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가람형의 미국 유학 시절에 안부 편지를 쓰면
가는데 보름 오는데 보름, 한 달이 걸려야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세상이 발전하고 또 발전하더니 이젠 카톡으로
아무 비용 안 들이고 미국의 안부를 실시간으로
한국에 전한다.
가람형과 나는 미국에 살고, 큰형과 큰누나, 작은누나는
한국에 사는데, 넷째와 막내가 미국에 살다 보니
한국의 정 많은 큰누나는 때때로 안부를 글로 전해
오기도 하고 카톡 전화를 걸어 목소리로 안부를
확인하기도 한다.
지난번에 썼던 '받기 곤란한 칭찬'이란 글을 가족
그룹채팅방에 올렸더니, 외가 풍경이 떠오른다고
큰누나의 옛 외가 추억을 되살려보고 있다는 답글을
주셨다.
큰누나의 답글을 보다가 핸드폰을 든 내 손에 눈길이
갔고, 귀가 찡하게 울리며 그 옛날 큰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니 손이 와 이런노? 일로 와 봐라~”
막 골목 놀이를 끝내고 들어오는 내 손을 본, 당시
갈래머리 고등학생이었던 큰누나는 그렇게 걱정 섞인
큰소리를 내며 나를 부엌으로 데리고 들어갔었다.
엄마 품에서 벗어나 골목놀이에 맛을 들인 다음부터,
겨울철의 내 손은 사람 손이 아니었었다.
손등 피부가 갈라져 자잘한 딱지들이 켜켜이 앉아있는
것은 물론이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주름 잡힌 곳마다
살이 터져 아예 붙을 엄두조차도 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손등엔 콧물을 쓱 닦아버린 흔적들도...
그렇지만 그 당시야 어디 나만 그랬던가?
도시 변두리 골목놀이에 여념 없던 대부분의 또래들이
다 그러했으니 별반 부끄러울 일도, 창피할 일도 아니었었다.
내복 위에 돕바 하나 입으면 겨울 복장 끝.
장갑이야 골목놀이 아이들에겐 사치품에 불과했고.....
더러 털장갑 하나 재수로 생겨도 끼나 안 끼나 별반
차이가 없던 시절이었다.
팽이를 치다가,
얼어붙은 골목 수채에서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타다가,
마음이 동하면 10여분 발품을 팔고 방천으로 나아가
빙판이 녹아서 울렁거릴 때까지 스케이트를 탔었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난 손이 어찌 성할 날 있으랴.
갈라진 손가락 마디에 구슬치기 한답시고, 구슬을
올려놓으면 그 살 속을 파고들던 따끔거림은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누부야 뜨겁다. 찬물 좀 부도고~”
“살 불려야 되니까 뜨거워도 참앗!”
세숫대야에 두 손을 담그고 큰누나를 보니, 큰누나는
찬장 앞에 놓여있던 참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야~! 아푸다 안 카나. 고마해라 누부야~”
누나는 내 엄살 섞인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맨들맨들한 돌로 내 손등을 문질렀었다.
“내가 됐다 칼 때까지 벗으마 안 된데이.”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간 누나는 내 손등에 콜드크림을
잔뜩 바르고는 하얀 면장갑을 끼워주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다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바깥에서 놀다가 따뜻한
방에 들었던 나는 그때 큰누나가 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참 달디 단 잠을 잤을 것이다.
그 당시 큰누나는 엄마 맞잡이로 부엌일에 집안일에
공부까지 참 잘했었는데, 큰아들과 큰딸 둘 다 대학
공부시킬 형편이 안 되어 서울로 돈 벌러 떠났던 누나.
사진식자 인쇄기술이 일본에서 처음 도입될 때,
그 기술을 배워 직장 생활하던 와중에 야간 대학을
다녔고, 경력을 쌓은 후 고향 대구에 돌아와 사진식자
인쇄기술을 보급하며 대구 인쇄업계의 대모가 되고,
신학에 뜻을 두어 못다 한 학업 다 마치고, 여성 목회자로
개척교회를 이끌다가 이젠 자형과 함께 은퇴생활을
즐기는 큰누나.
외가의 옛 추억을 되살리게 해 주어 고맙다는 큰누나가
나는 언제나 참 고맙고 자랑스럽다.
첫댓글 큰누나가 대단한 분입니다
동생인 마음자리님도 사랑해주고
학업에 대한 열망도 있구
사업적 으로도 출세한 분이네요?
이런분 한분만 있어도 그 가족들은 큰 도움을 받게 되지요?
!@#$%^&*()
마음자리님이 며칠 안보이니 궁금 했습니다
다시 돌아오니 방갑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시댁도 일으키고 친정도 보살피고..
대단한 누나입니다. ㅎㅎ
누나 자랑할 때 제 입이 쩍 벌어집니다.
