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엄청난 심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입니다. 그는 성전의 총감독으로 성전 내의 질서를 관장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바스훌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말씀을 들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를 때리고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웠습니다. 그는 아예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은 듣지 않기로 했습니다. 도리어 이 어려운 때에 그런 심판의 말씀은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는 이런 말씀은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스훌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시대에 필요한 말씀을 고르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예레미야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요 대적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마치 인정을 베풀 듯이 예레미야를 풀어주었습니다. 마치 예레미야가 받을 벌을 다 받았다는 식으로 대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태도를 그냥 좌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가 바스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바스훌에게 선언하시기를 먼저 그의 이름을 새롭게 부르시는데, “마골밋사빕”이라 부르시는데 이 이름은 사방의 두려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그와 이 민족을 사로잡게 될 것이며 그와 그의 가족도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게 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떠한 태도로 듣고 있습니까? 교훈과 책망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7절 이하에는 핍박을 받는 예레미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는 축복이 아니라 강포와 멸망을 외쳐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 때문에 그는 모든 이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종일토록 조롱을 받습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10절에 의하면 “그래 우리가 죄짓는다고 네가 고소했느냐? 두고 보자. 우리도 너를 지켜 볼 것이다. 우리가 널 고소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심지어 친한 친구들마저도 예레미야의 타락을 기다립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그들이 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길 기다립니다. 지금 하나님의 권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하지만 그래도 그만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9절 말씀대로 전하지 않으면 자신의 중심을 불 붙드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들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임을 기억하고 겸손하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