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verture
「밤의 장막의 그늘아래 붉은 피의 선율이 흐르네.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밤의 시간.
하늘에선 붉은 빛의 장미가 흩날리고 대지는
붉은 빛으로 물드네.
어둠이라는 핏빛 선율에 빛이라는 자유는
사라지고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만이 흐를 뿐…….
자신의 감정마저 핏빛 쇠사슬에 속박당한 채
그들의 눈물은 대지를 적시네.」
피를 탐하는 자. 너무나도 아름다운 존재. 그러기에 더욱 슬픈 존재. 영원한 어둠의 시간을 살아가는 밤의 종족.
「뱀파이어―.」
사라져버린 종족. 지금, 어디에도 그들의 존재는 없다. 역사를 기록한 책의 기록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그렇게 역사 어느 한 순간, 붉은 눈동자의 그들은 한 줌의 재처럼 흔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마치 그러한 존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나는 그런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달 아래, 찾아오는 밤의 시간을 살아간 그들 종족에 대하여. 그리고 나는 이야기하고자 한다. 뒤틀린 운명에 얽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지금은 역사의 그늘 아래로 사라진 피에 대한, 피에 관한, 피의 노래를―.
< 피의 노래- 기록하는 자>
One Night. 약속
◈◈◈
대지를 비치던 태양의 빛이 모습을 감추고 다가오는 시간. 밤의 시간. 하늘은 어두운 푸른빛을 머금고 대지는 빛을 잃는다. 하늘은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이며, 대지는 온통 어둠으로 물든다. 그렇게 모든 세상은 심연의 어둠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단 하나의 빛은 어둠을 이기지 못한 채 파묻힌다. 차가운 은빛은 어두운 푸른빛의 장막에 뒤덮인다. 빛은 어둠에게 끌려들어간다. 음침한 고독의 어둠은 빛을 집어 삼킨다. 단 하나의 빛이라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그렇게 영겁의 어둠의 시간은 영원히 반복되고 계속된다. 붉은 눈동자의 그들을 옭아매며, 영원히 심연의 어둠속 고독을 맛보게 하려는 듯이―. 손을 뻗으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 유혹하고는 그것을 무참히 짓밟으며, 잔인하고 잔혹하게―.
끝나지 않는 영원의 밤은 영원히 반복되고 반복된다.
소녀는 어둠속에 있었다. 반복되는 영겁의 어둠속에―. 하지만 소녀는 떨지 않았다. 그저 곧게 의지가 깃든 상냥한 눈으로 어둠을 꿰뚫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 고독의 어둠이 무섭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그저 순수하고 상냥한 올곧은 눈을 하고서 소녀는 어둠 속에서 어둠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하아. 」
이윽고, 소녀는 어둠속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입김을 불며 시린 손을 비볐다. 여전히 어둠을 무섭지 않다는 듯 당당히 올곧은 눈으로 꿰뚫어보며. 소녀는 어둠속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노엘.」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 들려온 목소리에 노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을 옮겼다. 정말 환한 미소를 띠고서. 노엘은 그렇게 소년이 오는 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 오는 줄 알고 걱정했어.」
소년을 향해 힘껏 달려가 노엘은 소년의 언 손을 꼭 붙잡았다. 자신의 체온으로 녹여주려는 것과 같이. 그 행동에 소년은 약간 놀란 듯 신비한 빛의 연한 붉은 빛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그런 행동을 처음 당한 듯.
「안 무서웠어? 이렇게나 밤이 깊은데―.」
자신의 언 손을 녹여주려는 듯 꼭 잡고 있는 노엘을 보며 소년은 걱정스러운 듯 한 눈빛으로 물었다. 하지만 붉은 빛의 눈동자에는 노엘을 걱정하는 마음만이 깃들어있지 않았다. 어딘가 모를 슬픔의 감정이 그의 눈동자엔 감돌고 있었다.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서글픈 듯 한 마음이 깃든 감정이었다.
「아니, 괜찮아. 네가 있잖아. 너는 강하니까 네가 내 곁에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안 무서워.」
소년을 만나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인 듯 연신 노엘은 싱글벙글 웃어보였다. 그 행동에 소년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자연스럽지가 못했다.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억지로 지어보이는 듯 한 그런 미소였다. 마치 노엘이 자신을 가까이 하고 소중한 친구처럼 대하는 것이 두렵다는 듯이. 그는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어 보이는 노엘 앞에서, 거짓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우두커니 그는 서있었다. 당장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이 위태로운, 저 어두운 푸른 장막에 떠있는 달처럼. 그렇게 그는 서있었다.
「있잖아, 사실 난 이 어둠이, 밤이 무서워. 빛이 사라진 이 풍경이 무서워. 아무것도 어둠에 파묻혀서 보이지 않는 게 무서워. 그런데 말이야, 네가 있으면 이 공포가 차분하게 사라져. 」
하늘에 뜬 달을, 어두운 주위 풍경을 바라보며 노엘은 갑작스런 말을 했다. 그 말에 소년은 여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슬픈 듯이 부서질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노엘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를 알지 못했다. 이윽고 노엘은 슬픈 듯이 부서질 것만 같이 서있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더없이 상냥하게 마음을 감싸는 듯 한 따스함이 깃든 순수한 미소를 띠고선. 그 미소에 소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런 따스함과 미소가 옛일을 생각나게 했기에. 지금은 잊으려했고 잊었다 생각한 일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노엘. 이거 받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의 이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듯 소년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펜던트 목걸이였다. 더없이 정적의 아름다움을 띤 고결한 붉은 빛의 장미가 깃든. 펜던트의 장미는 인위적으로 굳혀진 것이었지만 여전히 피어있을 때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육각형 모양 속에서 은으로 만들어진 문양 가운데서 그렇게 붉은 빛은 빛나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노엘은 넋을 잃은 채 소년의 손에 놓인 펜던트를 손대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이렇게 귀한 걸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가까스로 펜던트에서 시선을 떼고 노엘은 소년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엘은 왠지 모르게 소년의 붉은 빛이 슬픔을 띠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응, 이건 네가 갖고 있었으면 좋겠어.」
소년은 노엘의 손에 펜던트를 쥐어주었다. 그러자 노엘은 한동안 뚫어져라 펜던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노엘은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아까와 같은 미소를 띠면서.
「고마워.」
노엘의 말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눈만은 아직은 슬픈 붉은 빛이었다.
「노엘.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언젠가 만나면 알 수 있을 거야. 그 징표가 있는 한. 아니, 그 징표가 없다 해도 난―. 네가 날 잊더라도 나만은 널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너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간직해줘. 꼭―.」
노엘은 그의 마음을 알 지 못했다. 소년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노엘을 향해 웃어보였다. 자신의 마음 속 목소리를 숨긴 채―.
그리고 그 것이 그 둘의 마지막이었다.
◈◈◈
찰랑―.
아침의 따스한 햇살이 비춰오고, 불어오는 바람에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은빛. 열린 창문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반사되어 펜던트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정적과 어우러지는 듯 붉은 장미는 살아있는 듯 생기를 가득 머금은 채 피어있었다.
‘또 인가? 요즘 들어 자주 꿔.’
찰랑거리는 펜던트 목걸이 옆 침대에서 노엘은 피곤한 얼굴로 눈을 떠 일어났다. 심한 피곤에 절여 있는 듯 그녀는 쏟아지는 잠을 억누른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까스로 침대에서 더 누워 자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노엘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을 마친 후, 노엘은 옷장에 서 교복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잘 때 입고 잤던 옷을 벗고 화이트 스탠드칼라의 와이셔츠를 입고 무릎을 넘어서는 긴 블랙의 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블랙 리본을 스탠드칼라를 살짝 제쳐 묶고는 놓여있던 펜던트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펜던트 목걸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노엘은 그 펜던트를 보고는 약간 망설이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서글픈 눈을 하고서.
‘하아. 한심하게 아직도 이걸 버리지도 못하고 간직하고 있다니―. 모든 것을 깨달았으면서, 모든 걸 알아버렸으면서도.’
노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망설임의 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펜던트를 든 손과 주먹을 쥔, 노엘의 양손 또한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결코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을 느끼게 된 데에 대한, 결코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속 외침에 대한 죄책감일 것이다.
‘안 돼! 더 이상은…….’
자신이 품은 감정에 대한 또 다른 마음이 경종을 울렸다. 노엘은 눈을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억지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는 듯이 당장이라도 피가 날 듯 세게 입을 깨물고서는. 혼란한 마음을 정리하려고 그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썼다.
이윽고, 노엘은 펜던트가 놓여있던 탁자 쪽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은색의 작은 단검으로 꽂힌 종이쪽지가 놓여있었다. 은색 단검을 종이에서 빼내 맞은편에 있는 책상 서랍에 넣고는 그녀는 종이쪽지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종이쪽지에는 아무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글자 한 점 없는 새하얀 백지. 그것을 바라보더니 노엘은 다시 발걸음을 책상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맨 위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투명한 물과 같이 액체가 담긴 자그마한 병과 몇 가지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노엘은 망설임 없이 병을 꺼내들었다. 병의 마개를 딴 그녀는 병을 들고 종이쪽지에 병에 담긴 액체를 부었다.
「오늘밤, 연쇄적으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살생한 자가 나타날 것으로 추정된다. 그 자를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속하게 처리하라. 」
“임무…….”
