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38
9월4일 [연중 제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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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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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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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인 필레몬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노년기에 접어든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세밀하게 유추할 수 있어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젊은 시절, ‘열개의 팔’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펄펄 끓는 혈기와 넘치는 에너지로 온 세상을 뛰어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그러나 이제 바오로 사도는 달릴 곳을 다 달렸습니다. 마치 경주마 시절을 끝낸 폐마(廢馬)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픕니다. 수시로 닥쳐오는 통증으로 인해, 자면서 몇번이나 깨어 끙끙 앓습니다. 아침이면 안간 힘을 다 써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날씨라도 궂으면 삭신이 부서지는 듯합니다.지팡이를 짚어야만 겨우 운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혹독한 상황이 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늙고 병든 것도 모자라 투옥된 신세였습니다. 연세 드셨지, 갖은 병고로 괴롭지, 옥에 갇혀있지, 정말이지 바오로 사도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울적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에는 초대 교회 신자들과 동료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 희망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마지막 남은 모든 에너지를 모아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 쓰신 편지의 수신자는 콜로새 교회의 지도자로 추정되는 필레몬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께서는 다른 편지와 달리 필레몬에게 쓰신 서한에서는 무척이나 간곡함이 돋보입니다. 필레몬에게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었는데, 꼭 좀 들어 달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필레몬의 소유의 종 오네시모스가 어느날 갑자기 도망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극진히 바오로 사도의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에 의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음 같아서는 충직한 오네시모스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당시 법이 정하는데로 노예 신분인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로 돌려보내야만 했습니다.
도망쳐 나온 노예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는 바오로 사도의 심정이 참으로 착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분노한 필레몬이 오네시모스를 힘들게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겠습니다. 서한의 내용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은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필레몬서 19절)
아마도 오네시모스는 주인 집에서 도망나오는 과정에서 도피 자금으로 주인 필레몬의 돈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오네시모스가 도망나옴으로 인해 생긴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바오로 사도가 갚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늙은이’ ‘예수님 때문에 수인이 된 몸’이란 표현까지 구구절절 써가며 필레몬에게 간청하십니다.
노예 오네시모스를 바라보는 노인 바오로 사도의 시선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오네시모스를 사람도 아닌 가축 같은 존재, 자신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소유물, 매매의 대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더 이상 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형제로 바라봤습니다. 주님 은총 안에 새로운 인간이요 신앙의 동지, 총애하는 아들로 바라봤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에 대해 ‘내 심장과 같은 그’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노예 제도를 자연스럽게 바라봤던 당시, 바오로 사도의 이런 자세는 놀라움을 넘어 스캔들이 될 정도였습니다.
오늘 날 노예 제도 등과 같은 신분으로 인한 차별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다양한 측면에서의 심각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은연 중에 우리 공동체 안에 그런 차별이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물론 예수님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셨던 측면이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이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전국민적 관심사였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틈틈히 시청하며 정말이지 슬펐습니다. 청문회장 한켠을 차지하고 줄줄이 앉아 계셨던 분들, 그들이 보여준 언행 하나 하나는 마치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오만하고 무례한 모습, 파렴치하고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수많은 우리 어린 청소년들도 보고 있을텐데, 하는 마음에 큰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밉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동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에 대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라는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하더군요. 후보자를 앞에 두고 깐죽거리며 우롱하고, 상대를 올가미에 옭아매기 위해 갖은 유치한 언행들을 총동원하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산더미 같은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지, 걱정이 되더군요.
