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이씨 시조 고려때 상서좌복야 광산부원군인 이 정
시 조: 이 정(李 靖)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의 후손인 정(靖)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8세손 순백(珣白)을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로서 왕을 호종한 공(功)으로 은청광록대루(銀靑光祿大夫)에 오르고,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져 이씨를 사성(賜姓)받았다.
따라서 후손들이 광산(光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界)를 어왔다. 조선 때 선제(先제)는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태종실록(太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서 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들과 함께「고려사(高麗史)」를 개찬(改撰)하였으며,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지냈다.
그의 손자 복선(復善)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고, 달선(澾善)은 호당(湖堂: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으며,문명(文名)이 높았다.
달선의 손자 중호(仲虎)는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는데, 그의 아들이 선조(宣祖)때 북인(北人)의 영수인 발(潑)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고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대사간(大司諫)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는데, 마침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처벌 문제로 동인(東人)간에 강ㆍ온(强穩) 양파로 갈라져 그는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영수가 되었으며 특히,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하여 정계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 노력하였다.
이외에도 효성이 지극했던 홍량(弘量),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홍우(弘), 광해군 때의 정세가 어지러움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했던 서(서) 등은 광산 이씨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출처 개벽일꾼의 브로그
[출처] 광산이씨 시조 고려때 상서좌복야 광산부원군인 이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