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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관운
西大門刑務所 獄中記錄展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광복 제62주년을 기념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애국선열들이 남긴 기록은 한 자리에 모아 특별 기획전을 마련하였다.
의병전쟁(義兵戰爭)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을 거쳐 을사늑약(1905)을 통해 대한제국을 강점하려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한민족은 분연히 일어나 무력으로 일제와 맞서 싸웠다. 전국 각지에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국권회복의 목적으로 국민들이 직접 무기를 들고 일제의 군대와 전쟁을 벌였다.
의병들은 특히 1907년 11월 전국 연합의병부대인 13도창의군을 결성하고, 동대문 부근 12km 지점까지 진격하여 서울탈환 작전을 결행하기도 하였다. 의병 가운데 서울탈환작전을 이끈 허위⋅이인영⋅이강년⋅이은찬 의병장 등이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고, 순국직전 남긴 그들의 옥중시를 통해 국권회복의 군센 의지를 볼 수 있다.
옥중시(獄中詩) / 허위(許蔿, 왕산(旺山) 1854~1908)
國恥民辱(국치민욕) 나라 수치 백성 치욕
乃室於比(내실어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不死何爲(불사하위) 죽지 않고 어이하리오
父葬未成(부장미성)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으며
國權未復(국권미복)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거니
不忠不孝(불충불효) 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
死何暝目(사하명목) 죽은들 또 어떻게 눈을 감으랴
허위(許蔿, 왕산(旺山) 1854~1908)
경북 선산 출신
1896년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 거의
1907년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창의군 진동창의대장으로 활약
1908년 2월 13도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서울탈환작전 전개
동대문 부근 약 12km지점까지 진격
1908년 2월~5월 임진강 유역에서 의병운동 전개. 5월 피체, 서대문 형무소 수감
1908년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寄萬齡億齡書 (기만령억령서)
國事至此不死何爲 (국사지차불사하위)
今我得基所矣 (금아득기소의)
汝兄弟間來見也 (여형제간래견야)
戊申五月二十六日 (무신오월이십육일)
在京城日憲兵隊拘中書(제경성일헌병대구중서)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지금 나는 제대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너희 형제들은 와서 보거라
1908년 5월 26일
아버지가 경성의 일본헌병대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글을 쓴다.
<경성 일본헌병대 구금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옥중시 / 이인영(李麟榮, 1867~1909)
分明日月顯中州(분명일월현중주)
西海風潮濫○流(서해풍조남○류)
蚌鷸緣何相特久(방휼연하상특구)
西洲應無漁人收(서주응무어인수)
밝고 밝은 해와 달이 중주에 떠 있는데
서양의 새 풍조가 넘쳐흘러 들어오네
저 조개와 황새 어찌 서로간에 버티는가
서주에는 이를 잡을 어부 없어 그런 거네
<서대문 형무소 수감시 나라의 형편을 걱정하며 남긴시>
이인영(李麟榮, 1867~1909)
경기 여주 출신
1895년 춘천⋅양구지역에서 의병 거의
1907년 원주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관동창의대장으로 활약
1907년 전국의 의병을 모아 연합군을 조직, 13도창의군 결성, 총대장으로 활약
1908년 부친의 부고 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귀향
1909년 6월 피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09년 9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옥중시 / 이강년(李康秊, 운강(雲崗) 1858~1908)
成敗何須設 (성패하수설)
從容如踐言 (종욕여천언)
丹心培養驗 (단심배양험)
感泣聖朝恩 (감읍성조은)
성공 실패 어찌 말할 필요 있으랴
조용하게 말한 것을 실천하리라
붉은 맘은 북돋아서 기른 것이고
흘린 눈물은 임금 은혜 감격해서네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을 아들에게 당부하는 편지>
이강년(李康秊, 운강(雲崗) 1858~1908)
1869년 1월 문경에서 거의 의병활동 전개. 유인석 의병부대에서 유격장으로 활약
1907년 3월 제천에서 재 거의. 단양, 제천, 원주, 강릉, 문경, 안동 등지에서 활약
1907년 7월 제천전투에서 적 500여명 토멸. 13도창의군 호서창의대장으로 추대
1908년 6월 충북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피체, 서대문형무소 수감
1908년 9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옥중시 / 이은찬(李殷瓚, 1878~1909)
一枝李樹作爲船 (일지이수작위선)
欲濟蒼生泊海邊 (욕제창생박해변)
未得寸功身先溺 (미득촌공신선익)
誰算東洋樂萬年 (수산동양악만년)
오얏나무 한 가지를 베어 배를 만들어서
우리 창생 건지고자 바닷가에 띄웠는데
작은 공도 못 이루고 몸이 먼저 빠졌으니
어느 누가 우리 동양 만년 낙을 기약하랴
<기울어가는 국운을 통탄하며 남긴 옥중유시>
승아에게 유언하여 보냄
네 아비의 평생에 품은 단충은 왕가의 일에 죽고자 한 것인데, 이제 뜻을 이루니 또 무엇을 한하랴.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지 말고 정신을 수습하여 네 아우를 데리고 그 날 옥문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내가 죽은 뒤 사흘 안에 마땅히 장사지내야 하는데도, 고향의 산이 길이 멀어 일과 힘이 관을 수레에 실어서 반장하기 어려우니, 이 뜻으로 자세히 종가에 고하여 묘자리 하나를 효령대군(孝寧大君) 묘소의 주위에서 빌리기를 청함이 좋을 듯하다.
