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
일본 입장에선 무로마치 시대~ 에도 후기 까지
조선 통신사라고 불렀을 뿐 정확한 명칭은.,통신사.
1510년 중종 5년 발생한 삼포왜란을 계기로
세종 이후 파견되던 일본과의 사절 왕래는 끊겼으나
선조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파견.
오사카 성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립한 오사카 성은
16세기요도가와 강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였지만
대부분 소실, 1950년대 재건된 성채 만 남아 있다.
오사카 성 주변으로는 역사 박물관이 있고
여러 전시관 및 콘서트홀 등도 자리하고 있다.
오사카성 주변에 신문, 금융, 방송국 등 많은 기업.
일본에서 경제, 정치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오사카.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
16세기 오다 노부나가가 시작한 일본통일 대업을 완수.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정복에 실패했다.
일본의 세력자인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보병이 되었는데
쾌활, 세련된 매너, 총명한 두뇌로 인해., 사무라이로 발탁.
1582년 노부나가는 가신의 기습을 받고 할복자살했는데,
그는 그 가신을 처단함으로써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
이어 그는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노부나가의 대업을 완수.
그는 일본 전역의 정벌에 나서 통일을 이루었고.
1585년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불리게 되며 일본 전역을 정복.
2차례 조선을 침략했으나
조선전투의 불리한 결과에
크게 상심하여 62세에 병사.
그가 추진해온 전국통일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대로 계승
평화로운 도쿠가와 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
1590년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조선통신사를 환대했던.,히데요시.
통신사가 보고싶다는 곳을 모두 공개.
'히데요시 자신감이었을까?'
'일본 막부의 전략이었을까?'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 정유재란 7년전쟁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
도요토미를 대신하여 들어선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쓰시마 번을 통해서
국교재개를 요청해 1607년(선조 40년) 강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 동안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
일본에 가서는 재상 수상과 동격 대우를 받았다.
임진왜란 이후에 폐쇄하였던 초량왜관을 조선 정부는
1607년 일본과 국교 재개 후, 절영도(영도)에 허락하였다
부산.,초량왜관
..........................................................
...........................................................
일본은 언제부터 서양과 교류를 시작했을까?
............................................................
............................................................
일본이 서양과 접촉한 최초의 사건은 1543년이었다.
명나라로 향하던 포르투갈 화물선이 '가고시마' 표착.
이후 약 1세기 동안 일본은 포르투갈을 통해
서구의 발달된 과학 지식과 그리스도교를 수용.
그러나, 막부는 1612년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기점으로
1639년 포르투갈과 완전히 교류를 끊고.,강력한 쇄국 정책.
나가사키 데지마에서.,네덜란드. 중국,
'쓰시마(대마도)'에서., 유구국(琉球國),
'마쓰마에'에서., '아이누와(오키나와)'
3곳에서 만 인정한 제한적인 해외교역 허가.
그 과정에서 나가사키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과
통역사들을 통해 발달된 서양의학. 과학기술 유입.
실용적 학문에 대한 갈증을 안고 있던
지식인들이 서양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
이렇게 에도 시대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 '난학'.
................
.................
.
난학의 발달에 큰 획을 그은 것은 1774년
의학자 스기타 겐파쿠가 번역한.,해체신서.
1771년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접하고,
그를 토대로 인체를 해부하여 그 정확성을 눈으로 본 뒤
네덜란드 해부학서를 일본어로 번역한 최초의 서적이다.
10명의 동료 의학자와 함께
해부도와 단어 하나하나 대조.
4년 만에 완성된 이 책은 네덜란드 어를 일본어로 대치하는
사전 편찬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외과, 내과, 한과,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등 기초 의학서적이 일본에 소개된 것.
이를 계기로 일본의
의학발달에 크게 공헌.
이후 18세기 말에 온도계, 망원경, 시계 등 서양 물품들이 유입.
나아가 학자들이 서구의 자본과 기술, 역사, 철학에 주목하면서
폐쇄적인 막부 사회를 비판하고, 합리적인 정신을 갖추기 시작.
이렇게 난학으로 양학(洋學)의 토대가 갖춰졌고,
막부 말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학문이 유입.
일본에서 양학이 다양해지고 학문적인 깊이가 심화.
난학(蘭學)은 근세 일본의 창(窓).
근대 일본을 세우고 서양 열강에게서
일본을 보호해준 학문으로서 자리매김.
일본 최초로 서양문화가 유입된 곳은.,가고시마.
일본을 난학(蘭學)으로서 개화시킨 곳은.,나가사키.
오늘날, 선진국 일본이 있게 한.,나가사키 데지마상관.
