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 낙수 1710
-
2020/10/25 - 오늘의 목회 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자리에 불러주시고 예배의 은혜를 허락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때로 지치고 곤할 때도 예배를 통하여 저희 영혼이 소성함을 입게 하시고, 하나님 사랑을 알아가도록 힘 주시니 고맙습니다. 이 시간 병든 영혼이나 잠들어있는 영혼들이 모두 일어나 예배를 통해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혜가 있게 하시옵소서!
-
하나님! 이제 '코로나' 방역의 단계들이 사라지고, 옛적 아무런 제재없이 자유롭게 예배하듯이 진심으로 신앙의 자유와 생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게 도와주시고, 언제나 예배하고 어디서나 사랑의 교제를 나눌수 있도록 저희의 예배뿐만 아니라 성도의 교제도 넉넉히 회복시켜 모든 것이 온전하게 하옵소서!
-
이 시간 우리의 예배들이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일 오전, 오후 예배가 회복되게 하옵소서! 식당에서의 친교가 회복되게 하시옵소서! 수요기도회도 회복되고 새벽 기도회도 완전히 회복되게 도우시옵소서! 교회학교의 새싹교회, 푸른교회, 보배교회, 미래교회, 청년교회 등 다음 세대의 교육과 예배가 완전하게 회복되도록 주님께서 도와 주시옵소서!
-
우리의 믿음이 회복되고 열정도 회복되고 기도와 찬양이 회복되게 하시옵소서! 새벽마나 기도의 함성이 '베델성전'에 가득하게 하시고, 찬앙대의 아름다운 찬양이 성전에 가득하게 하옵소서! 재정이 회복되어 넘치는 재정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으로 지불할 곳에 지불하는 재정의 회복을 주시어,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나눔의 손길을 내밀게 하옵소서!
-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이 증거되는 동안 마음껏 말씀하시고, 하나님 사랑에 젖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모든 기도가 회복되고 기적의 응답이 넘쳐나게 하시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일생동안 승리하는 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사 되기를 소원합니다.
ㆍ
우리의 믿음과 삶이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동영상은 지난 4월 중순에 '이호 테우 해변'에서 찍은 것입니다.)
페목 칼럼 1712
-
외로운 예수님 (82) - 미래를 장담하는 제자들을 만나심!
-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마태복음 26:35)
-
젊은 시절의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두려움도 굽힘도 피함도 없습니다. 앞에 길이 있으면 가고 없으면 만들어서 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처음 말씀하실 때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을 때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던 것도 이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난의 잔을 마실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린다는 건 충격적입니다,
-
그때 '베드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그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고 장담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에 질세라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때 "다른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했다."고 했습니다. 즉 장담한 이는 비단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불과 몇 시간 후,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첫 걸음을 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가서 기도할 동안에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신 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며3 "내가 지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시고 조금 나아가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셨습니다.
-
그런데 이 때 동산 초입에 있던 제자들은 물론이고, 함께 가까이 왔던 세 제자들도 잠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오셔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십니다. 그렇게 두 번이나 깨우셨지만 세 번째 오실 때까지도 이들은 잤습니다. 잠들면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오셨을 때도 자던 베드로는 결국 장담이 수포가 되었습니다.
-
그 밤에 대제사장이 파송된 이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한 일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귀를 떨어뜨린 것이 고작이었는데. 주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시고 그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내가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그러면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
성경에는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야바' 법정으로 갈 때에 베드로가 결말을 보려고 멀찍이 따라 들어가 바깥뜰에 앉았는데, 한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자 놀란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난 네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앞문까지 나아갑니다. 그 때 다른 여종이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고 하자 그가 맹세하고 부인하여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
그렇게 밖으로 나가던 베드로는, 조금 후에 곁에 선 사람들이 "너도 진짜 그와 한 패다, 네 사투리가 갈릴리 사투리구나!" 하자, 저주하며 맹세하기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하자 곧 닭이 웁니다. 그렇게 장담하던 베드로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 그러니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던 장담은 계집종의 추궁에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던 베드로, 그에게 질세라 같이 장담하던 제자들은 순간 모든 장담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도망쳤습니다. 장담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실천은 아무나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 믿는 일에 이와 같은 장담을 반복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안 할 것 같고, 반드시 그렇게 할 것 같은 장담은 실상 반걸음도 떼기 전에 작은 미혹 앞에 무너지고 작은 유혹 앞에 허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매일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
주님은 무너진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가셔서 주님을 사랑하는 진심을 확인하고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지난날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죄를 사해 주시며 다시 한 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던 '도마'나,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울던 '베드로' 모두 주님에게는 사랑스런 제자들이었고, 제자들을 향한 끝없는 사랑은 그들의 부인(否認)과 배신에도 끝까지 참으시는 참 사랑이십니다.
-
(사진은 지난 수요일(14일) 손님을 배웅하러 나간 제주 공항에서 잠깐 기념으로 한 장 찍었습니다.)
페목 칼럼 1711
-
외로운 예수님 (81) - 감사를 모르는 이들을 만나심!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누가복음 17:17-18)
-
예수님께서 '갈릴리' 캠프를 떠나 '예루살렘' 으로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비켜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길로 예루살렘을 항해 가고 계셨습니다. 그 때 한 마을을 지나가시는데 그곳은 나병환자들이 집단으로 수용되어 있는 곳입니다. 환자들은 모두 열 명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시자 가슴이 아프십니다.
-
'나병(癩病)'이란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질병들 중에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우선 이 병에 걸리면 환자들은 자기의 집은 물론 거주 지역을 벗어나 특별히 마련된 수용시설에 집단으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다시 돌아가는 길은, 병으로 죽거나 병에서 고침을 받아야 하는데 나병에서 고침 받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고, 더구나 이 질병의 완치에 대한 확증은 의학적 소견에 앞서 종교적 절차가 먼저 진행되어야 합니다. 즉 '제사장'들이 완치 판정을 해 주어야 합니다.
-
그러니까 '나병환자'들의 병은 제사장이 보고 "이 사람의 나병은 깨끗이 나았다."고 해야 병 나음에 대한 예물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병에서 고침 받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가족을 이별하고 여기 와서 격리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만날 수 없고 아무 곳도 방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살인자처럼 외면당하고 있습니다."는 처절하고 절박한 외침입니다,
-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코로나'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보고 싶은 부모와 자녀의 얼굴을 못 보고, 명절에도 못 만나고 예배도 제대로 못 드리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도 그건 내가 확진자인 때문이 아니라 무서운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와, 확산을 방지하여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로 활동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눈물이 나는데, 자신의 몸에 진물이 흐르고 신체가 변형되는 나병환자가 따로 수용되어 지내는 설움이야 어떻겠습니까!
-
그런데 예수님은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축복의 선언입니다.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의 나병이 나았으니 가서 제사장들에게 완치 판정을 받고 예물을 드리고 그리운 가족에게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 무서운 나병이 이렇게 간단히 나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나환자들의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열 명 중 누구 한 사람도 자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음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
열 명의 나환자들은 "그냥 가기만 하면 됩니까?", "나은 게 확실합니까?",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사장에게로 갑니까?"하는 등의 불신앙적이거나 의심의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수용시설을 떠나 모두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길을 갑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가는 길에 동시에 나병이 고침 받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모든 망가진 피부들이 정상이 되고, 흐르던 진물이 마르고, 온 몸이 깨끗해진 것이 병자들에게 느낌으로 와 닿았습니다.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다.
-
그들은 기뻐하며 걸음을 재촉하여 제사장에게 달려갑니다. 이제는 제사장의 완치 판정만 받으면 그리운 부모형제 자녀들 모두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가슴에 가득합니다. 이들이 이곳에 수용된 기간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꿈에도 그리던 일이 벌어졌으니 그 기쁨이야 말로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제는 나환자의 멍에를 벗는다는 기쁨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행복감 때문에 이것이 꿈인가 싶었습니다. 그 감격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다음, 그 중 한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했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태생적인 한계인 사마리아인의 굴레를 쓰고, 거기에 나병까지 앓으면서 이중적 설움에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같은 나환자 수용 시설에서도 사마리아인으로 또 한 번의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무거운 사슬이 벗겨진 것입니다.
-
그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천형(天刑) 으로 알려진 나병에서 고쳐주셨음에도 감사보다는 자신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우선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주님은 나병을 고쳐주시자 가던 길을 돌아와 인사를 하고 돌아간 그를 다시 한 번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
우리에게 열정은 있는데 감사가 없습니다. '구원'과 '치유'에 대한 소원은 간절한데, 일을 이루신 주님께 드리는 감사는 인색합니다. 작은 사랑, 작은 은혜에 대한 감사는 더 큰 은혜를 약속합니다. 사랑을 입었을 때 당연한 것처럼 받는 이에게는 그 사랑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랑에 감사하는 이는 더 큰 감사의 은총을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나환자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신 그 '구원'은 우리는 모르는 신비한 축복입니다.
-
(사진은 지난 15일 목요일 '군산'의 '마리서사'에서 책 구경을 하고 있을 때 스승이신 '류지정' 선생님이 찍어주신 것입니다.)
페목 칼럼 1710
-
외로운 예수님 (80) - 말씀을 책잡으려는 이들을 만나심!
-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누가복음 11:53-54)
-
목회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성도들의 눈빛과 표정을 보면 거의 그 사람이 은혜를 받는지, 거부감을 가지고 듣는지, 덤덤히 앉아있거나, 무슨 트집거리를 찾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이 말씀을 들으며 메모하는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은혜가 되어 적고 있는 이가 있고, 나중에 따져볼 양으로 적어 두는 이도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내 양식(糧食)으로 삼고자 하는 이도 있고, 시빗거리로 삼고자 하는 이도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
어떤 교인 중에는 매일 새벽마다 목사님의 설교 본문, 날, 제목까지 꼬박꼬박 적어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적는 본문은, 얼마 전에 같은 본문으로 같은 설교를 했다는 뜻입니다. 설령 설교자는 어느 본문으로 어떤 제목의 설교를 했는지 참고를 위하여 적어둘 수 있지만, 듣는 이가 적을 이유는 없습니다. 몰론 매일의 말씀일기를 꼬박꼬박 적는 이는 필요하겠지만, 정말 그걸 적어두고 묵상할 만큼의 철저한 신앙인은 별로 없고, 대개의 경우 시비의 증거입니다.
-
목회자는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스승'이기에 모르는 성경이나 이해가 안 되는 교리 등 궁금한 것은 목회자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궁금한 게 있으면 당연히 목회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몰라서, 혹은 궁금해서 묻는 사람도 있지만, 목회자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묻는 이들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시험하고 싶어 묻는 것입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들은 어느 시대나 있었습니다.