그들이 몰염치하게도 ‘국민이 보고 있습니다!’ 운운할 때는 정말이지 뒷골이 다 땡기더군요. 국민의 대표라고 자처하려면, 품위있고 격조높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에 걸맞게,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겸손하고 진지하게 질문하고 발언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종일관 시정잡배도 그렇게 하지 않을 정도로, 껄렁껄렁·후안무치,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그들이 한 일은 온 국민을 모욕하고, 범 국민적 스트레스 지수를 한껏 드높인 것뿐이라는 생각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정말이지 지도자를 잘 뽑아야겠습니다. 국민들 생각은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 지도자, 틈만 나면 버럭 버럭 소리 지르는 지도자, 언행에 품위나 성숙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도자, 비열하고 천박한 지도자를 뽑는 순간, 그 뒤로의 감내해야 할 고통과 부끄러움은 순전히 우리 국민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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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9BNaVT0W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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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만 하면 정한 목표에 100% 도달한다>
켈리 최는 2022년 연 매출 6,000억을 기록한 켈리델리라는 대형마트에서 초밥 도시락을 파는 기업의 CEO입니다. 켈리델리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11개국 1,200개 프랜차이즈 매장을 지니고 있고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이렇게 급속도로 성장한 회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과 10년 전만 해도 최 회장은 첫 사업 실패로 10억 원의 빚더미에 눌려 하루하루 비참하게 살고 있던 노처녀였습니다. 그녀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6남매 중 셋째 딸이었고 가난했던 집을 일으키겠다고 서울로 상경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의류공장에 다니며 ‘세계적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라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 유서까지 써 놓고 일본으로 건너가 돈을 벌면서 대학에 다녔습니다. 다시 패션의 중심인 프랑스로 무작정 건너갔습니다. 학교 졸업 후 친구와 함께 동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40세가 넘었음에도 자신은 빚만 지고 있었고 거울을 보았을 때 흉측한 괴물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꿈을 좇아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마흔이 넘은 최 회장은 인생을 포기하려다 고생하고 계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 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점을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자신이 목표만 정했지, 그것을 위한 에너지를 다른 곳에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최 회장은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세 가지 습관을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는 부자들이 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부자들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첫 번째로 정한 것은 그 좋아하던 ‘술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실 저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술을 끊었어요. 제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술을 마시고 실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술을 마시는데 빼앗기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의 직업은 민박집 주인이자 가이드였어요. 게다가 동시에 켈리델리 사업도 준비 중이어서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따져보았습니다. 한 번 술을 마시면 최소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이면 여섯 시간이었어요. 이 시간이 저는 정말로 아까웠습니다.
그 뒤로 저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어요. 제가 잘 따르던 선배 언니는 저를 놀렸습니다. ‘켈리야, 보통 사업을 시작하면 거래처 사람들하고 술 마시고 친분을 쌓기 시작하는데, 너는 반대로 술을 끊네?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저는 인맥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런 생각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빚만 늘어가고 직원들 월급날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어요. 그때 딱 소주 한 잔만 마시면 살 것 같았죠. 어떤 때는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너무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그럴 때는 술 한 잔이 간절했어요.
하지만 이럴 때도 저는 술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한 잔을 마시면 두 잔이 되고 두 잔을 마시면 세 잔이 되고 제 의지는 사라져 갈 것만 같았죠. 지치고 힘들 때는 다짐했습니다. 나와의 약속을 절대로 번복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이렇게 술을 마시지 않자 언니들은 저를 부르지 않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저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명료한 정신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술을 끊은 것은 저에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포기했던 습관 두 번째는 ‘드라마와 게임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자기 관리의 기본은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고 스스로 발전시키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시간이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곤 했습니다. 이 두 개의 문제는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아는 성공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기 시간을 확보했고, 그 시간에 책을 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 시간의 활용법은 저와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었죠.
요즘 사람들에게는 특히 SNS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하는 것 중 하나예요. 이런 것들의 특징은 맺고 끊는 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 번 빠져들면 한두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죠. 자신의 사업이나 개인의 발전과 직결되어 있다면 괜찮아요. 하지만, 오락적인 요소가 크다면 분명 좋은 시간 활용법은 아닐 거예요.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확보를 위해서라도 SNS 사용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이 자기 계발을 하는 게 좋아요.”