나가사키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
도쿠가와 에이야스(1543~1616 徳川家康).
일본의 마지막 바쿠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 1603~1867]의 창시자.
본명은 도쿠가와 다케치요[德川竹千代]. 아시카가 바쿠후가 세력이 약해져
군웅할거 1세기 간 혼란시대를 종식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 중 사망.
국내에서 힘을 비축한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로 강력한
정적들을 제압하고 일본을 통일했다.
그리고나서야, 자신의 근거지 에도에
바쿠후를 열고 정치체제를 안정시킨 그.
.............................에이야스.............................
1598년 정유재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사망.
1603년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자 본거지 에도에 막부를 개창.
그러나, 도요토미 가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에 천하가 도쿠가와에게 있다는 것을 보이고자
셋째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은거하여 천하를 은밀히 다스리는 정치.
이에야스는 이후 죽을 때까지 9년간 중앙 집권화에 박차.
기존 가신들을 은퇴시키고 새로운 인물들로 막부를 채웠다.
신참 다이묘, 행정 전문가, 승려, 유학자, 경제 전문가, 거상 등.
상업, 경제, 행정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물론
일본에 들어온 외국인을 외교무역 고문으로 삼아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과 교섭을 시도.
임진왜란 이래 단절된 조선과 국교도 회복하고,
조선 동래에 왜관을 설치해 무역을 정상화시켰다.
.
이에야스는 정적을 교묘하고 교활하게 제거해 나간 끝에
1615년 마침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씨를 말리고
자신이 뒤에서 이끈 도쿠가와 막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듬해 그는 태정대신에 임명되었고,
4월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75세였다.
가신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비밀리 장사.
이에야스를 신격화하기 위해
불교의 산왕일실신도에 따라
'곤겐(権現)' 호칭을 부여했다.
.........................................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유해는 닛코로 옮겨졌으며,
천황은 '도쇼다이곤겐(東照大権現)' 시호를 내렸다.
닛코 도쇼 궁(東照宮)에 그의 유훈이라고 알려진 글.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 없다. 부자유를 친구로 삼으면 부족할 것 없다.
욕심이 생기면 궁핍했을 때를 걱정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원이요, 분노는 적이다.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그 피해는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스스로를 탓하고 남을 탓하지 말라. 모자람이 지나친 것보다 낫다. "
인내와 끈기로 최후의 승자가 된 이에야스
그의 일생을 대변하기에 적절한 글인듯 하다.
1600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천하패권을 두고
가신들이 둘로 나뉘어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하다.
1603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 개창.
1615년 : 오사카성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죽으면서 도쿠가와 막부의 입지가 공고해지다.
.............에이야스 & 나가사키현.,히라도 외국상관............
1543년 포르투갈 무역선이 처음으로 일본에 철포를 전한 이후
일본과 유럽의 교역관계는 차츰 깊어졌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인
1600년 4월 말, 붕고 우시키 만에 외국선박 한척이 모습을 나타냈다.
가까이 접근해 가보니 작은 배의 돛대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있었으며 승무원들은 빈사상태에 빠진 채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마치 유령선을 방불케 하였다.
처음 일본에 온 네덜란드 선박 리푸데 호.
이들 네덜란드 선원들 가운데 윌리엄 아담스.
영국인이 수로 안내자로 승선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급히 그 배를 사카이로 회항시키도록 명하였고 얼마 후
영국인 아담스가 선장 대신 이에야스와 면담을 갖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아담스는 이 배가 일본에 오게 된
경위와 유럽의 사정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와 영국이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일본에 온 것이 아니고 일본과의
무역 만 원하는 사실을 알고 기뻤다.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은
가톨릭에서 이탈한 신교국.
아담스는 이에야스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다.
때로 수학을 가르치고,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세계 각국의 사정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에야스 부탁을 받고
이즈의 이토(伊東)에서
영국식 선박도 건조했다.
그는 그후 이에야스로부터
미우라(三浦)를 영지로 수여받았기에
미우라 안침(三浦按針)이라 불리운 아담스.
안침이란 수로 안내자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
1609년 히라도에 도착한 네덜란드선
선장이 쓰루가에서 이에야스와 회담을 갖고
히라도 섬에 네덜란드 상관 설치 허가를 받았다.
1613년 영국왕 제임스 1세의 국서를 휴대한
영국군 존 세리스 사령관이 히라도에 입항하여
네덜란드 선장의 중재로 일본에서의 무역거래 합의.
.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는 달리
해외 제국과 교역추진 정책을 썼다.
이에야스가 이처럼 교역정책을 쓴 것은
'에도 막부의 경제를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는
해외무역을 활발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판단.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때 침략했던
조선에 대하여는 쓰시마 영주 소씨(宗氏)를
중재자로 내세워 1607년 국교회복에 성공하였다.
