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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쌍둥이 아빠
호정 : 진 용 호
1. 하나님의 은혜(천우신조)
미세 먼지로 인하여 하늘은 뿌였지만 봄은 봄인가 보다.
정원의 세 그루 백목련은 그 고운 자태를 뽐낸다.
엊그제 환갑이라며 환갑잔치를 하고 제주도에 환갑여행를 다녀왔는데 벌써 65세라니 참으로 세월은 빠르다. 외손자까지 합하여 일곱명이나 되니 세월에 밀려 이 상사라고도 부르고 혹자는 이 사장이라던 호칭도 이 영감으로 변하였다.
이 영감은 아직도 냉기가 도는 아침 공기를 마시며 세 그루의 백목련을 정답게 어루만지듯 감싸 쥐고 지난 세월을 반추하여 본다.
이 백목련은 1974.8.15.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행사시 재일동포인 문세광이 조총련의 사주를 받고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영부인이었던 고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어 사망하였고 운구차가 백목련에 쌓여 청와대를 떠날 때 온 국민이 비통에 빠졌다. 그 때 이 영감은 너무나 비분강개하여서 정원에 있던 일본의 국화인 “사쿠라 나무”를 뽑아내고 노포동 나무시장에 가서 백목련 세 그루를 사서 갑동이, 을동이, 병순이라는 이름을 붙혀 심은 것이다. 이른 봄 백목련이 필 때마다 무명 시인 “호정”이 쓴 “봄” 이라는 시가 생각나서 마음 속으로 읊어 본다.
“봄” 지은이:호정
창세서 영원까지/ 성쇠는 정한 순서/ 설한풍 핑계삼아/ 꿈속을 헤매다가
개구리 기지개에/ 놀라서 움을 튀니/ 유채꽃 일찍나와/ 줄서라 재촉일세
백목련 나신으로/ 꽃부터 터트리니 / 먼저간 님의모습/ 아련히 떠오른다
개나리 진달래에/ 산수유 끼어드니 / 봄내음 모라모락/ 한해가 시작된다
덩달아 여기저기/ 봄소식 들려오고 / 상춘객 흥을돋워/ 어깨춤 들썩이네
살 같이 지나간 세월 속에 기억도 가물거려 자질구레한 삶의 조각들은 망각의 뒤 안 길로 사라지고 굵직굵직한 것들은 추억의 보따리에 싸서 가슴속에 묻어두고 틈나는 대로 되새김 질 하여 본다.
6.25의 포성이 휴전이라는 미봉책으로 덮은 지 만 1년 뒤인 1954년7월31일자로 복무하던 진해 해병대 신병훈련소 교관을 마지막으로 만4년 간 의 전쟁의 아픔을 담은 4개의 훈장과 해병대 상사의 계급장을 가슴에 달고 전역식을 치루고 귀향하여 자녀들 교육을 위하여 무작정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가기로 하였다.
다섯 살 쌍둥이 갑동이와 을동이 그리고 세 살박이 여식 병순이를 데리고 김해 촌에서 이 곳 부산 중앙동 용두산 자락을 뒤 숲으로 삼고 지어진 “적 벽돌 2 층 양옥”의 2층에는 방 두 개에 부엌이 딸린 이 집에 전세로 이사를 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헌병 대장이 살았다고하여 “헌병 대장 집”이라고 불렸으며 대지 80평에 건평 1.2층 합하여 50평이었으니 정원은 열 평 남짓하였다.
각종 화초가 있었고 커다란 벚꽃나무가 4월경이면 만발하여 “사쿠라 꽃집”이라고 도 불렀다. 이 영감(그 당시는 쌍둥이 아빠라고 불렀음)은 정해진 직업도 없어 호구지책으로 피난민들과 뒤섞여 막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었는데 이 정도의 노동은 얘들 소꿉장난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 이유는 그는 “귀신 잡는 해병”의 산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이웃 동네 동갑내기 처녀 배복래와 연애하며 서로 열열히 사랑하였는데 불쑥 얘기가 들어서는 바람에 허급지급 음력 정월 스무나흗 날(양력 3월12일) 결혼식을 올렸다, 본 나이는 스무살 인데 호적은 열여덟살이었다.
그해 6.25가 발발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괴뢰군들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하던 때 쯤 인 8월1일 김해들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먼 곳에서 푸른색 천막 천으로 덮개를 덮은 스리쿼터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다가 갑자기 급 부레이크를 밟았는지“끼-이익 털털털”하는 소리를 내며 급 정거 하더니 칼빈 소총을 멘 순경이 내리고 “호루라기”를 불며 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길을 몰라서 길을 알려 달라고 그러는 줄 알고 달려갔더니 다짜고짜 차에 타라고 명령을 하여서 타고 간 곳이 김해 경찰서 였다.
그 곳에 도착하여 보니 벌써 청년 20여명이 경찰서 마당에 웅성거리고 있는데 군인들이 M1 총을 메고 삥 둘러서서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이름, 생년월일. 주소를 묻고 장부에 기록하고 빨리 군인 트럭에 타라고 하여 영문도 모르고 30여분 실려 간 곳이 진해 경화동 해병대 신병 훈련소 였다.
“ 여러분‼ 해병대에 입대 한 것을 환영한다. 지금 이 시간부터 여러분들은 대한민국 해병대다. 국가의 흥망이 백척간두에 처해 있기에 여러분의 어깨에 국가의 운명이 달렸다. 훈련 시 땀 한 방울이 전투 시 피 한 방울이다 열심히 훈련에 임하라 이상!!!”
훈련이래야 “앞으로 갓, 뒤로 돌아 갓, 우향 우 좌향 좌, 50여m의 포복 훈련, 그리고 M1 소총 간단한 분해 조립 , 조준하여 방아쇠 당기는 법, 수류탄 투척법이 모두 였다. 1주일 정도 훈련을 받았다.
소속은 해병대 제1 연대(연대장 김대식 대령), 제 1대대(대대장 김성은 중령)으로 제일 처음 참가한 전투가 입대 한지 17일 만인 8월17일“통영 상륙작전” 이었는데 한국 해병대의 단독 작전으로써 해군함정 512호를 비롯하여 7척, 어선 20여척으로 상륙하여 퇴로인 전술상 요지인 원문고개에서 퇴로를 막고 치열한 육박전을 감행 적을 완전 소탕 469명 사살, 포로 86명 생포, 따발총128정, 아식소총107정, MI소총 3정, 기관단총 14정, 박격포 2문, 짚차 2대, 트럭 10대....등을 빼앗는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도 15명 전사, 47명 부상을 입었지만 완전 소탕으로 승리 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뉴욕“헤럴드 트리뷴”지의 극동 지국장 마거린 허킨스 종군기자의 기사 중 ”그들은 귀신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이라고 썼는데 이것이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의 시초였다.
그 후 여세를 몰아 9월15일”인천 상륙작전과 수도 서울 수복, 10월2일 원산 상륙 작전이 끝날 즈음 아내로부터 쌍둥이를 순산하였고 어릴 때 다니다가 나가지 않던 교회도 나가며 하나님께 무사하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한다는 편지를 받고 전투도 잊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전우들의 축하인사를 받으며 쌍둥이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쌍둥이니까 갑동이, 을동이로 지으래서 아내에게 편지로 알렸다. 쌍둥이들을 위하여서라도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며 이를 악물었다. 다음 해인 1951년6월4일 양구 도솔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도솔산 전투는 처음에는 미 해병대가 투입되어 치룬 전투였는데 탈환에 실패하고 Do not. be impossibility.(두 낫 비 임포시빌리티) -하지마!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표현을 쓰며 손을 내 저으며 한국 해병대에 임무 교대한 전투였다.
북한군 제 5군단, 자동화기로 무장한 정예부대 12사단과 32사단이 배치되어 완강히 대항하며 버티던 지역으로 1148m 고지로 높고 낮은 24개 고지로써 바위가 평풍처럼 둘러친 바위 투성이의 고지로 악명 높다.
1951년6월4일부터 6월20일까지 17일간의 수 백번의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으로 북한군 2300여명 사살, 44명의 포로를 잡았고 우리 해병도 133명 전사, 500여명 부상이라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완전 제압하고 탈환하여 “귀신 잡는 해병”“무적 해병”의 위용을 만 천하에 떨쳤고 지금도 해병대 7대 작전 중 하나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9사1생이 아니라 900사1생으로 생사의 갈림길을 수 백번 헤쳐 온 이 영철 해병 상사, 쌍둥이 아빠로선 지금의 삶이란 어린얘들 소꿉놀이에 불과한 일이였다.
수많은 전장에서 살아 난 것은 전적으로 천우신조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처음 전투인 “통영 상륙작전”시 함께 참전한 전우가 적의 총탄에 쓰러지는(사망)것을 보고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내가 살기 위 하여는 적을 죽여야 한다. 나는 앞으로 태어 날 자식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야 한다.”는 굳은 각오가 오늘이 있게 하였는가 싶었다.
이웃에 자갈치 어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아줌마가 살았는데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가 고와 보인다.”며 아내에게 자기 가계에 나와서 생선 장사를 거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비린내라면 십리나 도망을 치던 아내도 남편이 막노동을 하는데 먹고 살기 위 하여는 코를 막고서라도 자기도 해야겠다는 굳은 각오가 이 집을 장만하는 단초가 되었다.
1년여를 장사를 거들다보니 차츰 장사 수완도 늘고 단골도 생겨서 주인의 허락을 받고 독립하여 옆에 다라이와 판대기에 생선을 놓고 팔기 시작했다.
적 황토색 고무 다라이에는 바닷물을 담아서 살아있는 광어, 도다리, 전어 . . .등 횟감 생선을, 판대기에는 죽은 생선과 말린 생선을 놓고 “오이소. 사이소” 하면서 호객을 하였다.
소위 초매 식 그 날 저녁에는 다섯 식구가 얼싸 안고 눈물을 흘렸다.
판대기 장사라지만 그리 어설프게 볼 것이 아니고 수익이 꽤 있었다.
이씨 영감은 자갈치 어시장에서 리어카를 끌었다. 이 가계 저 가계에서 부르면 공동 어시장에서 자갈치까지 생선상자를 실어 옮겨주고 삯을 받는 삯팔이-꾼이 되었지만 거의 고정적인 수입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은 넘쳐났다.
