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꽃이 피는 걸 시샘하려는 걸까. ‘덜덜덜’ 잔뜩 오그라진 콘크리트 벽에 매달려 발을 동동 구르는 네온관의 가닐가닐한 몸짓이 갸륵하다. 어제부터 영하로 떨어져 썰렁함으로 반죽된 초겨울비가 시리도록 쿨렁인다. 어둠 더버기로 모자이크된 도시의 무뚝뚝한 무늬에 지렁이고무 터진 튜브처럼 삐죽이 새어드는 바람이 야멸스럽다. 해가 뜨면 불그스름히 변하면서 오므라들었던 달맞이꽃이 꼼틀거리기 시작한다. 날이 어둑해지면 이울었던 꽃봉오리를 활짝 피우게 되는 것이다. 달을 맞이하는 꽃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지만, 날씨가 우중충 찌푸린 날에도 어김없이 피어난다. 도회지에 피는 달맞이꽃은 비바람 치는 궂은 날에도 봉오리를 펼친다. 콘크리트 벽에 스산하게 매달려있는 네온사인이 차가운 빗방울을 잔뜩 머금고 파릇한 기운을 차린다. 드디어 팔싹거리던 줄기 끝의 잎겨드랑이마다 샛노란 꽃봉오리를 터뜨린다. 꺼끌꺼끌하고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벽에 뿌리를 틀고 흔들릴세라 앵커볼트로 단단히 조여진 그 꽃이 꽃받침조각을 한껏 뒤로 젖힌다. 낮에는 숫기가 없어 꽃잎을 다소곳이 접고 있던 꽃이 밤이면 벌씬 웃음을 띤다. 꽃이 필 무렵, 갑자기 추워지거나 하면 꽃은 몸살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 저온장애로 인한 주접으로 고생할 수도 있지만 달맞이꽃은 개의치 않는다. 모든 꽃이 월동준비에 들어가는 가을에도 땅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트고 잎이 난다. 어린 싹은 얼어 죽지도 않고 땅에 납작하게 붙어서 겨울을 난다. 약간 붉은 빛깔로 땅바닥에 바싹 움츠리고 있는 게 마치 빨강불가사리 같다. 그만큼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함을 엿볼 수 있다. 도시에 사시장철 피는 달맞이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도시의 거리에 핀 달맞이꽃은 일상에 지친 행인들을 강하게 유혹한다. 잘 익은 삭과(蒴果)같이 네 갈래로 갈라진 시그널램프는 휑한 꽃 주위에 석류 알처럼 박혀 순간적으로 발광하며 아기자기한 별을 쏟아낸다. 그 별들이 행인의 허한 어깨위로 눈꽃처럼 사뿐히 내려앉아 덩어리져 엄습하는 피곤을 사르륵 쓸어내린다. 해가 질 무렵이면 꽃봉오리를 움씰대며 깡통트랜스에서 공급되는 물기와 양분을 긴 유리대롱으로 쭉 들이켜고, 카로틴색소를 한껏 뒤집어쓴 생기발랄한 낯꽃을 띠게 된다. 식물의 화려한 변신은 새나 곤충을 유인하기 위한 본능이라지만, 삭 막한 도시의 밤거리에서 하늘대는 달맞이꽃은 일과 후의 지친 발걸음을 사로잡으려는 애절한 몸짓이다. 달맞이꽃의 꽃말은 바로 기다림이다. 달맞이꽃에 얽힌 인디언처녀의 전설이 떠오른다. 한 청년과 사랑에 빠진 로즈는 이듬해 마을축제에서 그 청년이 다른 처녀를 선택하자 절망적 고통에 빠진다. 게다가 다른 청년이 로즈를 신부로 선택하자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나 신랑을 거절한 로즈는 전통에 따라 귀신의 골짜기로 추방을 당하고, 그곳에서 일 년을 애틋이 기다리다가 결국 허망하게 죽게 된다. 로즈가 죽은 후, 애초 로즈가 사랑했던 청년은 마음에 걸렸던지 골짜기로 찾아와서 로즈를 불러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희미한 달빛아래 핀 달맞이꽃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달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녀는 온종일 달이 뜨기만 기다리는 애련의 꽃으로 환생한다. 