이은찬(李殷瓚, 1878~1909)
강원도 원주 출신
1907년 9월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거의
1907년 관동창의군 편성,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 중군장으로 활약
1907년 관동창의군 편제를 13도창의군으로 발전시켜 13도창의군 형성의 모태적 역할 수행
1909년 임진강 유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
1909년 3월 31일 간도에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 및 독립운동가 향성 계획을 추진중 용산역에서 피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09년 6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3⋅1독립 만세운동(3⋅1獨立万歲運動)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각종 식민지 악법을 공포하여 한민족을 식민지 노예로 전략시키는 무단정치를 시행하였다. 이에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은 자주독립정신을 한데모아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펼쳐,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는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졌다. 이 운동으로 인해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피체 또는 순국하였으나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전세계에 알리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 약 3,0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피체, 투옥되었다. 특히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모진 고문과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설야(옥중시) 눈 오는 밤 / 한용운(韓龍雲)
四山圍獄雪如海 (사산위옥설여해)
衾寒如鐵夢如灰 (금한여철몽여회)
鐵窓猶有銷不得 (철창유유소불득)
夜聞鐵聲何處來 (야문철성하처래)
감옥 주위 사방 산에 눈이 잔뜩 쌓였는데
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꾸는 꿈은 싸늘하네
쇠창살도 꽉 닫히지 않은 틈이 있는 탓에
한 밤중에 어디선가 찬 소리가 들려오네
<감옥생활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표현한 옥중시>
한용운(韓龍雲, 만해(卍海) 1879~1944)
충남 홍성 출신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
1916년 월간지 ‘유심’ 발간, 계몽운동 전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주도, 3ㆍ1독립만세운동 전개
1919년 피체, 1920년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26년 저항시 ‘님의 침묵’ 발간, 저항문학 운동 전개
1927년 신간회 가입,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으로 활약
1931년 조선 불교청년동맹결성, 청년운동 전개, 항일독립사상 고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옥중시 / 남상락(南相洛, 1892~1931)
영웅호걸(英雄豪傑) 누구인고
고해종적(苦海踪跡) 가소(可笑)롭다
무궁화(無窮花) 금수강산 언제나 이뤄본가
뜻 두고 이루지 못하니 그를 서뤄 하노라
<독립의 염원을 표현한 옥중시>
남상락(南相洛, 1892~1931)
충남 서산 출신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 전개
1919년 4월 고향인 충남 서산 대호지면에서 민중을 규합하여 대호지 4ㆍ4독립만세운동 주도. 독립만세운동 전개 중 피체되어 8개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옥중시 / 오석준(吳錫浚, 1876~1951)
花鳥長安任自閒 (화조장안임자한)
雲飜雨覆十年間 (운번우복심년간)
강적빈훤원욕누 (강적빈훤원욕누)
家書不至雁空還 (가서부지안공환)
講學江舟誰陸子 (강학강주수육자)
編詩燕獄爾文山 (편시연옥이문산)
坐特沈沈長夜曙 (좌특침침장야서)
何如薛客滯西關 (하여설객체서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장안 땅은 한가론데
시속따라 그럭저럭 십 년 세월 보냈구나
디 피리는 자주 울려 원이는 눈물나고
집 편지는 안 왔은데 기러기는 돌아가네
배 위에서 강학을 한 육자는 그 누구런가
연경 옥서 시 쓴 이는 바로 문산이었다네
깊은 밤에 앉은 채로 긴긴 밤을 새우거니
서관에서 잡혀 있던 설 땅 객과 어떠한고
<나라의 형편과 외세의 침략을 경계하며 쓴 옥중시>
*육자(陸子) : 송(宋)나라의 충신 육수부(陸秀夫), 원(元)나라가 송나라를 함락하자 황제와 함께 강물에 투신하여 죽음.