아! 전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충성~!
옛날에는 공동목욕탕에도
때를 벗기는 돌들을 어머니들이
담아 가셨던 기억이 납니다
추운겨울날 장갑도 귀하고 했지만
얼어서 터진 살갗은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와 누나들의 정성으로
다시 재생되어 졌습니다~^^
튼손 튼발... 대단했어요. ㅎㅎ
말씀처럼 어머니와 누나들의 정성으로
돌아왔는데 전 주로 누나가 담당했어요. ㅎ
큰누님이 참 존경 부럽네요...
살림하며
아이들 기르시며
직장일 공부
그힘든 사랑실천
목회를 하셨 으니요...🙏🙏
❤️❤️👍👍
네. 역경을 닫고 많은 것을 이루어낸
한국의 여인이지요.
수샨님의 글들 보며 수샨님도
제 누나 못지않게 봉사와 베품의 삶 사신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자리님 글을 읽으며 어릴적 생각이 나고 수채라는 말 잊고 있다가 반가웠어요. 옛 기억을. 다시. 한번 되집어. 봅니다
추억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채... 지금은 상전벽해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지요. ㅎ
누님께서 열정가셨네요.
바람대로 노력을 하셨으니까
자기 삶을 아름답게 꾸리셨습니다.
존경받을 여성상입니다.
저도 손이 몇 번 텄습니다.
찬바람 맞고 다녀 그랬지요.
겁 많고 마음 여린 누나인데 대신 의지가 굳고 성실한 삶을 살았지요.
아버지를 많이 닮은 누나였습니다.
찬바람 맞아도 손이 트나요?
얼마나 세게 맞으셨길래요? ㅎ
마음자리님의 큰 누부야.. 정말 멋지신 분입니다. 뵙고 싶기까지 하네요 ㅎㅎ
예, 저도 못본 지 오래라 보고 싶어요. ㅎㅎ
그 추운 엄동설한에 거북이등짝을 한 손들이 모여 남자아이들은 구슬치기
여자아이들은 삔치기를 했었지요
그 손으로 노오란 콧물 쓰윽 닦는 것은 기본 이구요 ㅎㅎ
오랜만에 들어보는 콜드크림에 그 동네가 생각이 나서 히죽히죽 웃고 있습니다
좀 있는 집은 안티프라민이 있었는데 사계절은 아까징끼가 ,겨울에는 안티푸라민이 만병 통치약이었지요
누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동생들을 업고 키워서 알지요
꼴에 남자랍시고 ㅎㅎ 여자아이들이 노는 놀이에 낀 적이 없어 '삔치기'는 어떻게 하는 놀인지 모르겠네요. ㅎㅎ
아까징기... ㅎ 참 오랜만에 듣습니다. 안티푸라민 대신 미국에선 태국산 호랑이연고 쓰고 있지요. ㅎ
그 업어키운 동생들에겐 가리나무님이 제 큰누나 같겠습니다.
마음자리님 글보니
저도 옛날 생각 납니다
엄마가 뜨거운 물이 담긴 양철통에
저를 담가놓고 껍질이 벗겨지도록
때를 밀어대던...
아프다고 징징거리면 머리통을
쥐어박아 가면서요 ㅎ
저는 손트지 말라고 맨소래담 ?을
엄마가 발라 주셨어요
누님이 참 훌륭하신 분이군요
전 여동생과 단 둘이라 어릴땐
형제많은 집이 부러웠어요
특히 언니 오빠 있는 집이..
전에 마음자리님의 두레밥상 글을보고
참 정겹게 느껴졌어요 ㅎ
올만에
마음자리님 정겨운 글 반갑게
잘 읽었어요 자주뵙길 원합니다^^
해솔정님의 최근 글, 다락방 이야기와 물레방아 이야기 읽으며 많이
공감했고 제 추억과 연결해보며
즐거운 상상들을 했었지요.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추억들이
있어 참 좋습니다.
마음자리님의 글을 읽으면,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지난 어린시절 기억들을 다 풀어내시니까요.
글 중에 수채란 말이 나오길래,
슬쩍 미소 짓습니다.
요즘 아이들, 수채라하면 알아들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제 시대는 콜드 크림하면 몰랐지요.
구리세린이란 걸 발랐습니다. 아마도 일본식 발음인 것 같아요.
그시절 큰누님 또래면,
큰딸은 살림밑천이란 말을 들었을 것 같네요.
요즘 달라진 사회 정서가
마음자리님의 글을 읽으면 언제나 마음 푸근해요.
댓글을 쓰고 있으면
항상 마지막 구절에는 마음이 울렁입니다.
코끝이 찡해져요.^^
콩꽃님 댓글을 읽는데 제 마음도
울렁울렁 합니다.
귀한 줄 몰랐던, 힘들다고 불평했던
그 시절들이, 돌아보니 보석처럼
반짝이는데...
