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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4 이삭이 나이 많아
제가 요즈음 부쩍 많이 생각하는 일이 노인의 길입니다.
1) 50이 넘어서 노인의 길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은 너무 늦다는 생각입니다.
일반 신자이건 교회 직원이든 간에 보통 사람들이 준비하는 것을 제외하고 일찍부터 하나님의 말씀 이해와 관련하여 준비해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라 생각됩니다. 또 한가지는 잘 준비되어서 노인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고견을 듣는 일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가장 힘들었던 합동신학교 1년 초에 휴학을 결심하고 박윤선 그 당시 교장님을 찾아뵈었던 일이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교회를 개척하고서 어려웠었을 때마다 같은 강남 노회에 속해 계셨던 장경재 목사님을 가끔 찾아뵙던 일들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2) “노인”하면 그분들의 의지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는 각종 질병 때문에 자기 의지를 어쩔 수 없이 내려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음에는 막연히 세월의 주름에 밀려서 자기 의지를 슬그머니 내려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월이 갈수록 자기 고집으로 굳게 무장되어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상태인데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자기 의지를 두고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하여 살기도 하고 또 같은 방식으로 죽음에 임하려는 건실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3) 본문은 나이 많아진 이삭이 큰 아들 에서에게 스스로 축복을 제안하는 내용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이삭의 망령이요 망은이요 실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계대를 세워 가는 일이 마치 자기 안목과 자기 의지로 되어야 할 것처럼 서두릅니다. 여기서 더해진 실수는 스스로의 축복에서 복이 산출되는 듯이 생각하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또 그 축복의 부요성까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복과 부요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안목과 그분의 의지로 돌리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해 주겠다는 것이 일단은 그런 뜻입니다. 그에게 그런 은사와 그러한 직위를 주셨을지라도 그렇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에 주의하고 면밀히 검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그것이 일상 생활에서 할 수 있는 일반적인 기도이든지, 혹은 공적 모임에서의 축도이든지, 또 한편 특별한 복을 계승하게 하는 방식으로 유언 형식을 빌어서 축복하든지 간에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삭의 눈은 육신의 눈 뿐 아니라 그의 영적 안목에 대한 비유일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이 영원부터 서 있습니다. 그분의 의지가 확고하십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25:23). 또 이삭은 아내 리브가와 함께 큰 아들 에서의 이방 결혼으로 염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과정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그분의 의지가 야곱에게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장자의 기업을 굳이 에서에게 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삭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 자기 의지를 두는 일에서 실패하고 있는 자의 모습이 되겠습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은 가정 경영과 교회 경영에 큰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1. 본문 1절은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입니다.
1) 본 장에서 모세는 별로 유용성이 클 것 같지 않은 기사를 장황하게 서술합니다.
(1) 사건의 개요는 대강 이렇습니다.
에서가 자기 아버지의 명을 받고 사냥하려 나간 사이에 야곱이 자기 어머니의 간계에 의해 형의 옷을 입고 장자에게 돌아가야 할 복을 몰래 가로챕니다. 사슴 고기 대신에 염소새끼 고기를 자기 아버지에게 가져가고 털이 많은 형으로 가장하기 위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사용하여 자기 형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해서 축복을 얻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나 하는 장난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런 내용에서 헛된 방식으로 머뭇거리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극히 진지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형 에서보다 그의 동생 야곱을 더 좋아하신다고 하셨던 그분께서 친히 말씀이 표징이 됐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의 표징에 의해서 그에게 확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맨 먼저 관찰해야 합니다.
(2) 그런 점에서 여기 언급된 축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개입하셔서 선택의 은혜를 분명히 밝히는 합법적인 허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조상들에게 그들의 후손에게도 영영토록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임종 때가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자기 후손들에게 안전하게 계승시키기 위해서 마치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듯이 그 복을 소유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일찍이 그와 같이 자기 아들 이삭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엄숙한 의식을 통해 그의 아들 이삭을 영적 생명의 상속자로 세웠습니다 여기서는 이삭 역시 동일한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노령으로 쇠약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자기 첫째 아들을 축복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자기 가정 안에 존속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족장들은 이 일을 자기 개인 생각대로 경솔하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증거를 세웠습니다.
또 한편 그것은 이미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였습니다.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히7:7)고 한 바울 사도의 선언도 이 점에 속합니다. 심지어는 일반 성도들조차도 자비의 직분을 따라 서로 복을 비는데 익숙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특별한 사명을 족장들에게 부과하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기탁물로써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언약을 평생토록 간직하였습니다. 민수기 6장 24절에 주어진 아론의 축도와 다른 유사한 성귀에 나타나는 그대로입니다. 이 같은 동일한 명령이 나중에는 제사장들에게도 주어집니다.
(3) 그런 점에서 이삭은 그의 아들을 축복하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 신분이라든지, 일개 개인이라는 신분보다는 또 다른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그 당시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자였습니다. 또 그는 그가 속한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매개하는 중재자로써 제사장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인도자였습니다. 또 그가 속한 교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치리 해야 하는 지도자요, 왕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족장들에게는 메시야의 삼직이 한 인물에게 통합된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경우는 자기 아들을 자기가 받은 바로 그 은혜의 상속자로 내세웠습니다.
