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다”
■전문■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그 시간들은 나에게 넘어야 할 험난한 산과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매도가 계속되었다. 나는 가만히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당신의 조국, 대한민국 이외의 사심은 결코 없었다. 아니, 그보다 그분의 마음과 머릿속에서 결코 떠날 줄 모르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일념은 다른 무엇도 들아갈 틈을 주지 않았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아버지의 오명을 벗겨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남기고 가신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부모님 추모사업’이 자식 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다.
처음 추모사업을 꾸려갈 무렵, 이 일을 도와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대부분이 날 만나는 것조차 꺼려했다. 아버지가 매도당하고 주변 사람들조차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던 때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나와 뜻을 같이한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되었던 사람들이 어렵게 다시 모여 아버지의 추모사업을 진행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말처럼 순수한 마음 하나로 함께한 그분들이야말로 진정 용기와 소신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당시 사회의 냉담한 시선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나와 뜻을 함께한 그분들의 진심은 결코 그 누구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지와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신 그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도움을 발판으로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시작하는 한편, 겨레의 『지도자』란 책을 발간하고 「조국의 등불」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여론도 조금씩 진실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그 세대가 이 땅의 산업화를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신 분들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한다. 사실 아버지 시절에는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에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족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으신 분들도 계셨다.
나는 그분들에게 항상 죄스러운 마음을 가져왔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드는 데 그분들의 희생 또한 값진 것이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제대로 보답하는 길은 아버지가 못다 하신 민주화를 활짝 꽃피우고, 잘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새마음 봉사단이 강제 해산되면서 자연히 어떤 사회활동도 할 수 없었던 1980년, 나는 영남대 이사장직을 잠시 맡았다. 그러나 학교 내 운동권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결국 세상은 내가 그 자리를 맡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고, 나는 아무 사심이 없었기에 그 자리를 내 자리라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인생을 바쳐 하신 일을 이어가는 것만큼은 나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어머니가 남기신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어머니 생전에 하시던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는 일을 해나갔다. 어린이회관 안에 근화원과 목련정, 영해루 등 한국 전통양식의 집을 지어 유치원생부터 청소년들이 우리 전통과 생활예절을 알 수 있는 기관이 되도록 했다. 지금도 이곳은 아이들에게 배움의 터전이 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내가 육영재단 운영을 그만둔 것에 대해 많은 억측들을 쏟아내고 있다. 어머니가 생전에 세워놓으신 어린이회관이 자매 사이의 분란을 낳은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기에 동생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 후 가끔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동생이 잘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육영재단 운영을 그만둔 뒤부터 비로소 나는 ‘나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그동안 간절히 그려온 평범한 생활이었다. 하루하루 고요한 나날이 흘러갔다. 나는 일기와 독서로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했고 틈틈이 시를 쓰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올바르게 사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은 금덩어리도, 명예나 권력도 아니다. 그것들은 한순간 사라지고 마는 한 줌 재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순리대로 나타나는 사계절에 자연이 순응하듯
순리대로 펼쳐지는 생의 여정에 순응하며 산다.
오늘 하루, 아니 바로 이 순간은 더없이 소중한 것.
해 뜨면 먹이 찾아 나르고
집 짓고 새끼 키우며,
해 지면 또 보금자리에 드는
저 무심한 새처럼
오늘을 맞이하고 오늘을 보낸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일들,
순간순간 해나가는 일들,
그 안에 생의 의미와 즐거움이 있고
정성을 다할 가치가 있다.
다른 어디에서 이 모든 것을 찾을 것인가.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에서
그러던 어느 날 단전호흡을 시작했다. 단전호흡은 무엇보다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육체도 건강해지고 가슴에 맺혔던 멍울도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단전호흡을 하면서 병에 대한 면역력도 좋아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그 충격으로 몸이 많이 약해져 감기 같은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런데 단전호흡을 시작하면서 위와 장도 편해지고 온몸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또한 담력과 끈기가 생기고 서서히 자신감도 회복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독서도 한몫을 했다.
그 무렵 나는 법구경, 금강경 등 불교경전과 성경을 두루 찾아 읽었다. 동양철학 관련 책들과 『정관정요』, 『명심보감』 등은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보았다. 선인들의 뜻 깊은 말 중 마음에 남는 것이 있으면 공책에 메모해두고 생각이 어지러운 날 다시 펼쳐보곤 했다.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써 자신을 책망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요,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써 남을 용서한다면 사귐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명심보감』의 한 구절과, “인생은 참으로 짧지만 거기에는 별, 달, 꽃, 남자, 여자, 강 그리고 산 등 수많은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도 그대는 싸움만을 일삼으며 우둔하고 어리석게 살 것인가? 그대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라는 오쇼 라즈니쉬의 말은 쉬운 듯해도 그 깊은 진리를 알고 실천하며 살기는 매우 어렵다. 나는 이런 글귀들에서 많은 위안과 평안을 얻었다.