세 번째 끊은 것은 ‘불필요한 모임’입니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모임은 매한가지입니다. 모임의 핵심은 인맥 관리예요. 사람이 모이면 새로운 에너지가 창출되고 기회의 장이 열립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는 모임에 참석하는 게 성공을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생각했던 것이었죠. 사업가인 제가 모임을 포기했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럼 인맥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인맥 관리를 하지 않아요. 인맥은 관리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나는 켈리랑 친구가 될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라고 얘기한다면 당연히 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누군가가 저를 인맥 관리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 관리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반대로 인맥으로 이용하려는 사람, 이것을 저는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에요.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맥을 관리하지 않아요. 저는 성공을 위해서 이렇게 세 가지를 끊어냈습니다.” [출처: ‘바닥에서 6,000억 부자가 되기까지 ‘가장 먼저 갖다버린 습관 3가지’, 유튜브 채널 ‘동기부여학과’]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투자개발 회사의 대표이자 전미 13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의 저자 게리 캘러가 쓴 자기계발서인 『원씽』(The One Thing)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가치, 단 한 명의 사람, 단 하나의 아이디어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원씽 The One Thing’을 찾아라. 그것이 당신의 커리어가 됐든, 비즈니스가 됐든 가정생활이든, 인간관계이든 삶의 각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아 몰두할 때, 일에서의 성공과 삶에서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켈리 최 회장도 이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위 세 가지를 끊고 에너지를 모으기 전까지는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공사를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흥청망청 살아서 돈도 없으면서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결국 있는 돈도 날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혹은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질 것 같으면 싸움을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목표입니다. 이 목표에 도달하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를 끊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나 애정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의 저자 아른힐 레우뱅은 ‘선장’이라고 부른 자아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믿음, 의사가 준 희망, 경찰관이 준 사랑 등으로 선장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0년 만에 조현병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공부하여 최고의 정신과 의사가 됩니다.
두 대의 버스에 동시에 탈 수는 없습니다. 다른 것을 타려면 지금 탄 것은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아라는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으로 내 뜻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시지프스 신화가 있습니다. 시지프스는 신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영원히 돌을 산꼭대기로 굴려야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명에 불복종하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을 가지고 목표를 이루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돌을 버려야 합니다. 나 자신을 죽이게 하지 못하는 목표는 그것이 어떤 목표이건 가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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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애잔한 음성과 멜로디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가을을 시작하면서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서 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공, 명예, 권력’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 길을 찾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것도 모자라 학원까지 다니면서 우리는 성공의 길, 명예의 길, 권력의 길을 알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도 있었고,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적지를 알고 가는 배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끝을 생각하면서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소중한 것을 먼저 했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모두가 이기는 길을 찾았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혁신과 개혁을 통해서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먼저 경청하고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정신적인 것들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밤을 새우면서 그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한국을 떠나 이민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성공’은 모두가 선망하는 삶의 길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인 종교는 대부분 ‘지혜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대부분 고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원치 않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의지와 다르게 행동하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 고통은 집착에 있다고 합니다. 그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가 열린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각으로 몸과 마음을 가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유교에서는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마음,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마음, 잘못을 겸허하게 뉘우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 의, 예, 지’의 마음입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한양의 4대문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숭례문, 흥인지문, 홍지문, 돈의문으로 정했습니다. ‘인, 의, 예, 지’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한양의 중심에 ‘보신각’을 설치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을 이야기합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서는 마치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합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과 같다고 합니다. 덧없고 허무한 인생의 길입니다. 그 길에서 참된 진리를 찾는 것이 지혜의 길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된 지혜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아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경쟁에서 이겨 성공하는 이들이 얻을 수도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욕심을 버리고 ‘인, 의, 예, 지, 신’의 마음을 가지면서 시작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지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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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25-33: 그리스도의 제자의 자기 포기
오늘의 주제는 참된 지혜이다. 이 지혜는 지성과도 슬기와도 다른 것이다. 이 지혜는 인간의 역사 전체를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 평가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다. 이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고 인간 혼자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그래서 지혜는 지성과 통찰력의 선물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실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지혜의 완전한 표현을 그러기에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이시다. 왜냐하면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고 또 드러난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그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자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헛된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다. 즉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항구한 생활 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당신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구하고도 철저하게 당신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다음 자리에 두는 것을 뜻한다. 즉 그분은 언제나 가치서열에도 우리 마음을 봉헌하면서 항상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 나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신이 주님께 얼마를 할애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그리스도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어려운 요구를 하신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정말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려 할 때는 항상 십자가의 그림자가 그 생활을 뒤덮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천하게 태어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삶의 모든 순간이 구원의 의미로 충만하다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용기를 잃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면서 실망하지 않으려면 계산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두 비유를 말씀하신다.(28-33절) 그러면서 이 비유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라 하는 태도에 연결하고 계시다.
