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제게 묻는다면 저는 다음 457~458년의 송서 백제조의 기록을 들겠습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世祖大明元年, 遣使求除授, 詔許. 二年, 慶遣使上表曰:「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 右賢王 餘紀 等 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湣, 並聽賜除.」仍(1)以行冠軍將軍 右賢王 餘紀 爲 冠軍將軍. (2)以行征虜將軍 左賢王 餘昆、(3)行征虜將軍 餘暈並 爲 征虜將軍. (4)以行輔國將軍 餘都、(5)餘乂並 爲 輔國將軍. (6) 以行龍驤將軍 沐衿、(7)餘爵並 爲 龍驤將軍. (8)以行寧朔將軍 餘流、(9)麋貴並 爲寧朔將軍. (10)以行建武將軍 於西、(11)餘婁並 爲建武將軍.
世祖 大明 원년(457, 개로왕 3년) 百濟왕 餘慶(개로왕)이 사신을 보내어 벼슬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자 詔勅(조칙,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으로 허락하였다.
*『宋書』 「孝武帝本紀」 大明 元年(457) 十月 甲辰條에 ‘以<百濟王餘慶>爲<鎭東大將軍>’이라는 記事가 나타난다.
大明 2년(458, 개로왕 4년), 餘慶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가) “臣의 나라는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고 문무의 훌륭한 신하들이 대대로 조정의 관작을 받았습니다.
*개로왕이 臣이라고 쓴 이유는 중원국가가 되면 외국에서 온 국서는 臣이라고 쓴 것만 받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임.
(나) 行冠軍將軍 右賢王 餘紀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높은 지위에 나아감이 마땅하오니(忠勤宜在顯進),
(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가엾게 여기시어 모두 관직을 내려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1위. 行冠軍將軍 右賢王(우현왕) 餘紀(여기)를 冠軍將軍(관군장군)으로,
2위. 行征虜將軍 左賢王(좌형왕) 餘昆(여곤)을 征虜將軍(정로장군)으로,
3위. 行征虜將軍 餘暈(여훈)를 征虜將軍으로,
4위. 行輔國將軍 餘都(여도)를 輔國將軍으로,
5위. 行輔國將軍 餘乂(여예)를 輔國將軍으로,
6위. 行龍驤將軍 沐衿(목금)을 龍驤將軍으로
7위. 行龍驤將軍 餘爵(여작)을 龍驤將軍으로,
8위. 行寧朔將軍 餘流(여류)를 寧朔將軍으로,
9위. 行寧朔將軍 麋貴(미귀)를 寧朔將軍으로,
10위. 行建武將軍 于西(우서)를 建武將軍으로,
11위. 行建武將軍 餘婁(여루)를 建武將軍으로 삼았다.
=======================================================
457년에 백제 개로왕이 유송에 사신을 보내 11명 장군의 책봉을 요청하자, 유송은 457년에 먼저 개로왕을 진동대장군으로 책봉한 후, 개로왕의 책봉 요청을 들어주는 형식을 통하여, 그 다음 해인 458년에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에 책봉하는 등 11명을 책봉하였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습니다.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집필진은 모든 중국사서를 검토하였으므로 이 기록을 틀림없이 보았을텐데 삼국사기에 싣지 않았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정사조선전'도 이 기록 대하여 침묵하고 있으며, '한국사데이터베이스'도 그런 기록이 있다고만 하지 설명이 없습니다. 당연히 이 송서 기록은 우리 역사교과서에도 없고 일본의 역사교과서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전라도 천년사'는 이 기록을 매우 중요시하여 여러번 다루고 있는데, 11명의 장군 들 중에 8명이 개로왕과 같은 부여씨인 것을 들어 왕권강화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래 전에 부정된 것입니다. 만일 왕권강화책이라면 왕실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백제본기에 우선적으로 실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11명 중에 8명이 부여씨면 이미 왕권은 충분히 강하여 더 강화할 필요가 없고, 또 당시 백제의 양대 지배층인 해씨와 진씨가 단 한명도 없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씨나 진씨가 중요 직책에서 모두 빠진다면 가만 있을리 없으니 이 책봉은 아무 의미가 없는 허구의 직책이라는 주장도 나온 것으로 압니다.