-
설교를 마치신 예수님께 한 바리새인이 자기 집에서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여 그 집에 함께 가셨습니다. 그 때 잡숫기 전에 손 씻지 않는 것을 바리새인이 이상히 여겼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며 이상히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어리석은 이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고 하십니다.
-
이 말씀은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무서운 책망의 말씀의 병행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그가 준비한 점심을 드시면서 무서운 책망을 하셨습니다. "화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지만,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에 섰는 사람이 알지 못한다."며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한 율법교사가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심은 우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며 예수님께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
그러자 예수님은 "화 있을 진저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대지 않는구나."며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 진저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무슨 음식 맛이 나겠습니까? 그러자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
'현대어 성경'은 53절을 "그때부터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앙심을 품고 여러 반대 질문을 던져 예수를 잡을 구실을 찾으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에 "진리를 들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비위에 맞는 말을 하는 교사들을 찾아다니는 때가 올 것이다."고 했습니다. 4절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상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따라간다."고도 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나 통치자들은 충신의 직언(直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듣기 좋은 간신의 말만 들으려 합니다. 어느 시대나 성도들은 목회자의 아픈 채찍을 듣기 전에 터무니없는 위로만 듣고 싶어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백성들이 제 갈 길을 가도록 권하는 책망 대신에, 잘못하고 있음에도 잘한다는 말을 듣고싶어 하고, 형편 없는데도 그 정도면 됐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왜곡시키고 복음을 곡해해 갑니다. 만약에 그렇지 아니하면 지도자를 배척합니다.
-
성도들은 목회자가 헌금설교를 못하게 하고 주초문체 못 다루게 하고, 주일성수 책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다 알아서 하겠다.'면서 안 합니다. 때가되면 다 하게 된다는데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설교 하다 쫓겨 날 각오하고 설교하는 설교자가 그립고, 쓴 설교를 달게 들으며 자기를 고쳐가는 바른 신앙인이 그립습니다. 모두 적당히 타협하고 야합하는 동안, 교회는 병들고 진리의 터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올곶은 설교하다가 그렇게 참혹하게 죽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 된 이들이라면, 또 예수님의 복음을 따라 사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해야 하고, 당연히 죽기를 각오하고 외쳐야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피 흘리고 사신 교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책망하고 목숨을 빼앗긴 진리를 목회적 야합으로 말씀을 왜곡시킨다면 우리야 말로 화가 임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될 것입니다. 복음은, 전하는 자나 듣고 행하는 자 모두가 희생의 값을 치루고 지켜야 합니다.
-
(사진은 지난 7월 30일 '금릉해수욕장'에서 '김성조' 목사님께서 찍어주신 것입니다.)
페목 칼럼 1709
-
외로운 예수님 (79) - 대적들이 연합하여 대적함을 보심!
-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누가복음 23:11-12)
-
"적(敵)의 적은 친구이고, 적의 친구는 원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 맞는 말은 아니지만 거의 맞습니다. 우리가 흔히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을 쓰지만, 이는 동류(同類)끼리 통하고 동류와 노는 인간의 습성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당시 모든 권력자들의 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저런 죄목으로 엮여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당시에 권력자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우호적(友好的)인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죽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이 더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제사장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수시로 예수님의 살해를 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대로 예수님의 율법 파괴적인 언행을 보면서 어떻게하든 예수님을 죽여야 자신들이 율법의 훼손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거세게 비난했습니다.
-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하신 주님의 책망은 양대 산맥에 주시는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시니 그들이 얼마나 악한 이들로 비쳤는가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계속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하십니다.
-
예수님은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고 하시고, '회칠한 무덤'같다고도 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렇게 무서운 심판을 퍼부은 예수님을 그냥 둘 리는 없습니다. 결국 그들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짓겠다는 이', '가이사에게 세를 못 내게 하는 이', '안식일을 범하는 이', '율법을 파괴하는 이' 등의 죄목을 붙여 재판에 회부합니다.
-
교활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지키고, 무너지는 교권을 수호하며, 백성들에게 계속 높임을 받으려는 생각으로 '공공의 적'인 예수님을 축출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제사장과 하속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대제사장에게로 끌고가 종교재판을 합니다. 거기서 '빌라도'는 껄끄러운 재판에 손을 떼고 싶어 하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인 것을 핑계로 갈릴리를 관할하는 '헤롯'이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 있는 것을 알고 헤롯에게로 보냅니다.
-
가뜩이나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석방하려던 빌라도는 예수님을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에게 보냈으나, 헤롯 역시 그에게 별 관심을 못 가지고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는 바람에 재판은 빌라도의 손으로 다시 넘어왔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과, 부인이 꿈에 예수님에게 손대지 말 것을 보았다고 하여 그를 놓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당신은 '가이사'의 신하가 아니다."며 위협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못 박게 판결합니다.
-
'빌라도'와 '헤롯'은 유대 '총독'과 '갈릴리' '분봉왕'으로 서로 미묘한 관계로 불편하여 원수로 지냈지만, 이 일로 두 사람의 소원했던 관계가 가까워지고, 이들은 친구가 됩니다. 공동의 적인 예수님의 재판을 계기로 친구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의를 위하여 친구가 되고, 불의에 저항하기 위하여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를 위하여 모이고 흩어집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 그룹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분봉 왕 '헤롯', 총독 '빌라도' 모두와 적이 되었습니다.
-
이는 국내 정치도 마찬가지로 여야(與野)의 대치 정국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작은 정당이라도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고, 이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합종연횡을 하면 어제의 우군(友軍)이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까지 우리와 함께 하던 정당이 오늘은 적이 되기도 합니다. 국제정세에는 더 민감하여 어제의 우방이 오늘은 적이 되고, 오늘 우방국이 내일은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순전히 국가 간의 이해충돌에서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이유입니다.
-
'남북'은 항상 대치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포문은 북쪽을 항해 열려있고, 남측의 군사 무기는 북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일본과의 무역 등 갈등이 불거지면 남북은 하나로 일본에 맞서는 것입니다. 주님은 홀로 외롭게 버텨서 당시 종교, 정치의 전권을 쥐고 있는 모든 세력들과 대항하고 계셨습니다. 불의한 세력들은 한 분 의로우신 주님을 향해 세력을 구축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희생되었지만 끝내 승리하셨습니다.
-
때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 혹은 신앙현장에 우가와 싸우는 불의한 세력들이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우리에게 대항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께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강한 성이요 방패와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세력들이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예수님을 죽였으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최후의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페목 칼럼 1708
-
외로운 예수님 (78) - 율법주의자들을 책망하심!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23)
-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주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며 세상에서 표현 가능한 모두 어휘를 망라하여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포악성이 드러났으면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겠습니까? 지금도 그 사나운 이빨에 물리면 치명상을 입는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 의해 망가지는 게 아닙니다. 오염된 지도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무너집니다.
-
주님은 그들에게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 닫고 너희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하시며, "화 있을 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한 사람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행위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으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
어떻게 교인 한 사람을 전도해서는 지옥 자식으로 만듭니까? 자기의 의로 그들의 불의를 심판하고, 자기 의로 다른 이의 죄를 지적하므로 상처를 입힌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하듯이 자기는 이날까지 술 한 모금도 입에 안 대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본 적이 없다는데 정작 사람들을 정죄하고 음해하는 일에 열정적이었습니다. 남을 비난하는 일을 밥 먹듯 한 죄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는 말은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의(義)는 아주 작은 의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와 인(仁)과 신(信)은 어려운 덕목입니다. 지도자들은 입으로 거룩을 말하고 몸으로 경건을 보이지만, 가슴 속에는 제대로 믿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미움, 예배에 충실하지 못하는 성도들에 대한 냉대 등으로 사랑과 격려, 칭찬과 위로보다는 책망과 정죄함이 더 많습니다.
-
신앙의 지도자들은 멋진 가운을 입고 성별된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냄새나는 작업복을 입은 이들보다 거룩한 것도 아니고, 평상복을 입은 성도들보다 더 경건한 것도 아닙니다. 직장에 매여 상관의 협박때문에, 공직에서 일하며 정부의 방침 때문에 주일을 범하기도 하고 예배를 건너뛰기도 하지만, 그 간절한 마음은 예배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책망하며 정죄하는 성직자보다 더 절절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랑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입니다.
-
계속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맹인 된 인도자'라고 하시고,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킨다."며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했지만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 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눈 먼 바리새인아!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러면 겉도 깨끗하리라." 고 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들에게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하여 슬퍼하셨습니다. 그의 책망은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자의 뼈와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고 하십니다.
-
예수님은 "너희가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 선지자들의 무덤을 가꾸며 '우리 같았으면 그 때 선지자들을 안 죽였을 것'이라지만, 너희가 그들의 남은 분량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인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
어떤 분은 새벽기도 철저히 하는 사람 조심하고, 십일조 한 푼도 안 떼먹는 이도 조심하고, 주일성수 생명같이 하는 이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짐작가는 대로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런 이들을 존경해도 신통치 않을 터인데 조심하라는 것은, 그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폄하하고 정죄하는 것이 몸에 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로가 되어 새벽기도도 안 해?!', '주일을 성수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중직이야!' 하며 자신이 하나님처럼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그동안 보아오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태를 모두 고발, 책망하시며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는 말씀으로 책망을 마치십니다.
-
사회에 더러 거대한 사회악이 똬리를 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헤쳐갈 수 없는 산처럼 버텨선 구조적 악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개혁과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러 검찰권 혹은 사법권을 가진 이들의 횡포에 싸울 기력을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가 암 덩어리처럼 우리의 삶을 옥죄어도 우리가 한 움큼 생명의 능력이 있으면 끝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맞선 세상도 이런 슬픈 세상이었지만 끝내 이기셨습니다.
-
(사진은 어제 어느 목사님께서 당뇨에 '보이차'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사 보내신 것입니다. 그 사랑 고맙습니다. 목사님!)
목회 낙수 1709
-
'공항'과 '비행장'! 아직도 모르는 게 많습니다.
-
'군산'에서 글씨를 배우고 오는 길입니다. 아침 비행기가 정시 도착이 9시 55분이었는데, 3분 늦은 58분에 도착합니다. 중요한 것은, 공항 정류장에서 9시 정각에 버스가 출발하는데, 배차 간격이 30분입니다. 비행기 앞자리였기 때문에 뛰어오니 10시 정각에 버스 정류장까지 왔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차에 오르려니 문이 닫혔습니다. 이상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기사님이 안 오십니다. 5분이 지나자 오셨는데 짐작대로 화장실에 다녀오셨답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저도 가는 건데!