그 기약 없는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달맞이꽃은 꽃망울을 터뜨린다. 달이 뜨지 않는 암암한 밤에도 달맞이꽃은 피어난다. 절절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어둠이 내리기만 학수고대하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기다림에 지쳐있다. 도시에 피는 달맞이꽃도 어둠이 내리면 가녀린 꽃봉오리를 부풀려 변신한다. 오늘같이 잎사귀가 오그라지는 추위에도 얼어버린 어린애 볼처럼 빨갛게 물든 꽃잎을 추스른다. 달맞이꽃은 꿀벌 대신, 밤에 활동하는 나방을 꽃가루운반자로 선택한다. 활짝 핀 달맞이꽃이 끈적끈적한 점액이 묻어있는 꽃술을 펴들고 유혹한다. 그 유혹적 손짓이 조금 흥분되고 떨리는 듯하다. 자릿함에 숙추한 세상의 밤이 바짝 긴장을 한다. 어둠속에서 휘황한 불빛으로 물결치는 네온사인이 경직된 세상을 누긋하게 만드는 것 같다. 달맞이꽃은 왕성한 번식력을 가진 도래식물(渡來植物)이다. 보통 한 포기에서 6만 개 이상의 씨앗이 맺히며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기 때문에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달맞이꽃이 마구 잠식하여 자생식물이 멸종위기에 놓이는 폐해에 시달리자, 어느 지자체에서는 달맞이꽃과의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시골집으로 가는 지방도를 달리다보면 가드레일너머로 살랑거리는 달맞이꽃을 만나게 된다. 얼마나 기다림에 목말랐으면 그냥 버덩에 있지 않고 도로 옆까지 올라왔을까. 전조등에 나팔거리는 그 꽃은, 이글거리는 태양열에 아스팔트가 녹아버릴 정도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길가에서 용케 버티다가 기다렸다는 듯 환한 웃음을 띤다. � 뎬允�그 기다림이라는 게 얼마나 심절하기에 뿌리 내리기도 힘든 아스팔트 틈새로 파고들었을까. 그 대단한 적응력을 키웠던 원동력은 진정 기다림이었을까. 삭막한 도시의 언덕에서 피는 달맞이꽃도 메마른 지푸라기같이 푸석푸석한 콘크리트에서 자란다. 드릴비트가 뚫어놓은 검지만한 깊이에 뿌리를 틀었다. 독한 시멘트 냄새가 역겹기도 하겠지만 기다림이 이토록 처절한 생태를 만든 것일까. 비록 교박한 땅에 뿌리를 내렸지만, 달맞이꽃의 마음속에는 넉넉한 보름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궂은 날에도 어김없이 보르르 피어나서 상큼하게 웃어준다. 빗장고름을 단정히 맨 구김살 없는 자태이다. 샛노랗게 물들은 그 달맞이꽃은 아랫목 이불속에서 손이 노래지도록 까먹던 감귤처럼 질리지 않게 밤이면 포근한 웃음으로 반겨준다. 달맞이꽃은 고독한 식물이다. 고독하게 자란다. 빛이 없는 어둠속에서 소탈한 모습으로 피어나지만 보아주는 이는 드물다. 달맞이꽃이 꽃잎을 폈다 오므렸다할 수 있는 요인은 바로 빛이다. 빛에 의해 경성(傾性)이 나타난다. 하지만 세상의 빛과는 사이가 그리 도탑지만은 않다. 모든 철리(哲理)가 암흑에서 벗어나려는 애달픈 몸부림으로 광명을 찾으려하지만 달맞이꽃은 드다르다. 모질고 억센 세상의 심난함에도 전혀 아랑곳 않고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달맞이꽃은 언제나 칠흑빛 속에서 기품 있는 고독을 즐길 뿐이다.