선명하게 나타난 검은 색으로 적힌 내용의 종이쪽지를 보고는 노엘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까의 흔들리던 모습과 달리 그녀는 진지하고 감정을 지워버린 듯 한 무뚝뚝한 표정으로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더 이상은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감정에 대한 차가움이 그녀의 마음속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떠한 일에도, 마음을, 평상심을 잃지 마라. 그것이 사냥하는 자의 도리일지니.”
이윽고,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불에 타 새까만 재만 남은 종잇조각이 있었다. 마치 자신에 대한 마음을 지우려는 듯 종이쪽지의 내용은 재가 되어 남아있지 않았다.
◈◈◈
대지를 비치던 태양이 사라진 밤의 시간. 하늘은 어두운 푸른빛으로 물들고 하늘엔 단 하나의 빛인 달이 떠올라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잠들어 조용한 도시. 도시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적 속에 있었다. 생명체의 생기조차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적 속에.
타앙. 타앙. 타앙.
정적 속 울려 퍼지는 소리. 그것은 총소리. 이윽고 강한 총성이 3발 들려온 후, 도시에는 긴박하게 들려오는 발자국소리에 휩싸였다. 무언가를 긴박하게 쫓는 듯 한 발자국소리. 그리고 그 발자국소리가 잠시 멈춘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노엘이었다.
“저긴가?”
낮의 모습과는 다른 밤의 모습. 사냥감을 사냥하는 자의 눈빛. 감정을 지운 얼굴. 노엘은 은색의 총을 든 채 구두소리를 내며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주위의 소리와 기척을 느끼려하면서. 그녀는 냉정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공격과 방어에 온 신경을 곤두새우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달빛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골목 안은 정말로 캄캄했다. 한 치의 달빛조차 미치지 못한 그야말로 진정한 밤의 모습과도 같은 어둠속이었다.
“피를 내놔.”
들려오는 목소리. 그것은 맹수의 목소리. 오직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피만을 탐하는 맹수의 본능. 노엘은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그 목소리의 공격을 살짝 몸을 비틀어 가볍게 피하고 목소리의 주인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의 피를…….”
목소리의 주인공은 광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노엘을 바라보았다. 찢겨진 옷과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피를 간절히 바라는 듯이. 날카롭게 날이 세워진 손톱으로 사람을 죽여 그 피를 마시려는 듯이. 마음도, 의식도 전혀 사라져 오직 굶주림이란 감정밖에 가지지 않는 모습을 하고서 그는 그 곳에 서있었다.
인간이 아닌, 피에 굶주린 맹수의 형상을 한 그를, 노엘은 그 목소리와 모습에도 한 치의 미동도 없는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사냥하는 자의 눈빛과 같은,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모습으로.
“연쇄살인의 죄로서, 헌터로서 명을 받아 당신을 이곳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사람을 해한 것에 대한 대가. 그것은 무(無)로 돌아가는 것. 순혈 뱀파이어가 아닌, 혼혈 뱀파이어가 문 인간은 반드시 이성을 잃고 피에 굶주린 괴물이 된다. 그렇기에 피에 굶주려 사람들을 해치고 피를 마시는 그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 오직 그들을 무(無)로 되돌리는 길만이 사람들을 구하는 유일한 구원. 피에 굶주려 이성을 상실하고, 마음마저, 그 의지마저 사라진 그들을 구하는 것 또한 무(無)로 되돌리는 것이 그들을 위한 구원.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이성을 잃은 피에 굶주린 생명체인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것이 그들, 뱀파이어 헌터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들을 양성하고 임무를 내리는 것이 헌터협회.
노엘은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를 죽이는 것이 그를 구원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여기며, 그를 무(無)로 되돌리는 길이 헌터의 임무라는 헌터의 마음가짐으로.
노엘 카를리아. 그녀는 낮에는 성 세인트 폴 여학원의 학생, 밤에는 헌터협회에 소속된 뱀파이어 헌터.
“당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그녀는 그를 향해 그를 죽이는 것이 그를 구원하는 길이라 믿으며, 헌터로서 총을 겨누었다. 자신을 향해 겨눠진 총을 그는 으르렁대며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이미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뱀파이어의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예리한 손톱을 새운 채 달려들었다.
노엘은 그의 움직임을 느끼려는 듯 두 눈을 감았다. 그가 노엘의 몸에 거의 닿으려고 하는 찰나, 노엘은 그의 움직임을 읽고 몸을 살짝 비틀고 뒤로 물러났다.
“피……피를…….”
입맛을 다시며 달빛 아래 그의 눈동자는 붉게 빛났다. 그러더니 높게 떠오른 그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노엘은 갑자기 사라진 그의 기척에 놀라 눈을 떴다. 노엘이 눈을 뜬 순간, 그는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향해 손톱을 세운 채 공중에 떠올라있었다.
노엘은 재빠르게 몸을 틀어 옷에서 은색의 헌터전용 단도를 꺼내 그를 향해 정확히 던졌다. 그의 복부와 어깨에 꽂힌 단도는 그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많은 양의 피가 그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는 한손으로 복부를 감싸고 나머지 한손으로 노엘을 향해 손톱을 다시 한 번 휘둘렀다.
“안녕히. 부디 구원받아 좋은 곳으로 가시길.”
노엘은 손톱을 다시 한 번 피하고 총으로 그를 쏘았다. 그리고 노엘이 쏜 총알은 그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그는 피를 토해내면서 천천히 땅으로 쓰러져갔다. 하지만 눈을 감고 숨이 멈추기 전 그의 표정은 평온함으로 가득해있었다. 이윽고 그의 몸은 땅에 채 닿기도 전에 한줌의 모래가 되어 사라져갔다.
“뱀파이어 퇴치 임무 완료.”
노엘은 발사한 총을 휘둘러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간단하게 성호를 긋고는 그의 모래를 등진 채 걸어 나갔다. 그의 처리를 알리는 임무 보고를 하기 위해, 그녀는 임무를 하기위해 가던 중 봐둔 공중전화로 향했다.
어두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 잡은 검은 색의 공중전화에 노엘은 돈을 집어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이윽고,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핀 후 그녀는 전화기 사이로 들리는 수화 음을 들으며 상대방이 받기를 기다렸다.
“노엘 카를리아입니다. 학교의 기숙사를 통해 건네받은 임무를 끝마쳤습니다.”
“수고했다. 그밖에 보고할 사항은?”
수화기 건너편에서 중년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노엘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 밖의 사항을 묻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목표대상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단 한 명의 목격자는 없게 하였으며, 그 또한 잘 처리하였기에 아마 그가 죽고 남은 모래밖에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상처가 없으므로 다음 임무를 속행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다음 임무의 전달사항 또한 같은 방법으로 전달하겠다.”
이번 임무에 대한 완전한 보고를 마친 노엘은 다음 임무에 대한 보고를 들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엘은 멀리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를 눈치 챘다. 서서히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다가오는 무언가. 약하지만 느껴지는 차가운 냉기. 노엘은 재빨리 전화기를 내려놓고 소리가 나지 않게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어깨위로 들었다.
아래로 향한 그녀의 눈길에 비친 것은 투명한 빛의 얼음이었다. 서서히 상대방이 기척을 느끼지 못하도록 다가오는 얼음은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엘의 이마에서 긴장된 듯 한 방울의 땀이 흘렀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노엘이 있는 자리에 얼음이 다가온 순간, 얼음은 날카롭게 쏟아 올랐다. 한발자국 물러나 그를 피한 노엘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자신이 그 사실을 모르게 계속 통화를 했다면 자신은 그 자리에서 얼음에 몸이 꿰뚫려 죽었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노엘은 얼음이 얼어오던 방향으로 총알을 한 발 발사했다.
“뱀파이어헌터치고는 꽤나 쓸 만한 솜씨군. 최대한 눈치 채지 못하도록 주의하면서 공격한 건데.”
달빛이 들지 않던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노엘은 그곳에서 벗어나려 달렸다. 어둠속에서 적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싸우는 것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달빛이 드는 곳에 도착했을 때, 시야에는 한 남자가 자신의 저 멀리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상급 뱀파이어?”
노엘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단정하게 갖춘 옷차림과 송곳니가 아니었으면 인간과도 같은 겉모습. 피에 굶주려 이성과 마음마저 잃은 모습이 아닌, 뚜렷한 이성이 깃든 붉은 눈동자. 그것은 이 남자가 인간 이였다가 혼혈 뱀파이어에게 물려 이성을 상실한 뱀파이어가 아니란 것. 얼음이라는 특수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또한 그가 평범한 인간 이였던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그가 혼혈의, 완전히 뱀파이어의 피를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강한 뱀파이어의 피가 흐르는 혼혈의 상급 뱀파이어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큰일이다. 내 힘으로는 상급 뱀파이어를 상대하지 못해. 그렇다면…….’
어둠속에서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순수한 혈통의 뱀파이어. 순수혈통의 온건파왕족들. 그들과 그들을 따르는 순수혈통의 귀족과 혼혈의 귀족들. 인간에 대한 일은 간섭하지 않고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온건파라 불리는 그들.
하지만 헌터인 인간을, 자신을 공격한 자. 인간을 죽이기를 망설이지 않고 피를 탐하며, 인간을 물어 그들의 하인으로 삼는 자들. 지금 눈앞에 서있는 그자는 강경파 뱀파이어.
‘도망쳐야 해. 웬만해선 강한 헌터도 상급 뱀파이어를 쉽게 이기지 못하니까…….’
노엘은 총을 들고 최대한 속도를 내어 그에게서 도망치려 달렸다. 혼혈귀족의 뱀파이어는 강적이므로 이길 수 없다 판단한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치는 노엘을 보며 즐겁다는 미소를 짓고 있을 뿐.
