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3일
말씀: 엡4:8-10
제목: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의 뜻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은 우리에게 매우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사순절을 기점으로 고난주간을 정해서 지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부활의 신비는 고난주간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대로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만 보더라도 주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움직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만 움직이신 이유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하신 내용이 마태복음 4장 1~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아시는 내용이라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 의미만 언급하면 마귀는 결과적으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어기는 죄를 짓게 만드는 일을 시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하시는 구속의 사역을 물거품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시험과 유혹을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는 굴곡이나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고 신앙이 더디 성숙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실행하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신 사건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셨으며, 십자가의 승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증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삶은 곧 하나님의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여정은 하나님의 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14:7-9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을 본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셔야 합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구속의 시대, 즉 신약 시대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신비만 보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엡4:8-10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승리하고 선물을 주신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올라가셨다’라는 말씀을 붙들기 위해서 인용한 것입니다. ‘올라가셨다’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려오셨다’입니다. 그리고 내려오신 이유는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야기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게 되었다'에서 그치고 만족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선물을 주신다’라고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에 올라가셨다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그리스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올라가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엡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먼저 ‘올라가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를 사도행전 2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나라에 가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신 것은 이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통치하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비밀과 풍요로움과 충만함과 신비함을 부어주셔서 우리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 올라가셨고, 성자 하나님의 권세로 이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려오셔서 하신 일이 구원이었다면, 올라가셔서 하시는 일은 구원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의 권세를 우리에게 맡기시고, 이것이 끊임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회의 머리 되셔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를 하나 되게 하려고 부르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이 이제부터 가능해졌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이, 즉 십자가의 지극히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의로운 자로 부르신 이는 우리를 영광스럽고 충만하게 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에베소서 4장 8절 말씀처럼 우리에게 분량대로 선물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것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반대로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얼마나 큰 풍족함을 약속하셨는지 아셔야 합니다. 엡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분량대로 다 다르게 주신 이유는 한 사람에게 모두 줄 수 없을 만큼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에게 주신 분량이 교회에서 하나로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충만하신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11절 말씀은 적극적인 그분의 약속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탄이 쥐고 있던 원래 우리의 것을 그에게서 빼앗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한곳에 모으시고, 친히 그 머리가 되셔서 우리를 그분의 지체로 삼으시고, 그분의 장성한 분량의 비밀과 풍부함과 충만함을 서로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려오셔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려오셔서 죄의 사슬을 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며,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올라가셔서 성자 하나님의 권세로 우리를 이끌며 교회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비는 다양함 속의 풍성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고 신비나 풍성함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비한 체험들을 부러워합니다. 다른 사람이 영적 체험을 간증하면 ‘하나님은 왜 나에게는 침묵하시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풍성함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건강도, 지혜도,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도 주셨습니다. 큰 문제를 당했을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못 본다는 것은 그것이 큰일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큰일이 없는 것도 복입니다. 암이 치유되는 것도 신비한 일이며,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완전히 부서졌는데 운전자와 동승자가 멀쩡한 것도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에 대한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고를 당해 이런 극적인 체험을 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운행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더 놀랍고 감사한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이중적 구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함과 풍성함과 충만함을 허락하셨다는 이 이론적인 말씀이 실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실제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신 것도 실제입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늘나라로 올라가시고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도 실제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실제를 확인하고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풍성함을 위해 얼마나 교회에 부어주고 계신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다양함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함을 주시기 위해 이런 것들을 얼마나 허락하셨는가 하는 기대가 생깁니다. 사실 교회의 풍요로움과 신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사명을 다하며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비록 선명하지 않아도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보는 자들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더욱 강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거나, 큰 정원을 가꾸거나, 큰 건물을 세우거나, 큰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특징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작으면 금방 표가 하지만 크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구분이 잘 안 됩니다. 지구는 둥글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도 커서 평평한 것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풍성함을 드러내시기 위해 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금방 알아채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저런 일을 허락하시고, 왜 성도가 잘못하고 있는데도 방관하시며, 심각한 문제와 흉측한 죄가 드러났는데도 내버려두실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나라만의 어려움이 아닌 전 세계의 고통이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낸 교회가 많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코로나의 어려움을 겪게 하셨을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그분의 사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풍성함과 충만함이 너무 커서 구별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가 둥글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법칙을 가르쳐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에서 나타나는 사실들을 확인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큰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누가복음 7장 28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구약을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그 정도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큰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보다 요한이 크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직접 본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그분의 계시를 들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입니다. 천국에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요한보다 작은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한 그분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비하고 충만하고 풍요로우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는 요한보다 우리가 더 크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 크기를 '그러나'를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이 말씀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풍요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실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를 통해 우리를 신비함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우리를 언약궤로 부르시고, 성령의 전으로 세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운명적으로는 하나님나라에 가 있는 자로, 법적으로는 양자로) 부르신 풍성함을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이런 축복의 자리로 초대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성령을 통해 지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