조선을 통하여
명나라와의 관계도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던.,이에야스.
.
그당시 명나라 속국이었던 류큐를 통하여
명과의 무역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럴 즈음에
사쓰마 영주 시마즈는
1609년 막부의 승인 하에
류큐를 공략하여 복속시켰다.
그리고
류큐와 명나라와의
무역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두 나라 관계는 환원한 대신에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가로채려 한 것.
.
이처럼 일본의 명나라와 국교는 좀처럼
임진왜란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에서 오는 무역선 수는 해마다 증가.
규슈 나가사키에 이주하는 중국인 수도 증가추세.
.
이에야스는 동남아에도 눈을 돌려
샴과 인도차이나의 안남(安南),
캄보디아의 파타니 등과도
선린교역(善隣交易).
그 결과 이들 제국으로 건너가는
일본 상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16세기경 유럽에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제해권을 장악, 해외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양에서 동인도 방면에 세력을 뻗치고
스페인은 남미대륙, 필리핀 등 광대한 지역에 식민지 확보.
그러나 1568년 '스페인 식민지' 네덜란드에서 독립전쟁 발생.
1581년에 이르러 마침내 네덜란드가 공화국으로서 독립
1588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 의해 전멸되어
스페인 세력이 약화되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세력이 동양에 진출.
......................................................................................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4∼5만 조선인 포로.
그들 대부분 규슈로 끌려갔었는데, 바로 그 당시 규슈에는
'나가사키, 히라도'에 세계적인 노예시장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외, 정유재란 당시에도 일본군이
포르투칼 노예상인들에게 넘긴 4~5만 포로.
어느 하늘 아래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조선인들.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 막바지
조선에서도 의용군으로 징병된 후
그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
그리고, 꽃다운 나이에 정신대로 끌려가
지금까지도 그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영혼들.
.............나가사키(Nagasaki , 長崎)...............
규슈의 가장 서쪽에 있는 나가사키 현의 중심도시.
나가사키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이나사야마 전망대에서 본 항구의 모습은 일본의 3대 야경.
일본에서 가장 먼저 외국 문물이 유입.
중국과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당시의 이국적인 정서가 흐르고 있는 도시.
.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음식문화.
나가사키 짬뽕, 카스테라, 도루코 라이스 등은
나가사키 음식들로 전국적인 사랑을 받는 음식.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원자 폭탄이 투하된
아픔을 갖고 있는 도시이다.
....................................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70주년을 맞아 NHK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절반에 가까운 일본인들이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는 인식인 것으로 나타났다.
NHK가 6월 하순 20세 이상 남녀 1천여명을 상대로 실시해
3일 결과를 공개한 조사에서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것에 대해
현재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 49%
직접 피해지인 히로시마(43%)와 나가사키(46%)
반면, 원폭투하가 '어쩔 수 없었다'는 응답은 40%.
히로시마에서는 44%로, '용서할 수 없다'는 답보다
1% 포인트 높게 나타났고, 나가사키에서는 41%로 집계.
또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1945년 8월 9일)에
원폭이 투하된 날짜를 아는지 물음에 답하지 못한 비율이 70%.
히로시마 피폭일 아는 사람 30%, 나가사키 피폭일 아는 사람 26%
더불어 '가까운 장래에 세계 어디에선가
핵전쟁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꽤 있다' 응답과 '조금 있다' 응답이 합쳐서 66%.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원폭
나가사키 원폭
미국은 왜, 히로시마 나가사키
두 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한걸까?
'히로시마'는 2차대전 중
폭격받지 않은 도시 중 한 곳.
구레군항의 배후도시였고 교토와 히로시마가 1차 핵폭탄
투하 목표였지만, 교토는 일본의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며
히로시마가 군항의 배후도시란 점에서 1차 목표가 되었다.
'나가사키' 경우에는 좀 억울하게 당한 도시.
원래 목표는 공업도시 고쿠라였지만 투하 당일에
고쿠라 상공에 구름이 끼어 폭탄투하지점을 정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서 고쿠라 대신 나가사키에 핵폭탄 투하.
.....................고쿠라.............................
후쿠오카 현에 있던 도시로, 지금 기타큐슈 시
고쿠라키타 구와 고쿠라미나미 구에 속해 있다.
후쿠오카 현 기타큐슈 시 고쿠라키타 구.,철도역.
.
규슈 여객철도, 서일본 여객
(가고시마 본선, 산요 신칸센),
기타큐슈 모노레일 등이 사용.