-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며, 정류장마다 한참씩이나 걸려야 타시는 할머니들을, 친절한 아저씨는 어르신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서 출발하곤 하는데, 제가 답답한 것과 상관없이 보기가 참 좋습니다. 그렇게 30분 지나서 '해양경찰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5분 걸으니 공방이 나옵니다. 이렇게 가까운 걸 지난번에는 버스로 1시간 10분을 갔으니 도대체 얼마나 더 갔는지 모릅니다. 공방에 도착해서 커피 한잔을 하고 나서도 열한 시가 안 되었으니 얼마나 일찍 왔는지 모릅니다.
-
한 시간 공부하고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수제 돈가스'로 점심을 먹는데, 정말 옛날 양식집 '칼질'(?)하는 느낌으로 못 먹을 수준입니다. 배는 엄청 부른데 오늘 한 번 온 것으로 만족하자고 생각하고 나왔습니다. 나오는 길에 "혹시 동네에 서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야말로 작은 '동네서점'이 있다고 해서 갔습니다. 정말 동네 서점인데 행복감을 선물하는 작고 따뜻한 느낌의 책방입니다. 우선 '행복한 글 감옥'을 사고 싶어 했는데 있었고, 보고 싶은 몇 권의 책을 샀습니다.
-
가난하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데 필요한 '하드웨어'를 배우기 위해 '빈티지 홈'이라는 책 하나, '신영복' 선생님의 '큰 글씨 처음처럼'은 '캘리 그라피'를 배우는 입장에서 봐야 하는 글과 이야기입니다. 또 전국의 구멍가게 그림들을 사진보다 더 잘 그려낸 '이미경' 선생님의 '구멍가게 오늘도 문을 열었습니다.' 는 전에 화보집으로 한 권 사서 보았는데, 곁에 두고 그리울 때 한 번씩 펴보고 싶은 좋은 책인데, 크기 때문에 책장에 꼽혀 있어서 변형 국판 화보와 글 모음집도 하나 더 샀습니다.
-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은 전에 그의 다른 책을 못 본 아쉬움도 있을 뿐더러 인간의 탐욕이 빚은 지나친 육류 소비의 비참한 미래에 대한 책이라 보고 싶었습니다. 그건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제 개인의 식습관과 건강에 대한 필독서라 생각했습니다, 서점에 올 생각을 안 하고 '싱클레어' 교수의 '노화의 종말'은 아침에 딸에게 부탁했더니 벌써 사다 놓았습니다. 전에 글쓰기와 관련해서 사려다 못 산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도 오늘 샀습니다.
-
또 하나, "도대체 이런 책은 누가 산다고 만들었나?" 싶은 '왜 우리는 군산에 가는가?'는 군산 예찬론자인 제가 당연히 봐야 하는 책이어서 그것도 샀습니다. 제가 본 한국의 도시 중에 '군산'만큼 근대의 역사와 유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보존 관리되는 곳이 있을까 해서 문체부 같은데서 '근대 문화유적 도시'같은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이런 곳에 세금을 써서 전국의 청년 학생들의 역사 교육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제 주장의 옳음을 확인해 볼 참입니다.
-
이렇게 일곱 권을 117,400원 주고 구입하고 나니, 점심먹으며 씁쓸했던 기분이 사라지고 가슴에 행복감이 가득 밀려옵니다. 그래서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내 집에서 장사하시는 거지요?"했는데, 뜻밖에도 세를 주고 서점을 한답니다. 얼마나 귀한지 사진도 한 장 같이 찍었습니다. 이런 서점은 오래도록 우리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귀합니다. 천사를 만난 기분입니다.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다소 어려운 서점 이름과는 달리 제게 아주 친근함을 안겨 주었습니다.
-
오후 공부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왔습니다. 택시로 가면 15,000원 가까이 나오는데 버스는 1,500원이면 되니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을씨년스럽게 임대 점포만 가득한 정류장에서 차가워진 가을바람을 맞으며 40분을 기다리는데, 몇 번이나 택시를 탈까 하다가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참았는데 40분 만에 13번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실수할까봐 흔들리는 버스에서 글을 쓰며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였는데, "이번 정류장은 비행장입니다."하는 안내 방송이 나옵니다.
-
얼른 내렸는데, 내려 보니 공항 분위기가 아닙니다. 거기는 '군산 공항'이 아니라 '공군 비행장' 이었습니다. 편의점 아저씨께 공항을 물어보니 "한참 들어가야 돼요."하는데, 보통 거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여태 기다렸다 버스 타고 왔는데 다시 택시타기도 아까워 걸었습니다. 한참 걸었는데, 아직 공항이 1.6키로 남았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운동을 시키시나 하고 걷는데 힘이 듭니다. 지나가는 승용차를 세웠습니다. 휙 지나간 차는 저만큼 가더니 다시 제게로 후진해서 옵니다.
-
운전석에 앉은 부인은 자기도 공항에 가는 길이라며 공항까지 저를 태워다 주시겠답니다. 서로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가는 제 모습이 안 되어 보였나 싶습니다. 차에 탔는데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실재하는 천사입니다. 서점에서 만난 천사만큼이나 아름다운 또 한 사람의 천사를 만나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아침에 출발해서 종일 많은 경험을 하고 돌아와 조금 늦은 저녁을 먹는 후인데도 피곤함보다는 행복감이 가득 밀려옵니다. 정성학
목회 낙수 1708
-
청순미 / 지성미 / 야성미!
-
좀 쉬거나 놀면서 40년 전 사진 한 장이 굴러다니기에 생각이 나서 한 번 올려봤습니다. 올해부터 40년 전, 그 때도 늘 한복을 입고 다니던 때인데, 어느 디피점에 들렸는데, 지금은 장로님이 되신 이**권사님께서 손님들 앉는 소파에 앉아 있는 저를 찍어주셨습니다. 이 사진을 제가 33세에 쓴 '333개의 설교힌트' 라는 책의 날개에 싣고, 그 책은 사진 때문에 많이 팔렸는지, 제목 때문에 많이 팔렸는지, 아니면 내용 때문에 많이 팔렸는지 모르겠으나 약 100판 정도를 찍었습니다.
-
'신약 3권'을 완간하고 나서 구약을 쓰며 목회에 들어섰는데, 오늘 어느 친구 분이 어제 올린 제 사진을 보시며 '야성미'가 넘친다고 하시기에, 제가 이 사진은 무슨 '미'가 넘치느냐고 여쭈니 '청순미'가 넘친답니다. 저는 '지성미'가 넘친다고 하실 줄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그 책은 40년 전의 제 사진을 싣고 지금도 팔리고 있다는데 저자로서 많이 부끄럽습니다. 우리 친구 분들 중에는 이 사진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지금 놀고있던 분들만 포스팅 보시거든 한 번 적어주세요.
-
책이 곧 나올 터인데 이곳에 댓글을 적은 분들에게는 수요일 예배 전에 수고하신 만큼 충분한 기쁨의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그냥 선물하기는 그렇고, 책 값의 상당금액을 할인해 드릴 생각입니다. 아주 탁월한 표현은 그냥 한 권 드리겠습니다. 단, 이미 위에 언급된 '청순미', '지성미', '야성미'와 제가 아래 예를 든 몇 개의 쉬운(?) '미'들은 제외하고 다신 분들에게는 11월 신간 출간 때에 즐거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이름들은 제가 썩 좋아하는 의미들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
가자미 / 꾸러미 / 누르미 / 눈썰미 / 다리미 / 동치미 /두루미 / 들장미 / 등덜미 / 땅거미 / 목덜미 / 바구미 / 배멀미 / 부꾸미 / 불개미 / 산더미 / 솔개미 / 수세미 / 시어미 / 시치미 / 아가미 / 올가미 / 올빼미 / 왕개미 / 인절미 / 잿더미 /젖어미 / 지게미 / 지어미 / 주꾸미/ 차멀미 / 참매미 / 큰어미 /피라미 / 홀어미 (다 적을 수는 없고 대충 몇 개 적었습니다. 혹시 의미조차 생경하신 분들은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나옵니다. 국어서진이 없으시면 서점에 있습니다!)
페목 칼럼 1707
-
외로운 예수님 (77) - 온갖 희롱과 모욕을 당하고 죽으심!
-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태복음 27:30-31)
-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어 하는 때는 경제적인 손실을 입는 것보다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는 때입니다. 자기에게 물질적인 손해를 입힌 사람도 참아내기 힘들긴 하지만, 그보다 힘든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를 했을 때입니다. 어떤 이가 자신에게 조금만 모멸감을 주어도 분해하며 참지 못하기도 합니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찮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었을 때는 더욱 분해서 참지 못합니다.
-
웬만큼 사기당하고, 웬만큼 손해를 볼 때는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하고 자위하면서 참는 이들도,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나 행동을 당할 때는 그걸 참지 못하고 불끈하고 얼굴에 핏줄이 서고 말이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품을 보는 방법 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자존감을 건드렸을 때 나타나는 반응을 보면 얼마나 인내심을 갖고 있는 성숙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존감'은 그가 존재하는 이유이기에 자존감의 상처를 참아 낼 정도라면 대단한 내공(內工)입니다.
-
전직 '대통령'이나 '재벌 총수', 혹은 다선의 '국회의원'이나 '광역자치단체장'들이 검찰 조사를 받는 시기에, 혹은 부끄러운 범죄 혐의가 드러나 수사가 불가피한 때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를 보면, 그가 국가 경영의 최고위직에 있었거나, 그룹 경영의 총수로, 혹은 거대한 광역지자체를 이끌고 있던 정치 지도자로서 겪을 치욕적인 수사, 취재등 기타 불미스러운 상황들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쌓은 자존심과 인격이 송두리째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
사도 '바울'은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
'빌라도'가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자, 군인들이 예수님을 관정 안으로 데리고 가서 군대를 모으고 예수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로 때리며 희롱합니다. 그렇게 희롱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견디기 어려운 굴욕적인 장면입니다.
-
그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 패를 붙이고, "하나님을 믿으니 이제 그를 구원하실 거야. 그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했다"며 조롱하고, 같이 못 박힌 강도들조차 함께 욕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서박다니!"하니, 어떤 이들은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며, 달려가 해면을 가져다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합니다. 다른 이들은 "가만 두라! 엘리야가 그를 구원하나 보자!"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조롱을 당하며 그런 모욕을 겪으며 운명하십니다.