우리가 가지고자 하는 열망,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라는 것이다. 루카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들고 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루카 18,24; 12,13-34; 16,1-13 참조) 사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사람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보다 고귀한 감정, 예를 들면,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까지도 막아버린다. 그러기에 두 비유가 주님을 따르는 본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대한 장애 요소로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잘 계산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생활, 다른 요구, 다른 유혹 등을 철저히 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고(콜로 1,18), “모든 피조물의 맏이”(콜로 1,15)이심을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 우상화로부터 해방한다는 의미가 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느님이 제일 첫 자리에 모셔져야 하는데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수도자는 속세를 떠난다. 그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도 가치관에 있어 우상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자유로우며, 하느님을 잘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로 하고 사는 우리는 항상 주님을 따르는데 잘 계산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에 집착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우상에 매이지 않고 주님을 올바로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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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림과 따름>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이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보면 이렇게 끝납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 4,53) ‘온 집안’이 함께 예수님을 믿어서, 함께 구원을 받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그리스도교는 신앙 때문에 가족을 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온 집안’이 같은 신앙을 가져서 함께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씀은, 실제로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인간적인 애착심’을 극복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욕망들과 욕심들을 억제하라는 뜻입니다. <그 애착심을 극복하고, 욕망들과 욕심들을 억제하면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애착심을 극복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육적인 애착심과 욕망과 욕심들’은 ‘죽은 이들’의 ‘죽은 일’, 즉 ‘생명의 반대쪽에 있는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또는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모두 ‘밖’에 있게 됩니다. 중간까지 갔더라도, 문 앞까지 갔더라도, ‘밖’은 그냥 ‘밖’일 뿐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안’이 아니면 모두 ‘밖’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죽음’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 그는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한때 사도였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배반자’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여기서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라는 말씀을, “경비를 미리 계산해 보고, 돈이 부족하면 공사를 시작하지 마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충 해도 끝까지 갈 수 있겠지.”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고, 처음부터 각오를 단단히 하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고 가는 길은 미리 계산해 보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간절히 원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기도’입니다. ‘구원과 생명의 길’은 주님께서 부르시고 우리가 응답해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들어할 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잘 걷지 못하면 주님께서 부축해 주실 것이고, 지쳐 쓰러지면 주님께서 업고 가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끝까지 가겠다는 의지와 끝까지 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희망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1-33)
여기서 ‘다른 임금’은 ‘하느님’이고, ‘어떤 임금’은 바로 ‘나’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로 연상되는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입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이라는 말과 ‘이름을 날리자.’라는 말은, 그 사람들이 ‘하느님 행세’를 하려고 했음을 나타내고,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라는 말은, 감히 하느님께 도전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진 것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하느님 없이도(종교와 신앙 없이도) 나는 내 힘으로 충분히 내 인생을 살 수 있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은 모두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바벨탑은 결코 완성할 수 없는 탑입니다. 그것은 허무하고 무익하고 바보 같은 짓을 상징하는 탑입니다. 피조물은 조물주인 하느님께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런 어리석음의 결과는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참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지혜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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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을 뒤따르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족과 자기 목숨마저 미워하고 모든 소유를 버린 채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가족을 등지고 스스로를 괴롭히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데 머뭇거린 제자나(마태 8,21-22 참조)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여 떠나 버린 부자 청년처럼(마태 19,16-22 참조),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데 방해되는 무엇인가를 마음 한켠에 쌓아 둔 채 그것에 의지하며 위로를 찾는 이라면 그분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리라고 하신 “자기 소유”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온갖 집착, 아집과 교만, 이기심과 재물, 형식적인 신앙생활일 터입니다. 건축물을 짓거나 전투에 나서는, 세속적인 일조차도 매우 치밀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할진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이가 치열한 고뇌와 희생 없이 어찌 그것을 바라겠습니까?