아내와 둘이 많이 벌어 도 돈을 쓸 시간이 없어 통장의 예금액만 불어 날 뿐이었다.
가까운 사람이나 같이 생선장사 하는 사람들이 급전이 필요하다면 빌려주고 고맙다고 이자라도 얹어주면 그게 또 짭짤한 수입이었다.
직접 장사를 하면서 집안일이 걱정되어 집안일을 하기 위하여 고향의 먼 친척 벌 되는 혼자 사는 아줌마를 고용하여 집안일을 전적으로 맡겼다.
먹고 사는 걱정은 없고 이제 꿈 이라면 자녀들 쌍둥이 갑동이와 을동이 그리고 병순이의 장래를 위해 교육에만 신경을 쓰기로 하였다.
갑동이와 을동이는 일란성 쌍둥이로써 얼굴이 얼마나 닮았는지 이웃 사람들은 구분을 못하고 착각을 하는 수가 많았다.
그렇게 닮아도 성격은 판이하게 달라서 큰 얘 갑동이는 꼼꼼하고 내성적인 편이고 동생 을동이는 활달하고 공격적이며 친구들을 많이 사귀며 장난꾸러기였다.
초등학교에 입학 한 후로는 집과 가계가 얼마 멀지 않는 거리라서 방가 후면 꼭 가계에 왔다. 엄마가 그 날의 수입 중 얼마만큼씩 용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 쓰는 방법도 확연이 다르다 갑동이는 좀 체로 돈을 쓰지 않고 아끼며 보수동 헌 책방 골목에 가서 책(만화책도 포함)을 구입하여 많이 읽는 편이고 나머지는 꼭 은행에 저금을 하였다.
을동이는 그 당시 얘들이면 다들 군침을 삼키던 “아이스 케키”를 사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게 다반사였다.
병순이는 역시 여자라 온순하여서 용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표가 나지 않았다.
얘들이 한글을 깨우쳐 읽을 수 있을 때에 가훈(家訓)을 만들어 공책을 살 때 마다 맨 뒷장 안쪽에 아버지가 직접 일일이 적어서 외우게 하였다.
가훈
매사에 성실하라.
정직하라.
문무를 겸비하라.
남에게 뒤지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하라.
일원도 쪼개 쓰라, 나머지는 저축하라.
형제간에 돈목하라.
어릴 때는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크면 다 안다고 하면서 무조건 하고 식사 전에는 함께 암송하고 식사를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얘들은 자주하니까 노랫말처럼 곡조를 붙혀 노래하듯이 줄줄 외웠다.
자식들 셋이 열심히 공부를 하여서인지 반에서 상위 그룹에 끼는 우등생 이였다.
부부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열심히 한 덕분으로 가게가 번창하여서 5년만에 정식 생선가게를 세 개나 구입하여 둘은 임대를 주고 하나만 생선 횟집을 겸하여 운영하는 알짜 부자였고 어엿한 사장이 되었으나 특이한 것은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주는 용돈에 대하여는 절대로 사용처를 묻거나 간섭을 하지 않았다.
일단 자기 손에서 떠난 돈은 아무리 자식이래도 남의 돈이라는 지론이었다. 생선장사 8년 만에 전세로 있던 지금 이집을 통째로 구입하였다. 주인 되시는 분이 대구에서 모직 공장을 운영하면서 급하게 자금이 모자라면 얼마씩 빌려 달라는 요청이 있어 조금씩 빌려 드린 것이 꽤 되었던지 대구로 이사를 가면서 집을 사라고하여 목돈 얼마 들이지 않고 구입하고 이전등기를 마치고 나전 칠기로 이영철 이라고 쓴 문패를 달고나니 고향 사람들로부터 쌍둥이네는 성공하였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쌍둥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갑동이는 집에서 항상 경제신문을 구독하면서 장래에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구체적으로 부모님께 얘기 한 때는 한번 도 없었는데 간혹 보면 주식변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을동이는 학교가 끝나면 태권도 도장과 유도 도장을 다니면서 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도복을 검은 띠로 묶어서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을 보니 유단자인가 싶었다.
새벽이면 마당(정원)에 나와서 웃통을 벗고 맨몸으로 이 소룡의 흉내를 내면서 쌍절곤을 휘둘렀다.
또래들 중에서 왕초노릇을 하며 항상 몇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어깨를 펴고 다녔는데 소문에는“중앙동 을동이”하면 주먹쟁이로 학생들의 세계에는 상대가 없었다고 하였다.
대학교 진학도 큰 얘는 B대학교 상대 경영학과 작은 얘는 D대학교 체육학과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여서 부모님께 효도를 한 셈이다.
2년 뒤에는 병순이도 서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 난 여자대학에 합격하여서 겹경사가 났다.
이 영철 사장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같은 일을 한 결 같이 성실하게 한 보림이 있어 자갈치 상인에게서 신용을 얻고 미나까이 뒤편에 있는 공동어시장이나 자갈치에 드나드는 어선원들과도 친하여 이제 직접 싱싱한 생선(뒷 고기)을 어떻게 구입하는지 루트를 알아서 되넘기-장사를 하여 더욱 장사의 마진이 늘어남에 하루가 다르게 부를 축척하였으나 아내는 새벽잠 설치고 별보고 나가서 별을 보며 귀가하면 파 김치가 되어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팔이야” 하면서도 습관이 되어서인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쌍둥이가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해군에 자원입대를 하였다. 그 때만해도 해군에 입대하려면 모병제도라서 지원자가 많아서 30~40 : 1 의 치열한 경쟁의 시험에 합격해야 함에도 거뜬하게 들어갔다.
쌍둥이가 입대한지 1년쯤 되는 해 봄에 자갈치 상인회에서 봄놀이로 진해 “사쿠라 마치(벗꽃 축제)”에 가기로 계획이 있어 얘들에게 그 때 면회를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확수고대하고 있었다.
입대 후 처음 휴가 나왔을 때는 반갑고 얼마나 고생하느냐고 측은 해 하면서 맛있는 음식도 사 주고 용돈도 듬뿍 줘서 보냈지만 진해와 부산이 너무 가까워서 그러는지 이제 너무 자주 외박과 휴가를 나와서 만나기는 하였지만 그것도 시들하여저서 오면 좋고 안 오면 더 좋고 오는가, 마는가 하는 형편이었지만 면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 날 자갈치 상인회 총무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들과 헤어져 해군 통제부 동문 검문소 곁에 있는 면회 신청 접수처에 가서 계급과 성명을 대고 면회 신청을 하였다.
한 시간 여가 되어서 거의 동시에 얘들이 나왔는데 군에서도 성격차가 확연했다.
그들이 해군에서 어떤 보직을 받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갑동이 는 직별이 주계보조(병참)사, 을동이 는 성격대로 UDT에 배속을 받았다는데 3개월 신병훈련 중 희망 직별을 써 내라고 하여 둘 다 적성에 맞게 써 내었더니 희망대로 보직을 받았다고 하였다.
갑동이 는 함께 일하는 고참 하사와 둘이, 을동이 는 소대원을 다 불렀는지 8명이나 데리고 나왔다.
갑동이 는 근무지가 보급창 서문 창고, 을동이 는 장천 K-10 비행장 근처에 있는 UDT부대라고 하였다.
통닭 튀긴 것 3마리, 암소불고기 10인분, 잡채, 쌀밥을 큰 양푼 2개에 가득 장만하여 갔지만 먹쇠가 하도 좋아서 인지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벚꽃이 만발한 면회장의 긴 책상에 따로따로 갑동이 에게는 통닭 한 마리, 암소불고기 2인분, 을동이 에게는 통닭 두 마리, 암소불고기 8인분, 잡채...등을 나누어서 차려 주었는데 금새 동이 나서 옆에 있는 가계에 가서 치킨3마리 피자 두 판을 사다 안겼지만 그것도 남기는 게 없었다.
“아버님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는 한산도가 고향이고 해군에 입대한지가 5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갑동이가 너무나 일을 꼼꼼하게 잘 하여서 저는 요즘 거의 놀고 먹습니다. 그 동안에 여러 명의 보조를 두어 봤지만 갑동이 만큼 철두철미하게 일을 잘 하는 병사는 처음입니다. 영어도 유창하게 잘 하여서 미 해군 고문단에서 보급품 검열 나오면 이 수병이 통역하고 설명을 직접 합니다. 다른 부서에서 서로 데려 갈려고 하는 바람에 제가 못 가게 더 붙잡고 있습니다.
갑동이는 제대하면 큰일 할 사람입니다.” 부모로써 이보다 기분 좋은 칭찬은 없을 것 같았다.
“하사님! 갑동이가 잘 한다니 기분 좋습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고 하사님이 훌륭하시니 본을 받았겠지요.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을동이 자리로 옮겨 갔다. 아홉 명이 주루루 일어 섯다.
“ 차렷,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동작이 절도 있고 목소리가 우렁차서 인근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쳐다보고 박수를 쳤다. 묘한 기분이 들고 다소 우월감도 생겼다.
“ 을동이가 최곱니다. 완전 우리의 히어로(영웅)입니다.”
“운동이면 운동 수영이면 수영 만능이죠, 수영하고 잠수하면 물개가 울고 간답니다.”
“아들하나는 아주 멋지게 두었습니다. 우리 대장님이 ”사위 삼겼다“ 고 공공연이 말씀을 하십니다. 하하하하하하 . . . ”
“그래 듣고 보니 아주 기분이 좋네. 너희들이 추켜세워서 괜히 오버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뭐든지 완전 1등이지요.”
한데 모아 놓으니 못하는 말이 없었다. 어떤 놈은
“을동이가 여동생 사진도 보여주며 자랑을 하는데 아주 미인이던데 아버님 저 사위 삼으면 안 될까요?
“ 안됩니다. 저가 체격이나 인물로 봐서 훨씬 낫지요? ” 저요 저요 하고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다.
면회장 안을 아홉명의 UDT대원이 압도하는가 싶었지만 누구하나 가타부타 말하는 사람이 없어 완전 저들 판이었다. 순찰하는 해병 헌병들도 만류하지 않았다.
입대 전이나 입대 후라도 역시 그 기질은 못 속이는가 보다.
쌍둥이가 제대도 하기 전에 병순이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인연이라는 게 정해 져 있었던 모양이다. 병순이가 여름 방학 시 서울서 내려와서 엄마가 하는 횟집에서 거들어 드린다며 카운터로 어떤 땐 홀 써빙을 하는 때가 있었다.