“현명한 판단이다. 헌터 아가씨.”
조소가 섞인 미소를 지으며 그는 얼음 조각 3개를 형성했다. 그리고 노엘은 향해 날렸다. 노엘은 1개의 얼음은 머리를 숙여 피했다. 2개째의 얼음이 다가왔을 때 노엘은 몸을 옆으로 움직여 피했다. 하지만 정면으로 다가오는 1개의 얼음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총으로 그 얼음을 깨뜨리라 생각하고 총으로 얼음을 조준해 쏘았다.
“2개는 속임수, 1개는 결정타로 숨겨놓는 법이야.”
이윽고, 그의 목소리에 나머지 1개의 얼음은 부서지며 수십 개의 얼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붉은 눈동자에 붉은 핏빛이 비치었다. 쓰러지는 노엘의 몸과 함께.
“크윽.”
팔과 다리에 얼음이 관통한 노엘은 그대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노엘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상처에서 스며드는 붉은 피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강한 통증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 애쓰는 노엘을 향해 그는 점점 발자국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점점 더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붉은 눈동자와 함께. 노엘의 옷에 붉게 물든 피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인간의 피를 마시지 못한 그의 송곳니는 굶주려있었다. 계속되는 헌터의 방해로 자신의 하인인 뱀파이어들이 제거되어, 그들로 인해 인간의 피를 마시던 그들은 굶주려있었던 것이다.
하늘에 뜬 단 하나의 밤을 밝히는 달빛은 그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그를 피에 대한 강한 욕구로 옭아매면서, 그를 향해 조용히 비추며, 그를 향해 달은 조소를 띄웠다.
“피를 줘. 오랫동안 굶주린 내게 피를 주겠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거야. 오랜만에 직접 인간의 목에서 피를 빠는 거라고. 영광으로 생각해.”
조용히 비치는 달빛아래, 붉게 물들어가는 그의 붉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송곳니. 노엘은 공포심에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혼혈 뱀파이어가 자신의 목을 꿰뚫는 것은 의미, 그것은 노엘도 자신이 죽인 뱀파이어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 이성을 잃은 피에 굶주린 존재가 된다는 것에 대한 공포와 뱀파이어에 대한 인간 본래의 공포, 모든 감정이 뒤섞인 채 노엘은 강한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는 것, 움직일 수 없는 것. 그것 또한 크나큰 두려움이었다.
“헉……헉……. 다가오지 마!”
공포심에 얼룩진 노엘의 눈에 비치는 오랜만에 피를 마시게 되어 기쁘다는 미소, 그것은 노엘을 떨게 만들었다. 얼음으로 인해 움직이지도 못하는 노엘은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새 곁에 다가온 그는 그녀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귓가에 속삭였다.
“어때? 고통스럽지? 그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지? 어서 말해. 날 죽여 달라고.”
귓가에 들려오는 피에 굶주린 맹수의 속삭임. 거의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가 내뱉는 숨소리. 그것은 죽음의 속삭임. 아니, 죽음보다 더 큰 자신을 잃는 다는 것에 대한 공포의 속삭임. 속삭임에 노엘의 눈동자가 공포를 머금은 채 크게 확대되었다. 그리고 노엘은 그 지독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흐려져 가는 시야를 느꼈다.
‘살려줘. 난……난…….’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도 노엘은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욕구를 느꼈다. 그렇게 노엘의 눈은 감겨갔다. 아무리 그녀가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사냥꾼, 뱀파이어헌터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나약한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다.
◈◈◈
“노엘.”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 하지만 닿지 않는 목소리. 영겁의 어둠속 시간, 그는 모습을 감춘 채 어두운 골목에 서있었다.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달빛은 조소를 띤 채 붉은 눈을 가진 그들을 옭아매려는 듯 하늘 위에 떠있었다.
「있잖아, 사실 난 이 어둠이, 밤이 무서워. 빛이 사라진 이 풍경이 무서워. 아무것도 어둠에 파묻혀서 보이지 않는 게 무서워. 그런데 말이야, 네가 있으면 이 공포가 차분하게 사라져.」
과거의 추억 속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건물의 벽에 기대었다. 과거의 추억 속 기억. 떠오르는 기억에 그는 다시 눈을 뜨고 붉은 눈동자의 자신을 옭아매는 달을, 밤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두운 푸른 장막의 밤의 하늘을 조소를 띠며 비웃었다.
‘우습군.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시켜 빛난다. 달이 세상을 비추는 빛은 결국엔 자신의 빛이 아닌 다른 존재인 태양의 것. 결국 밤에 유일하게 세상을 비추는 빛은 거짓된, 다른 존재의 빛.’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쥐었다. 밤이라, 그것도 어두운 어둠속에 오래 있지 않아서 어둠에 눈이 익숙해 지지 않아 쉽게 보이지 않을 사물을, 그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을 어둠속에서 정확히 꺼내 손에 쥐었다. 아마도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어둠속이 훨씬 더 잘 보이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의 붉은 눈에 자신의 눈동자의 빛을 닮은 붉은 장미가 비치었다. 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생생하고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붉은 장미, 그리고 순은으로 새겨진 고귀한 문양. 그것은 노엘의 것과 같은 모양의 펜던트였다. 그는 펜던트를 한손으로 꽉 감싸 쥐었다. 소중한 것인 마냥 약간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펜던트를 소중히 감싸 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밤의 바람에 나부꼈다.
“카인님.”
어둠의 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 목소리에 그는, 아니 카인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완전히 지워버린 차가움만이 가득 찬 표정을 하고서. 이윽고 저편에서 카인을 부른 하인은 어느새 카인의 앞에 있었다.
“돌아가라.”
살짝 찡그린 표정을 하고서 냉담하게 카인은 하인을 향해 말하며 주머니에 펜던트를 집어넣었다. 카인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왼손을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고선 예를 갖추고 있던 하인의 표정은 굳어져갔다.
“하지만……. 아시지 않으십니까? ……의 후계자가 되실 수 있는 건 카인님뿐이십니다. ……이 될 수 있는 힘을 가지신 분은 카인님밖에는…….”
“내 대답은 같다. 전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나는 ……의 후계자는 되지 않겠다고. 어서 돌아가…….”
온 몸에 전해지는 전율. 그 전율에 카인은 말을 멈추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무언가가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리려는 듯. 그 진동을 자신이 느끼기를 바라는 것처럼. 카인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펜던트를 꺼내들었다.
펜던트는 뭔가에 크게 뒤흔들리는 것처럼 요란하게 흔들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카인은 진동하는 펜던트를 굳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에 딱 한 번 진동하며 뭔가를 알렸던 자신의 펜던트. 그것이 또다시 진동하고 있었다.
“헉……헉……. 다가오지 마!”
공포에 질린 절규의 목소리. 카인은 들려오는 노엘의 비명에 노엘을 바라보았다. 노엘은 잔뜩 조소를 띄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잔뜩 공포에 질려있었다. 카인의 눈동자는 그를 보더니 진한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분노의 감정. 그 감정이 카인의 마음속을 휘젓고 있었다. 카인은 분노의 감정에 차가운 표정으로 이성을 유지하던 자신을 잃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 한 살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가시면 안 됩니다. 카인님. 아무리 카인님이라도 해도 헌터협회와 그들 사이에 끼어드시면…….”
카인의 강한 살기에 억눌려 카인의 앞에서 예를 갖추고 있던 하인은 몸을 움직이기도 못한 채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하인은 카인이 손을 뻗어 쓴 힘에 밀려 벽에 세게 부딪혔다. 자신이 가려는 걸 막으려는 하인을 기절시킨 카인은 살기 가득한 붉은 눈으로 정신을 잃은 채 다가오는 적을 맞이한 그녀를 향해 걸어 나갔다. 뒤에서 불어온 차가운 밤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붉은 눈의 그들, 뱀파이어를 억압하고 짓밟은 초승달을 등진 채―.
◈◈◈
“뭐야? 재미없게 기절이나 해버리고……. 그럼, 피나 마셔볼까? 헌터아가씨는 꽤나 뱀파이어가 되면 쓸모가 있을 테니까……. 재미있겠어. 헌터협회를 한 번 상대로 장난쳐볼까? 그 당황하는 우스운 꼴을 보고 싶은걸.”
소리를 내며 재미있겠다는 듯 그는 기절한 노엘을 앞에 두고선 그녀의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웃고 있었다. 그는 기절한 노엘을 뚫어져라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노엘의 긴 머리카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있던 노엘의 목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목을 본 그의 눈동자는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노엘의 피를 탐내려는 듯 점점 피의 색과 흡사한 색으로―. 그는 노엘의 목에 손을 대고 잡았다. 마치 피를 마시려는 듯이.
“피를 마시려는 셈인가?”
그의 귀에 카인의 목소리에 들리는 찰나, 그는 갑자기 강한 힘에 뒤로 크게 밀려났다. 그에 그는 상당히 언짢은 듯 날카로운 눈으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네 놈은 뭐지? 왜 방해하는 거냐? 너도 이 헌터아가씨의 피를 마시려는 거냐?”
성가시다는 듯이 그는 얼음을 공중에 형성해 띄워 놨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같은 얼음은 얇지만 예리한 칼날을 뽐내며 건너편에 서있는 카인을 향해 겨눠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인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팔짱을 끼고 살기를 띤 채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더더욱 화가 났는지 카인을 향해 적대적인 감정을 강하게 드러냈다.
“기분 나쁘군. 죽어라.”
