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장 19절 –20절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과 회복의 기로인 선에서 사무엘이란 뜻은 하나님께 묻다, 하나님께 질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락의 시기의 대명사인 사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종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물을 드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겨도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예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교회안에서도 하나님께 구하는 강청형의 기도는 뜨겁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좀 더 열심있는 성도들은 금식하며 강청형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교회안에서 기도 잘하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묻는 즉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이루어 지는 관계형의 기도를 하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는다고 하는 인식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은 찬양에는 종종 등장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을 이상한 것처럼 여깁니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듣는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제사장은 제사장이며 동시에 사사입니다. 삼손이후에 이스라엘사회를 이끌었던 사사입니다. 엘리제사장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른 자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지극히 형식적인 신앙인의 대명사입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성이 듬뿍들고 거창한 예배를 드림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며 사사가 이러니 그 시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의 생각에 옳은데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듣는 기도가 사라진 그 때 그 때는 바로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고자 하나 잉태할 힘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바로 한나를 대표하는 그 시대의 모습은 하나님이 잉태를 막으시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이러한 문제 가운데 있습니다. 성도들의 수평이동은 있지만 불신자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런 자들은 지극히 적은 시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는 여호와의 절기를 맞아 성소에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한나님께서 자기의 처한 처지를 돌아봐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철저하게 자기의 무능력함과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여 서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하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엘리제사장의 눈에는 한나가 술주정하는 여인으로 비추어 집니다. 독주를 마시고 술주정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책망하는 엘리제사장 앞에서 한나는 자신이 눈물로 간구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제사장은 하나님이 한나의 구하는 것을 허락하시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한나는 엘리제사장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제사장같이 지극히 타락한 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해 보이는 자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있을 때 지극히 타락한 대제사장도 그 해 대제사장이었기에 예수님이 대속적인 죽음을 하실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겸비하다면 우리는 불신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