*문산(文山) : 송(宋)나라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원(元)나라 침략시 사신으로 갔다가 잡혀 3년간 연경(燕京)의 감옥에 투옥,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음.
*설객(薛客) : 설(薛) 땅의 객(客)으로,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충신 명상군(孟嘗君)을 지칭. 진(秦)나라에 들어갔다가 소왕(昭王)에게 잡혀 서관(西關)에
갇혀 있을 때의 상황을 일컫음.
오석준(吳錫浚, 1876~1951)
경북 영양 출신
1919년 3월 25일 영양 독립만세운동 주동
1919년 주동자로 검거, 1년 6개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옥중시 / 이준용(李俊容, 1860~1945)
땅은 내 당이로되
나라를 잃었으니
주인은 나그네 되고
나그네는 주인되었네
내 모든 것 혼을 부어
자주 독립 밑거름하니
광복의 그날이 그날이 오면
춤을 추세 춤을 추세
경신년 회갑날 옥중에서 이준용
<옥중 회갑날 나라 잃은 서러움과 독립을 갈망하여 쓴 옥중시>
이준용(李俊容, 1860~1945)
강원도 춘천 출신
1907년 9월 춘천에서 지용기(池龍起)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으로 활약, 자신의 집에 대장소 설치 및 군자금 제공
1919년 csehry 춘천교구장으로 활동
1919년 3월 28일 춘천읍내에서 독립만세운동 전개, 현장에서 피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옥중에서 어머니게 올리는 글월 / 심훈(沈勳, 본명 심대섭(沈大燮), 1901~1936)
어머니
오늘 아침에 차입해 주신 고의적삼을 받고서야 제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그 동안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저는 이곳까지 굴러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고생을 겪었지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집에 와서 지냅니다. 쇠고랑을 차고 용수는 썼을망정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 순시까지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에서 무악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 들어가는 듯 하였습니다.
어머니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닮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끊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명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 먹기가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중략)
어머니
며칠 동안 몰래 적은 이 글월을 들키지 않고 내어 보낼 궁리를 하는 동안에 비는 어느덧 멈추고 날은 오늘도 저물어 갑니다. 구름 겉힌 하늘을 우러러 어머니의 건강을 비올 때, 비 뒤의 신록은 담 밖에 더욱 아름답사온 듯 먼 천의 개구리 소리만 철창에 들리나이다.
1919년 8월 29일
심훈(沈勳, 본명 심대섭(沈大燮), 1901~1936)
경기도 시흥 출신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독립만세운동 전개. 현장에서 피체되어 6개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22년 중국 지강대학(之江大學)에서 수학. 귀국 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
1930년 3월 1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그날이 오면’발표
1931년 옥중투쟁을 소재로 한 ‘불사조’ 발표. 강한 항일저항의식 표출
1934년 ‘상록수’ 발표. 젊은이들이 식민지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여 민족의식 각성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국외 독립운동(國外獨立運動)
일제 감점 후 국권수호운동 펼치던 민족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ㆍ러시아ㆍ미국 등지로 이주하여 국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전생을 준비 하였다. 또한 해외에서 일제와 맞서 싸우며 조국 독립의 발걸음을 한발 한발 내딛었다.
이때 일제에 의해 피체된 국외 독립운동가들은 당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수감장소인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과 악형의 고통 속에서도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옥중일기 / 김구(金九, 호 白凡, 1876~1949)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쎈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내어민다. (중략)
의복은 벗어 꾸려 놓고, 수건 한 장씩으로 허리 아래를 가리고 알몸으로 공장까지 간다. 공장은 멀면 백고, 가까우면 50보 정도이다. 그 거리를 알몸, 맨발로 빨리도 못 걱고 천천히 걷는다. 손 활개도 못 친다. 벽돌 한 장씩 편 것을 밝으며, 공장으로 가서 각각 자기의 역의(작업복)를 입는다.