냉기를 띤 얇지만 예리한 얼음의 조각들은 카인을 향해 일제히 강한 힘을 내뿜으며 날아갔다. 카인은 마치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그는 광기어린 웃음으로 카인을 큰 소리로 비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카인에게 거의 근접해 다가갔던 얼음들은 카인을 보호하려는 듯 나타난 붉은 색의 쇠사슬에 튕겨나갔다.
“네 녀석!”
그 광경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그는 계속 얼음을 형성해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카인의 앞에 나타난 견고한 쇠사슬 앞에 그의 얼음은 무용지물이 되어 계속 반복되어 튕겨져 나가 바닥에 꽂혀나갔다.
“아무래도 넌 나를 간과한 거 같군. 네가 누군지 정체를 알지도 못한 채 덤비다니…….”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마냥 카인은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카인을 지키려는 듯 스스로 나타난 붉은 빛 쇠사슬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쇠사슬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대로 그에게 날아갔다.
이에 그는 얼음으로 결계를 형성해 대응에 나섰지만 결계는 금방 깨져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그리고 그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붉은 쇠사슬에 온 몸이 구속되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설마……. 네 녀석은 순수혈통의…….”
꽉 조여진 쇠사슬은 그는 끝까지 저항하며 풀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쇠사슬은 더 강하게 조여들어서 그의 손까지 결박했다. 거기다가 몰래 힘을 써서 벗어나려는 것을 쇠사슬은 눈이 달린 것처럼 파악해냈다. 이토록 강함에 그는 안색이 창백해져갔다. 그리고 예전, 누군가가 들려준 얘기를 떠올려냈다.
「우리들은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의 귀족. 우리 또한 상급의 뱀파이어로서 강하다 자부할 수 있겠지만 순수한 뱀파이어의 피만을 타고난 이들, 순수혈통의 그들, 그들 앞에선 어림도 없어. 그들은 괴물이었어.」
순수혈통의 뱀파이어. 그 강함을 겪어본 그의 동료의 말. 하지만 자신이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말. 그 말이 현실로 다가오자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옛날 들었던 그들에 대한 말. 뱀파이어세계의 저 위에서 모든 뱀파이어들을 관할하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에 관한 말. 귀족이라 자부하며 자신보다 더 강한 자는 없을 거라 생각한 자신. 그들의 강함을 믿지 않았던 자신. 하지만 동료가 목소리까지 떨며 한 이야기는 진실이었다.
“이제야 눈치 챘나? 하긴 네 녀석과 나는 적대적인 사이니 잘 모를 만도 하군.”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다가와 쇠사슬을 몸을 조여 주저앉게 만들고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카인의 눈동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런 그를 카인은 전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기분이 나쁜 듯 한 얼굴을 하고서 내려다보았다.
“살려……줘. 이 헌터아가씨의 피는 네가 마시도록 해. 나는 상관없으니…….”
마지막으로 죽고 싶지 않다는 듯 흔들리며 공포에 질린 그의 얼굴을 보고도 카인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카인은 그를 무시하고는 자신의 오른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을 자신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물었다. 송곳니에 물린 엄지손가락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흐르는 피를 순식간에 그를 구속하고 있는 붉은 쇠사슬과 같은 붉은 쇠사슬로 형상화했다. 카인의 오른손을 감싼 쇠사슬은 달빛을 받아 그 예리함과 날카로움을 빛냈다. 카인은 그 날카로운 쇠사슬의 끝을 그에게 겨누었다. ‘차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은 그의 목에 거의 닿을 것만 같이 겨누어졌다.
그리고 카인은 망설임 없이 쇠사슬로 그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쓰러지면서 그는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카인은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붉은 눈을 크게 뜬 채 크나큰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시체는 금세 한줌의 모래로 변하였다. 밤의 찬바람은 모래를 감싸며 멀리로 불어갔다.
차릉―.
불어왔던 밤바람에 카인의 손을 감싸고 있던 쇠사슬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윽고 카인의 손을 감싸고 있는 쇠사슬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잠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카인은 두 눈을 감았다. 그 자리에 홀로 선 카인을 초승달은 하늘에서 조용한 정적 속에서 비추었다. 다시 카인은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크윽.”
그를 죽이면서 자신에게 튀었던 붉은 피. 붉은 피는 카인의 검은 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숨 막힐 듯이 강한 혈향(血香). 그 강한 비릿한 냄새는 너무나도 큰 자극이었다. 카인은 그 강한 향기의 자극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몸이 그 피를 간절히 바라기라도 하듯, 몸의 본능에 카인은 떨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본능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던 카인이었지만, 오늘 자신이 쓴 순수혈통의 힘과 그를 죽이면서 자신에게 튄 피 때문에 카인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어지럼증과 욕구를 억누르고 카인은 일어섰다.
“노엘―.”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채 있는 노엘을 보며 카인은 겨우 일어서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걸어 나갔다. 서로를 부르고 있는 듯 카인의 펜던트와 쓰러진 노엘의 목에 건 펜던트 목걸이는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펜던트를 두 손에 꽉 쥔 채 카인은 노엘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이. 뱀파이어를 사냥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뱀파이어 헌터가 되어버린 그녀. 그렇기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지켜보고 지켜봐왔다. 하지만 그녀가 방금 자신이 해치운 자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기절했던 순간, 지켜왔던 이성이 한순간에 무너지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발걸음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도저히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으……윽…….”
들려오는 숨소리에 카인은 안심하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가 날린 얼음에 찢겨진 옷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심한 상처에 카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는 카인은 자신의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댔다. 그러자 카인의 손의 주변에 붉은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손의 주변이 붉은 빛으로 강하게 감싸게 되었을 때 그 붉은 빛은 노엘의 온 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엘의 거친 숨소리가 차츰 고르고 조용한 숨소리로 변했다. 또한 찢겨진 옷 사이로 보이던 심한 상처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다행이야. 노엘.”
여전히 기절해있는 노엘을 카인은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공포로 물들었던 표정이 어느새 평안해져있는 것을 보고 카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카인의 몸에서 검은 깃털을 가진 날개가 나타나고 둘은 하늘위로 사라졌다.
◈◈◈
크레선트(crescent), 즉 부서질 것만 같이 가는 초승달이 어두운 푸른빛의 하늘에 떠있었다. 하늘엔 살짝 구름이 끼여 있고 초승달의 은은한 달빛이 정적에 하늘 아래를 비추는 그런 조용한 밤.
불조차 켜지 않아 어둠만이 가득찬 방에 열린 창을 통해서 은은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창가에 놓인 침대, 거기엔 노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노엘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카인이 있었다.
깊이 박힌 얼음들로 인해 생긴 깊은 상처를 카인이 힘으로 치료해 그 상처는 나았지만 노엘은 그 충격과 출혈로 인해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기절해있었다. 또한, 그녀가 의식을 차리지 못한 데에는 카인이 자신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편히 쉴 수 있게 힘을 쓴 탓도 있었다. 이윽고 그런 노엘을 카인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카인은 열린 창을 통해 불어오는 차가운 밤의 냉기를 맞으며 그저 아무런 말없이 그녀를 옆에서 바라보았다. 그녀가 흘린 숨 막힐 듯 한 피의 향기를, 자신의 겉옷에 배인 피의 향기를, 밤의 냉기에 날려 보내 뱀파이어의 본능을 억제하려는 듯이. 하지만 그로도 부족한 지, 그는 오랫동안 피를 마시지 않아 닥쳐온 피에 대한 굶주림을, 뱀파이어의 본능을 자신의 머리를 꽉 감싸 쥐어 이성을 차리려 했다.
「있잖아, 카인.」
「카인.」
「카인?」
그리고 그런 그의 뇌리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아득한 추억 속의 목소리. 자신을 향해 미소 짓던 소녀. 유일하게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던 이. 과거의 추억 속 기억은 카인의 뇌리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의해 가까스로 이성을 차렸어도, 카인의 마치 보석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동자에는 슬픈 빛이 서려있었다. 입 또한 미소는 짓고 있었지만 쓸쓸함이 감도는 씁쓸한 미소였다.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소중히 간직해줘서……. 고마워.”
그런 카인의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이, 은빛의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노엘의 목에 걸린 펜던트의 붉은 장미가 우아하고 고풍스럽게 빛났다. 그녀를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던 카인의 눈에도 그 붉은 빛이 보였다. 그 붉은 빛을 보고 카인은 잠시 주춤하더니 진심에서 우러나온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해준 그녀. 자신이 주었던 펜던트를 소중히 언제나 품안에 간직해준 그녀.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고, 그들을 사냥하는 헌터가 되어서도,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모든 사실을 깨달음에도, 변하지 않은 그녀. 하지만 뱀파이어헌터로서의 노엘 카를리아는 자신의 적.
하지만 그런 그녀를 잊을 수는 없었다. 단념할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스스로 그녀와의 인연은 더더욱 확실히 끊을 수 없었다. 진정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더더욱 그녀의 곁을 떠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적인 헌터가 되어버린 그녀를 어둠속에서 그저 바라보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헌터협회를 방관하고 그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신분이면서도, 결국 그녀를 구하고야 말았다. 그녀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면서 차갑게 억지로 유지해오던 이성의 가면이 벗겨졌기에. 그렇게 그동안의 감정이 와르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자신의 감정이 무너지고 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 뱀파이어를 죽였다.