한번은 육군 중위가 동료들4명과 함께 횟집에 들렸다. 훤칠한 키에 인물도 출중하여서 아주 호감이 가는 타입 이었는데 병순이와 눈(?)이 맞았는가 몇 마디 장난스런 말을 주고 받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날 후로 토요일 오후, 일요일, 평일이라도 저녘 밥 때 쯤 이면 네댓명 씩 함께 생선회를 먹으러 왔다. 어떤 때는 서양(미군)사람과 함께 오기도 하였다.
영어도 유창하여서 서양 사람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웃고 떠들고 잡담을 곧잘 하기 도 하였다. 병순이가 방학이 끝나고 서울에 가고 난 후에도 자주 들려서 완전 단골손님의 대열에 들었다.
이제는 넉살 좋게도 어머님 , 아버님하면서 어떤 땐 양주를 몇 병씩 선물도 하여서 받는 때도 있었다.
한번은 소주를 조금 마시고 얼굴이 약간 붉어 보기 좋은 때 자기소개를 하는데 안동 권씨로써 네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이민을 갔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였는데 친하게 지낸 친구 미군이 제대하면서 미국에서 자기는 큰 농장을 하는데 함께 미국에 이민 가서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고 설득하는 바람에 미국에 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미국에 가서 보니 농장이 너무나 넓어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농약을 치고 비료를 뿌리는 아주 광활한 벌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미국인 친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고국에 돌아와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 농학과에 편입하여 학교에 다니다가 학사 장교로 군에 입대하였으며 지금은 부산 좌성대에 있는 미 군수지원 사령부에서 통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으며 고향은 경북 상주이며 아버지는 미국에서 익힌 기술로 3만여평의 산야를 개간하여 현대식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하였다.
그 동안에 서울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고 몇 통의 연애편지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겨울 방학에 병순이가 내려와서 권 중위와 결혼하면 어떻겠느냐고 슬며시 운을 떼었다.
“결혼이라는 게 평생의 운명을 좌우 하는 거야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려서야 쓰겠니?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정 하자꾸나.”
“아버지 그 동안에 몇 번 만나 보았는데 건전한 정신상태 였으며 집안도 그렇게 흠을 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지금 너는 대학교 학생이야. 학교나 졸업하고 천천히 생각하자.”
“권 중위가 다가오는 봄에 제대를 한답니다. 그 때 결혼하고 나머지 학업은 결혼 후에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원하면 대학원까지 책임지고 보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잘 말씀드려서 결혼하게 해 주세요.”
“고향이 상주라는데 그 곳에서 서울에 학교에 다닐 수 있겠니? 네가 원한다면 우리가 대학원까지 보낼 테니 학교 마치고 하기 로 하자.”
“학교를 포기하고서라도 결혼하고 싶어요. 대학교 안 나오면 결혼 못하나요? 네 아버지.... 권 중위가 제대기념으로 멋진 결혼을 하고 싶대요. 자기가 제대하고 복학하면 대구에 오가면서 학교를 다니고 신혼집은 내가 학교 졸업 할 때 까지 서울에 두고 거의 동시에 두 사람 모두 졸업을 하면 고향 상주로 내려가기로 계획하고 있답니다.”
권 중위의 나이가 병순이 보다 세 살이나 위여서 쌍둥이 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몇 번이나 재고해 보자고 설득하였으나 한번 먹은 마음을 돌리는 데는 역 부족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옛말 그르지 않아서 결혼을 승낙하고 양가 부모 상견례를 하고 봄에 좋은 날 잡아 식을 올리기로 하였다.
봄에 권 중위가 대위로 예편함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리고 병순이는 부모품을 떠났다.
쌍둥이는 별 탈 없이 3년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그 날짜에 해군에서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였다.
갑동이는 군 생활 3년 동안에도 입대 전에 주식에 투자한 자금이 낮잠을 자지 않고 불어나서 거금을 손에 쥐었단다. 돈 모으는 데는 귀신같아서 어디든지 손을 대면 꼭 이윤을 챙기는 것이다. 또 부지런도 하였다.
자기 공부도 하면서 틈을 내어서 고등학생을 가르키는 개인 과외도 하였다. 지금 나가고 있는 곳은 서대신동에 사는 고 2 여학생 인데 부모님은 서울서 피난 와서 범일동 시장에서 포목점을 경영하는 분으로 서울에도 집이 있고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아주 호화스런 저택이었다.
여학생의 부모님들은 은근히 갑동이를 외동딸의 사윗감으로 점을 찍고 친절하게 대하고 과외비도 다른 사람들 보다 후하게 지불하였다.
갑동이는 자기 전공인 경영분석 분야에선 대가라는 평을 들으며 학교 측에선 졸업하면 조 교수, 교수로 채용하겠다는 제의를 전달하여 오기도 하였다.
또 소문이 나서 기업체에서 경영분석을 의뢰하여 경영분석을 하여주고 컨설팅 비로 상당액을 받은 때도 많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대 기업에서 입사를 원하며 스카웃 제의가 있었으나 그 때마다 부모님의 가업을 잇겠다며 거절을 하였는데 실제로는 남의 밑에 들어가 구속(?)받기가 싫은 것이다.
쌍둥이는 대학을 졸업하였다.
부모들은 갑동이는 대 기업에 들어가기를, 을동이는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체육 교사로 취직을 하였으면 하고 바랐으나 그것은 부모님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을동이는 부산이 좁다며 서울에 가서 뭐든지 하겠다고 하면서 떠났다.
달포가량 있다가 부산에 내려와서 느닷없이 어이없는 말을 가족들 앞에서 꺼냈다. 가족이래야 갑동이는 아직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일하는 아줌마는 지금 시간이 오후 11시니까 벌써 자기 집에 가고 엄마하고 세 사람 뿐이다.
“아버지 저 개명(改名)하겠습니다.”
“왜 이름 때문에 너 앞길에 지장이 있는가? 작명 쟁이 한테 서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부르기 쉽고 쓰기 쉬우니 좋지 않나?”
“갑동이, 을동이 하니까 항상 2등이라는 어감 때문에 싫습니다. 그리고 항상 형님 그늘에서 사는 것 같아서 이제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살고 싶습니다. 큰 나무 밑에는 작은 풀은 잘 자랄 수 없습니다.”
“너희들은 쌍둥이로써 너는 단 10분 차이로 세상에 형님보다 늦게 나왔으니 숙명이라고 믿고 그냥 그대로 하자.”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이걸 두고 하루 이틀 생각한 게 아닙니다. 저의 제의를 받아 주십시오.”
“그래 어디 유명한 작명 대가에게서 지은 이름이 있나?”
“아닙니다. 저가 생각 해 둔 게 있습니다.”
“얼마나 거창한(?)이름인지 모르지만 그래 뭐라고 지을 것인가?”
“저가 해군에 들어가서 알았는데 대한민국 해군의 창시자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해군 ”손 원일“ 제독을 존경합니다.”
“손 원일 제독은 나도 안다 존경 받을 만한 분이 였다. 그런데 손 원일 제독과 무슨 상관이 있는데 . . . . ”
“제 이름도 ”원일“ 이라고 짓고 싶습니다. 으뜸 元. 한 一 부르기 싶고, 어감도 좋고, 쓰기도 편하고, 뜻도 좋지 않습니까? 항상 제일 으뜸!!! ”
“을동이 너가 많이 머리를 썻구나 이제는 너도 부모와 따로 살아야 할 때가 되었으니 개명 문제는 전적으로 너의 소관 일이다. 부모가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고 너 뜻대로 하여라.”
“아버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도 없다. 다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낳고, 기르고, 결혼하여 분가하고 . . . .삶의 공식이니까.”
갑동이가 돌아왔다.
“형아! 부모님 모신다고 애쓰지?”
“부모님을 모시는 게 아니고 내가 더 마음 쓰시게 하여서 죄송할 뿐이야. 야 ! 너도 온다고 피곤할 터이니 얼른 자자.”
이튿날부터 을동이는 어디로 다니는지 동분서주 하는 것 같았다.
을동이 더러 어디를 그렇게 분주하게 다니 냐 고 하였더니 개명 신청서를 작성하여 가정법원에 접수하였다고 하였고 보름쯤 후에 호적에 정식으로 “이 원일”로 성명이 바뀌었다고 하였다.
호적에야 “원일”로 바뀌었지만 가족이나 그 외 아 는 사람들은 옛날 이름그대로 “을동”이로 불렀다.
을동이는 또 서울로 간다고 옷가지를 챙기고 가방이며 준비물이 많은가 보다.
“서울로 갈 거가? 서울 가서 뭐 해먹고 살 건데 어디 정해 진 직장이라도 있니?”
“아직 없습니다. 얘기 해 놓은 곳은 몇 군데 있는데 가 봐야 알겠습니다. 잘 될것입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불 앞에 둔 아이 같이 불안해서 그런다. 서울이라는 곳이 예사 곳이니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 이라더라. 조심 하거라.”
“아버지 저는 유단자고, 해군 UDT출신입니다. 저 걱정은 마십시오. 자주 내려 오겠습니다. 잘 다녀 오겠습니다” 는 인사를 하고 자갈치 제 어미에게 가서 여비는 충분히 받아 간 모양이다.
아내가 은행에 가서 예금을 인출하였다고 하는 것 보면 상당액인가 짐작이 갔다.
을동이는 한 달에 평균 한 번씩은 부산에 내려 왔다. 올 때 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밤 늦게 겨우 집에 들어와서 잠을 자는 정도 였다.
그 생활을 3,4개월 지난 어느 날 아내로부터 을동이 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며 서울 사는 처녀라고 하였으며 아내도 더 구체적인 것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여보 !!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 보면 사귄지가 오래 된 것 같은데 좀 구체적으로 알아서 준비를 하여야 될 것 아니겠어요?”
“젊은 남자얘들이 여자 친구 사귀는 게 다반사 아니겠어요. 오다가다 만난 것이겠죠.”
“아무리 오다가다 만났더라도 을동이 나이가 얼마요? 벌써 결혼 할 나이고 이모 집이지만 객지에서 혼자 산다는 게 정서적으로 안 좋을 테니 그만그만하면 결혼을 추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우리도 이제 늙었소. 당신도 요즘 몸이 성치 않은 것 같아 걱정이요.”