그런 다음 또 열을 지어 쪼그려 앉힌 다음 인원을 점검하고 세수를 시킨 뒤에 아침밥을 먹인다. 그러고 나서는 곧 역사(작업)를 시작한다. 일의 종류는 간단한 철공ㆍ목공ㆍ피복공ㆍ가마니 짜기 등을 비롯하여 궐련제조ㆍ새끼꼬기ㆍ김매기ㆍ빨래ㆍ밥짓기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시 감옥생활의 고초와 공장 노동생활에 대해 기록한 백범일지의 일부분>
김구(金九, 호 白凡, 1876~1949)
황해도 해주 출신
1896년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 처단
1908년 신민회에 가입, 구국운동 전개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으로 피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취임, 활동
1931년 한인애국단 조직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취임. 해방 후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총격, 서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나의 사랑하는 아내 혜련 / 안창호(安昌浩)
(수산이가 이선생이 편지한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고 하시오)
당신이 경성 서대문형무소로 두 번 보낸 편지를 다 반갑게 보았습니다. 이 형무소의 법규가 두 달에 한 번씩 편지하는 법인데 다른 곳에 편지하는 때에는 당신한테는 편지를 보내지 못하게 됩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평생에 당신에게 기쁨과 위안을 준적이 없었고, 이제 늘그막에 와서 근심과 슬픔을 주게 되었으니 불안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더욱이 집안일과 아이들에 대한 모든 시름을 늘 혼자 맡게 하니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내가 종종 한곳에 홀로 있어 평소에 잘못한 여러 가지 허물을 생각하고 한탄하는 중에 남편의 직분과 아버지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을 또한 스스로 책망하는 바입니다.
1933년 6월 1일
안창호(安昌浩, 도산(島山) 1878~1938)
평남 강서 출신
1889년 독립협회 가입, 독립협회 관서지부 발기, 만민공동회 개최
1905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공립협회 창립, 공빌신보 발행, 초대회장으로 활동
1907년 항일비밀결사 신민회 조직, 민족계몽운동 전개
1913년 흥사단(흥사단(興士團)을 조직, 민족계몽운동 전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활동
1932년 윤봉길의 상해 홍커우 공원 의거에 연루되어 피체, 4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대전형무소로 이감
1935년 대전형무소 출옥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관련으로 피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37년 12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1938년 서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문화ㆍ사회주의 운종 의열투쟁(文化ㆍ社會主義運動 義烈鬪爭)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은 좌절하지 않고 조국 독립을 위해 각계각층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목숨을 바친 의열투쟁, 지식인의 문화운동, 노동자와 농민들의 사회운동 등 투쟁의 방법은 다르나 오직 나라를 되찾겠다는 공통된 신념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에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민족정신으로 결국 우리는 1945년 8월 독립을 쟁취하였다.
옥중편지 / 여운형(呂運亨, 몽양(夢陽) 1885~1947)
조선으로 호송되어 오자 날까지 몹시 뜨거워서 냉수만 자꾸 들이켰더니 그만 소화불량이 되었다. 그때 얻은 소화불량을 이때까지 고치지 못하고 계속하여 앓았다. 감옥소 덕에 얻은 병이 다섯 가지이다. 맨 처음 상해에서 잡힐 적에 운동장에서 경관과 격투하다가 귀를 몹시 얻어맞았는데 그때 고막이 상하여 한쪽 귀는 아주 병신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옥에서 주는 조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서 이 한 개가 그만 부스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잇몸 전체가 상하고 염증을 일으켜 퍽 괴로웠다. 옥에 갇힌 지 며칠 못가서 신경통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 통에 머리와 수염이 이렇게 하얗게 세어 버렸다. 코 아래 수염은 흰털이 많기는 하지마는 이전 모양으로 다시 길러 버리려고 생각한다. 신경 관계인지 불면증도 대단하였다. 하루 3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어 퍽이나 애를 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 안에서는 누구나 다 앓게 되는 치질을 걸리어 퍽 고생하였다. 네 번이나 수술을 했는데 그것은 완치된 모양이다. 그리고 보니 옥살이 3년에 나는 병쟁이가 되어버린 셈이다. 청년은 참으로 속히 늙어버리는 모양이다. 일은 그물 뜨는 일과 종이를 꼬아서 지통 만드는 일 두 가지를 배웠다. 일을 잘한다고 그 상으로 목욕도 남보다 좀 자주 얻어 할 수 있게 되었다.