30대 후반에 접어들자 삶에서 누리는 기쁨이 하나둘씩 더해졌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중국어 공부도 시작했다. 매일 EBS 교육방송을 시청하고 테이프를 가지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반복해서 들었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구사하기 위해 어학 공부에 매달렸던 경험은 중국어 독학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어학 공부에서 꾸준한 예습과 복습보다 더 효과적인 왕도는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던 만큼, 성실한 자세가 언젠가 내 실력을 만들어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덜하게 마련이다.
문화유산 답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이었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나의 소망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오랜 바람대로 나는 자주 여행길에 올랐다.
한번은 단종의 유배지에 다녀왔다. 지금은 깨끗하게 단장되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그 옛날 단종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착잡했다. 모두에게 버려진 채 유배지에서 보낸 그 몇 년의 세월은 죽음보다 더한 아픔이었을 것이다. 아내가 못 견디게 그리울 때마다 관음송에 올라 애끓는 마음을 토해냈다는 단종의 일화가 가슴을 더욱 애잔하게 했다.
나는 청령포를 둘러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몇백 년의 세월을 거슬로 올라가 단종 곁에 앉아 있는 듯했다. 내가 그의 벗이 되고 그가 나의 벗이 되어 밤을 새며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아픈 속내를 들어주는 듯도 하여 그곳을 빠져나오는 내내 코끝이 아렸다. 이는 내가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때는 결코 누려보지 못한 평화로움이었다. 편안한 신발에 때로는 청바지 차림으로 전국의 유명한 산을 찾아다녔고, 곳곳의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혼자 걷는 시골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순박한 미소가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 같았다. 시골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다 보니 재미있는 사연도 여러 개쯤 생겨났다. 동네 아주머니 서너 분이 가을 햇볕에 고추를 말리고 있다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 옆에는 방금 삶은 듯한 국수 소쿠리가 놓여 있었다.
“이봐요,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는데 끼니때도 되고 했으니 국수 한 그릇 들고 가슈.”
“괜찮습니다.”
시골 아주머니들의 오붓한 한때에 끼어드는 것 같아 그리 대답했는데, 아주머니 얼굴에 섭섭한 기색이 어렸다.
“찬이 부족해서 그런가?”
오래 걸어 시장하기도 하고 더 이상 거절하기도 민망해 주섬주섬 곁에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주머니는 금세 그릇 가득 국수를 꾹꾹 눌러 담아주셨다. 시골 인심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야무지게도 먹네. 헌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 봤을까?”
한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우뚱하니 또 다른 아주머니가 냉큼 말을 이어받았다.
“저기 산동리 이장네 큰딸 아닌가? 그 집 딸하고 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녀. 그 집 딸내미는 신랑 따라서 미국에 가고 없다니까. 내가 기억력 하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왜 가물가물한가 모르겠네. 혹시 그쪽은 나 알아요?”
그때 아까부터 잠자코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아주머니에게 퉁박을 주었다.
“가만히 국수나 먹고 가게 내버려두지 왜 그렇게 말이 많어. 먹을 때는 짐승도 안 건드리는 법인데.”
정답게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국수를 다 비우는 동안 냉했던 뱃속이 든든해졌다. 한나절 더 걸어도 거뜬할 것 같았다.
“잘 먹고 갑니다. 제가 지금 드릴 것이 없어서요, 다음에 이 길을 지나게 되면 그때는 음료수라도 가지고 찾아뵐게요.”
그러자 아주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여기다 딱 숟가락 하나 더 놓은 건데 뭐가 고마워요.”
맛있게 국수 한 그릇 얻어먹고 뒤돌아 나와 걷고 있는데, 한쪽에 가만히 앉아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내 뒤를 따라오셨다.
“난 자네가 누군지 알어. 돌아가신 육 여사님을 똑 닮았네. 그 양반이 좋은 일도 많이 했지. 남들은 까마귀 고기 먹은 것처럼 다 잊어도 나는 못 잊네. 이 깡촌에 전기 넣어준 사람이 자네 아버지 맞지?”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어 여비에 보태라고 내밀었다. 한사코 거절하는 내 손에 끝끝내 천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고서야 그분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힘내. 아직 살날이 더 많아.”
그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눈물이 핑 돌았다.
첫댓글 난 자네가 누군지 알어
힘내. 살 날이 더 많아
지혜로운 할머니를 만나셨네요.
허나 지금은 살 날이 많지 않음이 슬픕니다.
대통령님 힘내십시오.
하늘님
감사드립니다. ❤️❤️❤️
오늘도 감사합니다.
제가 항상하는 말이
남을 감동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꾸준함.
하늘님이 일전에 올린
변화는 있지만 변함은 없다.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