“다음에 내려오면 물어 보겠습니다. 결혼 상대자로 사귀고 있는가 그냥 친군가 물어 보리다.”
“말이 났으니 내가 물어보고 자기 의향을 떠 보리다.”
“그리하세요. 얘들 결혼 같은 중대한 일은 당신이 알아서 결정 하세요. 나는 당신만 믿겠습니다. 여보 그리고 요즘 갑동이는 무엇을 한답니까?”
”자기 전공을 살려서 작은 회사를 친구와 공동으로 차린 것 같습디다. 요즘 신문에 종종 보도되는 M&A 기업 인수.합병 전문가로 활동한다고 하는데 혹자들은 “기업 사냥꾼(Takeover Artist)”이라며 좋은 뜻으로 평을 하지 않습디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 . . . .”
“잘 할거요. 천성이 착한 얘잖아요 . . . . ”
을동이가 서울간지 넉달 쯤 되었을 때 부산에 내려 왔다.
“을동아 엄마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너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매? 어떻노 결혼 상대자인가 그냥 친군가?”
“엄마께 아버지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마시라고 하였는데 기어코 말씀을 드렸군요.”
“그게 숨겨서 될 일인가? 어차피 알아야 할 문제 아닌가? 현재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사정을 얘기해 보아라.”
이야기의 시종(始終)은 이러하였다.
이름을 바꾸기로 마음먹고 열차로 부산에 내려오는 그날 참으로 우연히 옆자리에 예쁜 아가씨가 앉게 되었다. 그냥 앞만 보고 말없이 오자니 쑥스러워서 말을 걸었는데 자기는 서울에 살며 지금 대전에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였다.
“나도 서울에 삽니다. 고향은 부산이지만 지금은 서울 이모님 댁에 있습니다.”
내가 열차 내에서 판매하는 콜라 두 캔, 초코렛 두 개, 비스켙 한봉지를 사서 서로 나누어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심심찮게 대전까지 오면서 제법 친하여 젔다. 헤어지면서 아가씨가 오늘은 대접을 받았으니 서울 가면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다며 연락처를 알려 달라기에 이모님 댁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밤 열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 그 후에 전화하면 된다고 하였다.
떳떳한 직장이 없어 당당하게 직장 전화번호를 알려 줄 수 없어 마음이 상하였다.
개명을 하고 서울에 갔을 때 이모님이 어떤 아가씨한테서 밤에 여러 번 전화가 왔다고 하며 무슨 책임 질 일이라도 있느냐고 다구쳤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지난번에 부산 내려갈 때 열차 칸에서 만난 아가씨로 과자를 사서 함께 나누어 먹었더니 서울 오면 커피라도 대접 하겠다기에 이모님 집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 아가씨가 아주 상냥한 말투로 전화를 하는데 안 봐도 착해 보이더라.”
“좀 예쁘데요(쑥스러워하며).......”
며칠 뒤에 밤에 전화가 왔다. 내일 만나자고 하였다. 그러마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괜히 잠이 오지 않고 얼토당토 않은 상상만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약속 장소에서 만나서 커피를 대접 받았다. 그 후로 일주일에 두어 번 씩 만나서 커피와 식사를 나눈 때도 있었다. 어떤 땐 내가 전화를 하여 불러내기도 하였다. 아마 열 댓 번 만나서 이제 제법 친하여 저서 차츰 서로를 탐색하는 시기였다.
점심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오후 한시에 만나자고 하였다. 약속 장소에 나갔다.
오늘은 중화요리를 대접 하겠다며 꽤 이름이 난 중국집에 가서 뭘 드시겠느냐고 물어서 탕수육과 짜장면을 주문하였다. 역시 촌놈이라 다른 요리는 생소하였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하는 손님들이 큰 홀에 20여명 쌍쌍으로 띄엄띄엄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문한 요리가 나와서 마주 앉아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거의 같은 밤색의 쎄무 잠퍼를 입은 스무서너살 전후의 젊은 청년들 5명이 어깨를 흔들며 떠들면서 들어오더니 지나가면서 같이 식사하고 있는 아가씨의 어깨를 툭 쳤다.
“왜 이래요? 기분 나쁘게 . . . ”
“이 가시나가 우릴 몰라? 촌 년 이군 . . . .” 하면서 뺨을 찰삭 때리고 가슴부위를 만젔다. 원일이가 젓가락으로 탕수육을 짚고 입으로 가져가다가 그것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이 새끼가 주제 남자라고 . . .뭘 봐?” 하면서 주먹을 쥐고 때릴 려고 손을 드는 순간“악” “아이구” 하면서 눈을 감쌌다. 선혈이 낭자하였다.
“뭐꼬, 뭐꼬” 4명이 뒤 돌아 서며 “원일”이를 둘러 싸며 주먹을 휘 두르는 순간 두 사람을 연거푸 엎어치기로 바닥에 내려꽂았다. 또 한명은 오른팔을 웅켜잡고 앉았고, 또 한명은 옆구리를 안고 뒹굴었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 난 일이라 어떻게 하였는지도 몰랐다.
엎어치기 당한 두 청년은 얼굴에서 연방 피가 줄줄 흘렀다. 머리가 박살이 난 모양이었다. 식사하던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이구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였다.
아가씨에게 손찌검을 한 청년에게는 들고 있던 대 젓가락으로 순간적으로 눈을 찔렀고, 뒤에서 달려드는 청년 두 명은 업어치기, 한사람은 팔을 뿌러뜨리고, 한명은 옆차기로 인하여 늑골(갈비뼈)한대가 나갔다.
내가 제압하지 않으면 맞아죽는다. 죽지 않으려면 제압해야한다고 마음먹고 급소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다섯명의 청년이 홀 중앙에 꿇어 앉아 있었다.
“서울 시민이 너희들 같은 쓰레기 같은 놈들 때문에 불안 해 한다기에 청소하러 온 해군 UDT출신 ”이 원일“ 이다. 다시 행패를 부린다면 쓸어 서 바다에 수장 시킬테니 조심 해 알았어 . . . . .” 목소리가 쩌렁쩌렁하였다. 다섯명의 청년들은 쭈구리고 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반항하면 당장 작살을 낼 것 같이 눈에서 이글이글 푸른빛이 품어져 나왔다. 주인이 파출소에 전화를 하였는지 순경 두 명이 달려왔다.
“갑시다. 파출소로 연행하겠습니다. 손님들 다들 식사하십시오. 잘 처리 하겠습니다.”
일곱명이 순경의 안내(?)로 파출소에 갔는데 한 테이블에는 부상자 청년 다섯명, 한 테이블에는 아가씨와 함께 앉았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사복을 입었는데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50대 남자였다.
나에게
“성명을 말하세요.” “이 원일 입니다.”
“아가씨는?” “김 민자 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가씨의 이름을 알았다.
“원일씨 사람을 이렇게 폭행해도 됩니까? 폭행죄로 구속하겠습니다.”
“보소, 보소. 형사양반 애인이 깡패들에게 추행을 당하는데 당신 같으면 가만히 있었겠소?”
“그래도 너무 심하지 않았어요?”
“뭐가 심 하다는 거요? 나는 정당방어를 하였소. 다섯 명이 한 참에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 드는데 내가 살기 위하여 한 조처입니다.”
아가씨가 형사에게 전화를 좀 하자고 요청하였다. 부모님께 연락을 하겠다는 것이다.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턱으로 가르키며 “저기 있습니다. 간단히 하십시오.” 아가씨가 전화를 어디에 하는지 돌아 앉아 수화기에 손을 감싸고 작은 소리로 몇 마디 하는 것 같았다. 한 5분 정도 지나서 금테 두른 모자를 쓴 파출소장이 나와서 앞에 앉은 형사에게 귓속말로 소곤소곤하더니 절을 꾸벅하며 “원일씨 이번 일은 잘 처리 할 터이니 돌아가십시오.” 앞에 앉은 형사는 멀쩡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파출소에 두고 온 5명의 청년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별 탈 없이 지나갔다. 그일 이후로 두 가지가 분명해 졌는데 하나는 아가씨의 이름이 “김 민자”라는 것과 형사들 앞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임기웅변으로 애인이라고 말한 것이 진짜 애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자씨 에게 파출소에서 누구에게 전화를 하였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에게 구조를 요청하였다기에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공무원으로써 요직에 있다는 말을 하곤 구체적인 것은 회피하였다.
이제는 사흘이 멀다 하고 만나서 함께 있었다.
정해진 직업이 없어 기다리는 중이라 마음은 초조하였지만 시간은 충분히 있었기에 만나자는 제의는 거절 할 일은 아니였다.
민자씨는 적극적으로 다가오며 부모님께 말씀드렸다며 가까운 장래에 부모님을 한 번 만나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도 하더라는 말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을동아! 서울에는 8도에서 올라온 주먹쟁이들이 들 끓는 다는데 어쩌려고 그리 무모한 짓을 하였나? 그리고 너를 군대에 보냈더니 싸움질 배우러 군대에 갔던가?”
“아버지 배운 게 아니고 필수 훈련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아시겠지만 육,해,공, 해병대에서는 특수 부대가 있습니다. 특수 부대에 속한 병사들을 타군에 3개월 정도 교환 의탁 교육을 시키는 제도가 있는데 대개 8~10명 정도 파견합니다. 의탁 교육을 받으러 가면 자기들이 하는 훈련의 곱절이나 강도 높게 하기 때문에 70%정도는 중간에서 탈락하는 형편이지요. 우리 UDT에 교육 받으로 오는 타군의 병사들도 살아 돌아간 자가 별로 없습니다. 거의 탈락하지요.”
“너도 타군에 교육을 갔던가?”
“예 육군 특전사에 갔는데 3개월 동안 식사시간 하루 두 시간, 취침시간 4시간을 뺀 나머지 18 시간을 특공무술 훈련을 시키는데 이건 훈련이 아니라 반쯤 죽이는 훈련 이었어요. 10명이 갔는데 4명이 중간에서 탈락 6명이 견뎌 내었습니다.
훈련 수료하는 날 그들의 말로는 60%가 살아 돌아간 예는 한 번도 없으며 해군 UDT가 말로만 들었는데 이렇게 강한 군대는 처음이라고 혀를 내 둘렀습니다.”
“세상에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이 있단다. 절대 자만 하지 말고 몸조심 하거라.”
