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실 공동묘지 ...
▲ 서삼릉의 태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세종대왕의 태실이 보이지요 ...
▲ 숙종태실과 뒷면 ...
▲ 왕자들의 태실 ...
▲ 공주와 옹주들의 태실 ...
▲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에서 천봉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는 태실 뒷면에 날짜가 지워져 있어요...
▲ 덕혜옹주 태실
창덕궁 기록이 남아있는 덕혜옹주 태실의 뒷면...
▲ 왕자와 공주들의 공동묘지...
▲ 인성대군 묘...
▲ 태실 안내판 ...
▲ 조선 역대왕 태실
왼쪽에 있는 검은 비석은 오석비군으로 조선왕들의 태실을 따로 모아 놓은 것이지요
조선왕 19기와 장조(사도세자) 1기, 영친왕 1기, 왕세자(이구) 1기 등으로 총 22기가 모아져 있어요
단종과 연산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철종, 고종 등 8기의 태실은 다행이도 이곳에 없네요...
▲ 조선 왕가 태실군
우측엔 화강암비로 만들어진 대원군,대군,공주,옹주 등 조선 왕가들의 태실이 모아져 있지요
알만한 인물들 덕흥대원군, 의소세손, 문효세자, 덕혜옹주, 페비 윤씨, 인성대군 등이 있어요 ...
▲ 비석의 뒷면
뒷면을 보면 우측 상단 부분이 일정하게 깎여 있는 흔적을 볼수 있는데
이는 충정어린 민초들이 일본의 연호를 삭제한 것이라 하네요 ...
▲ 태실의 전경 ...
▲ 태실의 전경 ...
▲ 왕자와 공주 묘역과 안내판 ...
▲ 깨진 묘비들과 뒷면 ...
▲ 왕자 공주 묘역 전경
가운데 장명등 하나, 혼유석 하나에 양 옆으론 망주석 2개와 문인석 2개가 놓여있지요
보통 대군묘에 준하는 상설인데 원래 대군묘는 원(園)의 규모와 맞먹거나 똑같이 해야 하지요
그런 묘역을 일제는 집장관리한다는 미명아래 이곳으로 집단으로 옮기고 원래 있던 터는 모두 팔아먹었다고 하지요
직접 보면 봉분이 굉장히 소박해서 얼핏보면 마치 유골함 단지를 묻은 정도가 연상되는데
조선시대 일반 서민들도 저렇게 작은 봉분은 없어요
이는 지극히 의도적인 것으로 조선왕실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만든것으로 울분을 자아내게 하네요 ...
▲ 후궁묘역 곡장과 안내판 ...
▲ 후궁묘역
숙원이 한명 끼어 있지만 내명부 품계로 봐선 정2품과 종2품만 따로 모아놓은듯 하지요
봉분 앞엔 혼유석과 향로 그리고 묘비가 하나씩 놓여 있어요
그런데 어찌하여 중간에 완화군 이선의 묘가 끼어 있는지요?
완화군은 고종의 첫번째 아들로 그 만큼 총애를 독차지 했으며 세자로 책봉될뻔 했으나
후궁이 낳은 서자 출신이란 신분 때문에 그리 환대 받지 못하고 10대의 어린나이에 일찍 요절했지요
제일 마지막에 천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제늠들이 그냥 막 끼워 맞춘듯 하네요 ...
▲ 후궁묘 비석
이 묘역에 있는 상석과 비석은 모두 원래의 것이라 하지요
위에 두개는 숙원 장씨와 숙의 김씨 묘비의 뒷면이고 아래 두 개는 완화군 묘비의 뒷면과 앞면이지요
이곳에도 일본의 연호는 삭제 되었고 완화군 묘비 뒷면엔 월곡동에서 천장된 내용과 그의 일대기가 기록돼 있어요 ...
▲ 또 다른 후궁묘역과 안내판
이곳에는 그 유명한 경빈 김씨와 덕혜옹주의 생모인 귀인양씨의 묘가 눈에 들어 오지요
종 2품 밑으론 보이지 않으므로 좀 지체높은 후궁들이 모여 있는 곳인듯 하네요...