고쿠라후쿠 - 일본제국 육군병사들이 덧입던 거죽으로,
기타큐슈 시 고쿠라 지역 면직물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
나가사키 항으로 흘러드는 우라카미 강 어귀., '나가사키'.
나가사키 항은 일본에서 2번째로 외국과 무역을 개시한 항구.
포르투갈 상인들이 16세기 이곳에 와서 가톨릭교와 조총을 전파.
오우라천주당
그들은 1639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과 함께 추방.
1864년 지어진 고딕양식의 오우라 천주당은 1597년 순교한
26명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20세기초 나가사키는 조선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45. 8. 9 히로시마에 이은 미국의 두 번째 원폭투하.
현재, 원자폭탄 투하 지점에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히로미사 나가사키현.,원폭 투하.
나가사키 원폭 평화공원.
나가사키 원폭 평화공원.,평화의 샘
のどが乾いてたまりませんでした。
水にはあぶらのようなものが一面に浮いていました。
どうしても水が欲しくてとうとう油の浮いたまま飲みました。
“목이 너무 말라 참을 수 없었습니다.
물에는 기름 같은 것이 떠 있었습니다.
너무나 물이 먹고 싶어 결국 기름이 있는 채로 마셨습니다.”
.............
.............
원자 폭탄이 투하된 후
고온으로 물이 모두 증발하자
물을 애타게 찾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앞의 비석에는
실제 한 소녀가 적은 글귀가 적혀져 있다.
그들의 목마른 영혼을 달래고자
지름 18m 인공연못을 만들었다.
나가사키 리나
나가사키 짬뽕.
........................군함도......................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군함을 닮아 '군함도'
이 섬은 처음부터 석탄을 채취하기 위해 개발.
섬에 석탄산업 시설, 노동자 주거·편의시설만 있다.
하시마에서 석탄이 처음 발견된 때는
하시마에서 4.5km 거리 다카시마보다
90여년 늦은 1810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하시마 석탄 개발은 다카시마탄전 개발의 연장선.
1920년대 후반부터 하시마에서는 연 20만톤이 생산.
그후 시설확충, 발전을 거듭해 1941년 41만1100톤 생산.
하시마 탄광 최고 생산량 이후 차츰 생산량 저하.
연료를 석유로 바꾸는 에너지 혁명으로 불황 산업.
1974년 1월15일 폐광후 하시마 출입은 오랫동안 금지
일본 정부는 '귀중한 해저탄광 유적',
'일본 근대화의 상징' 등 가치가 높다고
평가해 2009년부터 관광지로 개발해 활용.
.........................................................
- 2016.6.7. 아시아투데이 김지수 기자 -
일본의 나가사키 시가 지난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시마 섬(군함도)에서 일어난 조선인 강제노동을 부정하는
내용의 홍보자료를 배포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 산케이 신문은 나가사키 시가 “군함도는 ‘지옥섬’이 아니었다”는
문서를 제작해 전 도민에게 배포하고 일본 관광부국에 제출했다고 보도.
“전시 중 한반도 출신자가 강제노동을 당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군함도민들은 더불어 살며 배우고 일하는 등 의식주를
함께한 일종의 탄광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주장.
강제 징용과 관련해서 1944년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자국민도
“정책 특성상 일반적으로 의사에 반해 오게 된 경우도 있었다.”
2015년 7월 독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심의에서
일본 당국은 한국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메이지시대 산업 시설
23곳 중 7곳에서 조선인들이 강제징용 당했다’는 설명을 추가 약속.
그러나 유네스코 등재 직후 일본 정부는 말을 바꿔
"조선인 노동자에게 근로를 강제한 사실이 없다."고 발뺌.
나가사키 공식 관광사이트에도 이 사실은 서술돼 있지 않다.
미스비시 그룹에서
운영한.,하지마 탄광
......미스비시 그룹(Mitsubishi Group).......
1870년부터 경영하던 정부 운영의 해운회사를
이와사키 야타로가 계승하여 설립한 것이 시초.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기존의 회사에 철강, 보험,
정유, 비행기 생산, 화학 등 여러 계열회사가 추가되어
1920년대 말에는 일본에서 2번째로 큰 재벌로 성장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점령당국에 의해 해체
군정이 끝날 즈음 다시 결합.
가족 소유 지주회사 아닌 여러 회사 사장들이 정책조정
회사 간에 어느 정도 재정적 의존관계가 있는 형태였다.
미쓰비시전기는 발전기·변압기·승강기와 같은 중장비에서
냉장고·텔레비전, 반도체·컴퓨터 등 다양한 전자기기 제조 판매.