카인은 노엘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결국엔 안타깝게 창백한 노엘의 뺨을 만졌다. 어둠속에서 지켜보고 또 지켜보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을 수조차 없었던 마음을 달래려는 듯이.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런 그리움이 주체하지도 못할 만큼 자신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기에 카인은 그런 그리움의 감정으로 그렇게 노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언제나 나를 향해 미소지어주고 나를 걱정하고 함께 했던 그때처럼. 너만은 변하지 알았으면 좋겠어.”
유일하게 자신이 미소 짓게 되는 존재. 외로운 고독의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향해 미소지어준 존재. 단 하나뿐인 존재. 뱀파이어에 대한 진실을 알아버린 그녀.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모습이, 그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지금은 그것만으로 만족한다고 진심으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코 보답 받지 못한 다해도.
“비록 이렇게 지켜볼 수밖에 없지만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카인은 어루만지던 노엘의 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침대 위 뻗어있는 노엘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언제나 따스하던 그녀의 손이 지금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카인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는 듯이 차가운 노엘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안녕―. 노엘.”
망설임 없이 그는 노엘의 손을 놓았다. 이윽고 카인은 열려있는 창가로 올라서서는 밑으로 뛰어내렸다.
잠시 후, 카인의 속삭임은 얼어붙을 듯 차가운 밤바람에 휩쓸려 그 반동에 닫힌 창문 너머 밤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노엘의 주위엔 검은 빛의 깃털 하나가 하늘거리며 내려왔다.
◈◈◈
겨울의 구름이 약간 낀 짙은 푸른빛의 밤하늘, 밤하늘 위 떠있는 은빛의 초승달, 그리고 푸른 밤 하늘위에서 땅으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의, 밤의 바람.
푸른빛의 밤하늘은 겨울이라는 계절을 상기시키는 쓸쓸함을 품고 있고 초승달은 그 쓸쓸함을 감싸는 듯이 비친다. 겨울이라는 것을 또 한 번 상기시켜주는 밤의 바람은 마른 대지를 냉기로 뒤덮는다.
그렇게 차가운 겨울의 냉기를 느낄 수 있는 밤의 바람이 부는 푸른빛의 밤하늘에 떠있는 초승달의 이미지가 인상적인 조용한 밤.
공포에 휩싸여 정신을 놓아버린 후, 기절한 노엘은 푸른빛의 밤하늘에 있었다. 검은 칠흑과 같은 날개의 누군가에 의해.
‘이것은 꿈?’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불어오는 차가운 냉기의 바람이 뺨을 쓰다듬고, 흔들흔들 몸이 약간 기분 좋게 흔들렸다.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듯 한 애매한 의식에 그녀는 그냥 지금 이 상황을 꿈이라 치부하기로 했다. 현실보다는 꿈 쪽에 더 가까웠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꿈이라 느끼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염려하는 듯, 애쓰는 듯 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소중히 대하는 듯 자신의 팔을 붙잡아 끌어안은 두 손의 손길은 너무나도 조심스러웠다. 마치 조금이라도 거칠게 붙잡으면 자신이 부서져 사라질 것이라 여기는 듯, 그 손길은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만 같았다.
‘알려줘요. 당신은 누구죠? 왜 나를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거죠?’
자신을 붙잡아 안아 올려 이동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는 듯 자신의 팔을 감싼 두 손의 손길은 결코 자신의 팔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쪽팔로만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 어려워서였을까? 아니, 그래서 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팔을 감싼 손길은 어딘가 확실히 선을 긋고 거리를 두려는 듯 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다고 그녀는 확실히 느꼈다.
서리에 언 것처럼 더없이 차가운, 마치 겨울의 냉기 그 자체인 듯 차가운 손. 하지만 자신을 생각하는 소중한 마음이 깃든 듯 자신을 대하는 각별하면서 조심스런, 부드러운 손길. 그 손길에서 왠지 모를 차가움 속에 감춰진 따스함을 보이는 것 같았다.
‘당신은 정말로 누구죠?’
그녀의 가슴 깊이 의문이 스며들었다. 자신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두려워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따스함을 가진 이가 누군지. 서리에 언 것처럼 차가운 손의 주인공이 누군지에 대한 의문이―.
◈◈◈
댕댕―.
겨울 특유의 찬바람, 하지만 낮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태양이 대지를 비추고 햇빛이 정원을 감싸는 오후.
성 세인트 폴 여학원의 한쪽에 자리 잡은 고풍스럽고 커다란 시계탑이 2시 정각을 알리는 소리를 냈다.
겨울의 시린 바람 탓에 텅 빈 학교의 야외에서 들려온 시계 소리는 청아하고 맑은 특유의 소리를 뽐내며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지체 높은 사람들이 다니는 다른 학교의 화려한 정원과는 달리, 단정하고 소박하면서도, 화려하지 않도록 꾸민 특유의 멋으로 유명한 성 세인트 폴 여학원의 정원에도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정원은 겨울인 탓에 잔디는 초록빛을 잃고 색이 바래있었고, 겨울인지라 꽃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 무척이나 쓸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런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추운 날씨 때문인지 정원에는 인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인적이 드문 정원 가운데 구석 벤치, 짙은 색의 브라운 긴 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면서 노엘은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치마가 차가운 겨울바람이 쓰다듬는 듯 하늘 하늘거리며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그렇게 공허한 표정으로 색이 바란 잔디만이 자리 잡은, 아무런 볼거리가 없는 광경을 자신의 눈동자에 담으며 벤치에 앉아있었다.
“하아.”
시리도록 찬 공기가 살아 숨 쉬는 폐에 가득 차올랐다가 내쉬는 한숨에 찬 한기를 남긴 채 빠져나갔다. 노엘은 시린 한기에 조금은 멍했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풍경만을 바라보며 멍했던 정신을 차린 그녀의 뇌리에는 어젯밤에 관한 생각만이 떠올랐다.
“그건 꿈이었을까?”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공포와 두려움으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다가오는 뱀파이어의 송곳니를 보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뚜렷한 기억의 끝은 그것이 끝이었다. 하지만 흐릿한, 꿈과 현실의 경계 사이의 애매한 기억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노엘은 그것이 꿈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달빛이 비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에 가려진 채 보이지 않는 누군가. 바람에 흩날리는 칠흑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느껴지는 숨 막힐 듯 한 피의 향기.
강한 피의 향기가 옷에서 느껴졌기에, 그랬기에 처음에는 한때 공포를 가졌었다. 하지만 서리가 얼 것만 같이 차가운, 겨울 그 자체인 듯한 손에 깃든 어딘가 모를 따스함과 상냥함이 말해주었다. 이윽고 느낀 자신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각별한 손길과 거리를 두려는 어딘가 모를 두려움이 말해주었다.
해치지 않는다고―. 두려워할 것 없다고―.
「…….」
그리고―.
들리지 않는 속삭임. 그 속삭임 후, 자신과의 거리를 두며 다가왔던 그 손길이 망설이듯이 뺨에 닿았을 때, 손길에서 느껴지는 그리움의 감정이 말해주었다.
그 속삭임 후, 자신과의 거리를 두며 다가왔던 그 손길이 망설이듯이 뺨에 닿았을 때, 그제야 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누군지 이제야 알겠어. 그건 꿈이 아니었어.”
아침 햇살이 비치고 눈을 떴을 때, 놓여 있던 검은 코트. 붉은 피의 얼룩이 묻은 코트. 그리고 붉은 피의 얼룩 사이로 눈에 거의 띠지 않게 얼어있던 얼음.
그것은 자신을 해치려한 상급 뱀파이어를 쓰러뜨린 이라는 증표.
“너구나. 붉은 장미 펜던트의 이름 모를 뱀파이어.”
무척이나 차가운 손에 숨겨진 따스함의 감정을 가진 이. 어젯밤의 기억의 조각이 가르쳐준 이.
어릴 적 추억 속 유희. 검은 머리카락의, 이름을 밝히길 망설였기에 이름을 묻지 않은 채 함께한 이. 뱀파이어 헌터가 되고, 그제야 뱀파이어임을 깨닫고 고민하며 펜던트를 버리려했지만 버릴 수 없었기에 소중히 간직했던 붉은 장미 펜던트의 본래 주인.
‘하지만 나는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자. 뱀파이어 헌터.’
노엘은 목에 건 붉은 장미 펜던트를 손에 잡고 잠시 내려다보고는 펜던트를 눈에 띄지 않게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 있던 총을 만지작거리고는 오늘의 임무가 적힌 종이를 바라보았다.
「어제와 같은 장소 근방, 어제 그 자의 동료 무리가 나타날 것으로 추정. 다른 자들과 공동으로 무리를 소탕하라.」
노엘은 세게 입술을 깨물고는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구기었다.
‘어제와 같은 과오는 저지르지 않겠어.’
그 또한 자신의 적인 뱀파이어이기에 그의 도움을 절대 두 번 다시 받지 않으리라 결심하고는 노엘은 임무를 위해 마음을 굳혔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임무에 대한, 뱀파이어 헌터의 마음뿐이었다.
이름 모를 뱀파이어인 그도, 헌터로서의 그녀의 맘에는 없었다.
◈◈◈
어제와 비슷한 부서질 것만 같은 짙은 푸른빛 하늘의 초승달, 그리고 대지를 비추는 은빛의 달빛. 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잠시 변덕인양 하늘에 내렸던 눈으로 안개가 낀 으스름달밤.
보름달보다는 한참 약하지만 대지를 은은하게 비추던 초승달의 달빛은 어두운 어둠의 안개에 가려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안 그래도 조용한 정적의 도시는 더더욱 조용하고 어두운 밤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얼어붙은 유령 도시처럼―.
