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통로
말은
생각의 통로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조심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인
말을 내뱉게 됩니다.
부정적인 말은 다시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부정적인 말은
가능성의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지요."
그리하여 '말 관리'
이전에 '마음 관리'를
먼저 해야 합니다.
수원지가 오염되면
파이프 라인과 수도
꼭지를 통해 오염된
물이 나오게 됩니다.
마음이 오염되면
입에서 부정적인 말
미움의 말 정죄의 말이
계속 나오게 된답니다.
살리는 말을 하려면
마음의 그릇에 남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음의 그릇에 남의
말씀이 채워 질때 입을
통해 생명의 말 살리는 말
유유히 흘러 나갈수~
있습니다.
--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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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配慮)의 힘
/ 詩人 박 목 월
내가 6살 때 였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는데...
아버지는 글이 쓰고 싶으셨는지 저녁을 먹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 상을 가지고 오라 하셨습니다.
책상이 없었던 아버지는 밥상을 책상으로 쓰셨
습니다.
어머니는 행주로 밥상을 잘 닦아서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책상에 원고지를 갖다 놓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나에게 세살 된 여동생을 등에 업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불같은 포대기를 덮고
"내 옆집에 가서 놀다 올께" 하고 나가셨습니다.
나는 글 쓰는 아버지 등 뒤에 붙어 있다가 잠이 들었죠.
얼마를 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나를 깨워서 눈을 떠보니까 아버지였습니다.
"통금시간이 다 되어도 어머니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나가서 어머니를 좀 찾아 오너라."
나는 자던 눈을 손으로 비비며 털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왔는데 밖에는 무릎 높이
까지 눈이 쌓였고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집 저집 어머니를 찾아 다녔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지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집으로 돌아 오려다가 갑자기 어머니와 제일 친한 아주머니가 아랫
동네에 살고 계신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집에 한 번만 더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골목길로 들어서는
데 전봇대가 있고 그 전봇대 옆에 나보다 더 큰 눈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눈사람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동규야~" 하고 불렀습니다.
보니까 어머니
였습니다.
어머니는 눈을 철철 맞으며 머리에 쓰고 있던 보자기를 들추
면서 "너 어디가니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볼멘소리로 "어머니를 찾아오라고 해서 아랫동네 아줌마 집에 가는 중입니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어머니는 갑자기 내 귀에다 입을 대고 물었습니다.
"네 아버지 글 다 썼니?"
나는 고개만 까딱 거렸습니다.
어머니는 내 등을 밀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삽니다.
세월이 갈수록 내 머리속엔 몇 시간씩이나 눈 구덩이에 서서 눈을 맞으며 세 살 된 딸을 업고 계시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세 살 된 내 여동생이 아버지가 시를 쓸 때 울어서 방해가 될까 봐 그렇게 어머니는 나와서 눈을 맞고 서 계셨던 겁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직장을 다닐 즈음에 조금 철이 들어서 어머니
에게 한번 물었
습니다.
"엄마, 그때 얼마나 힘들었어?
돈도 많이 벌어오지도 못하고. 그런데 어머니는 뭐가 좋아서 밖에 나가서 일도 하고 힘들게 고생하면서 밤에 애를 업고 밖에 나가 있었어?"
나는 어머니가 우리집 생활을 끌고 가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웃으면서
"그래도 니 아버지는 밤에 그렇게 시를 다 쓰고 나면 발표하기 전에 제일 먼저 나보고 읽어보라고 해"
하고 웃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살아가며 힘든 일을 겪어가면서도
시인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詩 한 편을 읽어보라"
하는 아버지의 배려의 힘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은
이런 배려를 통해서 서로 사랑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박목월 시인 아들 박동규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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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려란 ]
어느 날 고흐가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하는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사람의 가슴에는 포장용 천으로 사용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는데 바로 천에 새겨진 글자 때문이었다.