[수감 중에 얻은 병과 당시 옥중 생활을 회고하여 쓴 글 / <신동아> 1932년 9월]
여운형(呂運亨, 몽양(夢陽) 1885~1947)
경기 양평 출신
1917년 상해로 가서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하여 활동
1918년 신한 청년당 조직, 파리강화의 김규식 파견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 역임
1922년 10월 백범 김구 등과 함께 한국 노병회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 준비
1826년 1월에 김찬, 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조직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다가 영국경찰에 체포, 국내로 압송된 뒤 서대문형무소 투옥
1944년 8월 건국동맹조직
2005년 대통령장 추서
옥중편지 / 오기만(吳基萬, 1905~1937)
아주머니 이미 아시려니와 나는 5년 징역을 졌습니다.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공소를 포기하였는데 그것은 아주머니의 수고를 덜어야 하겠다는 뜻도 섞여 있습니다. 미결 중에 여러 가지로 아주머니의 신세를 입었습니다. 앞으로는 두 달에 한번밖에 편지를 쓸 기회가 허락되지 아니하는데 배천과 평양에 번갈아 쓰려면 넉 달에 한번밖에 쓰지 못하겠습니다.
아이들이 건강하지요?
가끔 꿈에 경석이 경수를 보오며 내가 이번 고국 땅에 내리던 날 이제부터는 내 걱정은 조금도 마시고 지내시기 바랍니다. 5년이 긴 것 같지마는 일생에 비기면 한 마디에 불과하오며 하물며 긴 역사에 비기면 한 점에 지날 것 있습니까? 잠깐 새에 끝나겠지요.
나는 늘 아주머니를 자랑할 조선의 여성이요 존경할 모성이라고 생각하며 아주머니 같은 동지를 가진 나는 퍽 행복 된 자라고 믿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동생 오기영의 부인에게 가족의 수고로움을 덜고자 공소를 포가한 상황과 더불어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의 옥중편지]
오기만(吳基萬, 1905~1937)
황채도 연백 출신
1928년 4월 16일 신간회 배천지회 준비위원 활동 중 일경에 피체
1929년 1월 한국 독립유일당 상해총성회(안창호 결성) 가입
1932년 1월 적색노동조합 결성을 기도하여 동년 10월 적색노동조합부두위원회 조직
1934년 4월 상해에서 활동 중 피체.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중병으로 1936년 6월 병보석 출옥
1937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벌(罰) / 김광섭(金珖燮, 1906~1977)
나는 2223번
죄인의 옷을 걸치고
가슴에 패를 차고
이름 높은 서대문형무소
제3동 62호실
북편 독방에 홀로 앉아
‘네가 광섭이냐’고
혼잣말로 물어보았다.
3년 하고도 8개월
1,300여 일
그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시간을 헤이고 손꼽으면서
똥통과 세수대야와 걸레
젓가락과 양재기로 더불어
추기나는 어두운 방
널판 위에서 살아왔다
여름 길고 날이 무더우면
나는 바다를 부르고 산을 그리며
파김치같이 추근한 마음
지치고 울분한 한숨에
불을 지르고 나도 타고 싶었다
겨울 긴 긴 밤 추위에 몰려
등이 시리고 허리가 꼬부라지면
나는 슬픔보다도 주림보다도
뒷머리칼이 하나씩 하나씩
서리같이 세어짐을 느꼈다
나는 지금 광섭이로 살고 있었으나
나는 지금 앓은 것도 모르고
나는 지금 얻은 것도 모르고 살 뿐이다
그러나 푸른 하늘 아래로 거닐다가도
알지 못할 어둠이 문득 달려들어
내게는 이보다도 더 암담한 일은 없다
그래서 어느덧 눈시울이 추근해지면
어데서 오는 눈물인지는 몰라도
나는 눈물은 이제 드디어
사랑보다도 운명에 속하게 되었다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처벌된
이 어둠의 보상으로 일본아 너는 물러갔느냐
너는 너의 나라를 주어도 싫다
[옥중생활의 외로움과 식민지 현실을 통탄하며 지은 옥중시]
김광섭(金珖燮, 1906~1977)
함북 경성 출신
중등학교 졸업,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학과 졸업