그런 도시를 노엘은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안개가 낀 터라 더더욱 적의 공격을 눈치 채기 힘들었기에 그녀는 총을 들고는 주의를 냉정한 표정으로 살피고 있었다.
‘꽤나 악재군. 이런 날은 꽤나 임무수행도 힘들 텐데……. 무리로 나타난다니…….’
그렇게 짙지는 않고 잘 살피면 주위를 알 수 있는 옅은 안개였지만, 임무수행에는 큰 지장이 있는 오늘 밤의 날씨. 그렇기에 노엘은 옅은 안개 사이로 살짝 보이는 광경들을 바라보고 이곳이 어딘지 파악하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확실히 헌터 쪽에게는 불리한 날씨였다. 밤의 일족인 그들, 뱀파이어는 어둠에 익숙한 눈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후각도 가지고 있었다. 헌터 쪽에선 그들을 잘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들은 손쉽게 헌터 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면 적은 이쪽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이쪽은 적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에취.”
좀 전의 냉정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재채기를 하고는 노엘은 손에 들고 있던 총을 총알을 발사할 수 있도록 장전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기에 그녀는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적중이라도 한 지 옅은 안개 속에서 형체와 함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침을 삼키며 노엘은 총의 방아쇠에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올려놓고, 다른 왼손으로는 코트에 손을 넣고 헌터용 단도를 쥐었다.
“당신은 누구죠?”
“…….”
돌아올 반응에 대비를 하고는 노엘은 다가오는 그림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아무런 반응 없이 앞으로 전진해왔다. 그에 노엘은 적이라 생각하기로 하고는 헌터용 단도를 정확히 던졌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단도는 맞지 못한 듯, 챙―하며 쇠붙이에 튕겨져 나갔다. 그에 노엘은 실망하지 않고 공격을 예상하고는 안개 속으로 물러나 동향을 살폈다.
이윽고 그 예상이 적중한 듯 적의 공격이 가해졌다. 뭔가가 날아오는 듯 한 소리에 노엘은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땅에 꽂힌 무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날렸던 헌터용 단도였다.
‘날 과소평가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먼저 공격해주지.’
자신이 날린 단도를 그대로 던지는 적의 태도에 노엘은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이윽고 적이 먼저 공격해오는 것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먼저 공격을 감행하거나 하는 선택지 중 노엘은 후자의 선택지를 골랐다.
안개 속을 최대한 속도를 내며 달려간 그녀는 자신을 향해 휘두르는 주먹을 피하고는 방아쇠에 걸쳐져있던 오른손을 움직여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명중한 듯 보였다. 그녀를 공격한 적이 잠시 동안이지만 틈을 보이며 주춤거렸다.
‘끝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고 노엘은 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생사를 알기위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 곳에 모래가 흩날리고 아무것도 없을 거라 예상하며.
“이건 뭐……?”
하지만 보기 좋게 예상은 빗나갔다. 적이 있던 장소엔 빗나가 바닥이 깊이 파인, 총알이 맞은 것으로 추정되는 두 곳만이 있었다. 그 광경에 노엘은 어이가 벙벙해 멍하니 그 곳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윽!”
그리고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뒤에서 갑작스런 기척과 함께 적은 나타났다. 팔꿈치로 등을 세게 내리찍는 바람에 그녀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거기다가 그러면서 총은 저 멀리로 튕겨져 나갔다.
“죽여라. 뱀파이어.”
자신의 뒤에 서 목에 검을 겨눈 적에게 노엘은 굽히지 않는 태도로 소리 질렀다. 그리고 그녀는 곧 자신의 목을 검으로 벨 적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까처럼 또 한 번 예상은 빗나갔다. 적은 자신의 목에서 검을 치우고는 저 멀리 튕겨져 간 총을 건넸다.
“실전이라면 넌 죽었을 거다. 노엘 카를리아.”
익숙한 굵은 남자의 목소리. 목소리와 함께 그 일대를 뒤덮었던 안개가 걷혔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고는 노엘의 눈앞에 언제나 익숙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난치신 겁니까?”
남자의 모습에 노엘은 잔뜩 화난 얼굴로 따져댔다. 안개가 낀 것도 모든 것이 그가 꾸민 것이었기에. 하지만 노엘의 그런 반응에도 그는 그런 말이 안 들린다는 듯이 귀를 후벼 팠다.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노엘은 그런 태도로 일관하는 그로 인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전에 헌터 훈련을 받을 때도 이 사람은 그런 태도였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달랬다.
남자의 이름은 제 2급 헌터인 클라드. 노엘이 소속되어있는 헌터협회의, 노엘에게 임무를 내리고 수행명령을 내리며 보고를 받는 자였다.
하지만 친숙한 그의 등장에 노엘은 마음 깊이 닥쳐왔었던 불안감이 저 멀리로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그만큼 누군가 친숙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안심이 된다고 노엘은 진심으로 느꼈다.
“뭐하고 있는 거지? 다른 헌터들이 움직일 거다. 빨리 기척을 숨기고 그 방심한 마음을 다 잡아라.”
공격을 받은 그 자리에서 우물쭈물 서있는 노엘을 닦달하며 그는 아까와는 다른, 헌터의 냉정한 표정으로 노엘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정신이 든 노엘은 총을 들고 그를 따라나섰다.
‘2급 헌터까지 나선 임무라면 큰 임무이겠어.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
아까의 냉정함을 되찾고 기척을 숨긴 채 그를 따라나선 노엘은 큰 임무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그의 실력을 오랜만에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앞에서 걷고 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
「뭐하고 있는 거지? 다른 헌터들이 움직일 거다. 빨리 기척을 숨기고 그 방심한 마음을 다 잡아라.」
좀 전의 헌터로서의 강인한 눈동자와 말투. 그것을 떠올리며 노엘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클라드의 등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약간은 장난을 좋아하지만 헌터로서 뛰어난 클라드. 순간적인 반응속도도, 적의 허를 찌르는 공격도, 모두 자신보다 위. 그렇게 그의 능력을 부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노엘은 그를 향해 약간은 부러운 듯한 표정을 했다.
‘나도 언젠가 헌터로서 강해지면……. 마음마저 강인해질 수 있을까? 전혀 망설이지 않고, 설사 추억속의 그 뱀파이어가 나타난 다해도 망설이지 않고 처리할 수 있을까?’
노엘의 얼굴에 약간의 그림자에 드리워졌다. 어릴 적 자신을 보고 약간은 슬퍼보이던 표정을 짓던, 누군가. 그 모습이 떠올라 그녀는 더더욱 어두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노엘은 무의식적으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어이, 이번 임무가 중요한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뱀파이어를 사냥한다는 거, 뭐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닌 건 알고 있다. 네가 이러고 있는 것도 그거지?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그들을 어느 누군가는 처리해야한다. 그게 헌터가 해야 할 일이다. 더 이상 어리광은 용납 못한다. 이번이 끝이다. 잠자코 빨리 따라와라.”
무뚝뚝하게 그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손에 든 총을 꽉 쥐었다. 그리고 우두커니 있는 노엘을 향해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를 꺼냈다. 핵심을 꺼낸 그의 말에 노엘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는 그는 바로 뒤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 행동에 노엘은 약간은 정신을 차린 듯 빠른 발걸음으로 최대한 그를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왜 하필 나냐? 젠장. 이번만큼은 정말 이해를 못하겠군. 왜 그런 명령이 떨어졌는지……. 간부 녀석들이 평소에도 꿍꿍이속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슨 심중인 거야. 이런 명령이나 내리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일개 2급 헌터니까……. 그 명령을 따르는 게 옳은 거겠지.’
속으로 뭔가를 떠올리며 그는 심정이 복잡한 듯 짜증 섞인 표정을 했다. 헌터협회가 그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렸는데 그는 그것에 대해 불만인 듯싶었다. 아니,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더 옳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번에 협회가 그에게 내린 명령은 말이 안 되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헌터답게 그는 일절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뒤에 있는 노엘이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겉으로 그의 변화는 아주 미미했다.
‘으음. 이번 임무에 2급 헌터까지 투입되는 걸 보니 꽤나 센 뱀파이어가 나오거나 상당한 수가 나올 모양인가?’
반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의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노엘은 이번 임무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혹시 자신이 방해가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과 임무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조용한 노엘은 클라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클라드는 노엘을, 마음을 굳힌 듯이 냉정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노엘이 고개를 숙이며 걷다가 정면을 쳐다보려고 고개를 든 순간, 바로 전과 같이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
그리고 그 둘은 아까전과 같이 침묵에 쌓인 채로 기척을 최대한 감춘 채로 걸어 나갔다.
“도착이다.”
이윽고, 임무장소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던 노엘은, 도착이라는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와 같이 가로등만이 자리 잡은 어두운 풍경, 그리고 어제와 같은 도시사람들이 숙면을 취하는 밤이라는 시간 탓에, 낮과 다르게 서로 거리를 거닐면서 얘기를 없어 조용한 정적의 분위기. 어제, 이성을 잃은 뱀파이어가 나타났고 그를 처리한 장소.
‘이런……. 또 떠올라. 나를 바라보던 그 살기어린 눈동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강한 살기.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공포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거 같아.’
붉은 두 눈동자. 진심으로 죽이겠다는 살기어린 두 눈동자. 그리고 그의 입가에 떠올라있던 피를 마실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기쁨의 비웃음.
