 대학생 제자훈련 사역 등을 감당하면서 적극적인 후원사역에서 부부 팀사역의 형태로 발전해나간 경우이다.{{) 노희주 선교사와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2002년 9월 25일.}} 또한 칠레에서 1990년부터 선교사역을 감당한 오주엽 선교사는 원래 의사인데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헌신하였으나 자신의 전문직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주로 가정에서 가사일을 하면서 남편을 돌보는 일을 하는 가정주부와 남편의 적극적인 후원사역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전문영역인 의료사업을 남편과 함께 함으로서 효과적으로 팀 사역을 감당하고있다. {{) 오주엽 선교사님과의 인터뷰중에서 발췌, 2002년 9월 20일. }} 이러한 여성선교사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들의 주된 사역이 가정에서 시작이 되었고 많은 사역의 부분을 남편이 밖에서 일을 하는 동안 아내가 집안을 감당하는 보다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인력이 부족한 선교현장이라고 하는 특수성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남편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되는 경향을 보인다.
사역의 초창기부터 사모선교사가 적극적인 사역의 참여의 경우로는 아프리카의 부룬디로 1992년 파송된 정선미 선교사를 들 수 있겠다. 그는 남편이 현지의 EEAC 교단의 협력사역과 함께 Evangelical Mission for Africa 선교회의 리더로 다양한 사회개발사역을 감당하고있는데 사모선교사는 EEAC 교단의 기독교 교육 센타를 운영하고 선교회의 재정관리와 선교센타 스텝들의 훈련과 프로그램관리등의 사역을 함으로써 매우 적극적으로 남편과 협력하여 선교사역을 감당하고있다. 본인 스스로도 남편과의 사역에 있어서 자신은 보조적인 역할이라기보다는 철저한 파트너 사역으로 인식하고 있다. {{) 정선미 선교사와의 이메일 인터뷰 중에서, 2002년 9월 22일. }} 그렇다면 이러한 선교사들의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을까? 대체적으로 이러한 여성선교사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과중한 업무로 인해 쉽게 지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전통적인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이 주 업무였던 과거에는 전통적인 가정주부의 역할이외의 시간에 남편의 보조적 역할을 감당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적극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부인선교사의 경우는 가정에서의 가정주부의 역할뿐 아니라 사역에서의 온전한 파트너쉽을 형성하기시작하면서 두배로 늘어버린 사역의 과중함 때문에 많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더 늘어난 사역의 과중함 속에서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부담을 남편과 함께 나누지 못할 경우 결국 아내선교사는 가사업무와 현장사역의 이중적인 업무로 이한 고통을 당하면서 자녀양육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어려움은 사모선교사들의 선교사로서의 소명의식의 부족함이다. 비록 법적으로는 여성선교사로서의 지위를 보장하게 되었을지라도 기혼여성선교사들의 자기인식은 아직도 선교사로 헌신한 남편을 돕는 후원자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혼여성선교사들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보다 적극적인 여성선교사로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여성선교사들의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여성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남성들의 보조자 혹은 내조자 정도가 아니라 여성선교사로서의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철저한 자기정체성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독신여성선교사의 경우 이러한 문제는 대부분 이미 선교사로 파송받기 이전에 해결된 문제이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교에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강한 선교적 사명 때문에 많은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역을 계속적으로 감당한다. 이에 반해 사모 선교사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여성선교사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많은 사모선교사들은 이미 본인이 여성선교사로서 남편과 동등한 사역을 감당하고있다고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여성선교사들 중에는 남편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기에 아내도 이 사역의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여성선교사들의 생각에서보다는 아내선교사들을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태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남편선교사의 불행한 죽음이후 한 러시아 선교사는 더 이상 선교사역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이 선교사역을 감당하였고 아내선교사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한 후원교회가 지원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판단하게 된 이유에서였다. 이와 같이 부득이한 이유로 사역을 계속할 수 없을 경우 아내가 그것을 이어서 하지 못하고 결국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후원교회도 아내선교사를 더 이상 선교사로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 때문에 선교후원을 멈추어버리는 경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모선교사들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둘째로 이러한 여성선교사들이 전문여성선교사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가지기위해서는 그들에게 적절한 선교전문가로서의 적절한 교육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선교사의 재교육을 위한 경제적인 지원도 남편선교사에게는 주어질지라도 아내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재교육은 선교사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훈련의 기간이며 사역기간에 지친 몸과 마음에 새로운 활력소와 정체성을 다시 부여하는 목적도 있는데 이러한 재교육의 기회가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매우 제한적이란 것이다. 조사결과 사모선교사들이 비교적 활발하게 선교사역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여성이 선교사로 파송받기 이전에 이미 신학교육을 받았든지 분명한 선교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경우에는 여성선교사로서의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사역을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선교사의 아내들을 여성선교사로서 직책을 부여하게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에 걸맞은 적절한 계속교육을 통해서 여성선교사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발견하고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단차원에서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여성선교사들이 그들의 주어진 환경에서 재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주어서 여성선교사들에게 남성선교사 못지 않게 다양한 선교적 교육의 재충전의 기회를 주어야한다. 셋째로 부인여성선교사들의 경우 가사노동과 남편의 사역에로의 참여, 혹은 자신의 사역으로 인해 남성선교사보다 더욱 가중한 일을 감당하는 경향이 있기에 특히 가사노동이나 자녀양육에 있어서 남편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가사분담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결국 선교사라는 지역적 혹은 상황적인 이유 때문에 여성들의 역할이 전통적인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을 감당하면서도 외부적으로 또 다른 전문사역을 감당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결국 여성선교사들을 수퍼우먼의 역할을 하라고 하는 것이며 이러한 과중한 역할로 인해 여성선교사들은 결국 쉽게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고갈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파트너사역은 사역 현장에서 뿐 아니라 부부선교사들의 가정에서 가사노동의 분담과 자녀양육의 역할분담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5. 결론
1907년 최초로 한국여성이 타문화권 선교에 참여한 후 한국장로교회의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한국 교회와 사회 속에서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최선을 다해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왔다. 이제 한국의 타문화권 선교의 100주년을 바라보면서 한국선교는 여성선교사들의 활동과 공헌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 보다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여성의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서 한국교회가 노력해야한다. 또한 미래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며 온전한 평등함을 보여주신 주님의 말씀대로 여성들의 사역을 보다 제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하고 많은 젊은 기독여성들이 타문화권 선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