“예 아버지 몸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아가씨 부모님은 언제쯤 만나 뵈올 것인가?”
“서울 가면 시간을 내어 보겠습니다.”
서울에 가서 아가씨 부모님을 커피-숍에서 만나서 인사를 드렸다고 하였으며 아가씨 엄마의 말씀으로는 “민자가 여러 군데서 청혼이 들어왔는데 아직 나이도 어리다며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자기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하더니 자네를 만나고 난 후에는 꼭 결혼하겠다고 이렇게 매달리니 자네 생각은 어떠하며 다른 곳에 사귀는 색시가 있느냐”고 물어서 아직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다고 하였다.
아가씨 아버지는 고개만 끄덕이며 별다른 말씀이 없었고 뭔가 장고하는 눈치였다고 하였다.
“그래 너 생각은 어떠니? 결혼 할 의사가 있는가? 너를 좋아 한다면 이참에 결혼을 하는 게 어떻겠니?”
“결혼을 저 혼자 하는 게 아니니 민자와 의논하여서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일은 급진적으로 추진되어서 양가의 부모가 남산 밑에 있는 “아스토리아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상견례를 하였다.
신부 어머니의 말씀이
“신랑 될 원일이가 아직 직장도 없으니 혼사비용은 한 푼도 걱정하지 말고 몸만 오면 됩니다.” 고 하였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하였으나 막무가내로 민자가 결혼하면 살 집도 자기 몫으로 한 채 사 둔 게 있어 이미 마련 돼 있으니 진짜 몸만 오라고 하여 예의가 아니지만 속된 말로 “불알만 차고”결혼을 하였다.
결혼 하자마자 직장도 장인께서 알선 해 주셨다. 중동지역에서 토목과 건설업을 하는 건설사의 “총무부 인력 송출 과장”이라는 직함을 받아서 신나게 일을 하였다.
뒤에 알고 보니 장인은 남산 밑에 있는 어느 기관의 요직에 있었으며 고향은 목포라고 하였다.
이제 큰 얘 갑동이만 남았다. 결혼 할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도통 의사를 표하지 않고 회사 일에 만 신경을 쓰는가 보다. 이웃이나 시장의 상인들의 얘기를 들으면 큰 얘가 하는 일이 요즘 부쩍 호황이어서 수 백억원을 벌었다는 소문이지만 벌었는지 잃었는지도 무 반응이니 물어 볼 수도 없어 가만이 보고 만 있다.
아내도 요즘 부쩍 몸이 아프다며 병원 출입이 잦고 쉬고 싶다며 가게에 나가는 것이 몸에 부치는가 싶다. 큰 얘가 결혼을 하여서 며느리가 대신 맡아서 하여 줬으면 하나 요지부동이니 속이 탄다.
하루는 큰 맘 먹고 큰 얘를 억지로 잡아 앉혔다.
“큰 얘야. 엄마가 요즘 부쩍 몸이 아프다고 저러는데 네라도 결혼을 하여 며느리가 좀 거들면 어떻겠니?”
“엄마가 힘이 부친다고 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의탁경영하면 안될까요?”
“엄마의 낙인데 갑자기 손을 떼라면 좀 서운 해 할 것 같다. 어차피 너가 결혼은 해야 할 것 아닌가 할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하자.
서대신동에 가르치든 여학생도 대학을 졸업 하였을 것 아닌가 너를 사위 삼겼다 고 하였다매...? 거기 결혼 하여라 외동딸이라 처부모님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어 안성맞춤 이겠네.”
“아버지 잘 알겠습니다. 생각 해 보겠습니다. 이제 저의 사업도 본 궤도에 올라서 한 시름 놓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추진 해 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 만 먹으면 끝까지 해 치우는 치밀한 성격이라 이리 저리 뛰어다니면서 일을 서둘드니 승낙을 받아 내었다고 하였다.
결혼식은 호화롭게 치렀다 신혼여행도 서 유럽을 돌아 호주까지 경유하면서 한 달 가까이 여행을 하며 지내다 왔다.
복이 많아서 인지 신혼 방도 서대신동 처가에도 차리고, 중앙동에도 꾸며서 오가면서 지냈다.
며느리는 매일 가게에 나와서 시어머니의 가게 일을 거들고 상술을 익혔지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결코 아니었다.
아내는 며느리에게 가게 일을 맡기고 요즘은 손자들 커가는 것을 보며 교회에 잘 나간다. 그간에도 일이 바쁘다며 교회는 안 나가도 새벽이면 꼭 조용히 장시간 기도를 하였는데 이제는 틈만 나면 교회에 나가서 성도들과 잘 어울려 지내며 아들 딸 낳아 이렇게 훌륭히 키워 시집장가 보내고 대학 졸업까지 시킨 것은 지내 놓고 보니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하면서 감사 기도를 쉬지 않는다.
2 부 묘한 인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은 먹고 살기는 편하여 졌다고 하나 인간의 정신세계는 차츰 녹 쓸고 좀이 먹는다. 고도의 이기주의로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을 내 세우니 . . . . . 쌍둥이와 병순이도 어렸을 때 외운 “가훈” 때문인지 형제간의 우애는 돈독 하였지만 . . .
서로가 경쟁의식이 있는지 자기주장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세월은 멈추지 않아서 며느리에게 생선 가개와 횟집을 완전히 넘기는 데는 3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세월은 자꾸자꾸 흘렀다. 자식이 셋이라지만 한 자리에서 만나 식사를 같이하는 횟수는 1년에 한두 번으로 고정되어 가고 있었다.
설, 추석, 가끔가다 어버이 날이면 모이는 때도 간간이 있었지만 그 나마도 요즘은 전화로써 가름하고 만다.
한 자리에 모일라 치면 지역 색이 확연하다. 갑동이는 완전 부산을 대표하는 PK, 을동(원일)이는 호남을 대표하는 “호남”인으로, 병순이는 경북을 대표하는TK로 변신하여 열변을 토한다.
누구하나 자기주장을 접을 생각은 없는가 보다. 교육 받은 수준이나, 재력도 뒤쳐지지 않는다고 각자는 자부하고 있는가 싶었다.
시시로 급변하는 국내 정치판을 두고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격돌하는 것 보면 한 집안의 형제들이 이렇게 다른 걸 보면 국가의 경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소위 “국론 통일”이라는 단어는 감히 생각을 말고 그저 시류에 따라 적당히 넘어가는 게 현명한 정치인가 부다.
소위 정치가라고 자칭하는 그들을 보면 자기 지역 발전에만 급급해 수천억, 수조원의 국민 혈세를 투입해 공항, 철도, 종합 운동장...등을 건설하여 수익은커녕 관리비로 1년에 수백억 수천억 원의 손실을 끼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뉘우침도 없는 철면피로 변한지 오래고 국회라는 곳이 고성과 주먹다짐의 장으로 변하여 국민의 지탄을 받기가 일쑤다.
아내는 아이들이 왈가왈부 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것을 원치 않으며 어떤땐 “무자식 상팔자”란 말을 자주한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사고를 치거나 자산을 나눠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도 아닌데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가개에 나갈 때 자주 속이 쓰리다고 하더니 요즘은 더 심 한가 자주 가슴을 쓸어내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호소한다.
5~6년 전에 가개에서 속이 쓰리다고 하니 어떤 손님이 자기 “시아버지도 속이 쓰려서 “소 다”를 T스푼으로 한 숟갈 먹으면 속이 편하다고 하더라“는 말을 듣고 따라 하여 보았더니 신기하게도 속이 편하고 소화도 잘 되어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것도 별로 효험이 없어 졌는지 고통이 더 심하다고 하였다.
몸이 성치 않으니 세상이 다 귀찮아 졌는지 자주 화를 내고 손자들에게도 괜한 트집을 잡아 나무라고 며느리에게도 잔소리가 늘어난다.
요즘 손자 놈들이 천방지축으로 예의가 없어지고 옷이 사흘이 멀다 하고 바뀌고 머리 색깔이 노랗다, 붉었다, 심지어는 파란색으로 변하여 가니 그 꼴이 보기 싫단다.
이제는 기도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 보면 “하나님 이제 살만치 살았습니다. 더 고통스럽게 두지 말고 하나님 곁으로 불러주십시오.”하는 것을 보면 내색하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가 보다.
하루는 “여보 요즘 몸이 더 아픈가 본데 대학 병원에 가서 진찰이라도 받아보면 좋겠소.”하고 병원 갈 것을 권유하였더니 “내 나이가 얼마요? 아플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만치 써 먹었으면 당연히 아플 때입니다. 이러다가 좋아 질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나 몸조리 잘 하셔서 자식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도록 하세요. 내가 아파서 미안합니다.”
“여보 너무 앞만 바라보고 살면서 몸에 대하여 너무 혹사 시킨 것 같아 미안하오. 당신이라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소. 진심으로 당신에게 감사하오. 자식들 시집장가 보내고, 대학 졸업 시킨 게 우리 할 일은 다 한 거요. 남들은 우리 보고 성공하였다고 다들 부러워 한 답디다.”
아내는 옛날 생각해서 인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큰 얘한테도 어머니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지 않으니 대학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봄이 좋겠다고 말하고 아프다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가벼운 문진과 위 내시경을 해야 되기 때문에 미리 복용 할 약과식사량을 조절하고 내일 오라는 지시를 받고 정한 시간에 병원에 갈려고 집을 나서는데 “여보! 이제 생각난다 15년전에 보험 아줌마가 어찌나 도와 달라고 권하는 바람에 암 보험을 들어 둔 것이 있습니다. 혹시 해당 될지 모르니 보험 증서를 가지고 갑시다. 내가 장롱 깊숙이 넣어 놓았기에 찾아오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언제 가입하였소?”
“15년전에 가입하면서 한달에 10만원정도 되는 것을 10년 납입 20년만기 1억짜리를 은행구좌에서 자동 이체시켜 놓았더니 나도 깜빡 잊고 있었소. 만기 안에 사고가 날 시는 수혜자로 ”이영철“당신을 지정하여 놓았소. 5년만 있으면 1억 탑니다. 당신하고 세계 일주 여행이나 갑시다.”
“찾아 와 보소 가져갑시다.” 아직 햇빛도 보지 못한 듯 한 누런 대형 봉투채로 들고 병원에 갔다.
위 내시경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검사를 한답시고 거의 5시간을 소비하면서 검사를 마친 의사가 보호자를 따로 불렀다.