▲ 후궁묘역
이곳에는 후궁들 16기가 잠들어 있는 묘역으로 일제의 만행이 만든 묘역인데
후궁 묘역을 둘러보면 유독 큰 묘비가 눈에 띄는데 경빈 김씨의 묘비이지요 ...
▲ 대한 경빈김씨지묘
헌종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경빈 김씨의 묘이지요
경빈 김씨를 예로들어 내명부 품계를 잠깐 설명하자면
내명부 품계 중 상궁은 정 5품이고 그 이상부턴 종 4품인 숙원부터 후궁의 품계가 시작되는데
이때 후궁이 자손을 생산하면 바로 빈이나 귀인 같은 정1품이나 종1품으로 승격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영조의 모친인 숙원 최씨처럼 숙원인 종 4품으로 시작하여 연잉군을 낳고부터
바로 품계가 올라 숙빈 최씨가 되는 것이지요
때론 죽은후 추증 되기도 하지만 경빈 김씨처럼 내명부의 품계를 무시하고 왕의 총애를 받아
바로 빈의 자리에 오른 후궁도 있어요
참고로 숙종땐 왕후가 많이 바꾸었는데 장희빈의 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숙종이 직접
내.외명부법을 수정하였는데"앞으론 후궁이 왕후가 될수 없다'고 국법을 바꿔버렸지요
그래서 숙종 이후부터는 후궁이 왕후가 된 사례는 찾아볼수 없어요
경빈 김씨의 원래 묘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가 있던 휘경원 근처에 있었으나
어찌하여 광복후 이곳으로 천장했다고 하네요
경빈 김씨는 후궁으로 간택되어 들어와 헌종의 사랑을 독차지 했지요
창덕궁 낙선재를 지어 경빈과 시와 사랑을 나눴고 낙선재 안에 석복헌을 지어
그녀의 거처를 따로 마련해주기도 했지요
하지만 헌종임금이 젊은 나이(22)에 승하하자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를 극진히 모시고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에게도 예를 다했으며 늘 검소한 모습으로 왕실의 참모습을 보여줘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하지요
묘비에 대한이란 칭호는 그녀가 장수하여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가 고종때 이므로 국호가 대한 이었지요
고종은 순화궁이란 궁호를 내리고 직접 제문을 지어줄 정도로
왕실에서 존경받는 여인이었다고 하네요 ...
▲ 경빈 김씨의 사당인 순화궁 터
순화궁(順和宮)은 한성 중부, 현재의 관훈동 194번지 자리에 있었던 궁으로
조선 중종이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주었기에 ‘순화궁’이라 불렸다고 하지요
순화궁은 헌종 때에는 경빈 김씨의 사저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완용이 1907년 집을 화재로 잃고 일제로부터 순화궁을 받았지요
이완용은 순화궁을 전세로 주어 태화관이 되었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곳이 3·1운동 때에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이지요
이를 1921년에 감리교선교부가 매입하였고 1938년에 한국식 건축양식을 살린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다가
일제 말에 징발, 해방후에 경찰서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운용되었지요
태화기독교사회관은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헐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 지금의 태화빌딩이 들어섰어요 ...
▲ 회묘에서 바라 본 후궁묘역
조선의 후궁들은 특별히 권력을 행사하거나 왕을 배출한 몇몇 후궁들을 제외하곤
그리 알려지지 않은게 사실이고 왕의 첩이란 이유로 역사에서조차 그리 회자되지 못했지요
원래 후궁들은 선조 전까지는 궁에서 아이를 낳을수도 없었고 궁에서 죽을수도 없었어요
보통의 후궁이나 승은상궁들은 무척 외로운 삶을 살았는데
원래 죽으면 고향 땅에 묻히거나 부모가 있는 묘역에 안장되었지요
그러나 한시대를 주름잡았던 후궁들인데 이렇게 집단으로 모셔져 있다는 건
우리의 왕실전통이나 민족정기에도 맞지 않은 것이지요
이런 광경은 세계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웃지못할 광경이고 부끄러운 광경임에 틀림이 없어요
더군다나 이렇게 비공개 지역에 숨어 후손들에게조차 무시당하며 움츠리고만 있을 영혼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