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독립운동가 헐버트(Homer B. Hulbert)박사 (5)-조선독립운동
(헐버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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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공원의 헐버트 박사) |
헐버트는 한국의 은인,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입니다.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헐버트는 1884년 다트마우스(Dartmouth)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 재학 중이던 23세 때 육영공원(育英公院) 영어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하였습니다.
1886년 9월 23일 개원한 육영공원의 운영과 교육내용 및 방법에 관한 규정으로 ‘育英公院 設學節目’을 제정한 헐버트는, 학생들이 세계 지리에 관심을 보이자 1889년에는 <士民必知>를 한글판으로 발행했는데 이 책은 많은 학교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5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한 후 학교가 문을 닫자 귀국했던 헐버트는 1893년 9월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됩니다.
다시 방한한 그는 배재학당 안의 삼문출판사를 중심으로 주로 문서선교에 관여하며 다양한 주제로 한국에 관한 글들을 발표하는 한 편, 1903년에 창설된 한국 YMCA의 초대회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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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강제로 빼앗기 바로 전, 고종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외교적인 도움을 호소하기 위해서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이때 미국과 일본은 이른바 '가츠라태프트밀약'을 맺고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권 보장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망을 서로 묵인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있던 고종은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 즉 쌍방 중 어느 한 나라가 제3국에 의해서 침략을 당할 경우 다른 한 나라는 이에 간섭해서 우호적으로 사태를 해결해 줘야 한다는 거중조정 내용을 문구 그대로 믿고 밀사를 파견했던 것입니다. 결국 헐버트는 친일인사들로 구성된 미국 정부에 고종의 밀서를 접수시키지도 못하였고, 한국과의 신의를 저버린 자신의 조국을 원망하면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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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헐버트는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한국정부에 알리고 그것을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적인 통로로 활용하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이에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 세 사람의 밀사를 파견하였습니다. 헐버트 자신도 헤이그로 가서 유럽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이 일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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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8월에 헐버트는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강제로 퇴위된 고종으로부터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해 둔 25만 달러 상당의 비자금을 찾아 안전한 은행으로 옮겨 달라는 밀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해외독립운동을 돕기 위해서 비밀리에 마련해 둔 이 자금도 일본 통감부의 간계로 결국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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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가 마지막으로 미국의 헐버트박사에게 보낸 서찰.특이하게 한자와 한글 혼용)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상해 덕화은행 예치금을 찾기 위한 위임장) 상해 덕화은행에 예치된 고종의 비자금. 주권회복을 위해 쓰일 자금인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고 1909년 헐버트는 상해로 향한다.그러나 일본이 벌써 인출해 간 사실은 다음 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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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순회강연과 신문기고를 통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루즈벨트의 대한정책을 비판하며 한국을 잊지 않고 돕는 일을 했습니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내한하였지만 노쇠한 육신으로 오랜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헐버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한 살 때 죽은 그의 아들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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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양화진 선교사묘원" 인용]
(1949년 인천항에 도착한 노구의 헐버트 박사)
(헐버트 박사 소장 고종황제 탄신 50주년(1901년) 기념 은장)
(안중근 의사가 헐버트 박사에 대해 일본 경찰에 공술한 내용)
“이토 히로부미가 혹독한 정략을 쓰고도 각국의 이목을 가리고 있을 때 헐버트는 한국을 위해 분개하고 각국을 향해 한국의 진정을 발표해 준 사람이다.
한국을 위해 진력한 공을 몰각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안중근 의사는 비록 미국인이지만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위와 같이 매우 높게 평하였습니다.
그리고
헐버트 박사는 구전 ‘문경새재 아리랑’을 1896년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록해 외국에 소개한 것이다. 경북 문경시는 문경새재 입구에 있는 옛길박물관에서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아리랑 사랑을 기념하는 ‘문경새재아리랑비’ 를 세웠다. 가로 3m, 세로 2m의 크기의 아리랑비에는 40대 모습의 헐버트 초상화가 새겨졌다.
1896년 헐버트가 직접 아리랑을 영어로 쓴 ‘Korean Vocal Music(한국인의 소리)’이라는 제목의 서양 악보도 그대로 옮겨졌다.
1985년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아리랑 악보가 발견되었다.(조선일보)
1896년2월 발간 영문 잡지<조선유기The Korean Repository>에 수록된 것이다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 H.B 헐버트 박사가 채보한 것으로 그는
「이 노래는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1883년에 대중적 애호를 받게 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 가락은 즉흥곡의 명수인 조선여인에 의해 수많은 즉흥곡으로 대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후렴은 변치 않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얼사 디어라”
로 불려진다」라고 쓰고 있다.
문경새재 헐버트 아리랑 기념비에는 헐버트 박사가 채보한 '아리랑' 악보와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는 가사가 새겨져 있다.
뒷면엔 ‘헐버트를 기억하고자 기념비를 세운다’는 말도 담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1층 로비에 파고다 공원의 석탑같은 10층 석탑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일본 궁내대신 다나가 미스아끼가 개성에서 일본 자기 집 정원으로 분해해 간 것을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간한영국인 베쎌과 헐버트 박사가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하여 되찾은 것이다. 자세한 것은 다음에 소개할 것임.
일본에 빼앗겼던 경천사 10층 석탑을 되찾고 한국인
의 토지를 지키는 등 일본의 무자비한 약탈에 저항 했던 헐버트의 한국에 대한 헌신적인 삶을 조명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내 경천사 10층 석탑 )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 헐버트가 다트머스대학 졸업 후 신상기록부에 남긴 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