타성에 젖어 허울뿐인 제자의 됨됨이 속에 거저 얻어지는 믿음은 없습니다. 나이 든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옥바라지를 위하여 꼭 곁에 두고 싶어 하였던 오네시모스를 기꺼이 돌려보냈듯이(제2독서 참조), 우리도 자신의 생각과 계획에 갇혀 살지 않도록 늘 경계하며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제1독서 참조) 주님 때문에 무엇인가를 용기 있게 버릴 때 찾아오는 ‘자유’에 맛 들여 갈 때, 비로소 제 십자가를 힘껏 끌어안고 참 제자가 되어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18,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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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님]
<예수님 제자의 3가지 조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셨는데, 가족을 미워하라니요…. 그런데 ‘미워하다’라는 히브리 말의 뜻이 ‘덜 사랑하다.’, 혹은 ‘둘째 자리에 두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족관계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가족 사랑’을 ‘하느님 사랑’보다 더 상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니 어떻게 가진 것을 ‘다’ 버리란 말입니까?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내가 거기에 얽매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소유(재물, 명예, 권력, 가족 등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고 내적으로 자유롭게 되지 않으면 당신을 진실로 따를 수 없다고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는 없기에, 그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조건으로 또 제시하신 것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루카 14,27)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몸소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당신도 그대로 모범으로 보여주신 셈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요구사항 즉, 자기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분을 따르며, 자기 소유를 다 버리라는 숙제는 아직 다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가족을 상대하고 사랑하는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힘겹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내하는 것도 쉽지 않으며, 온갖 소유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탑을 세우려는 사람의 비유’(28절-30절)와 ‘전쟁에 나서려는 임금의 비유’(31절-32절)처럼, 주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버리며 살아가야 할지를 매일같이 ‘앉아서 계산해보고 헤아려보는’ 지혜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있겠습니까?”(지혜 9,17) 그러니 우리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분별하고 실행할 지혜를 주십사고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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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최창덕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을 따라 사는 제자의 길>
오늘 복음에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경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군중을 향해 돌아서서 하심으로써 당신 제자가 되는 길이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시며, 당신을 따라 사는 삶은 한순간의 호기로운 결단'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매 순간 당신을 첫 번째로 선택하는 여정'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으로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자유로운 떠돌이'의 삶을 사셨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곧 제자들이 당신의 모습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몸소 모범을 보여 주시며 앞장서서 구원의 길을 걸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제자가 될 수 없는 경우에 비춰서 신앙생활을 자주 점검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듣고 배우는 시대'였다고 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듣고 깨닫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미디어가 발달한 상황에선 '보고 배우는 시대'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말이 아니라 행동의 모범을 볼 때 참으로 따라 하고픈 열망을 품고 실천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신앙의 참됨을 전하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을 잘 본받아 제자로서 진정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너무 많거나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신앙의 사명대로 살기 어려운 법입니다. 솔직히 지킬 게 없는 사람이 제일 강합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애착에서 영적으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그만큼 더 굳건하게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사명을 잃지 않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칭하며 서로 격려하고 기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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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서달원 안드레아 신부님]
<하느님의 주권과 그분의 질서 안에 있어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첫째, 혈연관계보다 예수 추종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하고(루카 14,26)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루카 14,27) 셋째,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루카 14,33)입니다. 마지막(33) 조건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루카 복음사가가 제자 됨의 조건으로 강조한 부분입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도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루카 5,11)라고 말하며, 소유의 전적인 포기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복음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두 가지를 미워하고,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덜 사랑하다’는 비교급 표현이 없기 때문에 흔히 ‘미워하다’로 표현합니다.
‘미워하다’라고 번역된 희랍어 원문의 뜻은 ‘뒤로 돌리다.’, ‘2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이라고 되어 있는 마태오 복음이 더 분명하게 의미를 전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격적이고 모순처럼 들리는 듯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말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서 가족 간의 정(精)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집을 짓는 비유’나 ‘전쟁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비유’를 통해 당신을 따라나서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감정에 좌우되어 달려드는 모험과 같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심각한 것이며, 중대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을 진정으로 따르려는 사람의 조건이 ‘자기를 포기’하는 것과 ‘신중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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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재현 루도비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치열한? 계산된 포기의 결과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적은 투자로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선택하기에 앞서 먼저 계산해 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 신앙에서는 어떤가요?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과 세상의 재물을 놓고 늘 갈등하는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적게 투자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선택하는 길은 세상과 하느님 사이를 절충하는 타협의 삶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런 계산된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일까요? 인간은 생명체이고 모든 생명체의 기본 욕구는 생존입니다. 