어제의 그 일이 생각나 노엘은 손에 꽉 쥐고 있는 총을 더더욱 꽉 쥐었다. 그렇게 마치 그 일이 다시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함에 그녀의 손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이.”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흠칫 놀라며 노엘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엔 감정을 지운 채 평소 사냥을 할 때의 헌터의 표정을 한 클라드가 있었다. 그는 동요하고 있는 노엘을 보고 저쪽을 보라는 듯이 고개를 움직였다.
“아.”
거기엔 사냥준비를 끝마친 헌터들이 서있었다. 이번 임무가 중요한 임무인 만큼 그들의 수는 20여명 가량은 되어보였다. 하지만 노엘은 그들에게서 왠지 모를 이상함을 느꼈다.
무겁게 정적 속에 가라앉은 분위기. 맞은편에 서있는 낯익은 얼굴들의 사람들. 하지만 모든 감정을 지운 것 마냥 아무런 표정 없이 무기를 든 사람들. 이윽고 결정적으로 전혀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뱀파이어.
“뱀파이어는 어디 있는 거죠?”
뱀파이어 한 명 없는 그곳에서 무기를 든 헌터들을 향해 노엘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총부리가 노엘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을 향해 그토록 가까웠던 이들이 무기를 겨누는 지, 왜 이런 행동을 취하는지.
“왜 이러시는 거예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따지듯 그녀는, 노엘 카를리아는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거기다가 그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곁에 있던 클라드라는 남자도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맞은편으로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어이없는 상황에 더더욱 노엘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머릿속으로는 이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지만 그녀 자신의 마음이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계산대로라면 그, 클라드는 이곳으로 자신을 유인하기위해 나타났고 그 임무에 대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선 내가 설명해주지.”
그 상황을 설명하려는 듯 노엘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그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노엘을 향해 총을 겨누던 헌터들이 물러났다.
“아버지?”
자신의 코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노엘은 외쳤다.
크리스 카를리아. 자신의 아버지이자 헌터협회의 간부인 사람. 손에 명령장을 든 그를 보고 그녀는 헌터들의 행동에 대해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먼저 꺼내는 이야기에 노엘의 말문은 막혀버렸다.
“헌터협회 제 3급 헌터, 노엘 카를리아. 지난밤 있었던 임무에서 뱀파이어와 내통한 혐의를 들어 최고징벌인 사형에 처한다.”
명령장을 펼치고 그것을 눈으로 읽어 내려가며 들려오는 내용.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한 설명. 그것은 노엘을 더더욱 절망으로 이끌었다.
“어제 이 시각, 나타난 상급 뱀파이어를 어떤 뱀파이어가 처리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 근방 상급 뱀파이어의 기척을 눈치 채고 간 헌터1명이 보고했다. 그것만이라면 협회는 아무런 문제없이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그 뱀파이어는 너를 데리고 갔고 지금 너는 아무런 부상 없이 집에 도착했다. 그 뱀파이어와 내통해 우리 협회의 정보를 빼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래서 간부 회의에서 협의 끝에 결정했다. 정보를 빼돌린 것으로 보이는 너를 처벌하기로.”
자신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를 노엘은 믿기지 않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믿어달라는 눈을 하고 있는 노엘을 크리스 카를리아는 믿지 않았다.
“어……어째서……. 날 믿어주지 않는 거예요? 아버지.”
자신을 믿지 않는 아버지에게 노엘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하지만 그 호소를 무참히 무너뜨리기라도 하듯이 크리스 카를리아는 뒤에 서있는 헌터들을 향해 손짓했다. 자신의 딸, 노엘 카를리아를 향해 총을 겨누라고.
◈◈◈
짙은 푸른빛, 그리고 은빛―.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찾아온 밤.
조소하는 초승달 아래, 인간들이 편의를 위해 빼곡히 세운 건물들의 광경 속, 한 건물 위.
어둠속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도시, 그 광경을 붉은 눈동자에 담으며 그는, 아니 카인은 건물 끝자락에 서있었다. 보통 다른 이라면 보이지 않았을 광경이었지만, 카인은 그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다는 것을 떠나 보였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광경이 질렸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곳에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그 눈길을 위로 향했다. 그러자 그의 붉은 눈동자에 짙은 푸른빛의 하늘에 뜬 은빛의, 부서질 듯이 가는 초승달이 비치었다.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달. 그저 그 곳에 있기만 할 뿐인 달.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주지도, 그 아픔을 함께 해주지도 못하는 달.
그러나 상처 입은 이의 마음을 어떻게 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밤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신들을 끌어들이는 달.
그리고 생각나게 하고, 괴롭게 하고, 아픔을, 상처를 주는 달.
“정말 신물이 나는 광경이군. 하지만 여기서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
그렇게 카인은 짜증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늘에 뜬 달을 향해 조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의 붉은 눈동자는 더없이 슬펐다. 마치 아무도 없는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자처럼.
‘그리고 지난번에야 깨달았지. 나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이대로라도 상처를 줄 거라는 것도.’
지난번으로 인해 더욱 분명해진 선.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자와 뱀파이어, 결코 함께 할 수 있는 이. 어쩔 수 없는 사실에 저항하고 저항했지만 바뀌지 않는 사실.
카인은 그것에 대해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이제 본래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아. 하아.”
하지만 이윽고 갑자기, 카인은 가슴을 조여 오는 통증에 거친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거기다가 서있는 것도 한계였는지 카인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눈동자는 점점 선명한 붉은 빛을 띠어가고 있었다.
“카인님. 괜찮으십니까?”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그의 하인은 그에게 달려갔다. 그가 보기에도 한겨울에 심하게 땀을 흘리고 거친 숨을 내쉬는 카인의 상태는 이상했기에.
카인을 부축하고는 그의 곁에서 그를 바라본 하인은 선명한 붉은 빛을 띠어가는 카인의 눈동자를 보고는 왜 카인이 그런 지를 눈치 챘다. 그 것은 바로 굶주림에 의한 증상이었다. 오랫동안 본능을 억누르고 피를 마시지 않은 뱀파이어가 보이는 증상, 그 것을 지금 카인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카인은 인간의 피가 섞이지 않는 순수한 혈통이었기에, 더더욱 피를 더 많이 필요로 하는 그들의 특성으로 더 심한 고통을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눈치 챈 하인은 품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는 카인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단도로 손을 그었다.
“제 피라도 괜찮으시다면…….”
붉은 피가 흐르는 손을 카인에게 갖다 대며 하인은 카인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카인은 숨 막힐 듯 한 피의 향기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응대로 그는 하인의 손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은색 달빛에 그의 흰 송곳니가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윽.”
하지만 송곳니가 거의 닿기 직전, 카인은 하인의 피를 마시지 않고 하인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리고 카인은 숨을 내쉬며 얼굴을 숙였다. 얼굴을 숙인 채 한동안 거친 숨을 내쉬던 그는 한손을 뻗었다.
이윽고 은색의 달빛이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빛나게 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송곳니가 그의 입술 사이로 드러낸 것도 잠시, 그의 송곳니가 뻗은 손의 손바닥에 박혔다.
“하아. 하아.”
자신의 입가를 타고 내려오는 붉은 액체와 함께 그는 입안에서 감도는 비릿한 붉은 액체가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가 몸 안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피를 마셔댔다. 마침내 점점 선명하게 물들었던 붉은 눈동자가 본래의 빛으로 돌아올 쯤에야 그는 피를 마시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는 입가에 묻은 붉은 핏자국을 손으로 훔쳤다.
“왜 그렇게 하시면서 까지 제 피를 드시지 않으신 겁니까?”
그런 카인의 행동을 바라보며 그는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다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카인은 그 반응이 우스운지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쿡쿡대며 그를 비웃었다.
“네가 그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이군. 넌 분명히 아버지의 명을 받아서 온 것이라고 했었지? 날 데려가기 위해서.”
“네, 그렇습니다.”
갑작스레 카인이 꺼낸 얘기에 그는 긴장하는 듯 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인만은 태연함과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때도 되었겠지. 가겠다. 이곳에서의 용무도 끝난 듯싶으니까.”
지난번과는 다른 카인의 태도에 적지 않게 하인은 당황했지만, 이윽고 그는 카인의 명을 따른다는 것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한 카인은 아무런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의 행동에 하인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것을 거두고 그를 따라나섰다.
“…….”
뭐라고 한 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 나지막한 혼잣말.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하인은 애써 그것을 무시한 채 카인의 뒤를 따라 나서려했다. 하지만 혼잣말 이후, 문득 멈춰버린 카인의 발걸음에 앞을 보지 않고 윗사람에 대한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하마터면 카인과 충돌할 뻔했다. 그러나 뱀파이어 특유의 신체능력으로 하인인 그는 겨우 충돌할 뻔 한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의 행동에 하인은 무슨 영문인지 싶어 카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잠깐. 용무가 생겼다.”
무언가를 쥔 그의 손 사이로 보이는 무언가. 그 무언가로 눈길을 향하던 하인은 그 위치로 보아 그것이 그의 허리장식으로 있는 붉은 장미 펜던트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인인 그는 눈치 챘다. 그 펜던트가 심하게 요동치며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임을 하인은 몰랐기에 의아함을 품었다. 이윽고 그가 그것을 물어보려고 하는 찰나, 그는 곁에 있던 카인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카인님?”
그는 재빨리 사라진 카인은 찾기 위해 뒤돌아섰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는 카인의 모습이었다. 그에 그는 재빨리 뛰어가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인인, 그가 본 것은 카인이 검은 날개로 도시의 광경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정확히 보지 못한 채, 그는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거센 바람이 잠잠해진 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그가 본 것은 춤추는 듯이 하늘거리며 흩날리고 있는 검은 빛의 깃털뿐이었다.