이 책봉이 더 이상한 것은 책봉받은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가 책봉 이유인데, 외적을 물리쳤다거나, 내란을 진압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인데, 이는 책봉의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관군장군, 정로장군, 보국장군,.. 같은 직책들도 이전의 백제에 전혀 없던 직책들이고, 또 이런 많은 직책들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들 11명 중에 서열 2위의 여곤만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 동시에 모습을 보이고, 나머지 10명은 책봉 받은 후 무엇을 했는지 행적이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합리적 유학자들로 구성된 삼국사기 집필진이 이 이상한 기록을 삼국사기에 싣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의미없는 책봉이라면 개로왕이 국서를 보내 책봉을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린 다음을 답변하여 이 기록의 유효성을 검증해보아야 합니다.
송서 백제조의 11인 책봉기록 검증
1) 457년에 책봉을 요청했다는 연도는 정확한가? 만일 송서가 이를 456년이나 458년으로 고치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2) 11명이라는 숫자는 정확한가? 만일 송서가 이를 5명이나 15명으로 적는다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3) 서열이 여기가 1위고, 여곤이 2위고, 여훈이 3위고,,,, 인데 순서는 맞는가? 만일 송서가 1위와 2위를 바꾸면 틀렸다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가?
4) 왕족인 부여씨가 우선이라면 부여씨 8명이 먼저 오고 다른 성씨 3명이 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5명의 부여씨 다음에 목씨가 오는 것은 맞는가? 만일 6위 목금이 5위나 7위에 들어가 있다면 이것이 틀렸다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한자가 木이 아니고 沐인데 이것도 맞는가?
5) 7번째에 여작이라고 다시 부여씨가 오는데 이 순서는 맞는가?
6) 2위의 여곤이야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 동시에 나타나므로 알지만 나머지 10명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 어디에 묻혔는가?
과거에 4위 보국장군 여도를 문주왕 모도에, 6위 용양장군 목금을 475년에 웅진천도때 나타나는 목협만치(목리만치)에 비정한 일이 있는데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나중에 다시 나오겠지만 문주왕 모도는 신라 왕족 출신이고, 목협만치가 만일 6위라면 475년에 한성에 나타나기 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이 기록은 앞으로 20년 이내에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동시에 실릴 것입니다. 이 기록 없이는 한일고대사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5세기 일본서기 기록의 유효성 검증도 됩니다.[계속].
첫댓글 송서에서 백제 개로왕이 보내온 국서에 개로왕이 자신의 신하 여기와 여곤을 좌우현왕으로 호칭한 내용은 조공책봉에 거슬리는 내용이라 유송의 자국중심적 천하관의 입장에서 봤을떄 당장에 거부되어 접수되지 못할 수준의 기록이었지요 황제국의 높은 책봉작인 왕작은 황제만이 수여할수 있는 제도라 유송 입장에서는 제후국이나 다를바 없는 백제가 신료들을 상국의 허락도 없이 왕으로 봉한건 책봉 체제를 중대하게 위반하고도 남을 일이고 백제의 최고 통치자인 왕과 동일한 호칭을 신하들이 같이 쓴다는건 정상적인 군주 국가의 체계에서는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지요
왜 이 기록이 삼국사기에 없는가에 대한 공실불님의 설명으로 보입니다. 중국왕조의 책봉책이란 형식적인 것으로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이 기록이 삼국사기에 없는 이유는 "삼국사기에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인데 뒤에 설명드릴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 중국왕조의 책봉외교에 중국왕조의 주관적인 외교적 입장도 크게 좌우하여 나타나는 법이라 형식도 그 나라의 주관적 입장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삼국사기에 백제의 좌우현왕 작위에 관한 개로왕의 국서를 수록못한건 아무래도 삼국사기 저자들의 반대파들인 묘청 등 서경파들이 추구했던 칭제건원론을 유리하게 띄워줄 자료라서 그래서 삼국사기 편찬 추체들인 김부식 개경파들의 주관적 성격에 거슬리는 내용이라서 편찬에서 제외시켰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