생존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것은 효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도 효율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명확하게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세상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 둘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세 번째는 자기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정말 치열하게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계산하고 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탑과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이 치열한 계산에 있어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3가지 조건을 요약하면 ‘포기’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선택을 위한 포기’이며 ‘더 좋은 것을 채우기 위한 비움’입니다. 또한 능동적 선택에 의한 포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선택과 행동은 미련이나 후회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정쩡한 삶의 선택은 효율적이지도 않고 희망도 기쁨도 행복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치열하게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주어진 삶 속에서 핑계를 대며, 어정쩡하게 살거나 피해 가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포기의 삶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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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화석 도미니코 신부님]
어느 회사든, 종교든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 회사(종교)만의 장점과 혜택, 특전 등을 먼저 광고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거기로 가고자 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부정적인 것을 제시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조건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께 오려는 사람들, 다시 말해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족이나 친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미워한다’는 용어는 비교급이 없는 히브리어 표현이기에 이 말은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를 심지어 자기 목숨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할 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미워하라는 이 말씀은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적대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놓고 흠숭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이중계명을 살되 분명 하느님을 다른 것보다 우선시해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당신을 따르는 데서 오는 이익이 훨씬 크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도 영세 전에 나름의 계산을 통해서 신앙을 갖는 것이 훨씬 큰 이익(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확신했기에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잠시 지나갈 것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영원한 것에 대한 투자! 이것이 우리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신은 점점 줄어들고 세상의 것에 더 미련을 둠으로써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원히 이익이 되는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 위에 오직 예수님을 두어야만 합니다. 그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취미생활도, 친구도, 돈 버는 일도 나아가서는 코로나라는 병 핑계도 결코 그분 앞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버리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으로 우리가 얻게 될 그 영원한 것들에 대한 희망을 꺾어버리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 자신만을 부둥켜안은 채로 이름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었던 것은 아닐까요? 제자됨을 위해 내가 짊어져야 했을 그 십자가는 내 인생 어디쯤 버려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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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이 나>
루카 14,25-33 (버림과 따름)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오롯이 나>
주님께 갑니다
나의 누구가 아니라
오롯이 내가 갑니다
주님과 함께합니다
나의 무엇이 아니라
오롯이 내가 함께합니다
주님을 따릅니다
나의 바람이 아니라
오롯이 내가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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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양다리 걸치기 신앙은 없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참된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나 자신을 버림으로써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굳건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위로와 평화, 희망과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접하면서 긴장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누구든지 나에게 오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시며 자기 소유를 송두리째 버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아드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면 마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성당에 나가면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영 딴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보장받는다고 했는데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고 약속에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신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사실, “집안식구가 원수인 까닭은 ‘사랑’의 이름으로 ‘집착’에 빠질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출가’ 라는 말을 씁니다. 속세의 가정을 떠나 승려가 되기 위해 불문에 드는 일을 말합니다. 뜻을 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덕을 닦는 일을 들어 말하기도 하고 결혼을 하여 부모님 품을 떠나갈 때도 ‘출가’라는 말을 합니다.
‘출가’는 소위 가족과의 불화나 갈등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집에서 나가는 ‘가출’하고는 다릅니다. 출가는 단순히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을 떠나는 것입니다.ㅇ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소중한 하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을 선택하였으면 거기에 투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혼을 예로 들면,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따르기 때문에 그만한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한 가정의 주체가 되었다면 이제 부모에게 기대거나 무엇을 바라지 말고 홀로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뒷받침해 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칭 마마보이나 마마걸이 되어 성숙한 인격체로 설 수가 없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부모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켜보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남모르게 돕는 것이지 사사건건 이래라저래라하거나 기대하면 실망이 커집니다.
내가 신경을 안 써주면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온갖 일에 ‘간섭과 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야 하고 또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출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좋은 것임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다른 사람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선택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요한10,17). 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지금 하느님을 선택하면 바로 그 선택을 통해서 다시 더 큰 것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에 두어야 합니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예수님이 앞세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뜻을 품었으면 그에 걸맞은 투신을 해야 합니다. 탑을 세우려면 공사를 잘 마칠 수 있을지 계산해 보고, 임금이 싸움을 해도 먼저 지금 군대의 수로 이길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계산하면서 왜 그 좋은 머리를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에는 쓰지 않느냐? 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한 투신과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세상에 나왔으면 탯줄을 끊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은 마땅합니다.