미쓰비시중공업은 공작기계·항공기·농기계·철도차량을 생산하고
조선사업·공장건설에도 관여하여 1970년 미쓰비시자동차회사 독립
.........................................................................................
2016.4.12.,미스비시 광고 제의를 거절한 송혜교.
...........................군함도...............................
하시마 섬은 처음부터 석탄을 채취하기 위해 개발됐다.
섬이 군함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 동원된 800여명의 조선인들은
배고픔과 위험 속에서 하루 12시간 채탄작업을 한 곳.
질병, 익사, 탄광 사고 등으로., 확인된 사망자 만 122명.
2015년 7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신청한 하시마 탄광 등
23개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고 한국 등 주변국들은 반발했다.
...........................................................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 안은 비좁고
온도 45도를 넘고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
작업 중 해수가 갱내로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다.
육지 탄광에 비해 채굴조건이 매우 나빴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석탄 증산요구에 따라
배고픔에 속에서도 하루 12시간 동안 채탄.
이같은 혹독한 자연환경과 노동조건 탓에 '감옥섬'.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17년이다.
개발사 미쓰비시는 일본 각지는 물론 조선인도 모집했다.
1918년 갱내부 광부 941명 중에서 70명(7.4%)이 조선인.
1935년 3월26일 탄광의 갱내 가스 폭발로 20명 이상이 사망.
출신지가 공개된 사망자 17명 중 조선인 노동자는 9명이었다.
당시 조선인 5만8천명이 일본의 탄광·제철소·조선소 등
산업현장 23곳에 끌려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군함도는 사방이 바다인 섬이다 보니 마치 감옥과 같았다.
군함도는 '감옥섬' 혹은 '지옥섬'으로도 불렸는데.
탈출시도한 이들도 있었으나 육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거나 일본 측에 붙잡혀 탈출성공 기록은 없다.
.
또 다른 군함도 생환자 이인우(92)씨 증언에 의하면
"하시마 옆에 조그마한 섬이 있었는데, 거기는 화장터.
일하다 죽거나 탈출하려다가 죽은 사람들 화장시킨 곳"
2017.07.26. 세계일보 “거기는 죽는데지 사는데가 아니었어요.”
'군함도 징용 생환자' 이인오(94·대구)옹은 26일 용산 CGV에서
행정안전부가 마련한 영화 ‘군함도’ 관람 행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
이날 행사는 영화 군함도 개봉시기에 맞춰
일제강제동원 희생자와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보듬고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며 행사에는
이 옹과 최장섭 옹 생존자 2명, 유가족 50여명이 참석.
이 옹은 “그 조그만 섬에 있는 탄광에서 8개월 간 중국인들과 함께
하루 10시간씩 팬티만 입고 일을 했는데 눈만 빼고 온몸이 까매져서
목욕을 했는데 사람이 사는게 아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나는 살았지만 (가족이 먼저) 돌아가신 유가족들께
대단히 미안합니다."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하다”.
또다른 생환자인 최장섭 옹(90·대전)은 “3년10개월간 지옥같은
하시마 섬에서 생활을 했다” “일본으로 아직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했고,
여기에 대한 보상은 누구에게 받아야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
김부겸 행안부 장관은 군함도 강제 징용 문제를
과거사 청산에 포함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영화 군함도는 일제강점기 일본 ‘하시마’ 탄광에서
석탄을 캐던 강제징용 조선인의 참상을 그린 영화.
군함도에 강제징용된 조선인은 500∼800여명으로
추정되며, 현재 국내에 있는 군함도 생존자는 6명.
군함도.,크루즈
나가사키 조선업
한화그룹에서 운영하는.,나가사키 오션팰리스CC
나가사키 태양광 발전.
일본 속의 유럽.,나가사키.
오무라 공원
조선시대 -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商館).
나가사키 시에 남아 있는 에도시대 일본의 대외창구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인들이 거주했던 데지마 상관.
네덜란드상관터(出島和蘭商館蹟)는 전체 면적 5천평.
부채꼴 모양 작은 인공섬인데 19세기 일본의 전면적인 개항 후
그 기능이 없어지고 주변지역이 매립하여 근대적인 항구를 조성.
원래의 모습은 없어졌지만 1922년 에도시대 대외 교류의 창구였던
상징적인 의미를 고려하여 국가사적으로 지정하였다.
1996년 이후 나가사키시는 이곳을 복원
상관장의 자택, 일본관리 거주지 등
여러채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데지마(出島)는 1634년부터 2년에 걸쳐
포루투갈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막부는 나가사키의 부유한 상공업자에게 이 섬을 건설하게 하고
포르투갈인들에게 사용료를 받았는데 1639년 카톨릭 선교를 이유로
포르투갈인 추방후, 화란 동인도회사 상관을 이곳으로 옮겨 거주시켰다.