-
유순하기로 유명한 '이삭'은 '그랄'에 우물을 팠지만 자기네 땅에 판 우물이라고 빼앗는 그들에게 파는 대로 내주었습니다. 다시 다른 곳에 샘을 파면 또 물이 나왔고, 그러면 다시 빼앗습니다. 파면 뺏기고, 다시 파면 또 빼앗기며 '굴러온 돌' 취급을 받으며 모멸감을 견디고 참아내자, 후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을 데리고 화친을 청하여 왔습니다. 자존심 짓밟히며 인내하며 산 이삭은 패자(敗者)가 아니라, 끝내 하나님께서 승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
비운(悲運)의 '이스라엘' 사사 '삼손'은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 천하장사입니다. 사자를 패대기쳐 죽이는 힘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힘 하나 쓰지 못한 채 머리카락이 잘려 블레셋의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삼손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도 하나님께도 영광이 사라진 뒤에, 자존감의 손상을 입습니다. 그래도 극단의 선택보다 두 눈이 뽑힌 채 고통스러운 치욕의 세월을 모욕감을 참고 삽니다. 마침내 거대한 건축물에 자신의 목숨을 던져 불명예를 씻었습니다.
-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한낱 갈릴리 분봉 왕 '헤롯'에게 끌려가서 조롱을 받으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서 심문을 받으십니다. 오는 세상에 천하만국을 재판하실 세상의 재판장 예수님께서, 지배국 '로마' 황제의 명을 받고 관할지역을 통치하는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는 일이야 말로 모욕적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침묵으로 모든 굴욕적 재판에서 모욕을 참으시며 끝내 승리하셨습니다.
-
그렇게 수치와 모욕을 참으며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신 예수님은 죄 없는 몸으로 오셔서 강도의 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높은 십자가에서 벌거벗긴 채 죽으신 무력한 죽음이고, 침 뱉음을 당하고 가슴을 맞으며 조롱당하며 죽으신 강도 같은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죽음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려 부활의 영광을 허락하시고, 천하 만민을 심판할 영광스러운 심판주로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
(애월에 있는 '쌩텀 리조트'의 모습입니다. 이 대표님께서 찍어주신 사진입니다.)
페목 칼럼 1705
-
외로운 예수님 (75) - 의심하는 제자를 다시 찾아 가심!
-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
-
사람의 성격이란 천태만상입니다. 별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어쩌면 지구상에 사는 인생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안의 형제 중에도 성격이 각각 다른데, 모두가 같기를 기대하는 것도 욕심이지요. 열두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형제였지만 한 사람은 저돌적이고 과격했으며, 한 사람은 신중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답게 과격한 면과 정치적 욕망이 같이 있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 중에 '쌍둥이'라는 별명의 '도마'가 있었습니다.
-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 쌍둥이 형제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무척 바빴는지, 아니면 어떤 분주한 일로 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자리에 부재중이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의 저녁에 제자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환호했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도마는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방문 소식을 전해들은 도마는 뜻밖에도 예상 못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
여느 사람 같았으면 부활하신 주님을 뵙지 못한 아쉬움에 발을 구르고 가슴을 치며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물어서 찾아가 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와 반대였습니다. 그날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인데 아직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캠프에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잔인하게 죽인 유대인들이 언제 자신들에게 동일한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모두 긴장하고 숨어 있을 때입니다.
-
적어도 제자들을 예수님처럼 참혹하게 죽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위협이 가해질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와 '도마'를 제외한 열 명의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모두 닫아걸고 숨죽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한 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십니다. 함께 있던 열 명의 제자들은 분명히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빌고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
예수님은 두 번 째 제자들에게 평강을 기원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파송의 말씀과 함께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복된 현현(顯現)에도 없었고, 주님의 파송에도 참여하지 못한 도마는 속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치 그를 시샘이라도 하게 하려는 듯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자랑합니다.
-
그러자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듯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며 주님의 부활을 완강히 불신합니다. 그리고 난 후 훌쩍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 여전히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아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흉흉하게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고 문들은 여전히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가운데 계셨습니다.
-
여전히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신 다음, 지난번 도마의 이야기를 아시는듯 도마를 향하여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정말 이런 주님의 말씀은 도마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고, 도마 자신은 더 이상 "내가 만져보고 넣어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말을 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부활의 주님을 확증하게 됩니다.
-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차분히 설명하고 보여주셨습니다. 세 번에 걸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고, 말씀대로 고난 받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 후에 같은 장소의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같은 모습으로 가시면서도 믿음 없는 도마에게 자신의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도마는 감히 주님의 못 박힌 손에 자신의 손을 넣고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을 넣는 대신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
그리고는 "손을 넣어보고 만져보라!"는 주님을 향해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심하는 도마를 굴복시켰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그러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그 시간 이후 제자 공동체는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담력을 가지고 파송 받은 사도가 되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전사들이 됩니다.
-
의심하는 것과, 믿음을 확인하려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책망 대신 믿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맹목적 신앙고백의 폐해가 훨씬 위험한 것을 압니다. 근본적으로 완악하여 하나님에 대해 거역하는 '패역'이 있는가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하신 일을 확인하고 가려는 정직한 의심, '합리적 의심'도 있습니다. 이후 도마는 갈릴리에서 다시 주님을 뵙고 끝내 순교자가 됩니다. 의심을 품은 채 믿은 것이 아니라 확인하고 믿은 결과입니다.
-
(사진은 오늘(10월 20일)오후에 링거를 한 대 맞으라고 하시는 원장님 말씀에 한 시간 걸어서 병원에 가는 동안 마스크에 가을 안경을 쓰고 가다가 기념으로 한 컷 찍어 봤습니다. 완전 불량 모드입니다.)
페목 칼럼 1704
-
외로운 예수님 (74) - 종교지도자들을 보시며 슬퍼 책망하심!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5)
-
한 없이 부드러운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마태복음 23장에 기록된 불호령 같은 예수님의 책망을 들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전에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서 만난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실때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하자, "네 말이 맞다.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네 남편이 아니라."면서도 그의 복잡하고 문란한 생활을 책망하는 대신 그의 갈급한 영적 갈증을 위해, 어쩌면 그렇게 친절할 수 있을까 생각될 만큼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
요한복음 8장에서는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개처럼 끌려온 여인에게도 어떤 수치심도 주지 않으시고, 그를 책망하거나 꾸짖는 대신 무리들을 돌려보낸 후 "너를 정죄하던 이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고 "주여, 없나이다." 고 하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어떤 추궁도, 아무 다짐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은 그날 벌거벗겨진 채 드러난 자신의 수치를 가려 주신 주님의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성전에서 두 '렙돈'을 드리며 부끄러움과 죄송함으로 몸둘 바를 모르던 여인을 보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제일 헌금을 많이 드린 이가 이 여인이라!"고 위로하셨습니다. 물론 당사자에게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은 당연히 여인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마음의 짐을 벗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늘 따뜻하고, 부드럽고 자상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병들어 의지할 것 없는 이들에게 무한한 사랑이셨습니다.
-
그런데 정작 당시에 가장 막강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자 권력자들에 대해서는 추상같은 책망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비굴하고, 힘 없는 약자에게는 한 없이 무례하게 대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는 강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에게는 한 없이 따뜻했고, 죄인들에게는 너그러우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에게는 주저함없이 담대하게 책망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고 경계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듣고 지키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무거운 짐을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으며, 사람에게 보이려 '경문'의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랍비'라 칭함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서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도 말고,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하지도 말라. 랍비도 한 분, 아버지도 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도자'라고도 칭함 받지 말라. 지도자도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시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일곱 번 말씀하십니다. 고대 사본에 있는 14절까지는 여덟 번이나 됩니다.
-
지금도 교회 안에 많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교단마다 '총회장', '부총회장'도 계시고 '노회장'이나 '시찰장'도 계십니다. 몇몇 교단은 '지방회장'도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단은 '감독회장'도 계시고 '감독'도 '감리사'도 계십니다. 이 분들은 모두 교회의 어버이요, 지도자요, 스승입니다. 모두 얼마나 말씀을 멋지게 잘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의 말한 것은 따라하고 행동은 따라하지 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책망을 들었습니다.
-
세상에 나가서 전도를 해보면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들보다 들어보았을 뿐더러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한 이들, 또 교회에 깊이 간여하고 봉사했던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교회를 떠나 쉬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쉬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교회에서 갈등과 다툼, 더러는 불협화음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대상 중에 으뜸이 '담임목사'이고 두 번째는 '사모'입니다. 그리고 '장로'와 '구역장', '기관장' 순입니다. 가슴에 두고 내가 바리새인은 아닌지 보아야 합니다.
-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교회의 직분이 점점 무거워지고 직책이 주어지고 담임목사나 사모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흉허물 없이 지내다보니 권위도 신앙도 없어 보이는 현상입니다. 또 설교하는 목회자는 설교한대로 살지는 않고 말로만 한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설교를 듣는 청중에게 민감한 자기 해당되는 문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책망과 위로를 받는 게 아니라, 찔리고 상처를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오시면 "화 있을진저!" 하실지 모릅니다.
-
(사진은 지난 해 8월 29일 '사계리' 뜰을 지나면서 멀리 보이는 '산방산'을 찍은 것입니다.)
목회 낙수 1431
-
가을이라서가 아니라!
-
서울에 집회 일정으로 머무는 동안 늘 그랬듯이 교회-식당-숙소 세 곳을 다람쥐처럼 돕니다. 그것은 28년 전인 1991년 지금쯤인데 ‘순천’의 소망교회 부흥회 때입니다. 모든 목사가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오전 집회를 마치면 점심 식사 후에 차도 한 잔하고 바람도 쐬고 인근 구경도 하는 것이 큰 흉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 흉내를 내느라 지리산 산채백반으로 점심을 먹고 쌍계사, 화개장터로 기억나는데 한 바퀴 돌고 ‘돌산’ 근처인가 잘 만든 거북선 모형도 보았습니다.
-
저녁을 먹고 강단에 올라가 앉았는데 여느 날처럼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피곤이 느껴지면서 그날 창세기 본문으로 마지막 집회를 하는데 몹시 아쉬웠습니다. 담임 목사님이나 성도님들은 듣기 좋게 "은혜 많이 받았다."는 인사를 했지만 저는 송구함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나 이후로도 두 번 그 교회를 더 갔습니다만, 저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마치 "정 목사님! 한 번 더 기회를 드릴 테니 이번에는 좀 잘 해봐요."라고 불러주시는 것 같습니다.
-
그날 설교가 끝난 다음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제가 목회를 마칠 때까지, 어느 곳이든 부흥회를 가면 오후 시간에 다시는 돌아다니지 않고 숙소에 머물러 쉬고 설교 준비하여, 더 양질의 능력 있는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며 28년이 지났습니다. 정말 단 한 번도 부흥회 낮 집회를 마치면 숙소에 내려달라고 하고는, 저녁 먹을 때까지 푹 쉬고 기도하고 준비하면서, 이제 약속을 지키기로 정한 기한이 거의 다 되어갑니다. 3년 후면 끝납니다.