2)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이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 아무 까닭 없이 이토록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각각 형편들을 제 순서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실수로 에서의 복을 야곱에게로 옮기셨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이삭의 눈이 어두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야곱이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도 시력은 감퇴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는 시력 부족으로 인해 착오를 일으키는 일이 없이 야곱은 신중하게 자기 팔을 어긋맞긴 채 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이삭으로 하여금 마냥 속아 넘어 가도록 놓아두시고 계십니다. 자연 질서와 장자 권리 및 명예에 어긋나게 에서는 제외되고 야곱이 세워집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일의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이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상은 하나님 바로 그분의 안목과 의지의 실현으로 이 일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2. 본문 2-3절은
“②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줄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③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입니다.
1) 이삭이 한평생 동안 날마다 자기 아들들에게 복을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시도하려는 이것은 비상한 종류의 축복입니다. 더욱이 그가 자기 죽을 날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늙고 쇠약한 자기를 너무나 가까이 압박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는 자의 말입니다. 그가 더 이상 생존을 기약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 밴 여인이 분만 시기가 다가올 때 어느 날 출산할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극히 혈기 왕성한 나이에도 무수한 죽음의 요소를 휴대하고 다니는 셈입니다. 죽음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도 마치 제것인 양 우기며 덤비는 것입니다. 본래 죽음이란 인생의 모든 시기를 통해서 줄기차게 따라다닙니다. 물론 죽음은 노인들에게 더 근접하여 채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은 항상 자기 눈앞에 죽음을 두고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서는 마치 순례자처럼 세상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미 한 발을 무덤에 넣고 있는 자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젊어서부터 이런 정신으로 살고 있다면 노인보다 승한 지혜로 인생을 사는 자가 될 것입니다.
2) 지금 이삭은 죽음이 임박한 자로서 자기 아들의 인격 안에 자기를 살아 남아있게 하면서 교회를 떠나고 싶어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받아 누렸던 모든 은혜의 혜택들이 자기 아들 안에 남아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은혜로 알게 되었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자신에게도 계승되었듯이 같은 방식의 은혜로 된 믿음의 생활이 자기 아들의 인격 안에 살아 남아있게 하면서 그가 속한 지상의 교회를 떠나고 싶어합니다. 가장 정확하게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신실한 방패이셨고 가장 지극한 상급이셨듯이 자기 아들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가장 간단하게는 “내게 주신 은혜가 내 아들에게도” 라는 말입니다.
3. 본문 4절은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입니다.
1) 그러나 본문에서 이 거룩한 이삭의 믿음은 놀랍게도 어리석고 무분별한 세상적 애정과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축복함에 있어서 자기가 하나님께 약속 받았던 그 기업의 권리를 성령의 지시로 야곱에게 양도합니다. 이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신앙의 일반 원리가 약동합니다. 그 동안 그는 자기의 첫 아들에게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 휘말려서 그를 다른 아들보다 더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사실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 곧 그 분의 뜻으로 요약되는 바 그분의 영원하신 안목과 그분의 의지와 맞딱뜨리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의 정하심,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가 자식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던 언약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2) 이삭은 차자를 장남보다 더 사랑함으로써 보편화된 자연 질서를 변개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일에 대하여 변명하려 한다면 그 변명은 쉽게 논박을 당할 뿐 입니다. 이삭은 장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지나친 애착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또 이삭은 자기 아내 리브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자기 의무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소홀히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불성실은 결코 변명할 수 없습니다. 이삭이 자기 소명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장자에게 대한 그의 완고한 애착은 일종의 맹목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적인 시력의 감퇴보다 그의 영적 시력의 감퇴가 더 큰 장애물로 판명되었습니다.
4) 족장 이삭의 이와 같은 과실은 책망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 성자(聖者)의 축복 선언권을 박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전권이 존속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의 효능과 효력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고급하신 방식입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안목과 의지는 태양과 같을지라도 우리 인간의 안목과 의지는 마치 섬광과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반딧불과 같아서 참으로 보잘 것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서약하며 주의 이름으로 맹세했던 사실을 제쳐두고 자기 목회 원리를 따로 가져보겠다는 자들은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제껴두고 자신의 신앙 생활 원리를 따로 가진 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안목과 의지가 하나님의 은총의 의지 아래 놓일 때 그나마 우리의 의지의 가치가 하나님의 은혜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라야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은 노인의 길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으십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한 이해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에서 준비되고 있으십니까?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유일하시고 참되신 스승이십니까? 그리고 여러분 주변에 건실하고 아름답게 노인의 길을 가고 계신 스승이 있으십니까? 저는 지금도 주님께 저의 길을 물으면서 이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스승들께 진리 이해의 길을 지금도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함께 가자고 다른 사람을 권하는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