“이 지경이 되도록 뭐하고 있었어요? 위에 천공(구멍)이 생기고 위염이 너무 오래되어 손쓰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간에는 어떤 약물을 복용하셨습니까?”
“제 집사람의 말로는 아플 때 마다 ”소오다“를 한 숟갈씩 먹었답니다.”
“소ㅡ다”를..... 그게 병을 키웠습니다. 그게 위벽을 얇게 만들어 구멍이 뚫렸습니다. 심해도 너무 심합니다.“
“선생님 그럼 어찌해야 됩니까? 좀 살려 주세요.”
“본래 건강한 체질이라 이때까지 견뎌냈지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위암도 전신에 전이 되어서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병원으로써는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니 원하신다면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 보십시오. 지금 이 상태로 수술하면 길어야 1개월. 환자가 모르게 진통제 약만 복용하면 3개월 정도는 연명 할 수 있는 시한부 인생입니다.”
시한부 인생? 이게 무슨 말인가?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안돼..안돼...
아내에게는 서울 병원에 가면 새로 나온 좋은 약도 있고 간단한 수술도 하면 좋아지겠다고 하니 서울에 가자고 말을 하였다.
진료비, 각종 검사비용은 가져간 보험 증서를 제출 하였더니 보험회사 담당자에게 연락을 하는 것 같더니 모두 보험처리 하겠으니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였다. 비용만 120만원이나 되었다.
“대학병원이라면 제일로 치는데 이깟 병 하나 치료 못해서 서울로 가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네요. 역시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간다드니 옛말 그른 것 없네요. 이러다 났겠지요. 좀 더 기다려 봅시다. 나도 이를 악물고 참아 보리다.”
“참아서 될 일도 아니요. 의사 선생님이 서울로 가보라고 하셨으니 그 말대로 합시다. 이 일을 대비해서 을동이를 서울에 살게 미리 예정하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 . . 이 참에 아들신세 한번 져 봅시다.”
그 날 저녁에 서울 아들 을동이 에게 전화를 하였다. 어머니가 아파서 오늘 대학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서울에 가면 좋은 의사도 많고 좋은 약도 있으니 서울로 가보라고 하였다는 말도 하였다.
“아버지 그리 해야 되지요. 내 친구가 유명한 내과 전문 의사니 그 병원에 입원치료 하면 나을 것입니다. 걱정 마시고 올라오십시오.”
그러마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보! 을동이 에게도 전화하였더니 아들 친구가 아주 유명한 의학박사 내과의사래 거기 서 치료하면 곧 나을 것이니 걱정 말고 준비하여 상경 하도록 합시다.”
말은 아내에게 이렇게 하지만 의사 선생님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으니 너무나 걱정이 되고 숨기는 게 죄 스러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이런 지경에까지 왔다고 말하면 당장에 낙담하여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몰라서 그 대로지만 아는 사람은 이것이 지옥이다. 46년을 아둥바둥 함께 살아온 사람과 사별을 해야 된다니 이것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입맛도 없고 살고 싶은 마음도 없으며 함께 죽었으면 하고 마음 도 들지만 세상이 많이도 변하고 좋은 신약도 개발 되었다고 하니 최선을 다 하면 기적도 우리 앞에 펼쳐지리라 작은 희망도 가져 본다.
아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도 우리 부부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 왔기에 외면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도 해 본다.
서울 갈 준비를 하느라 대학병원에서 각종 검사한 영상 자료와 보험증서 등 이것저것 챙기느라 며칠을 소비하였다.
11시 쯤에 갑동이가 운전하는 고급 외제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행했다. 아내가 센 바람이 싫다 해도 창문을 일부러 열어서 내가 피를 흘려가며 지킨 조국 대한민국의 산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어 주고 싶어서 였다. 더 마시고 싶어도 제한된 남은 시간이기에 이 안타까운 나의 심중을 아낸들 알 수 있으랴 속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안타까워 한다.
“아버지 엄마가 센 바람이 싫다하십니다. 창문을 닫으시죠.”
“부산서 서울까지 천리라지만 언재 이렇게 가족 간에 여행을 즐겼나 다들 바쁘다는 핑계로 따로따로 서울을 오갔지만 . . . . . 뜻이 있어서 그런다. 신선한 바람이 엄마에게도 예상외로 더 좋을지 누가 아니?”
아내는 힘이 부치는가 별 대꾸도 반응도 없었다.
다섯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을동이 부부가 차를 몰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형제끼리는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던가 보다. “아버지 오신다고 욕 보셨습니다. 점심시간이 좀 지났지만 맛있는 식당에 가셔서 음식을 잡수시고 우리 집에 갑시다.”
“여보 을동이가 점심 묵고 가자는데 그렇게 합시다. 집에 가서 번거롭게 음식을 하는 것 보다 여기서 간단하게 해결 하는 게 좋겠소.”
“맨날 오는 것도 아닌데 집에서 음식 좀 하면 어때요? 좀 피곤하니 집에가서 누었으면 합니다. 오래 차를 탔더니 멀미 기운이 듭니다.”
“작은 얘야 엄마가 좀 누었으면 한다. 그만 집으로 가자. 집이 편할 것 같다.” “예 알겠습니다. 형님 제가 앞장 설 터이니 절 따라오십시오.”
강남의 으리으리한 집 앞에서 차를 세웠다.
“전에 결혼하던 그 집이 아니네.... 언제 이집으로 이사를 왔나?”
“아버지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서울 오신지도 꽤 오래 되셨네요. 4년전에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자 들어가시죠.”
대지가 7~80평 됨직하고 아래층이 50평 2층이 40평 정도 되는 양옥 집으로 담장은 나무들이 둘러쳐저 있었다. 집 안에는 외제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고 벽장에는 각종 양주병이 무수히 진열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아버님 어머님이 오신다기에 작은 방에 침구를 준비하였습니다. 침대가불편 하시면 온돌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온돌방이 또 있느냐? 어머님이 온돌방을 좋아하시니 그 방으로 하자.”
“ 예 있습니다. 혹시 어머님이 불편하실까봐 온돌방도 준비하였습니다.”
“얘야 나 좀 눕고 싶다. 차를 오래 탔더니 멀미 기운이 좀 있는 것 같다. 내가 운전을 한 것도 아닌데 ..... 미안하다.”
“아닙니다. 동생 어느 방인가 얼른 어머님 모셔라. 좀 피곤하신가 보다.”
“예 형님 그리 하겠습니다. 엄마! 이쪽으로 오십시오. 음식 차릴 동안 잠간 쉬십시오.”
주방에서는 음식을 만드는 어떤 아주머니와 며느리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얘야 서울에서 이만한 생활을 누리자면 돈이 꽤 들 터인데 한 달에 월급은 얼마나 되는가? 얘들이 셋이나 되니 너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을 터인데 용하구나.”
“아버지 그럭저럭 삽니다. 이리저리 하다 보니 사는 방법이 나옵디다.”
“결혼 한지도 벌써 16년쯤 되어 가지? 혹시 처갓집에 손을 벌리는 것은 아니겠지? 호사를 적게 누리고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란다. 그러면 남자가 기를 못 펴고 살 수도 있다. 알겠는가?”
“네 아버지 저도 우리 회사의 상무입니다. 먹고 살 정도의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작은 얘야 이번에 올라 온 목적이 뭐인지 알고 있겠지? 어머님 병 치료 때문이다. 너의 지인 중에 의학 박사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느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가?”
“동일대학 병원 내과 과장입니다. 부산 D대학교 동창이며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계시다가 픽엎 해 온 우리나라에서는 내과 명의로 이름 나 있습니다. 그분에게 진료를 한번 받으려면 여러 달 기다려야 차례가 올 정도입니다.” “그래 . . . 동일대 병원이면 ㅇㅇ대 병원, SS병원, XX대 병원...등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병원이라드라. 그런 병원에 갑자기 와서 진료가 가능 할까?”
“아버지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아들 원일이도 서울에 사는 우리 동창 중에서는 그래도 좀 잘 나가는(?) 편입니다. 저 말이라면 껌뻑 죽습니다. 하하하하..”
“아들 덕 좀 보자 기대 해 보마.”
점심 식사가 준비 되었다며 식당으로 나오시라는 며느리의 안내로 식당에 갔다. 어느 고급 식당에 옴직 하게 많이 차려 놓았다.
“어머님 모처럼 오셨는데 별로 차린 것이 없습니다. 어머님의 입맛에 맞을는지 몹시 걱정하며 준비 하였사오니 드십시오. 여기 전복 죽도 마련 하였습니다.”
“며늘얘야 푸짐하게 차렸구나. 수고가 많았다. 진수성찬이다. 맛있게 먹으마 . . . ”
호남과 영남은 다 같이 바다를 끼고 있어 음식 맛도 젓국 종류를 많이 쓰기에 별로 다름이 없어서 입맛에 딱 맞았다.
“언제쯤 병원에 갈 예정 인가? 친구에게는 연락을 해 두었는가?”
“예 아버지 언제든지 가면 될 수 있도록 연락이 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큰 얘야 너는 어떻게 할래? 서울 온 김에 어머님 입원 하는 것도 보고 며칠 쉬었다가 가면 안 되겠니?”
“동생이 있으니 저가 할 일이 있겠어요? 밤 10시경에나 내려가겠습니다.” “회사에 바쁜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랴 하긴 너 가 있어도 별로 달라 질 것도 없겠다. 그러면 내려가거라.”
“형 좀 쉬었다 가거라. 오랜만에 만났으니 얘기도 좀 하고 . . . . ”
“다음에 하자 회사 일도 좀 있고 . . . . . ”
눈치를 보니 동생이 해 놓고 사는 게 부러운 것 같았다. 부산에서는 그래도 산다고 하였는데 서울 와서 보니 도시 전체가 분위기가 확 달랐다.
거리의 사람들 걸음 거리며, 의상이며, 말씨가 퍽 세련되어 있는 것 같아 경상도 사투리가 어색하고 촌 스러워 입을 다물고 싶은가보다.
아내와 작은 방에서 병원에 입원하면 좋은 약도 있다고 하니 가급적이면 수술을 하지 않고 약물 치료를 할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잘 따라야 한다고 심심 당부를 하면서도 부산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하시던“수술하면 1개월이고 약물치료는 3개월 정도의 시한부” 라는 말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파왔다.