-
그런데 지난주에는 ‘교보문고’ 바로 옆에 있는 칼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기에, 제가 한 20분 먼저 서점에 도착해서 책을 골랐습니다. 본디는 한 시간 전에 가려고 했는데, 설교준비도 좀 늦게 끝났고,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도 한참 걸렸습니다. 한참 만에 택시를 타니 잘못 탔다면서 길 건너에서 타라는 바람에 또 지체되었습니다. 결국은 저녁 약속 15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안내에서 편집, 교정, 맞춤법 등에 필요한 책이 있는 곳을 물으니 C열로 안내합니다.
-
저에게 지금 없거나 부족한 부분의 책을 몇 권 샀습니다. 그래도 꽤 값이 나갑니다. 회원으로 3%할인해 주지만 그야 여느 서점이나 중고 서점에 비하면 비스킷 값도 안 되지요. 그 책을 한 보따리 사서 들고 칼국수 집에 가니 벌써 담임 목사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지락 칼국수’의 맛도 좋았지만 저는 제 곁에 커다란 보따리 안에, 잡힌 물고기처럼 들어있는 책들을 바라보는 맛이 더 좋습니다. 또 이제 이걸 언제 읽을지 시간을 안배하는 것도 즐거움 중에 하나입니다.
-
제 머릿속은 왜 그렇게 비어있는지, 책은 늘 여기저기 다닐 때마다 거의 그냥 안 오는 편인데도, 여전히 머릿속에는 아직도 수십, 수백 권의 책을 통째로 집어 넣어도 여느 목사님들의 머리 반절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고, 실제는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맨날 깨닫고 고치고 해도 여전히 다시 깨닫고 다시 고치는 게 저의 일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면서 그나마 다듬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책의 도움입니다. 책들은 늘 그렇게 저를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
‘가을’이라 책 읽기가 좋아서 산 것은 아닙니다. 책을 사면서 한두 쪽 훑어보는 것만 해도 유익과 행복이 있기 때문이고 서점마다 크기와 관계없이 문화산업의 꽃이라 불리는 책은 절반도 안 되고 문구, 팬시상품으로 채워지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제 책도 어느 진열장에서 안 팔리면 속상하니까 삽니다. 또, 밖에 왔을 때 한 번씩 돌아보고 몇 권을 사지 않으면 책을 사 볼 엄두도 못 내기에 무리를 해서 삽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책은 친구처럼 함께 삽니다.
-
정성학
페목 칼럼 1703
-
외로운 예수님 (73) - 더렵혀진 성전을 보시며 분노하심!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태복음 21:12)
-
예수님 사신 '공생애(公生涯)' 기록이 네 복음서에 있습니다. 그 중에 현실 상황을 보시며 주님의 마음이 상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 위선적이고 거짓된 모습을 보이던 종교인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분노가 있었고, 아침 일찍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며 시장한 배를 채우려 하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신 때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독사의 자식'이나 '회칠한 무덤'같은 표현으로 그들을 책망하셨고, 무화과나무는 말라 죽었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심정을 행동으로 드러내신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을 때, 기도소리 대신 짐승의 울음소리 가득한 성전을 보셨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부터의 피곤한 여행을 마치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번 유월절은 예수님에게는 의미심장한 절기입니다. 마지막 사명인 십자가의 절기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주간을 조용히 성전에서 기도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찾아간 성전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
성전에는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이나 기도하는 소리는 없고, 아니 기도할 마음이 생기거나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는 하나도 없고, 마치 시장터를 방불할 만큼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짐승들의 냄새도 심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의 마음에 분노가 가득했고, 눈에는 탐욕과 거짓의 긴 옷을 입은 종교인들의 위선적인 모습만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 아버지의 집에 대한 사랑의 짓밢힘으로 인하여 분노하셨습니다. 처음으로 과격한 대처를 하십니다.
-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우선 성전 안에서 짐승을 매매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성전 세금 반 세겔을 내기 위해 돈을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형편이 어려워 짐승을 바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드리는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모두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심한 모습이었습니다. 분노하신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성경에는 내 집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고 하셨습니다.
-
한 번도 보지 못한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런 소란스러운 틈에 성전 안에서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맹인은 전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는 말씀을 듣고,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던 맹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못하고, 거리에서 구걸하여 먹고 살던 거지인데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시자 밝은 눈으로 와서 미래의 운명이 바뀐 사람입니다.
-
예수님께 나아온 또 다른 사람 '다리 저는 이'는 지난 명절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 누어 걷지 못하던 이가 고침 받은 이야기를 들었거나 그의 치유 받은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도 유대인들의 명절에 기적을 보았는데, 그 때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구했을 것입니다. 분노하신 예수님은 장사하는 이들을 쫓아내시던 손으로 이처럼 저는 자와 맹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일어나야 하는 진정한 기적입니다.
-
또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엊그제 나귀를 타고 '벳바게'를 통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예수님께 겉옷을 깔아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는 것을 보거나 같이 환영하던 아이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맹인과 저는 사람을 고치고 아이들의 찬송을 받으시는 일들을 보고는 오히려 예수님께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이 안 통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성 밖 '베다니'로 나가십니다.
-
병행구설인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은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도 못하게 하시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던 성전이 황폐화 된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정신을 차리고, 아름다운 성전을 가꾸기 위해 애쓰려는 마음 대신, 이런 일을 빌미로 삼아 이 갈릴리 청년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교훈을 놀랍게 여겨 두려워 한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하나님 성전을 귀히 여기고 이를 지키려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정작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신(立身)만 생각하여 예수님을 죽일 방도만 생각했습니다. 다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므로 권력자들이 어찌할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누적된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은 유월절에 폭발하여 결국은 고발과 정죄를 당하여, 성전을 정결하신 그 절기에 주님은 진정한 성전의 어린 양으로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
지금도 교회에는 주님의 가르침과 사랑보다는 자기의 권위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한 집단의 횡포가 가득하고, 정작 주님의 치유를 희망하며 나온 맹인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리 저는 자들은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집에서 가장 멸시당하고 소외된 이는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지금 교회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이들이 주님께 찬양하려 하지만, 이미 성전에서 녹을 먹고 있는 이들은 주님의 존재가 자신의 길을 막아서는 장애로 여기는 이들도 많습니다.
페목 칼럼 1702
-
외로운 예수님 (72) -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심!
-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태복음 16:23)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헤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할지 자기 능력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지 판단하는 일도 어렵고, 자기의 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지 아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님의 기준에 미흡한 것은,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랬습니다.
-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으로 올라가셨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생각에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는 모르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대답은 다양했습니다. "네 항간에는 주님을 가리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아, 그래요, 그럼 당신들의 생각은 어떠하시오?"하고 물으십니다. 즉, "당신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며 제자들의 입장을 물어보신 것입니다.
-
그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대답합니다.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칭찬하신 다음, "이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고 하십니다.
-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시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나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처음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예언을 세 번 말씀하신 중에 첫 번 예언의 말씀이 이때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을 붙잡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고 간합니다.
-
분명히 베드로는 자기 선생님이 대제사장과 장로들, 즉 정치, 종교적 세력에게 죽임당하는 일에 자신의 스승이자 '메시아'인 예수님을 넘겨드려 고난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승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고 죽으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용납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고 책망하십니다.
-
그러면서 예수님은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
복음서마다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드러내 놓고 가르치실 때 누구보다 열심 있고 적극적이던 베드로가 그 길을 막아선 것입니다. 이후에도 '시몬'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자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 아니었기에, 그 때도 주님은 그를 책망하시며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 주셨습니다.
-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변화의 영광을 보이시고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음성의 내용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두 번째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잠잠하여 본 것을 말씀하신 대로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
우리는 흔히 '혈기'를 '열심'으로 생각하고, '고집'을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열정'을 하나님을 향한 '충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높이로 하나님을 재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눈높이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가 정한 것은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찾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으면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
(사진은 오늘(10월 18일) 주일 아침에 길건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드릴 헌금을 은행에서 찾아오면서 찍은 것입니다.) 정성학
페목 칼럼 1701
-
외로운 예수님 (71) - 예수님을 시비하는 바리새인들을 보심!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13)
-
사람은 누구를 만날 때 힘 있는 사람, 인기 있는 사람, 덕망이나 인품이 있는 사람 만나기를 좋아합니다. 반대로 힘없고 더러운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 전과자로 알려진 사람 만나는 것은 썩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불가피하게 만나야 한다면 얼른 용건만 간단히 마치고 일어서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힘 있는 이는 자주 만나고 싶어 하고, 오래 만나고 싶어 합니다. 무엇인가 소득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이 비슷합니다.
-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와는 가치관이 다르신 만큼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없는 사람, 사회적 약자, 소외된 자, 병든 자, 멸시를 당하거나 외면당하며 사는 자, 억압받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호소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의 '수가'성에서 다섯 남편과 살다, 지금 여섯 번째 남편과 사는 여인을 찾아가실 때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기록된 본문은 "내가 그 여자를 만나러 사마리아로 지나가야겠다."는 의지로 이해합니다.
-
'갈릴리'에서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세리 '마태'에게 귀띔을 받았는지, 아니면 직감으로 아셨는지 모르지만. '여리고'의 연도에 늘어선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돌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향하여 "삭개오여! 내려오시오. 내가 오늘은 당신 집에서 묵고 가야겠소!"하여 그를 놀라게 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저가 죄인의 집에 묵으러 들어갔다." 며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별일이라는 듯이 수군거렸습니다.
-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고 하십니다. 한걸음 나아가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세리장'이라는 명예를 갖고 있어 찾아가셨습니까?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날 삭개오에게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데나리온'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삭개오가 얻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입니다.
-
'세리장' 삭개오가 얻은 신분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더 이상 '여리고'에 내려올 수 없는 여행임을 아시고, 마지막 가는 길에 그곳에 들려 그가 '세리장'으로, '부자'에 오르기까지 고생하며 얻은 것보다 소중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영광의 선언을 하시고,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멍에를 벗겨 주셨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모아온 전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자들에게,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으며 대신 구원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
주님은 그 일을 위해 여리고에 가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찾아가실 때 자신의 이익이나 유익이 아니라, 찾아가는 이의 행복과 삶의 희망을 위해 가십니다. 예수님은 베이스캠프가 있는 '가버나움'의 세관에 있는 '레위'를 눈여겨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라 오라!" 고 말씀하시고, 세관을 떠나 주님을 따라 나선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게 '마태'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을 삼으셨습니다. '마태'란 '하나님의 선물(恩賜)'입니다.
-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너무 좋아 잔치를 베풀었고, 동료 세리들,, 군인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물론 잔치의 주빈은 자기를 불러 제자를 삼아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잔치에 앉은 걸 본 바리새인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말입니다. 마침 이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주님께서 들으셨습니다.