이후 약 200년 동안
이곳에서 에도막부의 통제 아래
일본과 서양과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인은 상관 바깥으로 출입이 불가능.
일본인도 허가된 관리들만 상관을 출입하였다.
에도막부의 상관운영은 조선의 왜관운영과 유사.
조선의 왜관이나 일본의 상관이나
그 규모도 작고 통제도 엄격했던 것.
.............조선과 일본의 상관 운영 차이점..............
조선과 일본, 양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오가던 초량왜관
그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 한가지는 바로 여인이었다.
엄격한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은 왜관에 여인의 출입을 금지.
하지만, 1690년, 조선인 이명원이
자신의 처와 딸, 여동생을 남장시켜
초량왜관에 들여보낸 사건이 발각된다.
이 사건에 관계된 조선인은 모두 극형을 받고,
그중 5명은 왜관 밖에서 효시 되었지만 이후에도
조선인 여인과 일본인 남성의 교간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동래부사 권이진은 왜관 밖 시장에 조선여자들이
채소를 팔러 나오면 왜인들이 채소가 좋건 나쁘건 몰리자
교간을 막으려 조선 남자 만 초량 왜관 시장에 나오라고 설득.
조선에 기녀, 유녀의 기반이 있으면서도 엄벌주의,
'왜관에 매춘부 유입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시 조선과 일본의 매춘에 대한 인식은 아예 달랐다.
조선여자와 성관계로 사형, 효시를 납득 못한 일본인들.
일본 또한 나가사키에 '데지마'라는 네델란드 상관을 운영.
조선여자와 성관계로 사형, 효시를 납득할 수 없던 일본인들.
나가사키 관료들은 데지마에 게이샤 출입을 허용.
'나가사키 항구의 인공섬' 데지마에 게이샤를 투입.
중국인이 돈쓰게 하여 무역적자를 흑자로 돌리는 묘수.
'게이샤 투입' 묘수로
일본은 무역흑자로 전환.
또 외국인과 게이샤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나가사키 시설에서 키웠기 때문에 장래에 그 아이들이
서양의학을 전수받은 의사가 되거나 통역사가 될 수도 있었다.
..................................................................................
에도시대 데지마는 일본의 서양과의 유일한 교류창구였으며,
상관에 거주한 네덜란드인들은 일본문화를 서양에 소개하였다.
데지마를 통해
입수된 서양서적들은
일본 내 서양학 연구를 촉진.
이를 "난학(蘭學)"이라고 하였다.
데지마네덜란드상관터
(出島和蘭商館蹟, 국가지정사적)
데지마(出島)는 1636년 천주교 포교를 막는 목적으로,
시내에 흩어져 살던 포르투갈인을 한곳으로 모아 거주시키기
위하여 에도막부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15,000㎡ 부채 모양 인공섬.
1639년 포르투갈인이 퇴거한 후 일시적으로 무인도가 되었으나,
1641년 히라도(平戶)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이 이곳으로 옮겨진 후
안세이(安政)의 개국(1859년)까지의 218년간 일본에서 유일하게
서구를 향해 열린 창으로 해외에서 새 학술이나 문화가 전해졌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 상관원 주택 창고 등이 있었고
가축을 사육하였고 여러가지 식물들이 심어져 있었다.
에도막부말기에서 메이지에 걸쳐서 실시된 항만개량공사
등으로 주위가 매립되어 바다에 뜬 부채모양 원형이 상실.
일본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한 귀중한 역사적 문화유산이므로
1922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출처:나가사키시청>
나가사키 우동
데지마(出島 )란 1636년에
에도 막부 쇄국정책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건설된 인공섬이다.
부채꼴 모양의 섬으로, 전체넓이는 1.3ha.
1641년에서 1859년 사이에 대 네덜란드 무역은
오직 이곳 인공섬에서 만 독점적으로 허용되었으며,
쇄국일본 시기에 서양과의 교류 숨통을 터놓았던 장소.
당시 일본은 1년에 한 번
쇼군에게 국제 흐름을 설명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서 서양을 이해.
일본이 화란 상인에게만 교류를 허락한 이유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관심사는 일본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이지, 전도(傳道)가 아니었기 때문.
1653년 8월 동인도회사
무역선.,'스페르웨르'호.
조선이란 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하멜 표류기'
1653년 8월 네델란드인 H.하멜이 남제주에 표도 후.
1666년 9월 나가사키로 탈출, 1668년 7월 화란 귀국.
1668년 네델란드어 ·영역본 ·불역본 ·독역본이 발간.
