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억새밭에서

[hotlip]

흐린 날 억새밭에서

저 세미한 바람에도 연신 흔들리는

억새꽃 무리에서 흐림에 묻힌 채

미로에서 헤매는 우리 자신을 본다.

이내 비라도 내릴 것 같이

회색 구름으로 드리워진 무거운

하늘을 이고 있는 가녀린 몸짓이

가을을 견디어내는 지혜인가 보다.

구름 그친 서쪽 하늘에서 노을이라도

비치면 억새의 군무는 절정이 된다.

그런데 우리 머릿속은 흐린 뒤 흐림이니

아직 사람들의 발걸음이 둔중한 탓일까?

혹 어젯밤 합창단의 아름다운 곡조인

‘참 좋으신 주님’이, ‘강 건너 봄이 오듯’,

‘그대 곁으로’ 오셔서, ‘그대 창밖에서’

기다리신다면,

우리의 모든 흐림이 그치게 될까?

천상의 음악이 우리를 자유 하게 하니.

2023.11.4. 용산고 동문 합창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