수술하면 1개월이라는 말은 절개부위의 치료와 항암 치료제의 독성을 이겨낼 체력이 못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수술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거실에서는 쌍둥이 형제가 얘기꽃이 한창이었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을동이는 회사의 해외 건설 프로젝트 관리 총괄 상무라고 하였다.
“너는 대학에서 그 쪽 업무도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관리를 하는가?”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회사 들어 온지가 벌써 몇 년인가? 실은 장인어른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하고 있어.”
“어떤 방법으로 지원하는데 . . . ?”
“전 세계에 나가 있는 정보원들이 수집한 정보를 미리 알려 주는 방법이야. 쉬운 말로 하자면 중동지역 각 나라의 주요 항만, 도로, 공항, 주택. . .등의 건설프로젝트를 알아내어 발 빠르게 대처함으로써 수주에 성공 하는 것이고, 그러니 항상 일감은 남아 돌아서 건실한 회사 운영이 가능하지 이로 인하여 회사에서도 나를 적극 활용하고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지 . . 하하하하.”
“회사에서도 너를 가볍게 다루지는 않겠다. 그치 . . . ”
“다른 회사로 옮길 가 봐서 신경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데요 그 예로 나에게는 법인 카드를 2장을 주면서 하나는 내가 하나는 아내가 쓸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 마음 만 먹으면 한 달에 수 천 만원 이라도 쓸 수 있지만 그럴 수야 없지”
“적당히 하여라. ”며뚜기 도 오뉴월이 한창“ 이라 드라.”
그의 형의 말은 다소 애매한 표현이라 생각하기에 따라 뜻이 다를 수 있었다. “형! 너는 요즘 하는 사업이 잘 되고 있는가?”
“친구와 둘이서 김해에다 자동차 부품 공장을 하나 차렸다. 친구가 그 방면에는 빠싹한 기술자이기에 앞으로의 전망도 좋아서 잘 될 것 같다.”
“친구 잘 사귀라 너무 믿지 말고 . . . . .”
최신 설비는 내가 제공하고 기술 분야는 그 친구가 담당함으로 잘 하고 있다. 벌써 특허도 여러 건 내어서 그 방면의 업체에서는 선두를 달리고 있다.
매출도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어 전망이 퍽 좋은 편이다.
우리나라 완성차 대형 업체가 현대, 기아, 삼성, 쌍용, 등 이지만 앞으로는 외국 자동차 회사와 제휴를 하여 사업을 넓혀 볼 생각이다.
형아!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하는 거야 . . .자금이 필요하면 나도 투자를 하고 싶다. 땅 짚고 헤엄 치기라면 나도 군침이 도는데 . .“ ”그래 알았다. 기회가 오면 연락하마.“
그 날 저녁에 갑동이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큰 얘야 밤이다. 운전 조심 하거라. 도착 하거 던 연락은 꼭 하여라 엄마 걱정한다. ” 예 알겠습니다. 엄마! 나 내려갑니다. 의사 선생님 말 잘 듣고 치료하세요. 시간 나면 또 올라오겠습니다.“
다음 날 동일 병원에 갔다. 작은 얘가 운전을 하고 갔는데 병원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북쩍 대었다. 서울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고통 받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아프다는 게 우리 만의 고통은 아닌가 싶었다. 내과 과장 선생님을 만났다. 작은 얘하고는 퍽이나 절친한 사이인가 악수를 하고 서로 포웅하며 절친함을 과시 하였다.
“작은 얘야 입원 수속을 하여라. 과장 선생님과 잠간 상의 할 일이 있으니 나중에 보자.”
“예 아버지 친구가 벌써 준비를 다 하였다고 합니다. 5층 특실에 입원하기로 되어 있으니 점검하여 보겠습니다.” 작은 얘가 자리를 뜬 사이에
“과장님 대학병원에서 검사 한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을 환자는 물론 을동이 에게도 절대 말하지 마세요. 모르면 약이 될 수 도 있습니다. 도리 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학 병원에서 보내 온 차ㅡ트를 보니 상태가 아주 안 좋습니다. 암 세포가 여러 군데로 전이 되어서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수술을 한다고 하여도 체력적으로 견뎌 내기가 불가능 합니다. 조용히 임종을 맞는 수 밖 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치료하는 흉내라도 내야 하기 때문에 각종 검사는 해 봐야 겠습니다. 치료 비용은 물론 입원비, 간병인 월급, 식대...등은 들어 논 보험으로 처리 되오니 돈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리 해 주십시오.”
“아버님 말씀 놓으십시오. 원일이 친구입니다. 저가 매우 불편합니다.”
“그래 알았다. 그럼 말을 놓으마 남은 시간이 얼마 인지는 모르지만 편안하게 지내다 갈 수 있도록 자네가 힘을 써 주게.”
“예 알았습니다.아버님”
을동이가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에 입원시켜 놓고 내려 왔다.
“아버지 올라가 보십시오. 조용하고 창 밖의 경치도 좋아서 어머님 병환도 빨리 치유 될 것 같습니다.”
아픈 노구를 이끌고 여기저기로 각종 검사를 한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팔 에는 각종 링거를 꼽고 먹는 약도 한줌이나 되어서 먹기가 거북스러운 것 같았다. 입원 하기가 바쁘게 “호스피스”와 간병인이 벌써 선임되어서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다. “호스피스”는 종교가 기독교 인지 환자와 호흡을 맞춰가며 찬송가도 불렀다. 아내의 마음이 다소 안정을 찾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간병하는 아주머니도 곱상하게 생겨서 친밀감이 들고 각종 시중이며 청소를 꼼꼼하게 잘 하여서 신뢰감이 들었다. 나이는 아내보다 에닐곱살 아래 인 것 같은데 붙임성 좋게도 언니 언니하면서 시중을 잘 들었다.
다들 고마운 사람들이였다.
“작은 얘야 호스피스와 간병인의 처우는 잘 해 주고 있는가?”
“예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 보다 충분히 약정 하였습니다. 돈은 걱정 말고 완쾌하여서 부산에 내려 갈 때는 별도로 보너스를 드리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너가 효도를 하는 구나 고맙다. 효도 하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날이 갈수록 얼굴은 수척하여 지고 힘이 없다고 하면서 왜 서울에 오면 곧 나을 것 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차도도 없고 점점 더 기운이 없어지냐고 불평을 하였다. 하긴 벌써 2개월이 넘었다.
하루는 남편을 불렀다.
“여보 어제 저녘엔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이 잘 안되는데 천사들이 두사람 와서 팔을 양쪽에서 부축하며 같이 가자고 합디다. 이 세상에서는 고생을 많이 하였지만 자기들만 따라가면 아픔도 슬픔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합디다. 그래서 내 남편을 두고 혼자 갈 수 없다고 뿌리쳤습니다.”
“이제 다시 오거든 나도 같이 갈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해 보소.”
“여보 복 없는 나를 만나서 고생만 싫큰 하여서 죄송해요. 내가 가고 없더래도 여생을 영화를 누리다가 나중에 와서 만납시다.”
“당신 없는 영화? 그런 말 하지 말고 회복 할려고 노력을 해 보세요.”
“이제는 영 글렀어요. 내가 내 병을 잘 압니다. 종말이 온 것 같아요.”
곁에서 보자니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나서 있을 수가 없어서 간병인 만두고 병실을 나왔다.
“............아주머니께 긴히 드릴 말이 있습니다. 얘기 좀 합시다.”
“언니 무슨 말씀인데 그리 뜸을 드립니까?”
“아주머니 이름은 뭐며? 올해 몇입니까? 자식은 몇인가요? 그리고 고향은 어디요? 말씨가 순 서울 말은 아닌 것 같은데 . . . .”
“이름은 정 연순 이고, 올해 오십일곱이며 시집간 딸이 하나 있는데 미국에 이민 갔고, 고향은 경상도 거제도요.”
“그런데 서울엔 왜 왔소?“
“1960년도에 23세의 나이로 결혼하였으며 영도 봉래동에 있는 대형 조선소에 근무하던 남편은 딸 하나 낳고 결혼 5년차에 조선소에서 사고가 나서 돌아 가셨는데 산재처리가 되어 다달이 300만원 정도 보험금이 나왔는데 딸이 성년이 되어 시집 가고나니 줄어서 요즘은 200만원 정도 받고 있습니다. 딸 하나 잘 키워 보겠다고 무작정 서울에 와서 놀면 뭐하나 싶어서 식당, 공사장......안 해 본 게 없습니다. 그나마 딸 하나가 잘 커 줘서 희망이었는데 결혼 하자 마자 남편 따라 미국에 가면서 함께 가자고 하였으나 꼬부랑 글 한자도 모르는 제가 가서 어찌 살 것인지 생각하니 벌어먹어도 우리나라에서 벌어 먹고 살려 고 여기 남았습니다.”
“죽는 사람 소원하나 들어 주세요. 우리 영감 내가 먼저 가고 나면 무슨 낙으로 살겠어요. 아줌마가 시중을 좀 들어주면 안 될까요? 한 2개월 사겨보니 아줌마의 성품이나 살림살이 솜씨가 마음에 들어서 늙으막에 친구 삼고 한 평생 같이 살아 줬으면 합니다. 살림도 먹고 살 만치 있고 자식들도 다 제 밥벌이 하니 노후가 편할 것입니다. 장사한다고 외국 여행 한번 못가고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 아주머니와 함께 여행도 다니시고
맛있는 음식도 사 잡수시면서 서로 의지하고 살면 안 될까요? “
갑자기 제안을 받고 보니 혼란스러운 가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고 창 밖을 응시하며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한번 생각 해 보겠습니다. 자식들은 몇인가요?”
“쌍둥이 아들 둘 시집간 딸 하나 있습니다. 다들 잘 살고 있어서 부모에게 손 벌릴 자식은 없습니다.”“
“생각 할 시간을 주십시오. 언니도 자식들이나 본인인 남편에게도 말씀드려서 의중을 알아 봐야 될 것 아닙니까?”
“하긴 내 생각이지 정작 본인은 어찌 생각할 것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오후에 남편이 병원에 왔다. 간병인 아줌마가 있는 자리에서는 할 얘기가 아니어서 아줌마더러 집에 다녀오라고 하고 말을 꺼내었다.