-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언중의 명언입니다. 마가복음 2장 14절에 보면 그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편이 되어 "나는 당신들 바리새인 같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레위 같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대언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가 따른 길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갈 만한 가치 있는 의인의 길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여리고 삭개오의 집에서 시비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아무리 부자요, 힘 있는 사람들조차 잃어버린 자요, 이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면서 존경받는 그룹, 돈 많은 그룹, 실력 있는 그룹, 지도층과 일하는 것은 자랑할 만하고 힘이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힘없고 멸시받는 이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힘을 주고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
주님이 부르신 대상,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은 늘 세상에서 존경이 아니라 멸시받는 사람들이었고, 무엇인가 향유하는 이들이 아니라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들입니다. 그들과 어울려 한 끼 식사를 하고 하룻밤 묵어가는 일도 시비를 받는 세상에서 외롭게 행보를 이어가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 일이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명받은 잃어버린 자. 죄인 된 자를 찾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사진은 오늘 주일 낮 예배를 드리고 아직도 텅 빈 예배당은 언제 채워질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찍어 두었습니다.)
목회 낙수 1428
-
뜻밖의 횡재! - 6차산업 국제 박람회!
-
지난 토요일(10/12)아침 '익투스여행사'를 경영하시는 로마 연합교회 ‘서나영’ 장로님의 카톡이 왔습니다. 지금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가서 6차 산업 제주박람회에 가서 동생의 강의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도착 시간에 맞춰 나가려 했으나 조금 늦었습니다. 회의장이 있는 중문 관광단지로 택시로 가시는 것을 중간에 내리게 하고는 제 차로 모셨습니다. 식사를 안 하신 듯해서 여쭈어보니, 전복죽을 잡수시겠다고 해서 전복죽 집에 갔습니다. 그 집 전복죽은 참 맛있습니다.
-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식사를 안 할 생각으로 있던 터라 같이 먹었습니다. 식사 중에 식당 사장님이 카드와 빌을 장로님께 드립니다. 들어오실 때 미리 카드를 주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잘 먹었습니다. 커피라도 대접하려고 하니, 커피도 당신이 내시겠다고 해서 저는 '자몽 에이드'를 시킨 후, 나올 때 컵에 담아 들고 나왔습니다. 장로님을 모시고 중문 관광단지의 ICC(국제 컨벤션 센터)로 갔습니다. 주차를 하고 들어가니 장로님은 벌써 제 명찰까지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
상상도 못한 박람회입니다. 전국 특히 제주의 농, 축산업을 하는 이들의 특별한 제품을 선보였는데, 먼저 통밤이 들어있는 찹쌀떡을 샀습니다. 장로님께서 엄청 귀한 ‘찔레꽃 차’도 한 병 사 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은 박람회인줄 알았으면, 미리 주일 준비를 다 해 놓고, 하루 돌아보는 건데 아쉽습니다. 그래도 급히 돌아보면서 비듬을 예방해 준다는 황토 샴푸와 치약도 사고, 임실에서 온 ‘임실 치즈’도 한 토막 구했습니다. 전시관을 다 못 돌아본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
카톡을 주시는 바람에 전복죽도 얻어먹고,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좋은 전시장에서 구경도 잘 하고, 또 이런저런 선물도 받았습니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꽤 짭짤한 여정이었습니다. 입구에서 받은 두툼한 안내 책자에는 이번 전시에 참여한 모든 기업과 제품의 소개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쉬운 것이나 미처 구입하지 못한 것은 그쪽으로 연락을 하면 될 것입니다. 박람회를 이틀만 하는 바람에 주일에 끝났고, 딸에게 시간을 좀 내서 가보라고 했더니 결국 못 갔네요.
-
이제 그곳에서 어제(10/17)부터는 건축 박람회가 열리는데 내일쯤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해 건축박람회엔 많은 유익이 있었고 첨단 건축자재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서재에서 쓰고 있는 원목 작업 테이블도 하나 샀습니다. 아무 볼 것이 없어 보이는 박람회장 같지만, 한 번 보고 나면 인식의 지평을 훨씬 넓혀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박람회나 전시회는 제주에 사는 이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지난 토요일은 그래서 횡재한 날입니다.
-
정성학
목회 낙수 1707
-
2020/10/18 - 오늘의 목회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가을의 복판에 왔습니다. 그래도 감염예방이 잘 이루어져, 1단계로 하향 조정되게 하시고, '비대면 예배'에서 '대면 예배'를 드림으로 성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예배하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이제 빠른 시일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상에서 소멸되었다는 '세계 보건기구'의 발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
질병으로 인한 신음소리를 기억해 주옵소서! 오늘도 예배하는 저희들이 전심으로 예배하되, 영으로 진리로 드리게 하시고, 비록 마스크는 썼지만 소리를 높혀 주님을 찬양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진심으로 헌금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바이러스가 두려워 예배의 자리에 오지 못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칭찬듣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
남북이 분단되어 70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 통일되지 못하고 여전히 긴장하고 갈등하며 대치하고 있습니다. 남북 최고 지도자들에게 소통과 공감 능력을 주시고, 남북 백성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지도자들이 되게 하시고, 그들의 결단에 의하여 이 땅에 속히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산 가족들의 아픔이 치유되게 해 주옵소서!
-
공부하는 자녀들이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사업하는 이들은 사업의 번창을 주시어, 생각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성도들의 삶의 질도 향상되고, 그들의 경제적 형편도 호전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생활에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힘든 시기에 건강에 이상이 없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
엄중한 코로나 상황에 언제 어떻게 전염병이 백성들을 힘들게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방역을 책임진 당국과 방역 실무를 맡고 있는 병원의 의사, 간호사, 스텝들 모두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하시고, 어려운 정국을 맞아 고생하는 경찰, 소방관들의 수고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국방을 책임진 군인들도 추위가 다가오는데 건강과 안전을 지켜 주옵소서!
-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사진은 신동원 목사님이 '첫눈 온 후의 백두산 모습'이라고 알려주신 사진입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페목 칼럼 1700
-
외로운 예수님 (70)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는 제자들을 보심!
-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9:13-14)
-
부모의 관심은 늘 자녀에게 있습니다. 자신은 못 입어도 자식들은 입히고, 자신은 굶어도 자식들은 배부르게 먹입니다. 자신은 배우지 못했어도 자녀들에게는 공부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부모들의 마음은 자녀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마음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든 자녀들을 복 받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자신의 아이들을 축복해 달라고 예수님께 데려오는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부모들은 자녀들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그때 제자들이 그들을 막았습니다. 아이들은 부산하고 시끄럽기 때문에, 소란하고 철없는 아이들을 여긴 왜 데리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당연히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를 결정하는 것은 남자보다 여자가, 부모보다 자녀가 우선권이 있을 만큼 자녀를 우선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여 보내셨습니다.
-
이렇게 아름다운 주님의 교훈과 모범이 있었기에, 그 때부터 시작한 교회학교(혹 주일학교)는 오늘까지 왕성히 발전해왔고, 대개의 교회들은 개척 이후에 아직 담임자 내외 밖에 없을 때, 그래서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장년예배가 어려울 때에 먼저 아이들을 중심으로 소위 주일에 공부하는 '주일학교' 혹은 교회에서 배우는 '교회학교'라는 이름으로 작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규모가 커지면서 교회에 따라 '유치부',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로 발전해 갔습니다.
-
우리 교회도 영, 유아, 유치부를 통틀어 '새싹교회'로 '유년, 초등, 소년부'는 모두 '푸른 교회'로 '중등부'를 '보배교회'로 '고등부'를 '미래교회'로 부릅니다. 이렇게 미래 세대, 혹은 다음세대로 불리는 '교회학교'를 세운 것은 "어린 아이들을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때 말씀이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사고(思考) 저변에는 어린 아이들을 소홀히 하고 경(輕)히 여기는 습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단지, 어린 아이는 가정에서만 소중할 뿐입니다.
-
분명히 각 가정에서는 신, 불신 간에 자녀들이 소중히 여김을 받습니다. 따라서 제일 좋은 것은 자녀들 몫입니다. 제일 좋은 음식, 외식이나 휴가지 선택, 기타 가족 공동체를 위한 모든 결정은 자녀들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부모들은 싼 옷을 사 입어도 자녀들에게는 유명 상표가 붙어있는 비싼 신발, 옷, 가구들을 마련해 줍니다. 시계, 휴대전화, 컴퓨터 등 자녀들에게는 형편이 허락하는 한 최고의 제품을 구입해 줍니다. 보석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
그런데 교회에만 오면 모든 것이 어른 중심이고 아이들은 그 부속품입니다. 교회학교는 마치 교회 액세서리처럼 여깁니다. '좋은 것을 해주고 싶지만 형편이 안 되어서 못 해주는 게' 아니라, '교회학교에 그렇게 좋은 것을 해 주어야하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형편이 안 된다고 하지만 어른들을 위한 것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합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들이 있겠지만 아직도 예배당 비품을 구하면서 어른들이 새것을 구입하면 어른들이 쓰던 것은 교회학교에 줍니다.
-
제가 미천하여 아직은 아이들에게 냉난방 시설을 먼저 해주고, 아이들에게 좋은 음향시설을 먼저 해주고 어른들은 나중에 하거나, 아니면 어린아이들이 쓰던 음향기기, 강단, 피아노를 어른들이 가져다 쓰는 곳은 못 보았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교회 교육관을 사용하는 우선권에서도 어른 예배실에 밀리고, 비품 구입에서도 한참 후순위입니다. 이유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어 자신들을 위해 결정을 할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
또 '아동부'나 '중고등부'를 책임진 교역자들은 위상이나 신분에서 의사 결정 기구인 담임목사나 '당회', '기획위원회' 에서 발언할 기회가 원천봉쇄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이 애정을 품고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여 보낸 소중한 어린이를, 접근권 조차 박탈하려던 제자들의 성품을 닮은 현대 목회자와 교회의 중직들에게 철저히 배척당하여 오늘도 가장 열악한 환경과 시설에서 거의 관심을 갖지 못한 채 말로만 '교회와 민족의 미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
주님은 이 시대의 교회에 오셔서 교회 각 기관(예배실, 교육관, 기도실)을 보시면 통곡하실지 모릅니다. 특히 어른들 중심으로 투자된 공간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빈약한 미래세대의 시설을 보고 경악하실지 모릅니다. 주님은 지금 교회학교의 운영이나 프로그램, 교사들의 구성을 보면서,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교육에 대한 열정을 보시면서, 슬퍼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부흥을 기대하는 것을 보시면 어쩌면 진노하실 것입니다.
-
(이 사진은 지난 4월 28일 '페목 칼럼집'표지에 쓰려고 찍었는데, 당뇨로 입원하는 바람에 손을 못 대다가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작업에 들어가게 되어 꺼내봅니다.)