따라서 천상을 위해서 유익하다면 나의 집착과 소유의 마음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죄악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생각과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못된 습성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사람을 소신 있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고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그것도 그냥 고집이 아니라 똥고집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느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쓸데없는 고집불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소신 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면, 또 이쪽도 저쪽도 아닌 미지근한 것이면,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여러분, 하느님 앞에 적당한 타협이나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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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람의 심성을 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로는 거미 같은 사람입니다. 거미는 처마 밑과 으슥한 곳에 끈끈한 거미줄을 쳐 놓고서 그 덫에 걸리는 타 곤충들을 잡아먹으며 심지어 동료까지 해치는 무지막지한 해악(害惡)한 놈이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돼! 라는 심보의 소유자입니다.
두 번째로는 : 개미같은 사람입니다. 근면한 사람이라고 비유하기도 하는데 자기만 살겠다고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만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입니다. 남을 도울 필요도 없고 손 벌일 일도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는: 꿀벌 같은 사람입니다.벌은 이 꽃과 저 꽃을 날아다니면서 꿀을 따면서도 꽃가루 수정을 하여 씨가 잘 맺도록 도와줍니다. 꿀을 모아놓으면 사람이 먹어요. 이웃과 서로 돕고 사는 공생관계를 맺고 산다. 이타주의 적인 사람입니다. 고달프고 힘들지만 보람이 있어요.
예수님을 닮은 삶은 어느 삶인가요? 꿀벌 같은 삶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지향을 잘 두어야 하고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철저히 따라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이타주의적인 삶을 충직히 살아야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자기 가족과 맺는 관계보다 더 강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소중한 것보다도 예수님을 우선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이 없이는 기초가 없이 탑을 짓는 것과 같고 군대 없이 전투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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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복음을 읽다 보면,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자렛 사람’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 ‘노쯔리’와 아람어 ‘나즈란’으로 쓰는데, 사실 이 단어는 예수님을 비하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즉, ‘나자렛 것’, ‘나자렛 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비하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에 예수님께서 활동을 멈추셨을까요? 이런 비판이 늘어남에 따라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의 정치인들도 자기의 지지도가 떨어지게 되면, 활동에 제약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을 전혀 멈추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위협까지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판단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님의 ‘북한교회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 죽음의 위험에서도 신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피난 가지 않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순교자들이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고백했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의 지금 삶 안에서는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답지 않게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랑스럽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입니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제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이고,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다음에야 돌아올 영광이었습니다. 즉,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어렵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지요. 사실 자기 부모,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그리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에 정말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유교 사회 뿌리가 깊은 우리만큼 조상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유다인에게 효도는 중요한 사상이었습니다.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뒤로 돌리다, 2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결국 극한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부모까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고, 궁극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탑과 전쟁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맡은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심사숙고를 요구하는 진지함과 어떤 난관도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인내심이 요구됨을 전해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데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지혜로움과 주님께 대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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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33)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오늘 복음(루카14,25-33)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한 말씀인 '버림과 따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육신의 가족보다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길'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하는 길'입니다.
세 가지 길 모두가 다 어렵고 힘들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길이 이런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육신의 가족이나 자기 자신보다 예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자기포기와 희생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다 갖다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 것인 양 소유하고 있지만 말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주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당신의 영을 보내주지 않으시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먼저 구하고, 이 지혜와 영의 힘으로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펠레몬서 9-10.12-17)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나,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기쁘게 바친 수많은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끝까지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천상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닮아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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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ZovzU0TZ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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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삶의 목적과
의미를 다시
묻게된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이다.
많이 수유할수록
가야 할 방향을
잃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임에도
소유의 늪에
허덕이는
우리들이다.
소유가
우리 삶을
구원하지
못한다.
가져야 할 것은
건강한 믿음의
여정이다.
소유속에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
복음의 실천은
소유를 버리고
나누는 기쁨이다.
가장 좋으신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이시다.
새로운 탄생은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다.
삶을 가로막는
소유이다.
영원한
삶을 위한
버림이다.
오히려 소유를
버릴 때
지켜지는 따름의
성숙한 관계이다.
인격의 완성은
소유를 버리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십자가의 여정이다.
이 십자가 마저
놓아버리고
하느님께로
가야 할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새로운 삶을 위한
버림이며 따름이다.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하느님을 향한
생명이다.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는
소유를 버릴 때
깨닫게 되는
은총이다.
소유를
버리는 것이
삶의 은총이다.
하느님을 위해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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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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