◈◈◈
“믿을 수 없어요. 왜 이런 명령이…….”
지금의 상황이 꿈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듯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노엘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손으로 훔치고는 눈물을 그친 채 눈앞에 서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크리스 카를리아는 노엘의 눈물에도 불구하고 총을 거두라는 명령을 끝까지 거두지 않았다. 거기다가 선을 확실히 그으려는 듯 그는 품안에서 주위에 노엘을 향해 총을 겨눈 2급 헌터들과는 다른 모양의 총을 꺼내 들었다.
“명령이다. 명령장에 적힌 바대로 행해라.”
주저앉은 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은 상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다가 마주친 어둠 속 가라앉은 검은 빛의 눈동자.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헌터협회의 간부로서의 차가움만이 가득한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자신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노엘은 마치 자신의 심장을 차가운 칼날이 관통하는 것만 같은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노엘의 마음속 희망을 짓밟기라도 하듯이 그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
그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노엘을 바라보던 것과 달리, 계속 흔들리던 노엘의 눈동자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흔들림이 사라졌다. 이윽고 더더욱 큰마음을 먹으려는 듯이 노엘은 눈을 한동안 감았다가 떴다. 그 행동 후, 노엘은 쓸쓸해 보이면서도 슬픈 표정을 하고서는 침을 삼키고는 닫혀있던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뭐지?”
여전한 태도로 대꾸하는 아버지를 향해 노엘은 갑자기 닥쳐온 마지막을 준비라도 하려는 듯이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믿으시는 건가요?”
“아니.”
거침없이 돌아온 대답에 노엘은 기쁘다는 듯이 진심으로 웃어보였다. 그러나 뒤에 돌아온 대답은 무척이나 잔인했다.
“믿고 아니고를 떠나서 신뢰한다. 나는 헌터협회의 간부로서 올바른 결정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확실한 정보였으니까…….”
그 말에 진심어린, 노엘의 미소어린 표정이 다시 절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돌아왔다. 굳은 표정을 하고서는 그녀는 그 자리에 아무런 생각이 담기지 않은 눈동자로 땅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전 배신하지 않았어요. 그것만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고개를 숙이고는 노엘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아버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지 않은 듯 눈을 굳게 감았다.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라도 품고 있는 삶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삶이 있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도 때로는 후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삶이 있으면 이 세상의 한 조각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무엇을 하던지, 무엇을 원하던 지 그것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자유다. 살아있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에 할 수 없는 것은 무한히도 많다.
생물이라면 가지고 있을 살고 있다는 욕구, 그 본능으로 인해 노엘은 총알을 피하고 이곳을 벗어나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극한에서 삶의 욕구를 억누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총알 하나를 피한 다해도 아버지의 뒤에 있는 헌터들이 총을 쏠 거야. 그렇게 추한 모습으로 죽고 싶지는 않아. 하나뿐인 목숨이니까 키워주신 아버지에게 해는 끼치지 않고 죽고 싶어. 한 순간이야. 한 순간이면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갈 수 있어.’
자신도 모르게 또 다시 타고 흐르는 눈물을 좀 전처럼 그녀는 손으로 훔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총알이 자신의 몸을 정확히 관통하는 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철컥―.
소리가 들려왔다. 생의 끝에 있는 가운데 들려오는 소리. 노엘은 그 소리가 들리고 눈을 감은 채 들릴 다음 소리를 기다렸다. 자신의 몸을 꿰뚫는 고통을 각오해야 했기에 추하게 비명을 지르며 죽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올 소리는 좀처럼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아? 왜 총소리가 안 들려오는 거지? 무슨 일이…….’
차릉―. 차르릉―.
들려오는 다른 무언가의 소리. 쇠붙이가 가볍게 부딪혀 나는 듯 한 소리. 그 소리가 노엘의 귓가에 들려오고 잠시 후, 두려움에 눈을 뜨지 않은 노엘에게 일제히 철컥하며 총이 겨누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럴 수가. 오늘 뱀파이어가 나타난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살기로 봐선 강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간부님! 어떻게…….”
웅성거림과 당혹감과 놀란 목소리. 최대한 자제했지만 공포 섞인 목소리. 정적에 쌓여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들려온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래, 이 느낌은 아까의 나와 같은 기분이야. 삶에 대한 욕구와 공포어린 감정. 누가 나타났기에…….’
“모두 당황하지마라! 뱀파이어 어째서 방해하는 거냐? 그럼, 네가 노엘 카를리아와 내통해서 협회의 정보를 빼돌린 자냐?”
앞에서 느껴지는 강한 살기, 그리고 경계하는 듯 한 움직임.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살기에 노엘은 몸을 움츠린 채 떨면서 결국 눈을 뜨고 말았다.
“정보를 빼돌렸다라……. 꽤나 지나친 생각이군. 그런 어리석은 생각으로 자신의 딸마저 죽이려하고……. 헌터협회에는 정말 그런 인간들밖에 없는 건가?”
차가운 목소리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 말에서 느껴지는 분노의 감정. 앞을 가로막은 채 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듯 서있는 존재가 눈을 뜨자 보였다.
차갑고 모든 생물들을 얼려버리는 겨울. 마치 겨울과 그 자체와 같은 차가운 느낌의 남자. 주저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노엘은 그의 뒷모습을 아래서부터 위로 훑어보았다.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색의 롱 코트. 옷 사이로 드러난 창백하리만치 투명한 흰 피부의, 피처럼 붉은 빛깔을 띠고 있는 쇠사슬이 얽혀서 감싸고 있는 두 손.
이윽고 노엘이 완전히 일어서자 그녀의 눈높이 약간 위에 바람에 일렁이는 검은 빛이 보였다. 칠흑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 그 광경이 눈동자에 비치고 그녀는 자신의 코트 안에 있던 붉은 장미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는 펜던트를 그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녀는 더없이 소중한 것 마냥 펜던트를 어루만졌다.
“네가 어째서?”
따지는 듯이 그리움의 감정을 지운 채 노엘은 펜던트를 손에 꽉 쥔 채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등을 보인 채 앞을 바라보고 있던 그, 아니 카인이 뒤돌아섰다.
“죽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가 사라지고 또다시 고독만이 존재하는 밤의 어둠속에 갇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약속했잖아.”
차가움 속에 깃든, 숨겨진 따스함을 살짝 보이며 카인은 말했다. 그에 노엘은 신비한 빛깔의, 연한 붉은 빛 눈동자와 눈을 맞추고는 약속과 첫 만남을 떠올리고는 대답했다.
「약속하자. 헤어져도 네가 반드시 널 찾을 거야. 그리고 네가 무서워하는 밤에 같이 있어 줄께.」
「나도 약속할게. 언제나 우리 같이 있자.」
어느 날, 해버린 약속. 그때는 친구로서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다른 감정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그것은―.
「나는 노엘 카를리아. 내 이름은?」
“나는 노엘 카를리아. 내 이름은?”
처음 만나서 마치 부서질 것만 같이 슬픔에 젖은 신비한 붉은 눈동자를 보고 자신이 한 말. 하지만 소년은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기에 자신 또한 묻지 않았던 대답.
“내 이름은―. 카인 폰 크로스.”
대답에 노엘은 8년 전, 그때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카인은 향해 다가갔다. 더없이 아름다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로―.
그리고 카인은 손을 내밀었다. 8년 전과는 달리, 노엘이 내밀었던 손을 잡은 것과는 반대로.
그렇게 8년 전과 겹쳐지는 기억, 붉은 장미가 바람에 휘날리던 밤의 그 기억처럼 둘은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베소 작가 은빛카린입니다.
3월달 캠퍼스 라이프가 시작되고….
카린은 치위생과에서 의학용어와 인체구조때문에 바쁘다못해 골이 터져나가고 있습니다.
소설을 쓰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요. 어제랑 그저께도 저 12시까지 과제했습니다.ㅜ_ㅜ
드라마 잠시 볼 시간밖에는 평일에 시간이 없더군요. 숙제 하느라고….
그럼 아주 눈꼽만큼 수정한 서곡 부분과 One Night. 약속 함께 올려봅니다.
ps. 내일 카린은 또 MT때문에 소설 못 쓴답니다.
나에게 시간을 달라!!!
이번 편은 지금까지 -피의 노래-를 읽으신 분이라면 굳히 다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가물가물하시면 다시 보시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그럼 보시면 오타나 묘사 지적, 감상평 남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첫댓글 에헤헤.. 다시 보내요 멋집니다!! 화이팅..ㅁ
감사드립니다. 어억. MT 끝내고 도착했습니다. 오늘.ㅠ
에에, 총정리[?]인겁니까 ㄷㄷㄷ
뭐 총정리죠.훗.
스크롤바보고서 순간 깜놀했어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글페이지로 26페이지였던가, 28페이지 정도 되니까요.
총정리군요! 근데 약속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는 <<<< 카린님 소설은 왠지 기억에 오래 남아요!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내용을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물이려나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치위생사. 요즘 고민중... 정말 본인하고 안 맞아서.ㅠ
다시 총정리 해서 보는거라서 더 이어지는 느낌이 강하고 이해가 잘되네요 !! 바쁜일정 잘 소화해내시고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감사드립니다. 내일 개교기념일이라 학교 안 가니 간만에 소설 좀 써야겠어요.
읽기 시작. 카인과 노엘의 만남인 것이군요!
읽기 순서는... 다음은 노엘 카를리아 외전편을 보시면 됩니다...다음이 Two Nigh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