페목 칼럼 1699
-
외로운 예수님 (69) - 귀신들린 사람을 찾아가심!
-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누가복음 8:27)
-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한 곳은 '갈릴리' 호수 동편에 있는 '가다라' 지방입니다. 그곳에 귀신들린 사람들이 아무 것도 입지 않고 벌거벗은 몸으로 공동묘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두 사람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한 사람으로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
예수님은 그를 보자마자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귀신은 가끔 그 사람을 붙잡아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지만 워낙에 강력한 귀신이라 귀신에게 몰려 그 쇠사슬을 끊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을 듣자마자 반응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 그 때 예수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자 그는 놀랍게도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
그는 많은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 엄청난 군대 귀신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아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귀신들린 이 사람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젊은 청년이 귀신이 들려 사람 사는 곳이 못 되는 공동묘지에 살고 있습니까? 아무도 관심하고 사랑하고 돌봐줄 이가 없는 곳에서, 귀신이 들린 채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풍랑을 헤치며 갈릴리호수를 가로질러 건너오신 것입니다.
-
그를 고쳐 온전하게 하시려는 일념으로 오신 예수님은 귀신을 향하여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그가 "주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는데, 얼마나 강력한 '군대 귀신'에 들렸는지 사람들을 그 앞에 오가지 못하게 하고, 쇠사슬로 엮은 것은 끊고 도망갈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지배당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아시는 주님은 귀신을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
귀신은 들판에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락하시자 그에게서 나와 돼지떼에게 들어가고 이천 마리의 돼지들은 미친 듯이 비탈로 달려 '갈릴리'호수에 모두 빠져 죽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 돼지 치던 이가 이 사실을 마을에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귀신들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자유하게 하시고 그들을 고치고 그들의 운명을 새롭게 하십니다.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합니다.
-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돌아가시려고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따라가기를 원했으나 허락지 않으시고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너를 불쌍히 여겨 고치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신 후 그곳을 떠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인생들이 귀신들려 고통 받고 있을 때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서 이 일 바로 전에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고쳐주셨고, 이 일 후에 '두로'와 '시돈'에서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의 소원을 듣고 고쳐주셨습니다.
-
어쩌면 세상은 모두 귀신들린 모습입니다. 귀신은 강력한 힘으로 인생들을 광야로 끌고 갑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귀신 들린 아이를 불 가운데도 끌고 들어가고 물 가운데도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서 아이를 거의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이 사람도 군대 귀신에게 광야로 끌려가서 거기서 반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쇠고랑을 끊고 광야로 내몰 정도의 힘을 가진 그가 얼마나 무서운지, 지나가지도 못할 정도니 그는 얼마나 과롭혔겠습니까? 지금도 귀신들린 자들은 무서워 모두 피해 다닙니다.
-
누가복음 8장에 보면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고 훌렁 벗고 사는 사람입니다. 징그럽고 혐오감이 느껴지는 그 사람 앞에 누가 지나가겠습니까? 쇠고랑을 끊을 정도의 힘을 가진 그 앞에 누가 나서겠습니까? 집도 아닌 무덤 사이에 사는 사람이 세수를 하고 몸을 씻겠습니까? 머리를 자르겠습니까? 풍기는 몰골에서도 사람의 모습이 아닌 혐오감이 들 것입니다.
-
마가복음 5장 5절에 보면 귀신들린 이 사람을 설명할 때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고 했으니, 훌렁 벗은 몸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온 몸을 돌로 짓이겨 피가 흐르고, 그 피가 딱지가 앉고 다시 그 위에 피가 흐르는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몰골이 아니라 귀신의 몰골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그 앞에 지나가지 않았지만, 측은한 그의 인생을 생각하며 갈릴리 호수를 갈로질러 온 곳이 '데가볼리'의 '거라사'입니다.
-
주님은 우리가 때로는 불신 귀신, 우상 귀신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세상의 향락귀신, 도박귀신, 춤 귀신, 오락귀신에 들려 피폐해가는 인생을 보시며 구원하려 오십니다. 음란 귀신이 들리고 이간질 귀신이 들리고 정죄의 귀신이 들렸을 때 측은히 여기십니다. 귀신은 다양하게 역사(役事)합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귀신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향하여 슬픔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온전하게 되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행복해 하십니다.
-
(사진은 15일(목) '류지정' 선생님이 당신의 공방 창가에서 손수 써주신 마스크를 쓰게하고 찍어주신 사진입니다.)
페목 칼럼 1698
-
외로운 예수님 (68) - 믿음 없는 제자들을 보심
-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누가복음 8:25)
-
공동체에 위기가 오고, 배가 침몰할 때에 그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노를 젖던 이들이 할 일은 뒤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거기는 주무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이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그 일로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믿음입니다.
-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뒤에서 평안히 계십니다. 아무리 지금껏 우리의 힘으로 노를 저으며 호수를 건너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러나 무서운 광풍을 어거하는 데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칩니다. 그러므로 배 고물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거기에는 우리 예수님이 계십니다. 제자들이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주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주무시던 자리에서 별일 아닌 듯 일어나십니다.
-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면 잔잔하게 됩니다. '현대어 성경'에는 이때 "폭풍을 향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시자, 파도가 가라앉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고 했습니다. 마태에 의하면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사람들'이 누굽니까? 조금 전에 죽겠다고 아우성치던 이들을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그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잠을 깨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하신 일은 제자들의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 이하에 보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고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그들이 배에 모시고 호수를 가로질러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른 채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신앙생활 하는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
이 일은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셔서 많은 고기를 잡은 후입니다.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고기 잡힌 것에 놀라는 경험을 했습니다. 시몬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는 고백도 했습니다.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고백한 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라면서 주님의 실체를 모르고 따라다녔던 믿음 없는 제자들인 것입니다.
-
이들은 정작 예수님과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목적지를 가면서도 그 분이 누구인지, 그가 이런 위기에서 건져 주실 수 있는 분인 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위기'는 순간순간 다가옵니다. 우리를 삼킬 듯이 몰려오는 '폭풍' 같은 위기, '파도'같은 위기, 생명을 질식시키려는 위기, 목숨을 앗아가려는 위기들입니다. '코로나' 같은 위기도 오고, 코로나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
지금 보이지 않는 곳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인생의 뒤편에, 교회의 뒤편에, 사업장의 뒤편에, 우리의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어느 '고물'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목적은 우리와 함께 호수를 건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 우리 스스로 힘써 노 저어 풍랑을 헤쳐가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위기의 순간에 두려움을 제거하고 문제를 풀어주시는 주님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위기의 코로나를 이기는 길입니다.
-
주님은 우리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기를 원하십니다. 풍랑을 만나 주무시고 계실 때, 우리가 깨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믿음의 길은,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위험한 일을, 때로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내가 겪는 어려움을 주님이 함께 느끼고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코로나는 전 세계적인 위기입니다 이런 세계적 위기가 일 년이 가까워 오고, 이것이 언제 끝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
그것이 신앙의 배를 침몰시킬 듯하고, 우리의 목숨을 소멸시킬 것 같아도 주님이 한 번 말씀하시면 거짓말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무서운 광풍이 부는 호수를 순간 잔잔하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주님께서 지구상에 퍼져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한 순간에 잠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코로나가 한 순간에 온 세상을 뒤엎었던 것처럼 한 순간에 온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이 폭풍을 잠잠케 하실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느냐?"고 하던 그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동일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주님을 슬프게 합니다. 주님을 섭섭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보여주신 기적과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이런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넉넉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서운 파도를 만나기도 하고, 죽음의 위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들과 동일하게 불신의 삶을 살면 주님은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코로나 사태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창조주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자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다 뒤엎어도 주님께서 우리를 막아 주실 것을 믿고 놀라지도 않는 것입니다.
-
설령 코로나가 우리에게 찾아와도 넉넉히 치료하실 것입니다. 설령 치료되지 않을지라도 영원한 곳으로 안내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립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음의 행보를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그 믿음이 없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이가 누구인가?' 하고 놀란다면 주님은 오히려 그런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실 것입니다.
-
(사진은 지난해 2019년 8월 어느 목사님과 장로님이 오셔서 차귀도에 갔을 때 원양에서 잡아온 오징어를 제주 해풍에 말리는 모습입니다.)
페목 칼럼 1697
-
외로운 예수님 (67)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보심!
-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누가복음 8:24)
-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에 올라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시자, 제자들은 말없이 예수님을 모시고 배에 올라 노를 저어 갔습니다. 배는 포구를 벗어나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가다라'지방을 향해 동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마가'에는 바닷가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떠난 일정으로, '마태'에는 귀신들린 많은 사람들을 고치신 후에 배를 따고 떠나십니다. 그라고 '누가'에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비유를 말씀하신 후입니다.
-
그러니까 고요한 바다에 오직 바람소리와 물살을 가르며 가는 뱃소리, 제자들의 노 젖는 소리만 삐걱 거리며 들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치고 설교하시는 일로 피곤하신 주님은 배 고물 쪽에서 잠이들어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설교 한 번 하는 일도 쉽지 않거든,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질문하던 무리들에게 말씀을 이해시키려니 얼마나 힘들까 생각해봅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한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로 기력이 많이 진(盡)하셨을 것입니다.
-
그 때 난데없이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그 바람이 점차 거세지더니 급기야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를 침몰시킬 듯 불어옵니다. 이들이 타고 가는 배는 고작 여남은 명이 타서 그물을 던질 정도의 작은 배였습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북쪽 '헐몬산'에서 발원하는 바람이 웅덩이처럼 패어있는 갈릴리호수에 도착할 때쯤 거대한 돌풍으로 변하여 호수를 뒤엎고, 그 돌풍에 희생된 어부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바람이 호수 위에 있는 제자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
처음에 대수롭지 않던 바람이 거세지며, 더 이상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을 안 제자들은 얼른 노를 저어 건너려던 수고가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람이 거세지며 바닷물은 여지없이 배를 타고 넘어와 배안에 가득했고, 제자들을 태운 이 배는 침몰 위기에 처해 위태로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 쪽에 와서 주님을 깨우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습니다."고 합니다. 당장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 위기에서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
누가복음 8장 24절 '우리말 성경'은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모두 빠져 죽게 생겼습니다!"고 했고, '현대어 성경'에는 "선생님! 선생님, 곧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아무튼 모든 제자들이 위기를 공감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지금까지 갈릴리호수에서 배를 타고 고기를 잡던 제자들입니다. 혹은 호수를 중심으로 살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이렇게 무서운 바람이 부는 것은 처음입니다. 어쩌면 전에 파도에 배가 뒤집혀 죽은 이들 생각도 났을 것입니다.