1933년 4월~1940년 중동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고취, 일제의 언론탄압정책 비판 독립사상 고취 활동전개
1935년 유치진의 작품 공연을 계획 중 일경에 피체, 구금
1941년 2월 피체, 2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 / 함석헌(咸錫憲, 1901~1989)
꿈속에 다녀간 길 꿈같이 다시 왔네
깼던 꿈 잇는 건가 깼다던 것 꿈인가
모두 다 꿈속 옛일을 맘 상할 것 없고나
강낭밥 한 움큼이 삭아서 피어나니
스물 네 마디 끝에 가지가지 생명의 꽃
거룩한 창조의 힘을 몸에 진고 있노라
쉬인에 가르치자 다시금 채치시니
내 둔도 둔이언만 아빠 맘 지극도 해
날 아껴 하시는 마음 못내 눈물겨워서
짓밟는 형틀 밑에 흘린 피 술로 빚고
풀무에 타고난 맘 금잔으로 쳐 내오니
아버지 눈물 섞어서 이 잔 들어 주소서
바람아 네가 불면 언제나 불 것이냐
울부는 가지 끝에 네 만가 높았더라
겨울이 왔다면이야 봄을 멀다 할 거냐
삭풍아 불어 불어 마음껏 들부숴라
떨어진 내 잎새로 네 무덤 쌓아 놓고
봄 오면 웃는 꽃으로 그 무덤을 꾸미마
<독립의 그날을 기원하며 쓴 옥중시>
함석헌(咸錫憲, 1901~1989)
평북 용천 출신
1919년 3ㆍ1독립만세운동시 평양고등보통학교의 연락을 맡고 전단배포와 시위등을 통하여 독립만세운동 전개. 그 뒤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입학,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클럽 결성, 잡지 ‘성서조선’ 발행 등 민족운동 전개
1928년 오산학교 교사 재직, 민족의식 고취 활동 전개
1940년 평양 농사학원 운영 중 피체, 옥고
1942년 3월 ‘성서조선’ 158호에 실린 ‘조와(弔蛙)’라는 글에서 ‘민족의 희망’을 표현하였다 하여 ‘성서조선’ 폐간. 이와 연관되어 피체, 미결수로 1년가 옥고
2002년 건국포장 추서
옥중편지 / 지봉하(池鳳河 1909~1933)
아버니께서 보내신 편지는 벌써 전에 받아 읽어 보았으나 예외사정으로 이제야 몇 글자로 문안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요전에 편지까지는 모두 편안하시고, 큰집과 작은집이 모두 편안하다 하셨으나, 소식을 못들은 요사이는 어떠하신지요? 집안의 형편을 들으니 기가 막힙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는 아주 건강한 몸으로 지냈으나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어찌된 일인지 몸이 점점 쇠약하기 시작하여, 수개월 전부터는 책을 읽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괴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전에 송금해 주신 돈 4원은 실수 없이 수령하였는데 동관(東官) 형님께서 2원을 더하여 6원이 왔습니다. 그 형의 일은 얼마나 감사한지...
아버지 참으로 죄송하옵고, 황송한 말씀이나 몸을 좀 보하여야겠습니다. 몸을 보하는데는 돈이 좀 있어야 할 터인데, 약 10원 가량을 12월 초승께 부쳐서 20일 안으로 여기(서대문형무소)에 도착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좋겠지만 그것이야....
수개월 전부터는 또 기침이 생겨 고생합니다.
1932년 11월 11일 지봉하
[옥중 생활의 고통과 가족의 안부를 묻고, 필요한 돈을 요청하는 편지]
지봉하(池鳳河 1909~1933)
함북 회령 출신
1930년 5월 30일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33년 옥중 순국
西大門刑務所 殉國烈士
강만형 강석대 강순필 강우규 김경운 김경태 김기한 김도원
김원조 김종근 김종철 김태산 김학섭 김헌경 김 혁 남상목
박희준 변춘식 석기호 송학선 신대룡 신석규 신창룡 신현구
우윤구 유관순 유택수 윤국범 윤병구 윤준희 이강년 이규선
이억준 이원직 이유복 이은찬 이응수 이인영 이인준 이재명
정용대 정흥준 조중대 채경옥 채기중 최경호 한상호 한정만
김동삼 김병일 김선일 김수민 김순희 김언세 김영권 김용원
동풍신 모인화 문창학 문태수 박복인 박수찬 박의송 박흥석
안광호 안창호 안철재 양한묵 엄순봉 오상원 오석완 오의선
이능권 이명언 이병묵 이병문 이선구 이성구 이수홍 이양섭
이제우 이종활 임국정 임봉주 임용우 장소진 정경태 정남용
허 위 현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