“여보! 이제 내 명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사람이 와서 같이 가자고 소매를 끄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못 간다고 발버둥 쳐 보지만 그것도 한 두 번 이지 이제 힘이 부처서 그것도 못하겠습니다. 여보! 당신을 두고 떠난다니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동안 변변히 모시지도 못하고 죽자 살자 살림모우고 자식 키우느라 당신에겐 정성을 쏟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
“별 소리 다하오. 당신이 옆에 있어 힘이 되었소. 나는 행복한 사내요. 나 같이 아내 복 많이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하시오.”
“여보! 죽기 전에 당신에게 드릴 말씀이 있소. 이것이 소원이며 나의 유언이요.”
“유언이라뇨? 유언은 죽을 때 남기는 말이요. 치료하면 나을 텐데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 자포자기 하지 말고 힘 내세요.”
“이렇게 말장난 할 시간이 없소. 당신 혼자 두고 갈려니 눈을 못 감을 것 같으니 저가 하는 말 단디 들으소 간병하는 아줌마를 사겨보니 성품이나 모든 면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 분도 과부라고 하니 노리에 친구로 삼아서 여생을 함께 보내시면 어떨까요?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이 아직 살아 있는데 . . . . . 그런 말 하지마소. 될 법한 말도 아니요.”
“그러니까 내 소원이라고, 유언이라고 하지 않소. 아줌마에게도 이런 제안을 드렸더니 생각 해 보마는 말을 들었으니 결론이 어찌 날 런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 뜻이 확고하다면 어찌해도 성사 시키고 숨을 거두겠소. 죽어가는 아내 소원하나 들어 준다고 생각하고 허락 해 주세요.”
아내가 기운이 없는 것 같아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아들 집에 왔다.
2개월 동안이라도 아들 집에서 며느리에게 밥 얻어먹는 것도 결코 마음 편한 것이 아닌데 만약 아내가 세상을 뜨고 나면 어느 아들 집에서 눈치 밥을 먹어야 할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여 온다.
요즘은 현대 의학이 발달하여 평균 수명도 8~9십이라니 아직도 앞날이 먼데 어느 며느리가 홀 애비 시아버지를 모시는 것을 받아 드릴지도 걱정된다. 내의며 빨래를 누가 좋다 할 것인지를 곰곰 생각해 보면 아내의 제의가 무시 할 것도 아님을 알겠다. 아내의 소원이며 유언이라는 명분을 세워서 받아 드릴 것도 검토 해 봄직도 하여서 며칠을 두고 생각하기로 하고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며칠 뒤 병원에 가서 아침 일찍 나온 간병사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니 별로 나빠 보이지 않아 슬며시 멀리서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한편 며칠 뒤에 아내가 일찍 일어나자마자 간병인 에게
“생각 해 보았어요? 소원하나 들어 주소. 내 장담 하지만 절대로 고생 시키지는 않을 것이요. 우리 그이 무뚝뚝하여도 인정 많고 사리 밝아 절대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요.”
“집에가서 많이 생각 해 보았습니다. 내가 지금 간병인 생활을 하지만 돈이 궁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사람이 그리워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보험 공단에서 나오는 돈으로도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습니다.
남편 되시는 분이 허락하고 자녀들도 받아 드리겠다고 하면 그럴 마음도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어떻게 하든지 남편이랑 자녀들에게서 동의를 받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이고 고마워라 이제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걱정 하던 문제가 해결되니 몸이 더 나아 질 줄 알았는데 역설적으로 도리어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쌍둥이 아빠가 병실에 나왔을 때 간병인 없는 잠간의 틈을 봐서 아줌마의 뜻을 알렸다. 우선 쌍둥이와 딸에게 귓 띰을 하여서 의향을 타진 해 보라고 일렀다.
그 날 저녁 작은 얘와 며느리를 앉혀 놓고 어머니의 뜻을 조심스럽게 전 하였다. 아들 을동이는 약간 시무룩한 반응이지만 며느리는 찬성의 기미가 보였다. 아무리 자녀들이 정성껏 잘 모신다고 하지만 누가 어떻게 모실는지 한계가 있을 것이고 아버님도 마음 편치 않을게 분명 할진대 새어머님을 모시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아버지가 이를 수락 할 것인가가 걱정되었다. 을동이가 아버지의 의향을 묻는다.
“아버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우리와 같이 사시면 안 되겠습니까? 약간의 불편이 있더래도 함께 삽시다. 잘 모시면서 효도 하겠습니다.”
며느리가 을동이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는가 움찔한다. 아들과 며느리의 계산은 확연히 다른가 보다.
“나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너희들에게 얹쳐 사는 것도 망서려 진다. 부모자식 지간이라고 꼭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굴레를 씌운다는게 부담 스럽구나 다음에 어떻게 하드래도 우선은 어머니 제의를 따르겠다. 을동이 너가 부산의 형과 동생 병순이 에게 전화하여서 의사를 타진 해 보아라. 한 사람이라도 반대 한다면 나도 하지 않겠다.”
병원에 나가서 어제 저녁에 작은 얘 부부와 건넨 이야기를 하면서 아들과 며느리의 생각이 다르더라고 하였더니 “그래서 한 다리가 천리라는 거요. 어느 며느리가 홀 시아버지 모시기를 반기겠어요. 더군다나 서울내기가 . . . . 어제 밤에도 저 세상 사람(천사)들이 와서 같이 가자고 하여서 밀어 내었더니 일주일 후 금요일에는 다시 와서 꼭 데려 갈 터이니 준비하라고 이르고 갔습니다. 죽음 준비를 해야 겠으니 나 죽기 전에 자식들 얼굴이나 보고 싶습니다. 다들 모이라고 하여 주세요.”
아픔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입술을 깨물어서 위,아래 입술이 잘 익은 오디 처럼 되어 있었다. 아내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죽이고 뒤 따라 죽었으면... 하고 상상도 해 본다. 아내의 말을 듣고 난 후부터 간병인 아줌마의 거동을 살피니 착실한 사람같이 보이고 다 같은 경상도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더욱 친근감이 들지만 그래도 다소 서먹서먹한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 . . . . . .
작은 며느리가 부산의 동서에게 어머님의 뜻을 전달하고 설득을 한 모양이다. 여자들(며느리)의 마음이야 매 일반이어서 어디 홀 시아버지 모시기를 반길까 “우선 먹기는 꽂감이 달다.”고 형님 부부를 설득하여서 그러마고 약속을 받아 내고 올캐 병순이 에게는 큰 오빠가 이야기를 알아 듣게 잘 하라고 당부를 하고 그 결과를 서울에 알려달라고 하였단다. 이틀 후에 어렵게 수락을 하여서 어머님의 뜻을 따르겠노라는 연락과 부산의 아들내외 손자 2명과 경북 병순이 가족 4명이 목요일 오후에 병원에 모이겠다는 연락이 왔다. 곁 드려 목요일에 부산의 어머님이 다니시던 교회 목사님도 병원에 문병을 오시겠다는 연락도 겸하여 왔다.
금요일 아침 일찍 아내는 간병인 아줌마에게 물수건으로 전신을 깨끗하게 딲아 달라고 한 후 작은 며느리에게 말해서 정갈한 옷을 입고 목사님을 뵙겠다고 하였다. 약속 시간인 10시경에 목사님과 자식들, 손자들, 아내의 간곡한 요청에 의하여 간병인 아줌마까지 병실에 모두 16명이 모였다.
목사님의 기도로 시작하여 엄숙한 예배가 시작되었다.
찬송가 545장“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목사님과 함께 부르면서 예상외로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신앙의 위대함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목사님의 간곡한 설교가 있었다. “원하신다면 좀 더 이 세상에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간곡한 간구와 하나님의 뜻으로 천국에 갈 수 밖에 없다면 남은 유족들에게 위로를 주십사고”하는 설교로 마무리 하였다.
아내가 지금까지의 투병의 고통과 천사들이 오늘 데리려 오겠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하였다. 아내가 죽기 전에 꼭 자녀들에게 당부하고 갈 유언이라며
“내가 가난에서 벗어나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생선 비린내를 마다 않고 험한 생선 장수를 하면서 너희들 아버지에게 아내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이때껏 살아 온 게 너무나 미안하여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이제 늙으막에 여행도 다니며 좀 즐겁게, 마음 편하게 모시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노년의 아버지를 자식들에게 부탁하고 떠나려니 너무나 가슴 아파서 아버지의 친구로 노년을 함께 지내라고 지금 여기 참석한 간병인 아주머니 정 연순씨를 설득하여 노년을 함께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러니 여보 ! 당신도 거절하지 말고 자식들도 어미의 유언이니 꼭 들어서 잘 모시도록 하여라. 사실 어느 며느리가 혼자 된 시아버지 모시기를 반기겼느냐? 그 대신 새 어머니에게 효도하여라. 너희들은 어미의 유언을 실천 하겠느냐?“ 이구동성으로 ”예!! 어머니“ 모두가 그러하마고 약속을 하였다.
“여보! 당신과 정 연순씨가 손을 잡는 것을 보고 싶소. 여기 참석한 모두 앞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세요. 그리고 어려운 부탁이지만 목사님께서 새로 출발하는 두 사람을 위해 주례를 부탁합니다. 마지막 부탁이요.”
죽는 사람의 부탁인데 어찌 외면 할 수 있을 것인가 소원대로 어색하지만 손을 잡았다. 이왕 잡은 손이라 각자는 묘한 감정으로 파라다이스의 꿈을 꾸며 손에 힘을 더하였다. 목사님도 평생 처음 당해보는 주례사를 엄숙히 이어갔다. 아내는 힘들어 보이지만 웃는 얼굴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아내의 목소리가 차츰 가늘어 지고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여보! 밖에서 나를 데릴러 온 천사들이 오고 있습니다. 남은여생 즐겁게 사시다가 하늘나라에 오시면 그때 잘 모시겠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드니 짚불이 꺼지는 것 같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여보!!! 어머니!!!, 할머니!!! 울음바다가 되었다.
의사 선생님들이 몇 명 급하게 와서 눈을 열어보고, 손목에 진맥을 해 보드니 운명하셨다고 “사망 선고”를 하였고 간호사에게 눈짓으로 무언가 지시를 하였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끝이 나는가 싶으니 너무 허무한 것 같다.
죽음으로 또 하나의 인연을 맺어주고 간 배 복래 씨의 영전에 한 송이 국화꽃을 올린다.
201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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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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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작입니다. 처음시도한 장르이오니 지도편달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