-
지금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세상에 창궐하여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매일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는 확진자라 숫자가 별 의미는 없지만, 이글을 쓰는 지금 세계 코로나 확진자수는 4,000만 명이 되었고, 사망자수도 1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세계는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그 바람에 경제는 얼어붙었습니다. 국내에도 확진자는 25,000명이 넘고 사망자는 500명에 육박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또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날 것이기에 수치에 별 의미는 없습니다.
-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삼가고, 사람만나는 일을 삼가고 모든 것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님, 우리가 죽겠습니다.", "우리 모두 침몰할 것 같습니다."며 아우성입니다. 정부는 원인을 교회에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가 '코로나의 온상'처럼, 감염 전파의 통로처럼 인식되었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차갑습니다. 그야말로 위기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항해가 호수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좌초의 순간에 있습니다.
-
그 바람에 교회는 재난을 선포하고, 예배를 취소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생경한 단어를 따라 이웃과 성도들과 거리 두는 일, '비대면 예배', '온라인 예배' 등의 낯선 어휘들이 귀에 익습니다. 목회가 동력을 잃고, 신앙생활의 기쁨은 증발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를 만나도 포옹은 커녕 악수도 못한 채 눈인사만 합니다. 아니면 서로 주먹을 갖다 대는 웃지 못 할 풍경이 연출됩니다. 예배당은 몰래 나오고, 그러다가 그마저 주저앉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죽겠다는 말만 쏟아냅니다.
-
그러나 이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배 뒤쪽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배는 예수님께서 배 위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설교하고 그 길로 그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중입니다. 아침부터 사역이 힘든 주님은 배를 제자들에게 맡기고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이 베개는 메밀이나 텍스같은 좋은 소재로 만든 게 아니라 고물에 가로질린 나무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평안히 노 젓던 제자들이 급히 주님을 보았습니다.
-
그 때 제자들의 소리에 잠을 깨신 주님은 아무 일이 없는듯이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원망과 놀람과 두려움이 섞인 말로 제자들은 "이 상황에서 잠이 오시느냐?"는 듯 주님을 깨우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 우리가 다 가라 앉게 생겼습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를 좀 보십시오." 주님은 슬펐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 이 배에 타고 있는데, 왜 이렇게 호들갑인지, 죽기는 왜 죽는다고 난리를 피우는지 제자들을 볼 때 슬펐습니다.
-
(사진은 15일(목) '군산'에서 '류지정' 선생님이 찍어주신 것입니다. 피로감이 사라진듯 해서 실어보았습니다.)
목회 낙수 1427
-
은혜를 끼치기는 커녕! - 어떤 집회!
-
13일 주일 저녁부터 서울 목동에 있는 '능력교회'(담임목사 : 이동석)에서 가을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행복한 교회, 행복한 신잉생활'이라는 주제로, '집회의 행복'부터 '교회생활의 행복'까지 열 시간을 전했습니다. 새벽과 낮에 한 시간씩, 저녁에 한 시간 말씀을 전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30년 전에 교회를 개척하여, 출석교인 천명을 넘기기까지 "청춘을 목동에 묻었다."고 하시는 목사님을 뵈면서 저의 한없이 조라한 성적표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
지금은 1,2,3,4부로 예배를 드리며 특별히 영,유아, 유치부를 비롯, 청년부에 이르기까지 다음 세대를 위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 목사님은, 다섯분의 부목사님들과 함께 '은혜의 30년, 앞으로 30년'이라는 올해의 표어를 붙잡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곳에 은혜를 끼치러 강사로 와서 오히려 많은 은혜를 받고 갑니다. 열 시간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 마다 열 번도 더 놀랐습니다. 200여 평의 좁은 공간에 8층 건물로 1500여평 예배당을 올린 건물부터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
30여년 전 제주도 '여미지 식물원'의 '천제연 폭포'를 건너는 구름 다리 공사 중 다리가 무너져 열 한 명이 목숨을 잃는 대형 사고가 있었는데, 그 현장 소장이던 목사님은,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십니다. 저와 한 살 차이인데 동안(童眼)을 유지하며 늘 '생글생글(달리 표현할 길이 없음.)' 웃으면서, 총회장을 지내신 어른 답지 않게 여전히 어린 아이 같으십니다. 비결을 여쭈었지만 끝내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
목동성전을 중심으로 이미 '광천'에도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은 '오송'에 수십억 예배당을 건축하여 내년에 입당을 앞두고 계십니다. "젊은 목회자가 목회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건물을 지어 주어야 마음 편히 목회하지요." 이 말씀을 들으니, 예배당을 지어 선물받는 목회자는 누구일까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예배당도 건축 전문가이신 당신의 손길과 눈길을 통해서 일일히 디자인하고 건축하신 능력을 보면 그 예배당도 분명히 잘 지어지리라 믿습니다.
-
'시간 되면 읽어보라!'며 '읽고 버리고 가셔도 된다.'며, '능력교회'의 '20년사'와 '30년사'를 한 권씩 주셨는데, 읽다 말고 대여섯 권씩만 더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몇 분들에 읽어보라고 주고 싶어서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저녁에는 각 찬양대가, 새벽과 낮에는 각 기관들이 찬양을 드리는데 입술만 옴직이는(?) 이 하나 없이 모두 아름다운 찬양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놀란 것은 다른 데 있었는데, 예배의 친행이었습니다.
-
첫 시간부터 담임목사님은 강단에 올라오시지도 않고, 부목사님들이 찬양을 인도하고 통성기도 후 내려오면, 순서를 맡은 임원들이 등단하여, 한결같이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몇 째날 무슨 예배를 드리겠다."며 신앙고백을 하고 "어느 집사님 나오셔서 성경 봉독해 주시겠습니다. 성경은 어디 몇 장 몇 절부터 몇 절. 신약 몇 쪽입니다." 하면 다음 순서자는 나와서 딱 성경만 읽고 들어가고, "어느 찬양대의 찬양 후에 강사님 나오셔서 말씀해 주십니다."고 말합니다.
-
분명히 안수 집사, 귄사, 집사들이 남녀 교대로 순서를 밑아 진행하는데, 한 명도 허튼 말 없이 '성경은 어디입니다'고 했는데, 다시 "어디 읽겠습니다." 는 사족없이, 섬뜩할 정도로 완벽한 진행입니다. 기도를 맡은 이들은 기도문을 써서 시간을 재며 연습한듯, 한결같이 간단 명료하게 기도하는지, 그 많은 기도자나 진행을 맡은 사회자, 성경봉독자가 실수하는 사람, 자기 말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
제가 "도대체 성도들을 얼마나 훈련하면 이 정도가 될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를 다녀보지만 강단에 등단하여 순서를 맡으면 자기 나름대로 사족을 달고, 멋을 내는 이들도 한두 명씩 늘 있기 마련이고, 찬양을 하면 거기 한 두 명쯤은 입만 뭄직이고 자리만 채우는 이도 있기 마련인데 모두 최 정예부대만 뽑았는지, 이런 이를 꼭 체크해 보는 저의 못된 습관도 머쓱해지고 말았습니다. 신비함에 정신이 번쩍들며 죄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시간마다 "아, 이렇게 은혜가 넘치는 교회에 부흥회는 뭐하러 할까?"하는 생각이 들어, 한 번은 "할 말이 없어 짐 싸가지고 돌아가야겠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 한바탕 웃고 끝났지만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마침 '목동'이라 바로 길 건너 방송국에 계시는 김정일 전도사님 시간되는지 물어보니 된다고 하여, 함께 점심을 먹은 것은 그나마 은혜를 끼치러와서 감동과 은혜를 받고 가는 저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집회를 마치고 오늘 내려갑니다.
-
사진은 옷 찍었고, 그나마 제가 앞에 앉아 찍은 몇 장과 마지막날 점심과 저녁 식사하는 사진입니다.
-
정성학
목회 낙수 828
-
성자가 되어갑니다.
-
아침에 류지정 선생님께 캘리를 배우러 가는데 본디 비행기 시간이 9시 30분입니다. 몇 곳에 책을 보내고 가면 좋겠는데, 마침 청주 공항의 안개 때문에 연결편 항공기 사정으로 30분 늦는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그래도 아슬아슬 했지만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편칩중국에 도착해서 번호표를 뽑으니 22번인데, 마침 그곳에서 정** 전도사님을 만났습니다. 11번 대기 번호를 갖고 있습니다. 좀 바꾸어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바꾸어 주어 금방 발송을 마쳤습니다.
-
한 시간 여유가 있으니 공항까지 20분을 잡는다 해도 시간이 중분합니다. 주차장, 주차 타워는 이미 차들이 가득하여 4층 노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발권하고 4번 게이트 앞에 앉았습니다. 어제 두 시간 밖에 못 잤기에 몸은 피곤한데 메시지는 계속해서 항공기 지연 소식입니다. 잠을 잘 수도 없고 무슨 업무를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훌쩍 넘기자 게이트 앞 항공사 데스크에서는 항공사 직원을 향한 승객들의 고성이 오가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
데스크 직원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기상청 직원도 아니고 항공기를 몰고 오는 기장도 아닌데 말입니다. 거친 항의가 게속되는 동안 성난 고객의 심장에 기름을 붓듯이 탑승 게이트가 4번에서 7번으로 바뀌었다는 안내가 나옵니다. 사실은 고마운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4번 게이트는 내려가서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7번은 브릿지로 바로 탑승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없이 7번 게이트 앞으로가서 쵸콜릿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왔습니다. 화날 때 먹으면 좋습니다.
-
비행기는 예정보다 2시간 37분 늦은 12시 7분에 제주 공항을 떠났습니다. 그 두 시간 반동안 예전같으면 씩씩거리며 얼굴이 벌개서 죄 없는 지상 인력에게 퍼부었을 터인데, 오늘은 소용도 없는 거친 항의에 마음의 상처만 받았을그 분이 안타까워 보입니다. 보딩을 하면서 성인이 된듯 조용히 말했습니다. "고객의 컴플레인이 심할수록 표정은 밝게!" 직원이 웃습니다. 왜 이렇게 갑자기 성자가 되었을까? 그것은 제 인격이나 성품이 바뀐게 아닙니다.
-
생각해보니 오늘은 시간을 다투는 급한 일도 아니고 거기에 있으나 공항에 있으나 제가 할 일을 하면 되기에, 정해진 시간에 오나 얼마간 늦어지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부드러운 마음으로 마치 정시에 출발하는 항공기를 탄듯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금 돌아가는 편입니다. 5시 50분 비행기가 현재 상태로는 8시 다 되어서 떠날듯 합니다. 끝까지 성자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오늘 저녁 8시에 시작하는 저녁 기도회는 인도가 불가능해 졌습니다.
-
정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