1653년 8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 스페르웨르호.
나가사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 하던.,하멜 일행.
그때 산방산 용머리 해안가에 닿은 64명 중 생존자 36명.
조선에서 13년간 억류당한 경험담을 쓴.,하멜표류기.
1653년 8월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의 심문을 받은 후
이듬해 5월 한양으로 호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다.
1657년 강진 전라병영, 1663년(현종 4) 여수 전라좌수영.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년 9월 7명 동료들과 함께 탈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본국으로 돌아갔던.,하멜.
1980년 한국과 네덜란드 공동출연으로
산방산 해안에 하멜 기념비가 세워졌다.
'1653년 8월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재현.
17세기 해금정책 조선시대는 국제적으로 폐쇄된 사회.
그러나, 17세기 일본은 서양의 선진 문명을 적극.,유입.
일본 나가사키는 외국의 관문으로 발전한., 무역항 도시.
'17 ~21세기' 나가사키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가사키(長崎市 )는 일본 규슈 북서쪽에 있는 도시.
나가사키 현의 현청 소재지이기도 하며.,일본국 핵심도시.
일본에서는 두번째 외국의 관문으로 발전된 항구 도시이다.
19세기에 동아시아의 주요 석탄공급항이 되었고
1903년까지 러시아 극동함대가 이용하였던.,부동항.
나가사키 항으로 흘러 들어가는 우라카미 강 어귀에 있다.
나가사키 항은 일본에서 2번째로 외국과의 무역을 개시한 항구.
포르투갈 상인들이 16세기 중반 이곳에 와서 가톨릭교와 조총을 전파.
1639년 그들은 영국 선교사들과 함께 추방당한다.
1597년 26명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순교하였다.
1864년 그들을 추모하는 고딕양식 오우라 천주당.
에도 시대에는 일본 내에서 유일한 에도 막부 공인의
해외(네덜란드, 중국, 조선)와의 무역을 하던 항구 도시.
일본 최초 무역항 데지마(出島)에는 네덜란드 상관이 있다.
즉, 나가사키.,데지마(出島) 상관은
서양의 선진문명을 일본에 전파한 곳.
당인옥부에는 중국인 거류지 유적이 있으며
외국문화 유입영향과 비탈이 많은 거리 풍경 등
일본 내 다른 도시와는 다른 경관을 보이고 있다.
1945년 8월 9일에 히로시마 시에 이어
사상 두번째 원자폭탄 공격을 당한 도시.
'1945년, 8월9일 11시 2분 지상에
거대한 하얀 빛이 덮쳤다. 24만..'
이때 이곳 제일교포는
나가사키 인구의.,1/10.
원폭 투하 지점을
가르키고 있는.,조각.
현재 원폭 투하 지점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평화공원 곳곳에는
반전, 평화를 염원하는
탑, 글귀 등이 눈길을 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일본 나가사키현 운전다케
1992, 1993년 두차례
화산 대폭발
오늘날,
인구밀도
7900명/km ²
원폭투하 70여년이 지나., 인구가 과밀한.,나가사키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 미쓰비시 전기 등.
공장들이 집중되어 있어 미쓰비시의 기업 도시로 불린다.
20세기 초, 나가사키는 조선업의 중심지.
면적 406.47㎢, 인구 43만 4,199명(2014).
나가사키 항은 포경이나 동중국해를 어장으로 하는
"이서 저인망" 기지 "나가사키 어항"으로 번영하여 왔다.
니시소노기 반도 남부에서는 육우·젖소의 양육도 행해진다.
일본 나가사키현 포경선들이
조선시대 독도 추자군도는 물론
태평양까지 진출하여 고래를 포획.
나가사키 해군교습소 & 데지마
데지마(일본어: 出島 ).
1634년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건설된 부채꼴모양 인공섬(1.3ha)
1641년~1859년 사이에 대 네덜란드 무역은
오직 이곳에서 만 독점적으로 허용되었으며,
쇄국일본 때 서양 교류 숨통을 터놓았던 장소.
그당시 일본은 1년에 한 번 쇼군에게
국제 흐름을 설명한 네덜란드 상인을 통하여
서양을 이해하였고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에게만
교류를 허락한 이유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관심사가
일본과의 무역이익이 목적이지, 전도가 아니었기 때문.
데지마는 포르투갈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로서
막부가 나가사키 마치슈(町衆, 부유한 상공업자)들에게
비용을 부담시켜 건설을 명하여 1634년부터 2년에 걸쳐 완공.
건설비용은 우선 건설을 담당한 업자들이 부담하게 하고,
나중에 입주할 포르투갈인(후에 네덜란드인으로 교체)들에게
토지 사용료(임대료)를 업자들에게 매년 지불하는 형식으로 보상.