그 보석들을 우리 사랑하는 후대들에겐
전할 수가 없으니 안타깝기도 합니다.
여러 님들이 공감해주는 추억글들은
나중에 모아 주었다가, 다음 세대나 그 다음 세대에 '옛날 옛적에'
이야기로 묶어서 USB에 담아 넘겨줄까 합니다.
콩꽃님 늘 쓴글보다 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자리 님 글은 늘 정감이 넘칩니다.
형제자매 간 정도 좋은 것 같고요.
옛날 시골에는 손이 튼 아이들이 많았답니다.
아마 저도 그랬으리라 짐작합니다.
큰누나는 엄마같은 존재였지요.
어린동생의 튼손을 깨끗이 씻어 주던
큰누나.
그 마음씨 고운 누나 내외분이 목회를
하셨군요.
어린 날의 고향 생각이 나서
마음이 울컥하기도 하네요.
마음자리 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제 글을 본 형들과 누나들도 그 시절이 일생 중 가장 행복했다 하니...
저는 참 사랑과 복을 많이 받은
그 가족의 막내였던 것 같습니다.
가족들 간에 알뜰히 챙겨주거나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주고받은 정은 깊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제 추억 글속에서 울컥하곤 한답니다. ㅎㅎ
어릴때 손등이 부르튼채로
동내 논에서 썰매타던 추억이 생각나네요
큰누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고
이제 여유로운 생활을 하신다니
참 잘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방학 때 외가에 가면 시골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자연과 어울려 노는 그 친구들과 헤어질 때 많이 섭섭해하곤 했던 기억 납니다.
큰누나, 제 마음처럼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단하신 큰 누님,
자랑스럽겠습니다.
모두 가난했던 시절
손이 엄청 트고 험해져도
행복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가람형은 어찌 지내시는지도 궁금하고 ㅎ
가족분들 모두 행복하고 평안한 나날 되세요.
큰누나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제 어깨가 활짝 펴집니다. ㅎㅎ
대개 큰누나는 어머니나 진배없다고들 하던데
그 사랑 듬뿍 받고 자랐군요.
대구는 인쇄술로 개화기를 일찍 열었다고 하던데
누나도 거기에 한몫 하셨군요.
대구의 사진식자 기술은 큰누나가 처음 보급하고 가르쳤는데 그때 일 배운 사람들이 대구 사진식자 인쇄의 선구자들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전 받은 사랑이 준 사랑보다 훨씬 커서
ㅎㅎ 다 못 갚고 떠날 것 같습니다.
손이 트는 것조차 모르던 어린 시절이
있었어요. 우리에게는.
다정하고 알뜰살뜰한 큰누님은
넘나 자랑스러운 삶을 사셨네요.
막둥이로 큰누님의 사랑을 듬뿍받은
맘자리 님이라서 가족 사랑도 유난히
깊은 것같아요.
받기만 할 때는 몰랐는데 커서 보니
제가 아주 큰 사랑을 가족에게서
받았더라구요.
따로 갚을 방법도 변변치 않아서
이렇게 글로 갚고 있습니다. ㅎ
ㅎ
저는 이전에 오줌으로 손 씻었어요
가난했던 시절이지요
나이차 많이나는 누님에게 사랑 많이받으셨군요.
저를 어렵게 여겼던 막내 아우 생각이 나네요
단풍님은 엄한 형이셨나요?
속 사랑 깊으신 분인데, 동생분들이
속 깊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가 봅니다. ㅎ
ㅋㅋㅋ
그 시절 풍경이 그려집니다.
마음님은 누나가 있어서
손도 씻겨주고 챙겨주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 훤히 그려집니다.
손씻고
안티프라민이나 콜드크림 잔뜩
발랐지요.
저는 겨울에
소 여물에 손등을 박박 문질러 닦아서
손이 트지 않았답니다.
소 여물에 손을 잘 닦으면 손이 안 튼다는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시골 살던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하던데 긴가민가 했었습니다. ㅎㅎ
누님의 따스함이 느껴져 가슴이 포근해지는것같아요
마음자리님의 글 읽으면서
저도 어린시절이 떠올라 잠시 추억속에 잠겼답니다
오빠 따라 다니면서 겨울이면 연못에서 썰매타며 놀다가 손시려워 나무장작불위에 손쬐기도 했고
발도 쬐다가 양말 빵구도 나고 ㅎ
언니가 가스나가 손이 이게 뭐꼬 하면서 쇠죽끓이던 여물에 손문질러 씻고
밤이면 안티푸라민 발라줘서 장갑끼고 잤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고향시골 마을에는 몇사람 살지도 않고 빈집들만 덩그러니 지키고 있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큰누나시군요. 마음자리님 도 그런 누나와 비슷한 의지의 사람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