Breakable(잘깨짐)
그 문구를 보며 고흐는 자신의 무릎을 쳤다.
아하!
사람은 깨지기 쉬운 존재로구나!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앞을 지나쳐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다시 보았는데, 그의 등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Be Careful(취급주의)
고흐는 등에 새겨진 글을 보고 다시 한번 무릎을 두드렸다.
맞아, 사람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거야!
우리 주변에서 가장 잘 깨지는 것은 유리병이다.
그러나 이 유리병 보다도 더 약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온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깨지고, 서운한 말 한마디에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상처 입은 마음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준다
관계는 사람들의 마음이 연결될 때 형성되는 것이다.
관계도 마음처럼 약하기 때문에 유리병처럼 쉽게 깨지고 상처를 입는다.
특별히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절대 깨지지 않는 관계란 없다.
모든 관계는 특별한 보호를 통해 관리될 때만 지속될 수 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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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를 탄생시킨 박정희 대통령-
초대 원장을 맡은 최형섭 원장은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미국을 돌며 한인 과학자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가난한 조국은 당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정성이 통했음인지 첫해인 1966년 18명이 귀국한 후 1990년까지 영구 귀국한 과학자가 1,000명을 넘습니다.
부자 나라 미국에서 과학자들이 이렇게 유출된 역사는 없었습니다.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 나라인 미국을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KIST의 재미 한국인 과학자 유치는 세계 최초의 역(逆) 두뇌 유출 프로젝트다”
며 혀를 내둘렀다고 합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날 몇몇 과학자의 연봉이 일국의 대통령인 자신의 연봉보다 높은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배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엔 없던 의료보험까지 미국 회사와 계약해 들게 해줬습니다.
각계에서 특히 서울대에서 반발과 진정이 쏟아졌지만 박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KIST를 살린 인물이라고 평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설립 후 3년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었고, 연구소 건설 현장에 직접 나와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뿐 아니라 국가기관의 부당한 간섭도 원천 예방해 주었다고 최형섭 초대 원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와대에서 열린 KIST 소장의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 대통령은
‘절대로 인사 청탁을 받아들이지 마라.’
고 당부하셨다.
그것이 오늘의 KIST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출범한 KIST는 국가 건설의 초석을 쌓았습니다.
KIST의 시작은 미약하고 초라하게 출범했으나 그 KIST가 이 나라 과학의 근간이 되었고 기업의 두뇌를 산출해서 오늘의 IT 강국 대한민국을 탄생시켰습니다!
KIST는 196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이 발표한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 과학연구소 설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근거해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설립됐습니다.
여기엔 미국의 1000만달러와 우리 정부 출연금 1000만달러를 합쳐 종합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탄생했습니다.
초대 소장이었던 고(故)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전국 30여 곳을 둘러본 뒤 대통령에게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을 연구소 부지 1순위로 보고했습니다. 농림부는 펄쩍 뛰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농림부 장관을 데리고 홍릉으로 가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과학기술연구소는 더 중요하다. 38만평을 모두 연구소에 내줘라"
고 했습니다.
KIST에 첫 예산 10억원을 배정할 때도 경제기획원이 예산을 깎으려 하자
"원하는 만큼 다 주라"
며 KIST 손을 들어줬습니다.
과학계엔
"조선시대 장영실 뒤에 세종이 있었고
KIST 뒤엔 박정희가 있다"
는 말이 퍼졌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과학기술 발전은 국가 원수가 선두에 서서 적극 지원하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발전사를 연구한 미국 스티븐 데디에르 박사의 말입니다.
박정희라는 지도자의 관심을 먹고 자란 KIST는 40여년 동안
국산 1호 컴퓨터,
자동차와 반도체 원천기술 등을
개발하며 한국 산업과 과학계를 이끌었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등
20개가 넘는 대학·연구소도 KIST에서 탄생해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4000여 명의 석박사급 인재를 키웠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진정한 '과학대통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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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