1639년 로마 가톨릭 선교 활동을 하는 포르투갈인 추방 후에
1641년 히라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을 입주시켰다.
이후, 200년 동안 네덜란드인과의 통상 활동 및
일본 내 활동에 대한 막부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공무상 출입이 허용된 일본의 관리
이외에는 출입금지 또는 제한 구역.
네덜란드인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본 체류 기간 동안에 데지마 안에서 만 거주.
하지만,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에 의하면
데지마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등 자유롭게 생활하였다고 전한다.
1855년 '일본과 화란' 일란화친조약체결에 의하여
네덜란드인의 나가사키 시로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
데지마 네델란드 상관의 존재가치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859년 데지마 내 네덜란드 공관은 폐쇄.
데지마는 일본의 유일한 서양과의 교류창구였으며,
네덜란드 상관에 부임한 엥게르벨트 캠벨과 칼 튠베리크
시볼트 등의 네덜란드인들은 일본의 문화를 그들 고국에 소개.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실학을 장려하고,
양서를 해금조치한 결과, 데지마를 통해 입수된
서양서적들은 의학,천문역학등의 연구를 촉진시켰다.
난학(네델란드학)을 통하여 탄생한
합리적인 사고 및 인간평등사상 등은
막부 말, 일본에 큰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데지마는 1904년 항만개량공사를 통해
주변이 매립되어 섬으로써의 기능을 상실,
현재 도로 상, 데지마 표시뿐.,옛모습을 상실.
.
1996년부터 '나가사키'는
약 170억엔의 비용을 들여
데지마 복원사업을 추진 중.
2000년도까지 1기 공사완료된 상관장(商館長)
차석이 거주한 방 등 5동의 건물이 완성되었고
2006년에는 제 2기 공사가 완료되어 상관장 자택,
일본관리 거주지, 난학관 등 다섯 채 건물이 추가복원.
나가사키 시의 계획에 따르면 2010년까지
나머지 15채의 건물을 복원 후 주변의 땅을 파내
부채꼴 모양의 윤곽까지 복원시킬 예정이라 하였다.
일본 근대화 문물개방의 중심지.,데지마.
약 4000평 면적 부채꼴모양 인공섬.,데지마.
막부에서 일본 내에서의 기독교 전파를 방지.
서양문물 유입하기 위해 만든.,상관(商館) 지역.
나가사키.,데지마.
1543년 표류 포르투칼인을 통해 일본이 우연히 얻게 된.,조총.
'나는 새도 떨어뜨란다.'는 조총은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총 제작법을 알기 위해 여인까지 바치며 기술을 확보한 일본인.
조총은 일본의 잠자는 역사를 뒤바꾸어 놓았다.
막부의 조총부대는 혼란한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유린.
포루투칼이 전래한 음식이.,나가사키 카스테라.
1682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가 먹고 감탄한 음식.
원래, 데지마는 기독교를 전파하던 포루투칼인 전용 감옥.
육지로 나갈 수 있는 통로는
오직 다리 하나 뿐.,데지마 섬.
포르투칼과 무역은 하되 기독교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이 전략적으로 만든.,인공섬.
1637년 막부의 기독교 탄압과
지역 영주의 폭정에 항거하여
3만 여명의 농민들이 봉기한다.
막부는 12만 군사를 동원하여
봉기한 농민 집압에 겨우 성공.
시마바라 운젠은 농민군들의 처형장으로
그당시 유황 연기와 뜨거운 열탕의 모습이
지옥을 연상케 한다 하여 지옥탕으로 불렸다.
기독교도 반란으로 포르투칼인은 일본에서 추방.
그후, 일본은 네델란드와 새로이 무역을 시작한다.
망원경, 지구본, 시계, 서양의학, 과학지식 등을 보급.
1774년 일본에서 출간된 네델란드 의학서적.,헤체신서.
일본 열도에 폭팔적 반응을 보인 일본 최초 의학 번역서.
해체신서로 시작된 난학 열풍은 천문 물리 군사 등으로 확산.
나가사키는 서양지식의 핵심으로
일본 지식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1800년 초, 일본 내 난학 전문인., 천여명.
현재, 나가사키는
당시 네델란드인 거주지
1만평에다 이국적인 공원과
서양식 주택들을 지어.,공원화.
일본 속의 작은 유럽.,데지마.
1634년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건설된 인공섬(1.3ha) 데지마.
일본 개화 및, 무역국으로 성장 시킨.,원동력.
모르고 보면, 별 볼 곳도 없이 작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한없이 크게 보이는 인공섬 데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